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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코리랑고개를 넘어서 - 정성산

작성년도 : 1999년 58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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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랑고개를 넘어서

- 정성산

 

 

나는 1969.11.17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장현인민학교와 성북 고등중학교를 졸업한후 86년에 군에 입대, 복무중 남한방송을 들은 사실이 탄로나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 중국으로 도망쳐 조선족의 남한행 권유를 받고 귀순하기까지 한국으로 오는 길은 무척 멀고 험난했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왼쪽 손목의 동맥을 자르기도 했으며 타국의 국경을 넘나들 때 죽는다는 생각으로 사선을 달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북한에 남겨두고 한국으로 귀순한 31살의 젊은이로 동토의 불모지 북한을 탈출하여 자유 대한민국에 정착한지도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처음으로 사회에 나와 자유라는 이름의 풍요함을 느끼던 어느날, 먼저 귀순한 선배의 훈시가 떠올랐다. 남한에 정착하려면 6가지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첫째, 사기 한 번 당해야 한다

 

둘째, 회사 한번 때려쳐야 한다

 

셋째, 개인사업하다 부도 한번 맞아봐야 한다

 

넷째, 사고 한 번 당해봐야 한다

 

다섯째, 첫 애인과 이별해야 한다

 

여섯째, 알콜중독에 빠져야 한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도저히 이해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하루 하루가 6가지 고개의 의미를 알 게 만들었다.

 

그러고 난후 방황의 괴로움이 뒤따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에 대한 좌절감 게다가 무한경쟁 시대가 남겨주는 가슴아픈 나날들.... 갈등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선배가 들려준 그 고개를 넘으려면 그래서 누구에게나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착은 너무도 멀고 험난한 것 같았다. 가장 큰 괴로움은 그리움이었다. 어머니가 보고싶어 온종일 술을 마시고 취한 적도 있었고 북한산 정상에 올라 멀리 북녘땅을 바라보며 소리쳐 어머니를 불러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후회까지 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적은 이 사회도 아니었고 몇푼 안되는 내돈을 사기쳐 달아났던 그 사람도 아니었다. 적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더구나 그 짧은 순간이나마 후회하게 만들었던 내 자신의 수양어린 푸념이었고 투정이었다.

 

사실 나는 누가 오라고 해서 한국땅에 온 사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사선과 사선, 고통과 고독, 괴로움과 외로움의 나날에 비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북한의 중앙당 간부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어느 사회이든지 간에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의식의 문제였다. 마음을 비워야 했다. 설사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불신과 과욕, 허영과 사치를 허물고 허상에 가까웠던 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종의 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 셈이었다. 나는 웃기로 결심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참 밝고 명랑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더 이상 "불쌍하다 안됐다"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가장 힘든 싸움은 내 자신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었다. 마음을 비우기로 한 이상 나는 그날부터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 뒷머리에 다음과 같은 각오를 써 놓았다.

 

"너 한숨 쉴 때 너의 어머니 눈물흘리며 괴로워하고 너 용기없이 주저앉을 때 너의 가족 쓰러진다"

 

그 다음부터는 절대 울지 않기로 했고 어머니가 그리우면 두 주먹을 불끈쥐고 속으로 부르짖는 습관을 길렀다.

 

"어머니!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내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스스로를 평가하는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이에 자만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호소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누구라도 믿지 말라고 말이다. 처음엔 내가 그 말을 믿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난 후에는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으며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회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이 사회를 사랑한다.

 

아니 끈끈한 정을 나누는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간한다. 비록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단점이 있지만 진정으로 이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쯤은 주인된 사고의식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왜냐면 나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나의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땅의 처절한 생존경쟁은 비록 내가 탈출하던 환경하고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같은 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세상을 살아가는 정의로운 요령과 최대의 개척정신과 노력! 그것이 생존의 승자가 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종종 강연회에 가서는 "자살하지 맙시다"라는 어마어마한 제목으로 서두를 떼곤 한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방황하던 시절 내 스스로 칼을 들어 그었던 손목을 바라보곤 한다. 그래서 그 때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그 정신력은 결코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 법인 것 같다.

 

한국에 온지 5년째 나는 당당한 방송작가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공부하는 대학생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전공중인 영화를 찍어 상까지 받았고 KBS 미니시리즈 진달래꽃 필 때까지 집필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 한국 국민으로 정착하는 승자의 기초이다"

 

지면을 빌어 서투르고 엉성한 글귀를 읽어준 네티즌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이 아들을 만나는 그 날까지 나의 부모님들이 건강하시길 기도하며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고 싶다.

 

19993월 서울에서 정성산(시나리오작가)

 

 

2004-11-18 00:05:4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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