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넘어 고통을 나누며
작성년도 :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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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넘어 고통을 나누며
- 최영학
세월은 소리 없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찾아 북한 땅을 떠난 지가 어제 일 같은데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지도 어느덧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이야기처럼 저 역시 지난 십 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삶의 변화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가 느꼈던 많은 변화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제 자신이 자유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자유는 어느 날 쉽게 찾아온 자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제가 누리는 자유는 죽음으로 찾은 참으로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저는 북한의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나 스물 네 해라는 짧고도 긴 세월을 인권의 불모지인 북한사회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북한사회는 저에게 있어서 생지옥과도 같은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결국 저는 인간의 참된 자유를 찾아 1998년 10월 1일, 눈물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탈북한지 15일 만에 저는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는 불우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1998년 10월 24일 오전 10시, 저를 비롯한 열아홉 명의 탈북동포들이 중국 길림성 화룡현 남평진 교두를 통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었습니다.어떤 이들은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치며 울면서 중국 변방대원들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우릴 살려주시오. 우린 조선에 끌려가면 죽어야 한단 말입니다. 제발 우릴 좀 살려주시오.”하지만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그들은 강제 북송되기 시작했고 그들을 넘겨받은 함경북도 무산군 안전부 안전원들은 울부짖는 탈북주민들이 죽을 정도로 매질하여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이 개쌍년들이 조국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서 저 중국놈들에게 살려달라고 빌고 있니? 조국과 인민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반성할 생각은 하지 않는 네년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단말이야.”결국 열아홉 명의 탈북자들은 사람이 아닌 개보다도 못한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강제 북송된 탈북주민들을 거의 시체로 만든 후 안전원들은 그들의 운동화를 조이는 끈을 풀어 한 줄로 세워 오른쪽 팔목을 연결하여 묶어서 호송트럭에 실었습니다.호송트럭에 강제로 오른 우리는 입술이 다 얻어 터져 피가 계속 나와도 닦을 수 없었습니다. 호송원들의 구두발에 얼굴만은 다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있는 통에 구두발에 치워 손등이 터지고 온 몸이 다 쑤셔나는 상태로 저는 다른 탈북주민들과 함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무산군 안전부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어느덧 우리를 태운 호송차가 무산군 안전부에 도착했습니다. 호송책임자가 먼저 차에서 내리더니 계호원들에게 우리를 끌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호송차량에서 내린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앞에서 걸어가는 호송원을 따라 무산군 안전부 구류장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이 새끼 어디서 허리를 피며 지랄이야. 이 개새끼가.”머리를 앞으로 숙인 채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호송 계호원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뒤따라오던 철수 형이 “으악!!”하고 비명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꼬꾸라지는 것이었습니다.순간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게 되었습니다.맨 앞에서 걸어가던 특무상사의 계급장을 어깨에 단 계호원이 뒤를 보며 소리쳤습니다.“야. 무슨 일이야?”“예. 글쎄 이 개새끼가 호송도중에 허리를 펴려고 하기에 경고를 졌습니다.”뒤에서 철수형을 구타한 계호원의 대답하자 앞에 있던 계호원이 저를 비롯한 다른 탈북주민들을 그 자리에 무릎을 끓여 앉히고는 뒤에 있던 호송원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야. 이제부터 이 개대가리 새끼들에게 기압을 좀 주라우.”명령이 떨어지자 계호원들이 등 뒤에서 사정없이 구두발로 우리에게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맨 처음 철수형이 “윽!!”하는 비명소리를 내며 앞으로 쓰러진 후, 저에게도 맵짠 구두발 타격이 가해졌습니다. 등 뒤로 순간적으로 구두발 타격이 가해지자 저는 숨이 막혀 소리도 못내고 온 몸을 꿈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습니다.그 순간 제 고통은 무엇이라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영숙이도 다른 탈북주민들에게도 계호원들의 구두발 타격은 사정없이 가해졌습니다. 구두발 타격에 저는 등뼈가 다 부셔져 나가는듯한 짜릿한 아픔을 참고 견뎌내야만 했습니다.구류장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한번 무서운 기압을 당하고 난 우리는 순한 양처럼 호송원들의 눈치를 잘 살피며 구류장으로 들어섰습니다.구류장으로 끌려간 우리는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방에서 차례로 신체검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저와 철수 형, 그리고 영숙이가 신체검사 받으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방에 들어서니 눈에 독기를 띤 계호원들이 저와 철수형을 세워놓고 겉옷부터 시작해서 팬티까지 다 벗으라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야. 이 개대가리새끼들아, 지금부터 겉옷부터 시작해서 양말은 물론 빤쯔까지 다 벗어. 빨리 못 벗어. 너 이 종간나새끼. 너는 저기 구석에 가서 벽에 돌아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차렷하고 서있어. 빨리 저기 못가겠니 이 종간나새끼.”구류장 책임자의 독살스러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저와 철수형은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영숙이는 한쪽 구석 벽에 뒤돌아 두 손을 높이 들고 서있기 시작했습니다.저와 철수형을 발가 벗겨놓은 후 구류장 계호원들은 옷이나 내의 속에 돈이나 손칼 등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도구가 없는가를 검열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계호원들은 혹시 우리가 중국 돈을 감추어놓은 것이 있을까봐 팬티까지 다 벗겨서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계호원은 내 바지를 검사하다가 허리띠를 보더니 가죽으로 된 좋은 허리띠를 차고 있다면서 허리띠로 내 등을 내려치는 것이었습니다.“어이구. 이 새끼는 중국에 있었다는 놈이 옷이랑 혁띠랑 쪽바리새끼들 것만 입었네. 이런 개새끼가 나도 못 입는 걸 네 새끼가 입어?”순간적으로 내 등 뒤로는 사정없이 가죽혁띠가 날아들었습니다. 또 제가 벗어놓은 잠바를 검사하더니 비싼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구두발로 등을 걷어차는 것이었습니다.“윽!”저는 너무 아파 그 자리에 꿇어앉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당시 저는 팬티를 벗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무엇이 내 등 뒤를 내리치는 바람에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몸을 비틀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계호원들이 또 저에게 엄살을 피운다면서 사정없이 구두발로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철수형은 제가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옆에서 훔쳐보았다고 또 다시 계호원들에게 사정없이 매질을 당했습니다. 결국 저와 철수 형은 계호원들에게 다시 한번 호된 매질을 당한 뒤 서로 다른 구류장으로 들어갔습니다.“이 종간나가 여기가 어디라구 오줌을 싸고 지랄이야. 이 더러운 개간나 같은게.”우리가 구류장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계호원의 악의 찬 소리와 함께 영숙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아아.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저와 철수형이 계호원들에게 매를 맞아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영숙이가 넋이나가 서있던 자리에서 오줌을 싼 것 같았습니다. 결국 영숙이는 오줌을 쐈다는 이유로 계호원들에게 매질을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영숙이의 비명소리가 나자 본능적으로 철수형이 뒤를 돌아 영숙이에게로 가려고 하다 두 명의 계호원에게 붙잡혀 또 매질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구류장으로 들어가는 좁은 복도에서 안전부 계호원들에게 처참하게 얻어맞는 철수형을 지켜보자니 너무 끔직해서 저는 그만 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순간적으로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철수형의 얼굴은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입술은 얻어터져서 형체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제가 마지막으로 본 철수형은 그렇게 험한 모습으로 계호원들에게 질질 끌려서 구류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는 영영 서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그 후 저는 일주일 동안 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 수사과에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저를 취조한 수사과 직원은 상위계급의 젊은 수사관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참 얌전하게 생긴 수사과 지도원이었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꿈틀거리는 사나운 짐승이었습니다.취조를 받는 동안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특히 걸상다리로 손바닥을 내려 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습니다.몇 시간동안 열심히 반성문을 작성했는데 조사실로 들어와서 대충 보고는 솔직하지 않다고 하면서 또 걸상다리로 내 손바닥을 내리칩니다. 하도 손바닥을 많이 맞아 손바닥은 다 갈라터지고 나중에는 도저히 펜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하도 아파서 일주일 동안 무산군 보위부에서 수사과 지도원으로부터 걸상다리로 손바닥을 얻어맞은 숫자를 세여 보았더니 총 100회 이상 맞았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수사과 지도원은 조사과정에서 펌프라는 고문을 당하는 동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엎드려서 팔을 구부렸다 폈다하는 고문을 시키고는 뒤에서 걸상다리로 발바닥을 갑자기 타격하곤 했습니다.“야, 펌프 제대로 안하겠니? 이 새끼가, 야 이 새끼야, 그 자리서 엎드렸다 펴기 현수 백 개 시작해.”저는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엎드려 팔을 굽혔다 펴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 갑자기 엎드려서 팔을 구부렸다 폈다하기를 하다가 발바닥을 얻어맞으면 순간적으로 팔에 주었던 맥을 놓게 되는데 그러면 저는 얼굴을 앞으로 떨어뜨리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턱을 쫒게 되는데 그러면 턱이 정말 아픕니다.몇 번 당하고 나면 턱 밑이 다 째지고 피가 납니다. 또 하루에 몇 십번씩 발바닥을 얻어맞으면 온 다리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정말 그 고통을 무엇이라고 표현조차 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취조를 받다가 밤늦게 무산군 안전부 구류장으로 들어가면 계호원들이 저를 보고는 겉이 멀쩡하다면서 또 사정없이 내 뺨을 몇 번씩 후려갈기곤 했습니다.종일 조사에 시달리다 구류장에 들어가면 잠을 재우지 않습니다. 계호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에서 나는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곧추 펴고 무릎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는 밤새 꼼짝하지 말고 앉아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모습이 계호원들의 눈에 띄면 펌프를 백 개 이상씩 해야 했습니다.무산군 안전부 구류장에 들어와 며칠이 지나자 내 몸속에서 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속에서 생긴 이로 인해 저는 온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리면 기압이 들어오기 때문에 간지러움을 참는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고문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구류장 안에서 당하는 기압 중의 하나인 펌프를 할 때면 큰 소리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외치며 해야 합니다. 너무 힘들어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낮아지면 저는 또 끌려 나가 계호원들에게 거의 죽도록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계호원들의 매질에 정신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적게 맞으려고 아픈 것은 다 잊고 있는 힘을 다해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습니다.“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정말 성실하게 잘 하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정말 밤새 한잠도 못자고 매일 밤 고통 속에서 지내다보면 사람이 제정신이 쑥 빠질 정도로 미쳐버리게 됩니다. 그래도 후에 무산군 보위부에서 함경북도 도보위부로 이송되어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과에서 다시 취조를 받았던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산군 보위부 수사과에서 취조를 당했던 일주일간은 매도 적게 맞았고 생각보다는 그리 힘든 나날들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에서 6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종일 구류장 안에서 앞으로 저에게 닥칠 불안한 운명을 가늠해 보면서 절망과 좌절속의 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다음 날, 무산군 보위부에 끌려와 7일째 되는 날 아침 저는 담당 수사과 지도원으로부터 저에 대한 사건이 무산군 군보위부에서 함경북도 보위부로 송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함경북도 보위부로 이송되어 다시 취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절망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저는 그 날 오후 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에서 함경북도 보위부로 다시 이송되게 되었습니다. 무산군 보위부를 떠나 함경북도 보위부로 이송되면서 저는 앞으로 제 자신이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이겨내야 할 어려움이 얼마나 크고 괴로운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에서 일주일간의 조사를 받은 후 저는 1998년 11월 2일 오후 함경북도 보위부로 다시 이송되었습니다. 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에서 조사를 담당했던 수사과 지도원이 직접 함경북도 보위부로 저를 이송하고 돌아갔습니다.그리고 저는 그 이후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에서 30일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함경북도 보위부에서 조그마한 지하 독감방에서 지내야했습니다. 종일 고된 조사와 조사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뒤 계호원들에 의해 끌려서 캄캄한 지하 독감방에 시체마냥 쓰러져 있을 때는 정말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제가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에서 30일 동안 조사를 받은 내용은 ‘자본주의 황색문화의 유포’와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 훼손’, ‘불법월경행위에 관한 위법’이라는 세 가지 정치적인 죄목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 적용된 이 세 가지 정치적인 죄목은 이전에 남조선 드라마 ‘모래시계’사건의 연장수사로써 당시 북한 보위부에서는 아직 종결하지 못한 수사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하지만 사건의 장본인이 중국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북송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함경북도 보위부에서는 저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에서 함경북도 보위부로 이송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당시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에서는 저에 대한 사건을 자신들의 손에서 종결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에서는 첫날부터 저를 대상으로 무자비한 고문과 함께 가혹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우선 저에게 적용된 ‘자본주의 황색문화의 유포’라는 죄명은 북한사회에서 금지된 적대국인 남조선의 드라마 ‘모래시계’가 들어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친구들에게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모래시계’사건은 곧 김일성, 김정일이 창조한 건전한 북한식 사회주의 제도의 사상문화를 부정하고 썩어빠진 자본주의문화를 북한사회 전반에 유포시켰다는 정치적인 죄명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또한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 훼손’은 자본주의 문화를 유포시킨 그 행위의 근본문제는 제 자신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는 김일성, 김정일이 창조한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훼손시키기 위한 불손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모래시계’와 같은 사건을 일으켰다는 죄명이었습니다.결국 이로 인해 조사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고 중국으로 불법월경을 했다는 것이 함경북도 도보위부 반탐처에서 저에게 적용한 마지막 ‘불법월경행위에 관한 위법’이라는 죄명이었던 것입니다.하지만 함경북도 보위부에서의 조사는 말이 조사지 실상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조사였습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조사실에서 자그마한 전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벗으로 삼아 저는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만 했었습니다. 함경북도 보위부의 조사에 아무리 솔직히 답변해도 조사를 담당한 반탐처의 조사관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노릇이었습니다.하루에도 몇 십번씩 반복되는 조사관의 질문에 똑 같은 대답을 해도, 아니면 조금씩 다른 대답을 해도 저에게 차려지는 것은 가혹한 고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진술서를 잘 써도 조사관들에게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매일 몽둥이에 의한 찜질을 수없이 당해야 했습니다.그래도 몽둥이에 의한 고문은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각목에 온 몸을 얻어맞을 때는 정말 눈앞이 아찔하다 못해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두 다리의 무릎관절 뒤로 나무각목을 끼고 무릎을 꿇고 한 시간씩 앉아있어야 하는 관절꺾기 고문 역시 참기 어려운 고문의 한 종류입니다. 두 손과 두 발을 뒤로 비틀어 사족을 하나로 묶어놓고 천정에 매달아 놓는 비둘기고문에 의해 병신이 된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고 합니다.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정신을 잃으면 정신을 차리게 한다고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큰 물독에 얼굴을 처넣고 흔들어 대는 물귀신고문 등 상상하기도 끔찍한 야만적인 고문을 조사과정에서 저는 수없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조사보다는 고문을 위한 도구로써의 죄수가 더 필요했던 것 같았습니다. 열흘 동안 밤낮으로 잠도 재우지 않고 먹이지도 않고 때리고 패고 매달아놓는 고문으로 인하여 온 몸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함경북도 보위부에서의 고문으로 인해 저는 신경과 근육이 다 마비되어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저를 때리고 패도 열흘이 지나면서부터는 때리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온 몸의 살가죽이 터져나갔습니다. 터져 나간 살가죽에서는 피가 흐르다 못해 고름이 섞인 피고름이 굳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얼굴은 하도 매를 맞아 퍼렇게 멍들어 퉁퉁 부어올라서 사람의 얼굴이 아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슨 짐승의 얼굴과 같았습니다.입술이 다 터져서 부어있었고 그로 인해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입술이 다 터지고 이빨이 다 부셔져 나가 조사과정에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또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질을 안기는 시대의 살인마, 살인기계들이었습니다.두 손목과 두 발족을 뒤로 비틀어 하나로 묵어놓고 천정에 매달아 놓는 비둘기 고문은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의 두 손목과 두 발목을 뒤로 비틀어 하나로 묶어놓은 후 묶어놓은 사이로 연결해 천정에 매달아 놓으면 남자인 경우에는 머리가 무거워 온 몸이 앞으로 거꾸로 기울어지게 됩니다.그런 상태에서 한두 시간도 아니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몸 안에 있는 피들이 앞으로 모이게 됩니다. 결국 시간이 오래 지나면 두 눈과 코, 입, 귀로 피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머리가 무거워지고 얼굴신경이 마비가 되기 시작하면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온 몸의 뼈들이 다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도 바빠서 오줌과 똥을 싸기가 일쑤입니다.그렇게 저의 온 몸이 서서히 망가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하루 이틀이 지나면 죽어버리게 됩니다. 함경북도 보위부로 이송된 후 보름이 지나자 저는 완전히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버렸습니다. 혼자서는 일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혼자서는 단 일초동안도 서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오직 숨은 쉬고 심장은 뛰고 있지만 저는 사실상 시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결국 보름이 지나자 반탐처의 조사관들은 더 이상 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햇빛 한 점도 들지 않는 캄캄한 지하 독감방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느냐, 아니면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정신적인 싸움을 싸워야만 했습니다.아마 그 당시 정말 제 자신이 무수한 고문과의 싸움에서 삶을 포기했다면 아마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 자신이 독종이라기보다는 그 모진 고문을 이겨낼 수 있도록 그 어떤 힘이 저를 붙잡고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매일 강도 높은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지하 독감방에서 쓰러져 있을 때면 저는 사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그렇게 저는 조사 없이 독감방안에 갇혀있었는지 보름이 지나 함경북도 보위부로 이송된 지 30일째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도 저는 혼자 지하 독감방안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잠에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며칠 동안 잠에 들면 영문도 모르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그 날도 저는 주변이 온통 하얗고 사람처럼 보이는 모습들이 흰옷을 입고 희미하게 제 주위를 오고가고 무슨 바람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철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독감방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저는 소스라쳐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꿈에서 소스라쳐 깨어나 눈을 떠보니 저의 온 몸은 이미 식은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귀에는 ‘철커덩’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앞으로 바라보니 독감방문이 열리고 담당 수사관이 문 앞에 서있었습니다.“나와!”저는 드디어 죽음의 순간이 도래해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몸을 겨우 추세워 바닥을 기어서 지하 독감방의 문을 나섰습니다.독감방문을 나서자 두 명의 계호원들이 내 옆에서 저는 부추겨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독감방에서 나와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가 또 다른 구류장들이 있는 복도를 지나면서 창문을 넌지시 바라보니 밖은 이미 어둠이 짖게 드리운 밤이었습니다.저를 끌고 가던 계호원들이 구류장 입구에서 제가 입고 있던 다 째진 죄수복을 벗기고 낡은 국방색의 헌 옷을 입히고 신고 있던 고무신대신 헌 운동화로 바꿔 신겼습니다.“과연. 이 밤에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일까? 그리고 고무신은 왜 헌 운동화로 바꾸어 신기는 것일까? 혹시 이 밤에 나를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를 정치범수용소로 이송하는 것은 아닐까?”불안한 예감 속에서 저는 두 명의 계호원들에게 끌려 조사실이 아닌 갇혀있던 건물의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지하 독감방에서 해방되어 함경북도 보위부안의 한 건물 밖으로 나와 12월의 북방의 겨울날씨를 맞이하고 보니 왜서인지 저는 순간적으로 혼미하던 정신이 돌아오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칼로 에이는 듯 한 북방의 날씨였지만 말입니다.저는 계호원들에 의해 밖에 서있는 호송차량에 태워졌습니다. 제가 호송차량에 태워지자 운전수 옆 좌석에는 호송책임자처럼 보이는 보위원이 올라타고 뒤에 태워진 내 좌우로 한 명씩의 계호원이 올라탄 후 호송차량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호송차량에 태워진 저는 “결국 나도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름대로의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송차량을 차고 가면서 저는 속으로 정치범인들은 낮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밤에 죽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저 자신이 밤에 호송차량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하지만 저는 당시 제 자신이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함경북도 안전국 산하의 농포집결소로 이송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무슨 까닭인지도 모른 채 저는 1998년 12월 3일 밤 11시 경 호송용 우와즈 지프차에 실려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죽음의 현장이 아닌 함경북도 안전국 산하의 청진시 농포집결소로 이송되게 되었습니다.이후 저는 갖은 곡절과 위기를 넘기며 드디어 2001년 5월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되었습니다.북송시절 겪은 고문 후유증은 치료를 받으며 적지 않게 회복되었으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아니 결코 지울 수도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입니다.아직 2천4백만 명의 북한주민은 김정일 독재의 혹독한 통치하에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나는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행복을 저 휴전선 너머 북한 동포들과 함께 하는 그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탈북자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 갈 것입니다.2011년 5월 최영학
2011-07-20 21: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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