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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희망을 배달해 드립니다."

작성년도 : 2005년 68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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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배달해 드립니다."

- 장사민

 

 

희망을 배달해 드립니다

 

 

불효의 마음 사죄드리며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의 작은 공업도시이다. 동해바다를 끼고 있는 고향에 대한 추억은 참으로 아름답다. 옥천의 맑은 물과 높고 낮은 산맥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모든 주민들이 정붙이고 살만한 고장이었다. 바다에 나간 배들은 만선이었고 크고 작은 공장의 굴뚝에선 뽀얀 연기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농어촌의 활기찬 모습과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주었다.

 

그러던 내 고향은 95년부터 시작된 자연재해로 인해 북한 땅에서도 가장 못사는 고장이 되어 사람들은 식량을 찾아 하나둘씩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북한생활의 어려움은 그 어느 지방이든 예외가 아니었고 그로 인해 결국 나도 학업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끝에 나는 984월에 탈북을 하여 중국에서 살 방안을 모색하였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장사를 하겠다고 할 때 어머니는 본인의 책임이라며 장사를 해도 본인이 한다며 나를 말렸지만 나는 그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혜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후 나는 밤이나 낮이나 가족과 친지들을 단 한번이라도 잊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중국에 살면서도 항상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였기에 가족에게 연락도 한번 제대로 못한 채 이곳까지 왔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던 가족을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며 떠나온 고향, 고향 부모님께 저지른 불효와 형제들에 대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은 평생을 지워도 다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무정하게 가버린 딸자식이 지금은 이곳 대한민국에서 자아를 찾아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머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믿으며 오늘 이 글을 쓴다.

 

따뜻한 손길에 눈물 흘리며

 

나는 200143년간의 중국에서의 방황과 불안을 떨쳐버리고 기회의 땅 대한민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한국의 산과 들은 틀림없는 내 고향 산과 들이었다.

 

그러나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웅장하고 화려한 공항의 모습과 도로에 가득 찬 승용차, 눈이 아찔할 정도로 높이 솟은 고층건물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는 이곳이 나의 조국이고 고향이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살아서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내가 잘 살고 성공하는 것으로 나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리라 결심을 하였다.

 

하나원에 있으면서 나는 뜻하지 않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운동을 하다가 철봉에서 떨어져 그만 허리를 다쳤다. 허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할 때는 모든 것이 끝이구나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낯선 땅 대한민국에 온 탈북자 하나 그 누가 신경 써줄까 하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복받쳤다. 오로지 믿는 것이라고는 건강한 신체 하나뿐이었는데 이제 허리까지 다쳤으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젠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이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비록 가진 것 하나 없는 탈북자이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 선생님들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감동하고 또 감동했다.

 

의논 과정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몇 시간의 토론 끝에 수술은 피하고 대신 안전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확실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북한에 살 때 일리우스라는 병에 걸려 쓰러져 있어도 구급차는커녕 의사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서야 왕진 나온 의사는 생명이 위독하니 병원으로 급히 후송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가자 어머니는 힘들게 나를 업고 10리나 되는 시 병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때의 일이 생각나 눈물이 흘렀고 나를 업고 울면서 병원으로 뛰어 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어머님께 효도하지 못한 점에 대해 마음속 깊이 속죄하고 사죄하였다.

 

열의를 갖고 나를 치료해준 선생님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의 그 자상한 얼굴만큼은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지금까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퇴원한 후에도 나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까지 해주신 선생님들의 모습에 나는 감동했고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아나운서가 되기까지

 

하나원에서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적응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 나왔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사회를 몰라도 너무 몰라 무엇이든 먼저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하나원 퇴소 직후 미용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원 다니는 6개월 동안 남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해서 학원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 취득 후에는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고 인터넷과 컴퓨터 활용 능력 등을 습득하기 위해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생소한 외래어 공부도 하면서 한국사회에 그 누구보다 잘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이라는 사회는 나에게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았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난감했던 점은 누구나 겪는 일이겠지만 북한 말투 때문에 어떤 장소에 가든 조선족으로 착각하고 불법체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일 때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말투를 고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어느 날인가 불현듯 말투야 어떻든 상관없이 내가 열심히 일하고 인정을 받게 되면 그 누구도 우리를 낮춰 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무역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중국어 통역 일을 할 때였다. 의사소통에는 별 지장이 없어 중국어만큼은 자신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쓸 일이 없었던 경제용어나 기계용어 등 전문용어는 생소하고 어려웠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중국어 학원을 다니며 손에서 사전을 놓지 않고 틈틈이 중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들게 느껴졌지만 열심히 하다보니 재미도 있고 보람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나의 성실함과 노력에 감명을 받으신 듯 그후 사장님은 통역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청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나를 인정해주고 아껴주는 사장님이 너무나 고마워 나는 그러한 사장님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더 부응하고자 열과 성의를 다해 통역을 하였다.

 

그후 나는 인터넷 방송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였기에 공통된 목표를 향해 서로가 의기투합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맡은 일 뿐만 아니라 옆자리의 동료 일까지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내일처럼 열심히 도와주었다. 비록 하찮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나의 조그마한 힘이 이 나라와 통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뿐이다.

 

이러한 나의 노력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 덕분인지 나에게 대학입학이라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디지털대학이라 쉽게 생각했지만 일하면서 대학강의와 학교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엔 욕심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젊음이 있기에 요즘은 새벽에 신문배달도 한다. 젊은 여자가 새벽에 신문을 돌린다는 사실에 주위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나의 꿈을 위해 더욱 더 억척스럽게 일하고 있다.

 

매일아침 출근하고 저녁에는 강의를 들으며 새벽에 신문까지 돌리다 보니 정작 친구들과 밥 한끼 먹을 시간조차 낼 수가 없어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지금은 어려워도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고 통일이 되면 가족과 친지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믿음이 나를 지탱시켜준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사실 나도 아직 이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는데 주제넘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부족함이 많은 내가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탈북자라는 멍에를 지고 살지라도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탈북자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가 자신을 구속하기 보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되는 정착을 위한 과도기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이 사회의 건전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탈북자들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진취적인 사고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나 자신과 나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 때만이 우리 탈북자 한사람 한사람이 정상에 설 수 있고 통일되는 그날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나를 사랑해준 모든 분들과 나의 태가 묻혀있는 조국에 당당히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탈북자 한명한명이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힘들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면 우리 앞에 그 어떤 난관이 있을지라도 당당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다 같이 힘을 냅시다. 아자아자 화이팅 ! !

 

2005. 5 장사민 씀.

 

 

2005-06-13 10:41:45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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