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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는 BABARIAN(야만인) - 김영성

작성년도 : 1999년 51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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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제 치하에 있던 1934년 평양시 유성리에서 태어나 6.25전쟁을 겪고 얼마 안된 59년에 체코로 유학하여 프라하공대 건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동기중 최근까지 맹활약했던 사람으로 전 총리 강성산과 연형묵을 들 수 있다.

귀국후 전공을 살려 폐허로 변한 국가재건을 위해 매진하던 74년경 성분조사로 첫째형이 종파분자로 몰려 옥사하고 형 2명이 월남한 이 유로 성분불량자로 분류되어 산간 오지인 함북 무산군 노동자로 추방 되고 지방 한직으로만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89년경 함북도당 비서로 유학동기였던 강성산의 전폭 지원(신원보증)으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당원이 되어 동독의 라이네펠데 건설회사 설계원으로 파견되었다. 인생의 말년에 고목에도 꽃이 필 수 있다니... 89년 가을 다른 설계사 5명과 동독에 도착했다. 내 인생에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동독에 도착한지 보름만에 독일의 콘 크리트 장벽이 뚫린 것이다. 바로 이날 동독체류 유학생 두명이 서울 로 망명하자 북한 당국은 재빨리 유학생, 실습생 등 1,000여명을 평양 으로 긴급 공수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어찌될 줄 몰라 초조했다. 선불 로 받은 1,200마르크는 쓰지 않고 쥐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끝에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은가! 독일인과 함께하는 점심을 빼고는 아침, 저녁으로 감자나 마카로니에 달걀국을 먹어야 했다. 일류호텔에 투숙하면서 달걀국이라니 우리들은 유럽에 나타난 신종 babarian이었다

이와같은 독일 생활속에서나마 북조선에서 생각조차 어려웠던 나의 인생을 돌아 보았다. 56살이 되서야 겨우 후보당증을 받은 인생, 한 수령의 자비로 을 하사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뽑힌 것도 설계사 둘은 60년대 유학했지만 설계경력이 없거나 토목전공자로 건축설계 업무에 적합치 않았고 나머지는 독어를 전혀 못해 외화벌이를 위해 인 나를 어쩔 수 없이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룩한 수령은 몇푼의 외화를 위해 를 자유세계로 풀어줬던 것이다. 당시 동창 강성산의 신원보증을 받고도 보위부는 안전한 귀소를 위해 박이라는 감시조를 따라 붙였고 함북으로 쫓은 병아리들을 인질로 삼았다. 자유세계로 날고 있던 매는 열심히 사냥한 먹이(돈)를 주인께 바쳤다. 적어도 2년이상은... 그리고 앞으로 먹이를 바치는데는 장애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악하고도 의심많은 주인은 매의 정신건강 점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가 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 둥지를 오염시키고 있으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말기증상에 처해 있다는 진단을 한 것 같았다. 마지막 사냥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닭잡듯 하려는 것이 주인 생각이었으리라!

첫 휴가후 감시조는 나로 인해 독일로 오는데 애로가 많았다는 말을 하면서 전 직장동료한테 무슨 말을 했느냐며 물었다. 자랑삼아 독일의 생활수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큰죄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동서 독의 수준차와 통일후 동독 실업자들이 과거보다 많은 생활보조비를 받는 것, 동독 동물원 원숭이는 당근을 먹지만, 서독은 바나나, 평양 원숭이는 굶고 있다는 등 우스개 소리로 을 비웃었었는데... 물론 그 말은 믿는 친구들에게만 했으니 누설되리라 생각은 못했던 것이었다.

감시조 박씨는 말을 삼가고 얼근하게 취했을 땐 도래할 을 귀띔해 주는 것처럼 확연히 달라졌다. 한 달에 한번 대표부 보위부 파견관을 보고 오면 몹시 불쾌해 했다. 그때마다 목숨을 걸고 보증한다는 각서에 손도장을 찍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92.5경 한국인 친구가 있는 독일인 설계사로부터 월남한 형중 한명은 서울에 한명은 LA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42년만에 처 음듣는 소식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그러나 바로 그순간 감시조 박씨가 엿들을 줄 누가 알았으랴! 독일인 동료는 놀랜 나의 손을 잡으며 "혈육의 안부를 들은 것이 무슨죄냐?"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 말은 북한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외국인과는 절대로 혼자서 상대하지 말며 둘 이상이 함께 만난 경우에도 그 내용을 조직에 바로 보고해야 하는 것이 북한의 외국여행 수칙이다. 그런데 나는 혼자 만나고 또 간접적이긴 하지만 반동(?)형제들의 소식까지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탄로나면 만사 끝이었다. 나는 차츰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굳혔다. 그날이후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했으나 박씨와는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박씨 역시 나와 관련해 무슨 사고가 터지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에 고심이 컸으리라...

박씨는 내가 한국으로 올 때까지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왜 입을 다물었을까? 자신의 성급한 그 어떤 거동이 나를 돌출행동으로 내몰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하면서 모르는 척 해야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져도 몰랐다며 발뺌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설마 망명까지라고 생각했거나 상반기 보너스가 나오는 6월중순까지 아무일도 없기를 정말로 바랬을 수도 있다.

자고나면 아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면 잠자리는 푹 젖었다. 고뇌끝에 결심했다. 돌아가지 않기로 그것은 가족에 대한 비열한 배신이 분명하다. 그러나 돌아가도 이미 반역죄명을 씌운 보위부는 나를 없애버릴 것이었다. 무의미한 죽음의 도래를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92.6.2 북한과 결별하고 한국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황혼을 앞두고 북한에 충성을 바치기보다 인간 본연의 나를 찾기 위해 북한이 비난하는 혁명배신자-인간쓰레기로 낙인 찍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애국심이나 북한체제에 대한 염증때문만은 아니다. 노년에 후보당원이 되고 유럽에 파견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런 특권과 사치를 버릴 바보도 아니다.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서도, 돈벌어 잘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내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도 혈육과 가정에 대한 애정이 남보다 덜해서도 아니다. 당과 수령에 대한 남다른 앙심을 품어온 것도 아니다. 북에서는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망명함으로써 마침내 공포로부터 해방됐다. 전에도, 정부기관 연구원으로 일하는 지금도 잘했다, 잘 못했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그러나 독일동료 H씨가 들려준 "뭐하러 발목을 잃어가면서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왔냐는" 일화는 한국의 남쪽나라에서 무수히 들려오는 것 같다. 아니 듣고 있다. 타인이 그럴땐 그래도 괜찮다. 내 처지에 서봐 하는 답변거리라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스스로 내게 물을땐 정말 괴롭다. 두고온 가족을 잊을 수 없어...

스스로 묻는다. 南의 깬 사람들은 비웃는다. 내가 겨우 흑백논리나 터득한 덜 진화한 Babarian이라고! 南의 깬 사람처럼 모든 사물을 화사한 장미빛으로 보는 데까지 진화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백년? 아니면 만년? ...

1999년 6월 김영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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