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열린 세상 - 조명철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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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59년, 나는 성분이 좋은 자만이 살 수 있다는 특혜받은 평양시에서 행정부 간부이셨던 아버지와 출판사에서 노어를 번역하셨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간부 아들만이 다니는 남산고등중을 거쳐 김일성 종합대와 같은 대학 박사원을 나와 한동안 교수로 일하다 중국으로 유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맛본 중국 땅의 생활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왜 그리도 자유롭고 풍요로워 보이는지... 갑자기 갇힌 세상에서 받고 살아왔던 그 많은 혜택과 특혜가 왜 그리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였는지... 갑작스레 자유라는 의미에 홀려 나는 정든 고향 북녘 땅을 뒤로한 채 한번도 밟아 본 적이 없는 남한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고립 무원한 사회에 살다가 다양하고 활기찬 열린 세상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작은 가슴으로 받아 안기에는 벅찬 많은 것들이 한 순간에 안겨와 그것을 대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고통"은 내가 스스로 바라고 바라던 "고통"이고 벅차지만 마음 신나게 하는 것들이어서 인생을 살면서 "고통"이 좋아 보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우습겠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남한사회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은 실로 크며 그 충격의 이면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듯 합니다. 나를 감동시킨 많은 것들 중에서 제일 크게 영향을 준 것중 하나가 남한의 방송이었습니다. 남한의 발전과 언론기능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또 이것이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체제반역으로 취급되어 혹독한 제재를 받기 때문에 남한에 어떤 방송이 있는지 북한사람은 잘 모릅니다.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고위층의 자제였지만 저도 처음으로 남한방송을 들었던 때가 17세경인 75년 1월이었습니다. 북한의 평남 용강군에서는 정부 장,차관과 그 자제들만이 치료받을 수 있는 온천요양소(당시 정부요양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김정일 총비서도 김일성 종합대학시절 치료를 받았을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유황온천으로 피부질환, 관절염, 대장염 등의 병치료에 특효가 있는 유명한 곳으로 온천이 하도 좋아 요양소 건물 왼쪽에 김주석 별장, 오른쪽 옆에 인민군 장병요양소가 있습니다. 당시 나는 그 휴양소에 가기 위해 관절염 치료 겸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가짜 병명을 만들어 1 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러 갔었습니다. 요양소의 각 방에는 라디오가 1 개씩 놓여 있었는데 하루는 후배가 남한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난생 들어보지도 못했고 들어 볼 수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남한방송 얘기에 나는 후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멍하니 대답않고 앉아있는 나에게 라디오를 가리키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 알고 있던 바로는 가변축전지와 연결된 라디오 줄을 끊어 채널을 중앙방송 하나만 고정시켜 남한방송은 커녕 북한의 제2방송도 들을 수 없다고 알았는데 들을 수 있다고 하여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맞춰보려고 하였으나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채널을 돌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배가 빙그레 웃더니 들을 수 있도록 해 줄테니까 두가지 요구조건에 수락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남이 보는 데서는 절대 들어서는 안된다였고 둘째는 한턱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는 라디오 뒤 뚜껑을 열더니 손으로 가변축전기를 돌리면서 주파수를 변경시켰습니다. 주파수를 맞추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말 같으면서도 말씨나 억양이 분명 북한과는 다른 것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숨소리도 가빠졌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명합니다.
혹시 누가 벌컥 문이나 열고 들어오면 어쩌나 해서 라디오 스위치를 끄라고 야단을 치면서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파고 드는지...
그순가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되던 나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 니다. 후배를 야단치고 내보낸 후에 나는 방문을 걸고 최대한 소리를 낮춰놓고 다시 주파수를 맞춘 다음 남한 방송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스피커에 귀를 바싹 갖다대고 말입니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장면을 생중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그처럼 미워하고 군사독재자, 타도대상자로 교육받아 잘 알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다 못해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내용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당시 감명을 받은 것은 그처럼 절대 군사 독재자라고 하는 대통령이 직접 방송에 나와 기자들의 자유로운 질문에 답하고 연설문이 아니라 자유롭게 대화식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 다.
북한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남한방송을 들었습니다. 20년전 남북방송이 남북의 이념 대리전이었던데 반해 20년이 흐른 지금 남한방송은 북한이 조금이라도 잘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방송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내심 아름다움과 고맙게 생각합니다.
북한 대남방송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음에도 남한방송은 북한이 돈 안들이고 배워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귀중한 가르침을 많이 방송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현재로서는 북한을 변화시키고 개방의 길로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방송보다 강력한 수단은 없으므로 남북방송이 대립과 대결이 아닌 화해와 협력의 길잡이, 통일의 선도자로 탈바꿈하고 미완이기는 하지만 선진화 되어가는 남한방송을 북한방송이 본 땄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남북관계는 얼마나 더 좋아지고 가까워지겠습니까? 또 통일의 길은 얼마나 더 가까워지겠습니까? 현실이 아쉽고 아쉽기만 합니다. 이 고통스런 자유를 하루빨리 끝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이곳에 와서 정부산하 연구기관에 들어가 북한의 시장경제 개방을 위한 방안 등을 연구하면서 연대 대학원을 나와 북한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과 아울러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되는 길을 향해 전 인생을 걸어 매진하는 특혜를 받고 있는데 한시도 나의 연구생활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북한출신 탈북자란 사실에 갈등과 보이지 않는 눈물도 흘렸고 자료수집이 어려울 때 좌절감에 전율도 했지만 최근, 사회적 분위기가 탈북자에 대해 우호적이고 이해를 많이 해주는 방향으로 흐르고 제한적이나마 북한자료도 열람하면서 북한을 보다 더 철저히 분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곳에서 내가 배웠던,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할 수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1999년 5월 조명철 씀
처음으로 맛본 중국 땅의 생활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왜 그리도 자유롭고 풍요로워 보이는지... 갑자기 갇힌 세상에서 받고 살아왔던 그 많은 혜택과 특혜가 왜 그리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였는지... 갑작스레 자유라는 의미에 홀려 나는 정든 고향 북녘 땅을 뒤로한 채 한번도 밟아 본 적이 없는 남한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고립 무원한 사회에 살다가 다양하고 활기찬 열린 세상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작은 가슴으로 받아 안기에는 벅찬 많은 것들이 한 순간에 안겨와 그것을 대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고통"은 내가 스스로 바라고 바라던 "고통"이고 벅차지만 마음 신나게 하는 것들이어서 인생을 살면서 "고통"이 좋아 보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우습겠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남한사회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은 실로 크며 그 충격의 이면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듯 합니다. 나를 감동시킨 많은 것들 중에서 제일 크게 영향을 준 것중 하나가 남한의 방송이었습니다. 남한의 발전과 언론기능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또 이것이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체제반역으로 취급되어 혹독한 제재를 받기 때문에 남한에 어떤 방송이 있는지 북한사람은 잘 모릅니다.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고위층의 자제였지만 저도 처음으로 남한방송을 들었던 때가 17세경인 75년 1월이었습니다. 북한의 평남 용강군에서는 정부 장,차관과 그 자제들만이 치료받을 수 있는 온천요양소(당시 정부요양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김정일 총비서도 김일성 종합대학시절 치료를 받았을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유황온천으로 피부질환, 관절염, 대장염 등의 병치료에 특효가 있는 유명한 곳으로 온천이 하도 좋아 요양소 건물 왼쪽에 김주석 별장, 오른쪽 옆에 인민군 장병요양소가 있습니다. 당시 나는 그 휴양소에 가기 위해 관절염 치료 겸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가짜 병명을 만들어 1 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러 갔었습니다. 요양소의 각 방에는 라디오가 1 개씩 놓여 있었는데 하루는 후배가 남한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난생 들어보지도 못했고 들어 볼 수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남한방송 얘기에 나는 후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멍하니 대답않고 앉아있는 나에게 라디오를 가리키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 알고 있던 바로는 가변축전지와 연결된 라디오 줄을 끊어 채널을 중앙방송 하나만 고정시켜 남한방송은 커녕 북한의 제2방송도 들을 수 없다고 알았는데 들을 수 있다고 하여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맞춰보려고 하였으나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채널을 돌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배가 빙그레 웃더니 들을 수 있도록 해 줄테니까 두가지 요구조건에 수락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남이 보는 데서는 절대 들어서는 안된다였고 둘째는 한턱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는 라디오 뒤 뚜껑을 열더니 손으로 가변축전기를 돌리면서 주파수를 변경시켰습니다. 주파수를 맞추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말 같으면서도 말씨나 억양이 분명 북한과는 다른 것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숨소리도 가빠졌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명합니다.
혹시 누가 벌컥 문이나 열고 들어오면 어쩌나 해서 라디오 스위치를 끄라고 야단을 치면서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파고 드는지...
그순가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되던 나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 니다. 후배를 야단치고 내보낸 후에 나는 방문을 걸고 최대한 소리를 낮춰놓고 다시 주파수를 맞춘 다음 남한 방송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스피커에 귀를 바싹 갖다대고 말입니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장면을 생중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그처럼 미워하고 군사독재자, 타도대상자로 교육받아 잘 알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다 못해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내용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당시 감명을 받은 것은 그처럼 절대 군사 독재자라고 하는 대통령이 직접 방송에 나와 기자들의 자유로운 질문에 답하고 연설문이 아니라 자유롭게 대화식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 다.
북한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남한방송을 들었습니다. 20년전 남북방송이 남북의 이념 대리전이었던데 반해 20년이 흐른 지금 남한방송은 북한이 조금이라도 잘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방송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내심 아름다움과 고맙게 생각합니다.
북한 대남방송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음에도 남한방송은 북한이 돈 안들이고 배워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귀중한 가르침을 많이 방송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현재로서는 북한을 변화시키고 개방의 길로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방송보다 강력한 수단은 없으므로 남북방송이 대립과 대결이 아닌 화해와 협력의 길잡이, 통일의 선도자로 탈바꿈하고 미완이기는 하지만 선진화 되어가는 남한방송을 북한방송이 본 땄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남북관계는 얼마나 더 좋아지고 가까워지겠습니까? 또 통일의 길은 얼마나 더 가까워지겠습니까? 현실이 아쉽고 아쉽기만 합니다. 이 고통스런 자유를 하루빨리 끝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이곳에 와서 정부산하 연구기관에 들어가 북한의 시장경제 개방을 위한 방안 등을 연구하면서 연대 대학원을 나와 북한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과 아울러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되는 길을 향해 전 인생을 걸어 매진하는 특혜를 받고 있는데 한시도 나의 연구생활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북한출신 탈북자란 사실에 갈등과 보이지 않는 눈물도 흘렸고 자료수집이 어려울 때 좌절감에 전율도 했지만 최근, 사회적 분위기가 탈북자에 대해 우호적이고 이해를 많이 해주는 방향으로 흐르고 제한적이나마 북한자료도 열람하면서 북한을 보다 더 철저히 분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곳에서 내가 배웠던,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할 수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1999년 5월 조명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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