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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한 꽃제비

작성년도 : 2024년 591 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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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꽃제비의 고통스럽고도 끈질긴 생존의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청진역 앞, 구린내 나는 구석골목에는 나의 자리가 있었다. 그곳은 지금도 변함없이 있을 것이다.

지금쯤, 또 다른 꽃제비가 그 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밤이 어두워지면, 저 골목으로 헤매이며 들어가곤 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나는 작은 배를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청진 제철소로 숨어들어갔다.

작은 배낭 하나로 도둑질을 해 나올 때마다, 마치 시름이 놓인 것처럼 가슴이 편해졌다.

그날은 죽물이라도 입에 발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였다.

훔친 석탄을 내 앞에 놓아도, 그것을 먹지 못했다.

앙상한 뼈에 여린 여자의 힘으로는 그것을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석탄 배낭 한 배낭을 팔면 한 바게트 값이 나오지만,

그걸 25원에 팔면 빵 3개 값이 되는데도...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아팠다.


새벽 한 시, 아직도 어둠이 짙던 그 시각에 3개의 작은 빵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나는 수많은 고비를 겪어야 했다.

용광로 주변에서 주워 담은 석탄 한 배낭, 거의 10키로 되는 길을 걸어야만 제철소 정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보초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걸리면 끝장이었다.

보초를 피해 성공하면 사봉 버스 정류장까지 가야 했다. 거기서도 석탄 배낭 검열이 심했다.

거기서 걸리면 죽음의 매를 맞아야 했다. 무사히 버스를 타고 사봉, 송평, 수남, 포항, 청암, 신암, 청진역까지 갔다. 그곳에서 내려, 빵 파는 할머니와 빵을 바꿀 수 있었다.

그래도 기쁘다. 하지만 제철소 요원들에게 단속되어 그 작은 배낭까지 빼앗겨야만 했다.

온통 눈물이었다. 빼앗겨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였다.

거기다가 사정없이 매를 맞았다. 매를 맞아도 나는 알고 맞았다. 그나마 이유가 있고 맞을 때였으니 억울하진 않았다.

나의 뼈는 부서진 것만 같았다. 도망갈 기운조차 없었다.


석탄 먼지에 눈물에 나의 눈동자만 알롱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배를 움츠러쥐고, 나는 잠이 들었다. 몇 일을 누워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이불 삼아, 시커먼 제철소 땅구석에서 나는 찢어진 작은 신발을 베게 삼아 쪼그리고 계속 잤다.

눈을 뜰 기운조차 나는 없었다. 그래도 나를 낳아준 부모님 원망은 않았다.

그 속에서도 그냥 가족이 그립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떨리는 다리를 움츠려 보았다. 신경이 마비된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일어나서 가야 했다.

청진역 구석에 있는 내 자리로... 그 곳으로라도 가서 누워있으면,

물장사 아줌마한테서라도 물 한 모금 쯤은 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이라도 나와서 그 짠 눈물이라도 먹고 싶었다. 메말라서인지 한 방울도 않나온다.

하늘을 쳐다보며, 비라도 좀 내려와서 메마른 나의 목 좀 추기게 해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았다.

그렇게 반복되는 꽃제비의 3년 생활은 너무나도 지겹고도 힘들었다.

내 하찮은 목숨은 너무나도 질긴 것 같았다.

날이 캄캄히 어두워지면, 버림받은 갓난 애기들이 가 숨진다.

어른들도 영양실조로 눈동자만 남아 눅눅한 땅에서 모처럼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들 속 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죽을 두 번째 힘을 다해 두만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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