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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는 왜 조선노동당을 깨끗이 버렸나 - 허영식

작성년도 : 2006년 68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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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조선노동당을 깨끗이 버렸나

- 허영식

 

 

1010일은 조선노동당이 창건된 날이다. 이날은 내가 당 6차 대회를 맞으며 당에 입당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맞는 당원출신 탈북자들의 감회는 씁쓸하다.

 

언 땅에 배를 붙이고 10년 동안 총을 잡고 얻었던 당증, 고향 뒷산에 그 당증을 땅에 묻고 온 나는 당증을 따기 위해 바친 삶이 너무 허무하다.

 

좀더 일찍이 자유를 알고 그 열정을 자기 개발에 바쳐졌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다.

 

지금도 거리에서 책 배낭을 메고 젊음에 넘친 대학생들을 보면 몹시 부럽다. '배움의 자유가 있는 저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43살에 남한에 입국한 나는 배울 나이가 지나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대학 졸업장이 필수인 남한사회에서 내가 일할 곳은 생산직이나 기능직밖에 없다.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가 교육과정의 절반을 차지하는 북한의 학력을 가지고는 정보화 지식사회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내 나이 또래의 유명한 교수나 학자들을 볼 때마다 내 삶이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온다.

 

10년 군대생활로 얻은 당원증

 

나는 17살에 군에 입대했다. 군사 분계선 최전방 초소인 북한군 2군단이 주둔한 철원군 유정리가 첫 근무지다. 남한으로 온 후 나는 먼저 철원군 '승리 전망대'에 올라 나의 옛 초소를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골짜기, 그곳은 나의 젊음을 삼킨 곳이었고, 내가 당증을 따기 위해 바친 10년의 땀이 스며있는 곳이다.

 

동기(冬期), 하기(夏期)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수백 마리의 토끼를 키우고, 마당을 청소하는 등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오직 조선노동당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결과 나는 군단장 감사표창을 받았고 전사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가장 기뻤던 일은 내 또래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입당할 때였다. 나는 드디어 부모님 뜻에 부응했구나 하는 성취감에 마음 설렜.

 

그 당시 북한에서 성공을 꼽으라면 첫째가 노동당원이고 다음이 대학, 훈장, 직위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입당하기 위해 군복무를 했다. 입당해야 간부로 등용되고 사회에서 발언권이 있었다. 노동당 입당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김정일 '방침제대'에 걸려 탄광으로

 

잘 나가던 내 인생에 찬 서리가 내린 것은 87방침제대에 걸려든 때부터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안주탄광을 현지지도 하던 김정일이 왜 석탄생산이 떨어지는가?”라고 묻자, 탄광일꾼들이 탄을 캘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정일은 내가 제대군인 만 명을 보내주겠으니, 석탄생산을 늘이라고 지시한 것이 방침제대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의 '방침제대'에 따라 나는 제대명령서를 받았다. 재대후 배치지를 보니 평남 덕천탄광이었다. 당적(黨籍)을 등록하러 책임비서를 만나니 그는 당의 부름에 물불을 가리겠는가라며 우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3개월간 굴진공으로 일하던 나는 어느날 절망하고 말았다. 나와 함께 배치됐던 평양시 당위원회 모 간부의 아들과 평남도 당 선전비서의 아들이 하루아침에 안 보이는 것이었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전부 대학에 갔다는 것이다. ‘방침제대는 김정일의 방침이어서 누구도 빠질 수 없거니와 빼준 간부도 처벌을 받게 있다. 그런데 일도 안하고 계속 빈둥대던 애들이 모범탄부로 대학 갔다니 화가 치밀었다.

 

노후된 굴진설비로 인해 90년대 들어서면서 탄광에서는 인명사고가 연발했고, 쌀공급도 중단됐다. 10년 동안 나라를 지키고 탄광에서 일생을 썩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권력있는 집안 자녀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도대체 나는 뭔가 하는 생각에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향 뒷산에 당증 묻고 중국으로

 

나는 당위원회를 찾아가 고향으로 가겠다 했다. 그러자 당 지도원은 나를 방침 태공분자’(당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태만하는 자)로 몰았다.

 

나는 환자증명서를 떼기 위해 병원에 석달을 드러누웠다. 그보다 당적을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 제일 큰 골치거리였다. 당위원회는 당원임을 빌미로 나를 놔주지 않았다. 노동당원은 규약상 보름동안 당 생활을 하지 않으면 자동 출당된다.

 

그러던 95년 말, 갱안에서 가스폭발로 수십명이 질식사 했다. 나는 도저히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당증이고 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안전부(경찰)에서 방침을 어기고 도망쳐왔다고 단속했다.

 

미래가 없는 나는 드디어 중국으로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떠나던 날, 나는 그토록 갖고 싶었던 소중한 당증을 안고 고향 뒷산에 올랐다.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당원이란 뭐야? 결국 독재자의 들러리 아닌가? 내가 왜 이 당증 하나에 목을 매야 하는가?"

 

결심을 굳힌 나는 구덩이를 파고 당증을 파묻었다. 청춘도 세월도 함께 묻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다음날 나는 중국을 향해 떠났다.

 

허영식(43, 2001년 입국) 데일리엔케이

 

 

2006-02-03 11:09:2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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