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자예요, 내가 북한 여자란 걸 저주해요 - 김수희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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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열아홉에 性노리개가 된 脫北 여성의 수난記
-나에게도 꿈이 있었어요
나는 1980년에 함경북도 회령군에서(지금의 회령시) 태어났어요.
내가 태어날 당시 아빠는 회령군 담배공장에서 기계기사로 일하셨고, 엄마는 회령군 고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셨어요. 탁아소와 유치원 시절에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악기 다루기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유치원을 마칠 때는 손풍금을 가지고 아무 노래나 다 반주할 수 있었거든요. 인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도 부모님들의 엄한 통제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항상 학교 서클 小組(소조)에 편입되어 손풍금과 플루트를 다루었어요. 우리 엄마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예술학교에 보내어 앞날의 연주가로 키울 거라 다짐했어요. 학교 서클 소조에 편입되어 춤과 노래를 준비해가지고, 아빠가 일하시는 담배 공장이나 외삼촌이 일하시는 탄광기계공장에 공연하러 다닐 때는 참 재미있었어요. 내가 치는 손풍금 반주에 맞추어 독창, 중창 노래가 울려 퍼질 때면 관중들의 박수 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세상의 사랑을 다 받고 사는 것 같았어요.
1990년 당시 북한에는 지금의 중국처럼 사탕, 과자 같은 간식은 없었어도 집에서 자체로 달인 옥수수엿을 맛있게 먹으며 공연했거든요. 그러나 예술가가 되어 현란한 무대 위를 누벼보려던 나의 꿈이 점점 깨질 줄은 어찌 알았겠어요.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95년부터는 무서운 식량난이 들이닥쳤어요. 배급소에서는 식량을 주지 않아 밥을 해 먹을 수 없었어요. 매일 배급을 주겠나 하여 엄마는 선생질을 하는 바쁜 속에서도 짬시간에는 배급소에 달려가야 했어요. 엄마가 수업할 때면 할 수 없이 내가 수업에 빠지고 배급소 앞에 가 혹시 쌀을 주겠나 기다렸어요. 보름내 기다려야 이따금씩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를 실은 자동차가 배급소에 오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는 건 1~2㎏의 옥수수가루뿐이었어요. 이 가루는 한 끼에 우리 식구가 한 숟가락씩 먹어도 모자라는 양이거든요.
엄마와 나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회령시의 주변 산들을 다 돌아다니며 독이 없다는 풀들은 다 뜯어왔어요. 풀을 삶아서 가루 몇 숟가락씩 넣고 저어낸 풀죽은 그래도 맛이 괜찮았어요.
중국땅에서 지금 먹으라면 열두 번도 더 토했을 그 풀죽이 그때에는 왜 그리도 맛있던지, 중국에서 기르는 돼지들도 그런 죽을 잡아먹힐 때까지 한 번도 못먹어 볼 거예요.
-아빠·오빠는 식량 구하러 떠나고…
담배공장에 다니는 아빠와 회령 교원대학에서 공부하는 오빠는 점심 끼니로 가루에 풀을 비빈 풀범벅을 항상 싸가지고 다니곤 하였어요. 그 점심 도시락감이 너무 많이 들어 엄마와 나는 항상 맨 풀을 우려낸 물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어요. 우리 엄마는 참 목소리가 좋았어요. 처녀 시절에 청진제철소 예술선전대에서 독창만 내내 하며 박수갈채 속에 살아왔다는 엄마거든요. 어머니는 우리 회령시 고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면서, 나이들어서도 늘상 노래를 달고 다녀 많은 노래 공연에서 상을 탔어요.
그런 엄마가 수업하러 들어오셔서는 노래할 힘이 없어 한두 마디 노래를 우리 학생들에게 배워주고는 더 부르지 못하셨어요.
잡숫지 못하니까 목이 꺽꺽 막혔거든요.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옆의 학생들에게 부끄러웠어요. 옥수수알 한 줌만 삶아먹어도 우리 엄만 노래 열 개쯤은 잘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동무들에게 많이 설명하였어요. 이런 우리 가정에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어요. 1996년 8월이었어요. 먹을 것이 없어 출근 못하시게 된 아빠와 대학교 공부를 임시 중단한 오빠가 양강도 혜산 쪽으로 녹말가루를 구하러 가게 되었어요.
거기에 가서 넓은 대흥단벌의 수확한 감자밭을 뒤지면 감자 이삭이 나온다는 데 그걸로 녹말 가루를 바꾸어 집에 가져오겠다는 것이었어요. 또 아빠는 떠날 때 담배공장에서 퇴근하시며 조금씩 가져와 모아두었던 담배 개비를 반 배낭 가지고 떠나셨어요. 우리 엄마와 나는 아빠와 오빠가 식량 한 배낭을 가득 지고 집에 들어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하지만 한 달 가고 두 달 지나 양력설을 맞는데도 떠나가신 아빠와 오빠는 돌아오실 줄 몰랐어요. 찾으러 떠나려고 해도 어디 간지 모르는 형편에 어떻게 찾겠어요. 동네 사람들은 外地(외지)에 나가 굶어죽지 않았으면 중국 쪽으로 脫北(탈북)했다는 것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더는 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배워줄 형편이 되지 못하여 사직하시구요. 먹지 못해 공부하러 못 나오는 학생들이 70%를 차지해 선생들도 많이는 필요치 않았어요. 더욱이 지금 실정에 음악 선생은 없어도 된다고 엄마가 사직하실 때 교장 선생님이 귀띔해 주어, 엄마는 너무 분해 하루 종일 울었어요. 그러면서도 나만은 학교에 꼭꼭 보내셨는데 정말 배가 고프니 공부할 생각이 전혀 안 나더군요. 학교에서 내가 늘 치던 손풍금 위에는 먼지가 더덕이 되어 들어앉았고 우리 서클조는 활동을 멈춘 지 2년이 지났어요. 전에는 우리 학교 학생이 45명 빼곡히 들어앉던 교실에 학생이 열 명도 되나마나 하여 다른 학교 교실에 같이 모여 공부했어요.
이 기간에 우리 가정은 재봉기와 녹음기, 입을 만한 옷가지들을 옥수수와 다 바꾸어 먹었어요. 1년이 지난 1997년 8월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게 된 나의 앞길은 캄캄해 보이기만 하였어요. 엄마는 떠나가신 아빠와 오빠 때문에 정신적 타격과 육체적 부담에 앓아 누우셨어요. 『중국 쪽에 脫北했으면 식량이라도 보내오겠는데』하고 엄마는 중얼거리셨건만 소식은 없고, 보위부나 안전부에서는 계속해서 행처를 대라며 못 살게 굴었지만 우린들 어찌 알겠어요. 망태기가 된 가정에 엄마 병구완도 해드리고, 졸업도 하게 된 나는 그래도 연주가가 될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청진 예술전문학교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청진 예술전문학교는 나라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신입생들을 받지 않는다는 통지가 내려왔어요. 뭐 식량이 없어 외지 기숙사생들은 받지 못한다나요. 이렇게 몇 년도 안되는 어간에 꿈도 희망도, 가정도 다 깨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요. 설상가상으로 졸업한 지 한 달 후인 1997년 10월에, 엄마는 심한 영양부족으로 당뇨병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어요. 운명의 마지막을 예감하신 엄마는 이런 유언을 남기셨어요.
『수희야. 어떻게 하든지 너는 살아서 아빠·오빠를 찾아내고, 좋은 세상 구경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단 말인가』
사망한 엄마를 땅에 묻어 드려야겠는데 제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아빠가 일하시던 회령 담배공장에 가 보았으나 너무 죽은 사람이 많아서 棺(관)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나는 악을 썼어요, 우리 엄마를 땅 속에 편히 묻지 못하면 나도 같이 죽겠다고 결심을 다지며 집에 있는 이불장을 뜯어내 톱으로 썰고 칼질을 하며 혼자서 棺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오빠가 다니던 회령 교원대학의 동창생들이 열 명 남짓 우리집에 들이닥쳤어요. 고마운 오빠와 언니들은 나와 같이 울면서, 돈도 모으고 쌀도 모아 관을 마련하고 쌀떡도 한 접시 해왔어요. 대학생들은 농촌 쪽에 나가 소달구지도 얻어와 어머니 屍身(시신)을 실어 내갔어요. 엄마를 회령시 유선구 쪽으로 가는 산 옆에 묻던 날 어디서 나타났는지 「꽃제비」들이 한 무리 다가왔어요. 엄마가 가르쳐주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는데 모두 거지 차림을 하였어요.
「꽃제비」들은 어디서 훔쳤는지 빌렸는지 술 한 병과 국수 두 타래를 속옷에 싸가지고 와서 내놓았어요. 대학생과 옛 중학교 학생들은 엄마 앞에 술을 붓고 절을 하였어요. 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학생들은 운명이 너무 서러워 실컷 울었어요. 울고 난 뒤에는 모두 모여 쌀떡 반 개씩 나누어 먹고, 「꽃제비」들에게는 가져온 국수를 모두 삶아 먹였어요. 지금 내가 나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해서 나의 불행만이 아니에요. 이런 건 全(전) 회령시가 겪는 불행이었어요. 무정한 세상에서 살아갈 길은 누구에게나 막혀 버렸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홀몸이 된 나는 직업을 구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어요. 회령 담배공장, 회령 곡산공장을 비롯한 큰 공장들과 장공장, 농기계 수리 공장 같은 작은 지방 산업공장들도 다 찾아다녔지요. 가는 곳마다 원료가 없어 종업원들이 일을 못하고 있었고 숨죽은 듯 공장 안은 조용하기만 하였어요. 그러니 일하던 종업원들도 모두 집에서 놀고 있는데, 나 같은 새 종업원은 받을 필요가 없었어요. 들어서면 썰렁하기만 한 텅 빈 집안에, 직업도 없이 無(무)직업자로 있자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게다가 식량이 전혀 없어 산과 들을 헤매며 풀을 뜯거나 주울 때면 마음은 더 울적하기만 하였구요. 옆에서 함께 풀을 뜯는 자유스러운 그 짐승 무리들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였어요. 나중엔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단 말인가?』하는 반발심에 이를 악물곤 하였어요. 살자니 자연히 장마당에 눈길이 돌려지더군요. 가정들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빈 그릇만 달그락거려도, 장마당에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먹을 것이 항상 팔리고 있었어요.
보나마나 권세를 부리는 黨(당) 일꾼들이나 사법·안전 일꾼들, 군인 가족들에게서 흘러나온 낟알들이었지요. 나라가 난리통에 허우적거리는 틈을 타서 관료 족속들과 군대계통 가족들은 폭리를 얻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옷을 괜찮게 차려 입고, 기름진 중국 음식들과 옷가지들을 파는 중국 장사꾼들 모습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기르지 못하는 콧수염을 기르고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음식과 물건을 파는 남자들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였어요. 게다가 허벅다리와 엉치까지 착 달라붙은 바지를 입은 여자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나로서는 창피하기도 하였구요. 그들을 보며 나는 「저 사람들은 먹을 근심, 입을 근심이 없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날마다 부러워 바라보았지요.
-장마당서 만난 중국 남자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근처에 장사하러 나왔던 서른댓 살 되었을 중국 남자가 나를 보고 아는 체했어요.
『어이, 처녀 이리 오오』
망설이던 내가 다가가니 그 남자는 히죽 웃으며
『앞집 처녀 혼자 산다는 소릴 들었소, 얼마나 배고프겠소』
하며 팔던 중국빵 두 개를 나의 손에 쥐어주었어요.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빵이 나의 손에 쥐어지자 나는 꿈이 아닌가 싶었어요.
내가 빵 먹는 모습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남자는 나를 보고 몇 살인가 묻기에 열여덟 살이라 대답했어요.
『열여덟 살이라?! 곱게 생긴 처녀가 불쌍하구만』
그 남자는 잇달아 팔던 사탕 한 줌을 또 쥐어주며 자기가 팔던 물건을 거두어 가자니 힘이 든다며 보따리 하나를 먼저 가지고 우리 집에 좀 가져다 놓으라 하였어요. 나는 고마운 그 남자의 부탁대로 얼른 물건 보따리를 받아 이고 총망히 집으로 돌아왔어요. 한 시간 가량 지나자 그 남자도 우리 집에 들어섰어요. 그 남자는 신발을 신은 채로 부엌에서 보따리를 헤치더니 나에게 맞을 만한 옷 한 벌을 꺼내 입으라고 주는 것이었어요. 내가 질겁을 하며 사양하자 그 남자는 이런 것쯤은 중국에 흔하다고 하며 부모도 없이 어린 나이에 혼자서 살면 옷 한 벌 해입기가 하늘에 별따기일 거라고 내 몸에 옷을 들고 맞추어 보는 것이었어요.
나는 어렸지만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이 황당하였고, 그렇지만 고마운 그 남자를 뿌리칠 용기는 더욱 없었어요. 이어 중국빵 열댓 개와 사탕, 과자를 한 움큼 꺼내놓은 남자는 나를 보고 어서 옷을 입어보라 하였어요. 하도 권고해 내가 달아오른 얼굴로 윗방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 남자는 나의 아래 위를 쓸어보며 옷이 잘 맞는다고 하였어요.
내가 입은 옷을 쓸어보는 그 남자의 손길이 나의 몸을 누빌 때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異性(이성)의 야릇한 감각을 느껴보았어요. 그 남자는 좀 쉬었다가 가겠다며 서슴없이 신발을 벗고 방안 구들에 올라와 앉더니 들고온 가방에서 마른 명태와 술 한 병, 달걀 삶은 것 열댓 개를 꺼내놓았어요.
-1년 만에 먹어본 빵과 삶은 달걀
주춤거리며 부엌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재촉해 올라오라고 한 그 남자는 신문지에 음식을 모두 펴 놓았어요. 거듭 먹으라며 술병을 통째로 들고 꿀꺽꿀꺽 마시는 그 남자를 보니 나는 식욕이 당겨 어쩔 수 없어 마주 앉았어요.
빵과 삶은 달걀을 1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정말 맛이 있었어요. 나는 거의 일주일간 삶은 풀에다 옥수수가루 한 숟가락씩을 뿌려 끼니를 때웠거든요. 그 남자는 큰 술잔 하나를 달라더니 거기에 술을 가득 부었어요. 그리고는 슬플 때 술 한 잔만 먹으면 마음이 쑥 가라 앉는다며 안 먹겠다고 사양하는 나의 손에 억지로 술잔을 들려주었어요. 자기도 꿀꺽 마시며 내게 먹으라고 강압하는 그 앞에서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더군요. 술잔을 들고 마시는 나의 목은 타는 듯하였고 배 안에서는 역겨운 느낌이 가득 느껴졌었어요.
전에 우리 아빠가 마시던 북한 술과는 달리 중국 술은 훨씬 더 독한 것 같았어요. 나도 어릴 때 아빠 마시는 술을 조금씩 맛있는가 장난삼아 훔쳐 맛보았거든요. 내가 술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술잔을 받쳐주며 나의 입에 넣어주던 그 남자는 내가 다 마시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결단성이 있어야 하오』
그는 나에게 달걀 삶은 것을 소금에 찍어 연속 쥐어주며 입 안이 써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나를 달랬어요. 창 밖은 이미 날이 어두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온 몸은 땅 속에 가라앉는 것 같아 자리에 눕고만 싶었지만 영문 모를 중국 남자가 앉아있으니 억지로 정신은 가다듬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내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고, 그 남자의 손이 나의 손을 꼭 잡아쥐는 것을 느끼면서도 천길 나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만 꽉 차 있었어요.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나를 안아 이불을 깐 자리에 눕힌 그 남자가 수염이 가득한 얼굴을 비벼대는 것도 느꼈지만 그때엔 무슨 정신이었는지 가만 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 있더니 下身(하신)이 째지는 듯한 아픔에 윙윙거리는 머리를 들고 눈을 뜬 나는 놀라웠어요. 글쎄 내 몸이 알몸뚱이였고 내 몸 위에 엎드린 그 남자도 알몸뚱이였는데 아래를 움직일 수 없었어요. 나는 하반신의 아픔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감고 그 남자의 짓이 끝날 때까지 견디어야 했어요.
그 남자가 내 몸 위에서 떨어지자 나는 급히 이불을 덮으며 돌아누워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나도 서러웠어요. 그 순간에 아빠, 오빠 없는 설움도 마구 겹쳐 흐느꼈어요. 옆에서 달래는 그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더군요. 한참 후 그 남자가 돌아간 뒤 이불에서 일어나 보니 새하얀 이불 깔개는 핏자국이 점점이 찍혀 엉망 진창이더군요. 나는 이날 저녁, 울고 또 울었어요. 하지만 나의 동창생들에게 들은 말이 생각이 나 좀 위안이 되었어요. 뭐 새 것이라며 값을 높이 부르면 한동안 잘 먹을 수 있다고, 지금 세월엔 주저할 것 없다고 하던 그들의 말이 생각났어요.
그 다음날 그 남자는 저녁이 어스름해지자 또 찾아왔어요. 물론 가방에 먹을 것을 가득 가지구요. 그 남자에게 도로 가라고 냉정하게 실컷 욕해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이해에 낟알 구경도 못 해볼 것이며 또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물건이나 돈을 조금 얻어 가져야 한다는 이기심이 쳐들었어요. 이 글을 읽어보시는 여러분들이 웃을 수도 있지만 내 목숨이 당장 굶어 경각에 이르렀는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걸 체험해 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거예요. 이날 저녁 그 남자는 나에게 돈 2백원과 팔 수 있는 빵, 사과, 과자를 또 한 가득 안겨주었어요. 그 남자가 떠날 때까지 동반해주기로 하구요. 정말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에겐 황송했어요.
-부끄러움 참고 임신중절
이날은 나에게 술을 먹겠는가 물어보더니, 머리가 아파 안 먹겠다고 하자 저 혼자 술을 마셨어요. 뒤끝에는 온밤 그 짓을 하구요. 그 남자가 말하기를 나 같은 인물 체격이면 중국땅 같은 데서는 정말 시세가 높은 노임을 받으며 꽃이불 속에서 살 수 있다더군요. 그의 말에 중국 땅이 그리워지는 환상이 생겨났고 황홀해지기까지 하였어요.
그 남자가 중국 땅에 돌아갈 그날까지 근 열흘간 잠자리를 같이 하였고 그 남자는 중국 땅의 자기 집 주소와 脫北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더군요. 脫北하면 자기와 같이 살며 일생 부러움 없이 지내자는 것이었어요.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이라는 엄청난 공간이 있었지만 나의 마음 속에서는 그 남자에 대한 공경심과 사랑이 타오르기 시작했어요.
중국 땅으로 돌아가는 그 남자를 바래 주던 날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脫北 결심이 굳어졌어요. 사랑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하지만 정든 내 나라 내 고향, 내 땅을 떠나자니 무서움과 괴로움이 고개를 쳐들어 차마 행동에 옮기기 어려웠어요. 주저주저하다 보니 그 남자가 떠나간 지 어느덧 두세 달이 훌렁 지나갔지요.
나의 몸에서는 이상이 생겨 배 안이 꿈틀거렸어요. 앞날을 기약할 길 없는 이 현실 앞에 나는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의사를 찾아가 임신중절 수술을 해버렸어요. 그 기간 중국 남자와의 관계가 뒤가 켕겨 은근히 마음을 졸였는데, 나 같은 처녀애들은 살기 위해 무산읍 장마당이나 역전, 두만강 주변에서 거의가 이런 짓을 하더군요. 출장 온 손님들을 대상으로, 또 두만강 둑을 지키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 나온 중국 남자들을 대상으로 제각기 「몸 쟝끼」를 부렸어요.
죽기보다 살고 싶었어요
1998년 9월에 접어들며 햇곡식이 나와 굶주림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여전히 낟알은 주지도, 나올 줄도 몰랐어요. 굶주림이 눈앞에 도달해 이악하게 살아보려고 별별 노력을 다해 보았어요. 중국 남자가 주고 간 돈을 밑천 삼아 두부도 해 넘겨보고, 국수도 해 팔아보았지만 그때그때 밥벌이나 되고 어느덧 밑천은 거덜나 굶주림 앞에 서게 되었어요.
너무 속상해 같이 송기떡을 해서 팔던 아줌마가 정말 믿을 만해져 지나간 시기 중국 남자와의 관계를 소곤소곤 이야기해 보니 그 아줌마는 나를 부추겼어요.
『이 난리통에 너 같은 처녀애는 견디기 힘들어, 네가 굶어죽는다 해서 누가 너를 동정할 줄 아니, 그 남자가 있는 중국 땅으로 뛰어』
그 아줌마는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어요.
자기가 나를 두만강 너머 중국 땅에 넘겨주겠으니, 내가 살던 나의 집과 내가 가지고 있는 단돈 3백원을 넘겨달라는 것이었어요. 하루 생각해볼 여유를 달라고 한 나는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아줌마 말대로 얼마 견딜 것 같지 않았어요. 또 그 남자가 그리워졌고, 그한테 가서 의지하면 혼자 있는 설움도 메워지고 근심이 없을 것 같아 脫北하기로 결심했어요. 한마디로 이 땅에서 이리저리 다니다 굶어죽기보다, 편안한 데 가서 살고 싶었거든요. 다음날 그 아줌마를 찾아 합의를 본 나는 집과 돈을 양도하고 이틀 후 그 아줌마를 따라 두만강변으로 나갔어요.
그 아줌마는 두만강을 지키는 웬 국경경비대 군관과 수군덕거리더니 한참 걸어 두만강 둑에 올라섰어요. 과연 거기에는 보초 서는 경비병도 없고 두만강 물도 얕게 흐르는 여울목이었어요. 때는 점심시간이었는데 중국에도 점심시간은 아주 조용하더군요. 나를 보고 자기가 봐줄 테니 안심하고 넘어가라고 한 아줌마의 말에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허겁지겁 두만강을 건넜어요. 두만강을 넘어 뒤돌아보니 그 아줌마가 손을 들며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더군요. 답례할 경황도 없는 나는 그저 히죽 웃어보이고 바삐 산 밑에 붙은 중국 도로에 올라섰어요. 일전에 그 남자에게서 들어두었던 도로와 마을 지형이어서 나의 목표는 정확했어요.
두 개의 고개를 굽이돌아 그 남자가 대준 마을에 이르러 지나가는 한 노인에게 그 남자의 이름을 대며 찾아달라고 부탁하니, 노인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나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더군요. 노인은 그 집 아들인 듯한 스무 살 좀 넘었을 남자에게 내가 찾는 남자 이름을 대주며 찾아온 손님이라고 하자 그 남자는 제꺽 자기 집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중국말로 뭐라 수군거리더군요. 전화기를 놓은 그 남자는 30분쯤 있으면 그 사람이 온다며 앉아 기다리라고 하였어요. 약속한 시간이 되자 과연 마당에서 오토바이가 멎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남자가 집에 들어섰어요.
-어린 첩
나는 너무 반가워 그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있기에 억제하는데 그 남자도 아주 기뻐하는 기색이었어요.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타고 간 곳은 그 남자의 집이었는데 뜻밖이었어요.
넓은 초가집에 그 남자의 서른두 살 된 마누라와 여덟 살 된 아들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놀란 표정을 하며 마음 속의 허물어짐을 감추느라 애썼지만 그 남자는 회령에 나왔을 때 언제 나와 약속을 하였던가 싶게 뻔뻔스러운 표정이었어요. 그 남자의 마누라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 사연은 이미 들었는지 그저 측은한 표정으로 동정만 표시했어요.
『곱살하게 생긴 어린 처녀가 의지가지 할 데 없게 되었다니 잘 넘어왔어요. 여기 중국 땅에서 좋은 데 가서 한번 잘 살아보아요』
그 남자의 마누라가 자기네는 중국 땅에서 제일 못사는 축에 속한다 하였지만 천연색 텔레비전, 냉장고, 재봉기 등 家電(가전)제품을 갖추고 있는 게 북한에 비하면 郡(군) 안의 고급 관료들의 살림살이였어요. 그 남자는 마누라 모르게 나를 보고 속삭이는 말이 자기가 그때 어떻게 하든지 나를 중국 땅에 넘겨오려고 거짓말한 것은 사실었는데, 이제 나의 앞길을 잘 열어주겠다고 달콤하게 구슬렸어요. 이러나 저러나 오도가도 못하고 그 남자의 손아귀에 든 나의 운명이어서 그는 나에게 운명의 神(신)이 되고 말았지요. 다음날부터 나는 그 남자의 「어린 첩」이 되었지요. 그 남자는 마누라가 남새 사러 나갈 때면 미친 듯이 나를 붙잡고 섹스를 해댔고 마누라가 저녁에 마작하러 나가도 마구 나를 물고, 빨고 했어요.
이런 3자의 관계가 한 달이 좀 지나자 마누라도 우리 사이 관계를 눈치채고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급한 그 남자는 처갓집 부모들에게 물건을 사서 들고가며, 마누라 환심을 사느라 벌벌 기었어요. 거의 두 달이 되었을 어느 하루였어요. 그 남자가 나를 데리고 저녁에 나가며, 이제 가면 너의 신랑 될 사람이 있는데 어떤가 보라고 하였어요. 쑥스러운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 남자를 따라가니 어느 한 덩치 큰 벽돌집에 데리고 들어갔어요. 들어가니 마흔 살 안팎의 살이 유들유들하고 뚱뚱한 사나이가 꽤 넓은 집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보기에도 몇 칸이나 되는 번쩍거리는 집안 차림새에 돈깨나 있는 잘 사는 집이라는 걸 짐작케 하였어요.
나를 데리고 간 남자가 의미 있는 눈짓을 하자 그 뚱뚱한 중년남자는 「헤」해서 나를 보더니 벙글 웃는 품이 좋다는 표시였어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끼며 한쪽 구석 바닥에 공손히 앉았어요. 데리고 온 남자는 나를 보며 『이 집 아저씨는 참 좋은 분이시오. 걱정 말고 이 집에 있으라니까』하고 안심시켜 주었어요. 부엌 냉장고에서 간단히 술상을 차린 남자들은 술 몇 잔을 마시며, 북한의 식량기근 참상과 굶어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를 동정해 주기도 하였어요. 그리고 데리고 온 남자는 돌아갔어요.
-돛단배처럼…
뚱뚱한 남자는 나를 보고 자기는 나이가 좀 들어도 나 같은 어린 여자도 존경한다며 자기가 나의 앞길을 잘 열어 행복하게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위로했어요. 그때 어리석은 나는 속생각으로 정말 이런 잘 사는 남자한테 기대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까지 해보았지요. 뚱뚱한 남자는 옷장을 뒤지더니 연한 분홍색 원피스를 한 벌 꺼내 놓았어요. 어서 입어보라 독촉하는 그 남자의 성화에 응접실 곁에 달린 침실에 들어가 바꾸어 입으니 속살이 다 들여다보였어요.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 남자는 나를 보더니 입을 쩍 벌리며 옷이 몸에 맞고 아주 보기 좋다고 탄성을 올렸어요. 가까이 다가와 나의 어깨 품이 좀 넓지 않는가고 더듬어보던 그 남자는 불시에 나를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더니 마구 키스를 퍼부어댔어요.
바삐 웃통을 벗어제낀 그 남자는 나를 들어 침대 위에 눕힌 후 자기 옷을 벗길 사이도 없이 마구 잡아채 찢어놓은 후 그 짓에 달라붙었어요. 자기는 오랫동안 굶었다며, 해대는 그 몸동작에 내 몸은 금세 이불처럼 납작하게 펴지는 것 같았어요. 한참 만에 땀 벌창이 된 몸을 옆으로 쿵 쓰러뜨리며 한숨을 돌린 그 남자는 여자가 나이 어리니 새 맛이라며 칭찬하더군요. 타놓은 커피 한 잔 쭉 마신 남자는 또 달라붙었는데 그 번보다 더 세찬 게 나는 너무 아파 저도 모를 소리를 질러댔어요. 그래야 된다며 더욱 신이 나 하는 그 남자의 공격에 나는 일이 끝난 뒤 쭉 늘어졌어요.
일도 안하며 건들건들 집에서 놀아대는 그 남자는 시내 한 바퀴를 돌고 오거나, 술만 마시면 하루에 댓 번도 달라붙었는데 기절할 지경이었지요. 이렇게 근 보름 동안 시달리는데 하루는 회령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웬 50세 되었을 아줌마와 37세 가량 된 남자를 데리고 이 집에 들어섰어요. 이들은 여느 날 같지 않게 무슨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지 네 명이 모두 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수군수군 거렸어요.
한참 만에 응접실에서 나온 이들은 무슨 토의에서 성과를 거두었는지 모두 희색이 만면해 만족한 표정들이었어요. 나를 불러 다시 침실로 데리고 들어간 뚱뚱한 남자는 자기가 이제 중국 內地(내지) 쪽으로 먼 출장을 갔다와야겠다고 말하였어요. 그러며 『네가 혼자 이 빈 집을 지키고 있으면 중국 말도 모르고, 신분증도 없으니 혹시 파출소에서 검사오면 위험하다』며 『집에 온 아줌마를 따라 그 집에 당분간 가 있으라』고 하였어요. 나는 파출소에서 검사올 수 있다는 바람에 아무 미련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지요.
이어 떠날 차비를 한 나는 그 아줌마 일행을 따라 버스를 타고 어딘지 모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어요. 후에 알고 보니 중국 돈 6천원에 나를 37세 난 홀아비한테 팔아 먹었더군요. 그 뚱뚱보 남자는 마누라가 있는 남자였구요. 그의 마누라는 연변지구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는 업주라나요. 이국 땅에서 어린 내 몸은 돛을 단 쪽배처럼 순풍이 부는 대로 움직여갔어요. 날씨는 이해 막 가을에 접어들어 어수선한 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일행을 따라와 보니 어느 한 농촌의 편벽한 산골 마을이었어요. 여기 조선족 농민들은 기본 수입을 벼농사를 통해 얻어 살더군요. 같이 온 아줌마는 37세 남자의 누나이고, 37세 남자는 아직 돈이 없어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래요. 이 노총각은 자그마한 초가집을 따로 가지고 살았어요. 나를 데려온 돈은 이해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갚아주기로 한 돈이었대요.
난생 제 마누라라고는 처음 가져보는 이 노총각은 처음에 어린 나를 얻은 것을 희한한 일이라며 끔찍이 고와했어요. 그만큼 밤낮으로 나에게 매달려 형편없이 조겨댔구요. 뭐 담배나 술을 늦게 배우면 더 피우고 마신다더니 내 몸은 농사로 굳어진 그의 돌멩이 같은 육체 아래서 풀자루처럼 늘어져 갔어요. 우리는 가정의 궁색한 살림이 펴질 때까지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고 피임환을 해넣기로 합의했어요. 둘러봐도 노루 때릴 막대기도 변변치 않은 이 집 실정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노리개가 되다
마을에서는 어디 가서 저런 仙女(선녀) 같은 어린 북조선 색시를 데려왔는가 하며 칭찬을 하더군요. 하지만 살림궁색한 집안에 싸움이 잦다고 1999년 새해에 접어들며 나는 신랑의 뭇매질 속에 살게 되었어요. 나를 사온 돈 값으로 작년 농사수입을 다 처넣었으니 집에는 먹을 식량도 쓸 돈도 없이 빈털터리로 나 앉았어요. 술 주정이 심한 신랑은 나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며 술만 먹으면 귀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하였어요. 농사꾼들이 할 일이 없는 긴긴 겨울에는 남의 돈을 꾸어가지고 마작놀이나 술놀이를 매일 벌여대는데 재간이 어떻게나 신통한지 돈만 뜯기고 나앉더군요.
올해 2월 신랑이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는 웬 중년 남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와 술상을 폈어요. 신랑이 전에 그 남자한테서 돈을 계속 꾸어 쓴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나도 반가이 맞았어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신랑은 나를 윗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오늘밤 자기는 누나네 집에 가서 자겠으니 저 남자와 같이 자라는 것이었어요. 내가 질겁하며 안된다고 항의하자 신랑은 눈을 뚝 부릅뜨고, 우리가 지금 저 남자한테 진 빚이 만원 가량 되는데 네가 말을 들으면 5천원을 삭감해주며, 앞으로도 돈을 계속 꾸어 쓸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신랑의 사정에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 머리를 흔들자,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뽑아들며 찔러죽이겠다고 위협도 하고, 나의 머리채를 잡아 벽에 쾅쾅 찧기도 하였어요. 미련하고 우둔한 신랑의 성미를 잘 아는 나는 할 수 없어 속으로 눈물을 떨구며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지요.
계획대로 신랑은 누나네 집에 가고 나와 단둘이 남자, 그 중년 남자는 술상을 치우기도 전에 사정없이 나에게 달려들었어요. 새벽까지 잠 한번 재우지 않고 무슨 한국식, 일본식이라며 엎어놨다, 세워놨다 섹스를 들이대는 그 남자의 공세 앞에 정말 힘이 들었지요. 날이 밝자 돌아간 그 남자의 뒤를 이어 집에 들어온 신랑은 자기가 밑지겠는가 하며 또 달려들어 낮에도 봉사를 해야 했으니 그 고통은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연 5일 동안 기어든 그 중년 남자의 노리개로 몸을 바친 나는 자살할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기를 쓰고 살아,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를 아빠, 오빠의 행처도 찾고 좋은 세상 구경도 하고 싶은 욕망에 차마 용단이 서지 않았어요.
그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꼭 그 중년 남자가 와서 나에게 섹스풀이를 하곤 했어요. 결국 나는 두 남자의 소유물로 되었지요. 결과로 신랑의 마작돈, 술돈은 그 남자가 계속 대주게 되었구요.
자기 마누라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런 너절한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이 원망스럽고 한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게 나의 운명이었어요. 같이 살며 날이 갈수록 한스러워하는 나의 눈치를 챈 신랑은 아예 자기가 밖에 나갈 때면 열쇠를 채워 놓고 가곤 하지요. 내가 도망칠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걸 나도 알지만 별 수 없었어요. 마을에서도 한 달간 이 사실을 모르다가 차음 알게 되어 신랑의 이 非(비)인간적인 처사를 두고 항의했어요. 거의 두 달 만에 집에 갇혀 있던 나는 신랑과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는 합의를 거쳐 다시 자유스러운 몸이 되었어요. 내가 도망친다 한들 중국 말도 잘 모르고, 돈도 없고, 도와줄 형제, 친구들도 없는데 어디 가고, 어디 간들 잘되겠어요.
-『나도 여자예요』
마을에서는 할머니들과 아줌마들이 자기 집에 나를 데려다가 같이 놀며 말동무도 해주곤 했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의 성의 앞에 나는 살 용기를 얻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나의 마음속은 피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요.
나도 여자예요. 어린 나이에 이런 시집 같은 것을 갈 생각이 없는 여자예요. 남들처럼 스물다섯 살까지라도 처녀 시절을 애교스럽게, 보람 있게 보내고 싶었어요. 난 지금 손풍금이나 피리를 가지고 집안에 혼자 있을 때나 마을 사람들 앞에서, 부르기 좋은 한국 노래를 타며 노래를 곧잘 부르곤 해요. 한국 노래는 참 재미있어요. 회령시에서 유행되는 「당신은 모르실 거야」가 한국 노래인 줄은 회령시 주민들이나 청년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이 노래를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배웠고 즐겨 불렀거든요. 한국 노래를 부르면 잡아가는 데 아마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회령에 나와서 몰래 배워준 것이 퍼진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설사 운명의 기이한 장난으로 시집을 간다 해도 여기 중국 여자들처럼 마음놓고 당당히 살고 싶은 욕망이 가득해요. 돌아가신 엄마나 아빠·오빠 앞에서 여자처럼 사는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난 아직도 결혼이란 게, 가정생활이란 게 뭔지 아리송하기만 하는 열아홉 살 어린 나이예요. 또 남녀간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애숭이 여자예요.
사랑과 결혼이 뭔지 알기도 전에 성 풀이 도구로 태어난 것만 같은 내 운명에 기가 막혀요. 어떻게 내가 태어났는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을 것만 찾아다녀야 하는 나의 짐승과 같은 생활이 저주스러워요.
중국 여자나 다른 나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내 운명도 이렇게 기구하지는 않았을 텐데 원통해요. 지금 우리 마을이나, 멀고 가까운 곳곳에 나처럼 어쩔 수 없이 숨막히게 사는 수많은 북한 여자들이 불쌍해요. 태어나게 만들어 놓고는 품어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못하고 정처 없이 헤매도록 만든 북한 사회가 저주스러워요. 더욱이 내가 북한 여자란 걸 저주하고 싶어요.
1999년 8월 김수희
-나에게도 꿈이 있었어요
나는 1980년에 함경북도 회령군에서(지금의 회령시) 태어났어요.
내가 태어날 당시 아빠는 회령군 담배공장에서 기계기사로 일하셨고, 엄마는 회령군 고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셨어요. 탁아소와 유치원 시절에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악기 다루기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유치원을 마칠 때는 손풍금을 가지고 아무 노래나 다 반주할 수 있었거든요. 인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도 부모님들의 엄한 통제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항상 학교 서클 小組(소조)에 편입되어 손풍금과 플루트를 다루었어요. 우리 엄마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예술학교에 보내어 앞날의 연주가로 키울 거라 다짐했어요. 학교 서클 소조에 편입되어 춤과 노래를 준비해가지고, 아빠가 일하시는 담배 공장이나 외삼촌이 일하시는 탄광기계공장에 공연하러 다닐 때는 참 재미있었어요. 내가 치는 손풍금 반주에 맞추어 독창, 중창 노래가 울려 퍼질 때면 관중들의 박수 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세상의 사랑을 다 받고 사는 것 같았어요.
1990년 당시 북한에는 지금의 중국처럼 사탕, 과자 같은 간식은 없었어도 집에서 자체로 달인 옥수수엿을 맛있게 먹으며 공연했거든요. 그러나 예술가가 되어 현란한 무대 위를 누벼보려던 나의 꿈이 점점 깨질 줄은 어찌 알았겠어요.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95년부터는 무서운 식량난이 들이닥쳤어요. 배급소에서는 식량을 주지 않아 밥을 해 먹을 수 없었어요. 매일 배급을 주겠나 하여 엄마는 선생질을 하는 바쁜 속에서도 짬시간에는 배급소에 달려가야 했어요. 엄마가 수업할 때면 할 수 없이 내가 수업에 빠지고 배급소 앞에 가 혹시 쌀을 주겠나 기다렸어요. 보름내 기다려야 이따금씩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를 실은 자동차가 배급소에 오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는 건 1~2㎏의 옥수수가루뿐이었어요. 이 가루는 한 끼에 우리 식구가 한 숟가락씩 먹어도 모자라는 양이거든요.
엄마와 나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회령시의 주변 산들을 다 돌아다니며 독이 없다는 풀들은 다 뜯어왔어요. 풀을 삶아서 가루 몇 숟가락씩 넣고 저어낸 풀죽은 그래도 맛이 괜찮았어요.
중국땅에서 지금 먹으라면 열두 번도 더 토했을 그 풀죽이 그때에는 왜 그리도 맛있던지, 중국에서 기르는 돼지들도 그런 죽을 잡아먹힐 때까지 한 번도 못먹어 볼 거예요.
-아빠·오빠는 식량 구하러 떠나고…
담배공장에 다니는 아빠와 회령 교원대학에서 공부하는 오빠는 점심 끼니로 가루에 풀을 비빈 풀범벅을 항상 싸가지고 다니곤 하였어요. 그 점심 도시락감이 너무 많이 들어 엄마와 나는 항상 맨 풀을 우려낸 물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어요. 우리 엄마는 참 목소리가 좋았어요. 처녀 시절에 청진제철소 예술선전대에서 독창만 내내 하며 박수갈채 속에 살아왔다는 엄마거든요. 어머니는 우리 회령시 고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면서, 나이들어서도 늘상 노래를 달고 다녀 많은 노래 공연에서 상을 탔어요.
그런 엄마가 수업하러 들어오셔서는 노래할 힘이 없어 한두 마디 노래를 우리 학생들에게 배워주고는 더 부르지 못하셨어요.
잡숫지 못하니까 목이 꺽꺽 막혔거든요.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옆의 학생들에게 부끄러웠어요. 옥수수알 한 줌만 삶아먹어도 우리 엄만 노래 열 개쯤은 잘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동무들에게 많이 설명하였어요. 이런 우리 가정에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어요. 1996년 8월이었어요. 먹을 것이 없어 출근 못하시게 된 아빠와 대학교 공부를 임시 중단한 오빠가 양강도 혜산 쪽으로 녹말가루를 구하러 가게 되었어요.
거기에 가서 넓은 대흥단벌의 수확한 감자밭을 뒤지면 감자 이삭이 나온다는 데 그걸로 녹말 가루를 바꾸어 집에 가져오겠다는 것이었어요. 또 아빠는 떠날 때 담배공장에서 퇴근하시며 조금씩 가져와 모아두었던 담배 개비를 반 배낭 가지고 떠나셨어요. 우리 엄마와 나는 아빠와 오빠가 식량 한 배낭을 가득 지고 집에 들어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하지만 한 달 가고 두 달 지나 양력설을 맞는데도 떠나가신 아빠와 오빠는 돌아오실 줄 몰랐어요. 찾으러 떠나려고 해도 어디 간지 모르는 형편에 어떻게 찾겠어요. 동네 사람들은 外地(외지)에 나가 굶어죽지 않았으면 중국 쪽으로 脫北(탈북)했다는 것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더는 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배워줄 형편이 되지 못하여 사직하시구요. 먹지 못해 공부하러 못 나오는 학생들이 70%를 차지해 선생들도 많이는 필요치 않았어요. 더욱이 지금 실정에 음악 선생은 없어도 된다고 엄마가 사직하실 때 교장 선생님이 귀띔해 주어, 엄마는 너무 분해 하루 종일 울었어요. 그러면서도 나만은 학교에 꼭꼭 보내셨는데 정말 배가 고프니 공부할 생각이 전혀 안 나더군요. 학교에서 내가 늘 치던 손풍금 위에는 먼지가 더덕이 되어 들어앉았고 우리 서클조는 활동을 멈춘 지 2년이 지났어요. 전에는 우리 학교 학생이 45명 빼곡히 들어앉던 교실에 학생이 열 명도 되나마나 하여 다른 학교 교실에 같이 모여 공부했어요.
이 기간에 우리 가정은 재봉기와 녹음기, 입을 만한 옷가지들을 옥수수와 다 바꾸어 먹었어요. 1년이 지난 1997년 8월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게 된 나의 앞길은 캄캄해 보이기만 하였어요. 엄마는 떠나가신 아빠와 오빠 때문에 정신적 타격과 육체적 부담에 앓아 누우셨어요. 『중국 쪽에 脫北했으면 식량이라도 보내오겠는데』하고 엄마는 중얼거리셨건만 소식은 없고, 보위부나 안전부에서는 계속해서 행처를 대라며 못 살게 굴었지만 우린들 어찌 알겠어요. 망태기가 된 가정에 엄마 병구완도 해드리고, 졸업도 하게 된 나는 그래도 연주가가 될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청진 예술전문학교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청진 예술전문학교는 나라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신입생들을 받지 않는다는 통지가 내려왔어요. 뭐 식량이 없어 외지 기숙사생들은 받지 못한다나요. 이렇게 몇 년도 안되는 어간에 꿈도 희망도, 가정도 다 깨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요. 설상가상으로 졸업한 지 한 달 후인 1997년 10월에, 엄마는 심한 영양부족으로 당뇨병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어요. 운명의 마지막을 예감하신 엄마는 이런 유언을 남기셨어요.
『수희야. 어떻게 하든지 너는 살아서 아빠·오빠를 찾아내고, 좋은 세상 구경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단 말인가』
사망한 엄마를 땅에 묻어 드려야겠는데 제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아빠가 일하시던 회령 담배공장에 가 보았으나 너무 죽은 사람이 많아서 棺(관)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나는 악을 썼어요, 우리 엄마를 땅 속에 편히 묻지 못하면 나도 같이 죽겠다고 결심을 다지며 집에 있는 이불장을 뜯어내 톱으로 썰고 칼질을 하며 혼자서 棺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오빠가 다니던 회령 교원대학의 동창생들이 열 명 남짓 우리집에 들이닥쳤어요. 고마운 오빠와 언니들은 나와 같이 울면서, 돈도 모으고 쌀도 모아 관을 마련하고 쌀떡도 한 접시 해왔어요. 대학생들은 농촌 쪽에 나가 소달구지도 얻어와 어머니 屍身(시신)을 실어 내갔어요. 엄마를 회령시 유선구 쪽으로 가는 산 옆에 묻던 날 어디서 나타났는지 「꽃제비」들이 한 무리 다가왔어요. 엄마가 가르쳐주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는데 모두 거지 차림을 하였어요.
「꽃제비」들은 어디서 훔쳤는지 빌렸는지 술 한 병과 국수 두 타래를 속옷에 싸가지고 와서 내놓았어요. 대학생과 옛 중학교 학생들은 엄마 앞에 술을 붓고 절을 하였어요. 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학생들은 운명이 너무 서러워 실컷 울었어요. 울고 난 뒤에는 모두 모여 쌀떡 반 개씩 나누어 먹고, 「꽃제비」들에게는 가져온 국수를 모두 삶아 먹였어요. 지금 내가 나의 신세를 한탄한다고 해서 나의 불행만이 아니에요. 이런 건 全(전) 회령시가 겪는 불행이었어요. 무정한 세상에서 살아갈 길은 누구에게나 막혀 버렸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홀몸이 된 나는 직업을 구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어요. 회령 담배공장, 회령 곡산공장을 비롯한 큰 공장들과 장공장, 농기계 수리 공장 같은 작은 지방 산업공장들도 다 찾아다녔지요. 가는 곳마다 원료가 없어 종업원들이 일을 못하고 있었고 숨죽은 듯 공장 안은 조용하기만 하였어요. 그러니 일하던 종업원들도 모두 집에서 놀고 있는데, 나 같은 새 종업원은 받을 필요가 없었어요. 들어서면 썰렁하기만 한 텅 빈 집안에, 직업도 없이 無(무)직업자로 있자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게다가 식량이 전혀 없어 산과 들을 헤매며 풀을 뜯거나 주울 때면 마음은 더 울적하기만 하였구요. 옆에서 함께 풀을 뜯는 자유스러운 그 짐승 무리들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였어요. 나중엔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단 말인가?』하는 반발심에 이를 악물곤 하였어요. 살자니 자연히 장마당에 눈길이 돌려지더군요. 가정들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빈 그릇만 달그락거려도, 장마당에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먹을 것이 항상 팔리고 있었어요.
보나마나 권세를 부리는 黨(당) 일꾼들이나 사법·안전 일꾼들, 군인 가족들에게서 흘러나온 낟알들이었지요. 나라가 난리통에 허우적거리는 틈을 타서 관료 족속들과 군대계통 가족들은 폭리를 얻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옷을 괜찮게 차려 입고, 기름진 중국 음식들과 옷가지들을 파는 중국 장사꾼들 모습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기르지 못하는 콧수염을 기르고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음식과 물건을 파는 남자들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였어요. 게다가 허벅다리와 엉치까지 착 달라붙은 바지를 입은 여자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나로서는 창피하기도 하였구요. 그들을 보며 나는 「저 사람들은 먹을 근심, 입을 근심이 없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날마다 부러워 바라보았지요.
-장마당서 만난 중국 남자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근처에 장사하러 나왔던 서른댓 살 되었을 중국 남자가 나를 보고 아는 체했어요.
『어이, 처녀 이리 오오』
망설이던 내가 다가가니 그 남자는 히죽 웃으며
『앞집 처녀 혼자 산다는 소릴 들었소, 얼마나 배고프겠소』
하며 팔던 중국빵 두 개를 나의 손에 쥐어주었어요.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빵이 나의 손에 쥐어지자 나는 꿈이 아닌가 싶었어요.
내가 빵 먹는 모습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남자는 나를 보고 몇 살인가 묻기에 열여덟 살이라 대답했어요.
『열여덟 살이라?! 곱게 생긴 처녀가 불쌍하구만』
그 남자는 잇달아 팔던 사탕 한 줌을 또 쥐어주며 자기가 팔던 물건을 거두어 가자니 힘이 든다며 보따리 하나를 먼저 가지고 우리 집에 좀 가져다 놓으라 하였어요. 나는 고마운 그 남자의 부탁대로 얼른 물건 보따리를 받아 이고 총망히 집으로 돌아왔어요. 한 시간 가량 지나자 그 남자도 우리 집에 들어섰어요. 그 남자는 신발을 신은 채로 부엌에서 보따리를 헤치더니 나에게 맞을 만한 옷 한 벌을 꺼내 입으라고 주는 것이었어요. 내가 질겁을 하며 사양하자 그 남자는 이런 것쯤은 중국에 흔하다고 하며 부모도 없이 어린 나이에 혼자서 살면 옷 한 벌 해입기가 하늘에 별따기일 거라고 내 몸에 옷을 들고 맞추어 보는 것이었어요.
나는 어렸지만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이 황당하였고, 그렇지만 고마운 그 남자를 뿌리칠 용기는 더욱 없었어요. 이어 중국빵 열댓 개와 사탕, 과자를 한 움큼 꺼내놓은 남자는 나를 보고 어서 옷을 입어보라 하였어요. 하도 권고해 내가 달아오른 얼굴로 윗방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 남자는 나의 아래 위를 쓸어보며 옷이 잘 맞는다고 하였어요.
내가 입은 옷을 쓸어보는 그 남자의 손길이 나의 몸을 누빌 때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異性(이성)의 야릇한 감각을 느껴보았어요. 그 남자는 좀 쉬었다가 가겠다며 서슴없이 신발을 벗고 방안 구들에 올라와 앉더니 들고온 가방에서 마른 명태와 술 한 병, 달걀 삶은 것 열댓 개를 꺼내놓았어요.
-1년 만에 먹어본 빵과 삶은 달걀
주춤거리며 부엌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재촉해 올라오라고 한 그 남자는 신문지에 음식을 모두 펴 놓았어요. 거듭 먹으라며 술병을 통째로 들고 꿀꺽꿀꺽 마시는 그 남자를 보니 나는 식욕이 당겨 어쩔 수 없어 마주 앉았어요.
빵과 삶은 달걀을 1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정말 맛이 있었어요. 나는 거의 일주일간 삶은 풀에다 옥수수가루 한 숟가락씩을 뿌려 끼니를 때웠거든요. 그 남자는 큰 술잔 하나를 달라더니 거기에 술을 가득 부었어요. 그리고는 슬플 때 술 한 잔만 먹으면 마음이 쑥 가라 앉는다며 안 먹겠다고 사양하는 나의 손에 억지로 술잔을 들려주었어요. 자기도 꿀꺽 마시며 내게 먹으라고 강압하는 그 앞에서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더군요. 술잔을 들고 마시는 나의 목은 타는 듯하였고 배 안에서는 역겨운 느낌이 가득 느껴졌었어요.
전에 우리 아빠가 마시던 북한 술과는 달리 중국 술은 훨씬 더 독한 것 같았어요. 나도 어릴 때 아빠 마시는 술을 조금씩 맛있는가 장난삼아 훔쳐 맛보았거든요. 내가 술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술잔을 받쳐주며 나의 입에 넣어주던 그 남자는 내가 다 마시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결단성이 있어야 하오』
그는 나에게 달걀 삶은 것을 소금에 찍어 연속 쥐어주며 입 안이 써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나를 달랬어요. 창 밖은 이미 날이 어두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온 몸은 땅 속에 가라앉는 것 같아 자리에 눕고만 싶었지만 영문 모를 중국 남자가 앉아있으니 억지로 정신은 가다듬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내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고, 그 남자의 손이 나의 손을 꼭 잡아쥐는 것을 느끼면서도 천길 나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만 꽉 차 있었어요.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나를 안아 이불을 깐 자리에 눕힌 그 남자가 수염이 가득한 얼굴을 비벼대는 것도 느꼈지만 그때엔 무슨 정신이었는지 가만 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 있더니 下身(하신)이 째지는 듯한 아픔에 윙윙거리는 머리를 들고 눈을 뜬 나는 놀라웠어요. 글쎄 내 몸이 알몸뚱이였고 내 몸 위에 엎드린 그 남자도 알몸뚱이였는데 아래를 움직일 수 없었어요. 나는 하반신의 아픔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감고 그 남자의 짓이 끝날 때까지 견디어야 했어요.
그 남자가 내 몸 위에서 떨어지자 나는 급히 이불을 덮으며 돌아누워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나도 서러웠어요. 그 순간에 아빠, 오빠 없는 설움도 마구 겹쳐 흐느꼈어요. 옆에서 달래는 그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더군요. 한참 후 그 남자가 돌아간 뒤 이불에서 일어나 보니 새하얀 이불 깔개는 핏자국이 점점이 찍혀 엉망 진창이더군요. 나는 이날 저녁, 울고 또 울었어요. 하지만 나의 동창생들에게 들은 말이 생각이 나 좀 위안이 되었어요. 뭐 새 것이라며 값을 높이 부르면 한동안 잘 먹을 수 있다고, 지금 세월엔 주저할 것 없다고 하던 그들의 말이 생각났어요.
그 다음날 그 남자는 저녁이 어스름해지자 또 찾아왔어요. 물론 가방에 먹을 것을 가득 가지구요. 그 남자에게 도로 가라고 냉정하게 실컷 욕해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이해에 낟알 구경도 못 해볼 것이며 또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물건이나 돈을 조금 얻어 가져야 한다는 이기심이 쳐들었어요. 이 글을 읽어보시는 여러분들이 웃을 수도 있지만 내 목숨이 당장 굶어 경각에 이르렀는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걸 체험해 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거예요. 이날 저녁 그 남자는 나에게 돈 2백원과 팔 수 있는 빵, 사과, 과자를 또 한 가득 안겨주었어요. 그 남자가 떠날 때까지 동반해주기로 하구요. 정말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에겐 황송했어요.
-부끄러움 참고 임신중절
이날은 나에게 술을 먹겠는가 물어보더니, 머리가 아파 안 먹겠다고 하자 저 혼자 술을 마셨어요. 뒤끝에는 온밤 그 짓을 하구요. 그 남자가 말하기를 나 같은 인물 체격이면 중국땅 같은 데서는 정말 시세가 높은 노임을 받으며 꽃이불 속에서 살 수 있다더군요. 그의 말에 중국 땅이 그리워지는 환상이 생겨났고 황홀해지기까지 하였어요.
그 남자가 중국 땅에 돌아갈 그날까지 근 열흘간 잠자리를 같이 하였고 그 남자는 중국 땅의 자기 집 주소와 脫北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더군요. 脫北하면 자기와 같이 살며 일생 부러움 없이 지내자는 것이었어요.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이라는 엄청난 공간이 있었지만 나의 마음 속에서는 그 남자에 대한 공경심과 사랑이 타오르기 시작했어요.
중국 땅으로 돌아가는 그 남자를 바래 주던 날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脫北 결심이 굳어졌어요. 사랑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하지만 정든 내 나라 내 고향, 내 땅을 떠나자니 무서움과 괴로움이 고개를 쳐들어 차마 행동에 옮기기 어려웠어요. 주저주저하다 보니 그 남자가 떠나간 지 어느덧 두세 달이 훌렁 지나갔지요.
나의 몸에서는 이상이 생겨 배 안이 꿈틀거렸어요. 앞날을 기약할 길 없는 이 현실 앞에 나는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의사를 찾아가 임신중절 수술을 해버렸어요. 그 기간 중국 남자와의 관계가 뒤가 켕겨 은근히 마음을 졸였는데, 나 같은 처녀애들은 살기 위해 무산읍 장마당이나 역전, 두만강 주변에서 거의가 이런 짓을 하더군요. 출장 온 손님들을 대상으로, 또 두만강 둑을 지키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 나온 중국 남자들을 대상으로 제각기 「몸 쟝끼」를 부렸어요.
죽기보다 살고 싶었어요
1998년 9월에 접어들며 햇곡식이 나와 굶주림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여전히 낟알은 주지도, 나올 줄도 몰랐어요. 굶주림이 눈앞에 도달해 이악하게 살아보려고 별별 노력을 다해 보았어요. 중국 남자가 주고 간 돈을 밑천 삼아 두부도 해 넘겨보고, 국수도 해 팔아보았지만 그때그때 밥벌이나 되고 어느덧 밑천은 거덜나 굶주림 앞에 서게 되었어요.
너무 속상해 같이 송기떡을 해서 팔던 아줌마가 정말 믿을 만해져 지나간 시기 중국 남자와의 관계를 소곤소곤 이야기해 보니 그 아줌마는 나를 부추겼어요.
『이 난리통에 너 같은 처녀애는 견디기 힘들어, 네가 굶어죽는다 해서 누가 너를 동정할 줄 아니, 그 남자가 있는 중국 땅으로 뛰어』
그 아줌마는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어요.
자기가 나를 두만강 너머 중국 땅에 넘겨주겠으니, 내가 살던 나의 집과 내가 가지고 있는 단돈 3백원을 넘겨달라는 것이었어요. 하루 생각해볼 여유를 달라고 한 나는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아줌마 말대로 얼마 견딜 것 같지 않았어요. 또 그 남자가 그리워졌고, 그한테 가서 의지하면 혼자 있는 설움도 메워지고 근심이 없을 것 같아 脫北하기로 결심했어요. 한마디로 이 땅에서 이리저리 다니다 굶어죽기보다, 편안한 데 가서 살고 싶었거든요. 다음날 그 아줌마를 찾아 합의를 본 나는 집과 돈을 양도하고 이틀 후 그 아줌마를 따라 두만강변으로 나갔어요.
그 아줌마는 두만강을 지키는 웬 국경경비대 군관과 수군덕거리더니 한참 걸어 두만강 둑에 올라섰어요. 과연 거기에는 보초 서는 경비병도 없고 두만강 물도 얕게 흐르는 여울목이었어요. 때는 점심시간이었는데 중국에도 점심시간은 아주 조용하더군요. 나를 보고 자기가 봐줄 테니 안심하고 넘어가라고 한 아줌마의 말에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허겁지겁 두만강을 건넜어요. 두만강을 넘어 뒤돌아보니 그 아줌마가 손을 들며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더군요. 답례할 경황도 없는 나는 그저 히죽 웃어보이고 바삐 산 밑에 붙은 중국 도로에 올라섰어요. 일전에 그 남자에게서 들어두었던 도로와 마을 지형이어서 나의 목표는 정확했어요.
두 개의 고개를 굽이돌아 그 남자가 대준 마을에 이르러 지나가는 한 노인에게 그 남자의 이름을 대며 찾아달라고 부탁하니, 노인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나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더군요. 노인은 그 집 아들인 듯한 스무 살 좀 넘었을 남자에게 내가 찾는 남자 이름을 대주며 찾아온 손님이라고 하자 그 남자는 제꺽 자기 집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중국말로 뭐라 수군거리더군요. 전화기를 놓은 그 남자는 30분쯤 있으면 그 사람이 온다며 앉아 기다리라고 하였어요. 약속한 시간이 되자 과연 마당에서 오토바이가 멎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남자가 집에 들어섰어요.
-어린 첩
나는 너무 반가워 그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있기에 억제하는데 그 남자도 아주 기뻐하는 기색이었어요.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타고 간 곳은 그 남자의 집이었는데 뜻밖이었어요.
넓은 초가집에 그 남자의 서른두 살 된 마누라와 여덟 살 된 아들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놀란 표정을 하며 마음 속의 허물어짐을 감추느라 애썼지만 그 남자는 회령에 나왔을 때 언제 나와 약속을 하였던가 싶게 뻔뻔스러운 표정이었어요. 그 남자의 마누라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 사연은 이미 들었는지 그저 측은한 표정으로 동정만 표시했어요.
『곱살하게 생긴 어린 처녀가 의지가지 할 데 없게 되었다니 잘 넘어왔어요. 여기 중국 땅에서 좋은 데 가서 한번 잘 살아보아요』
그 남자의 마누라가 자기네는 중국 땅에서 제일 못사는 축에 속한다 하였지만 천연색 텔레비전, 냉장고, 재봉기 등 家電(가전)제품을 갖추고 있는 게 북한에 비하면 郡(군) 안의 고급 관료들의 살림살이였어요. 그 남자는 마누라 모르게 나를 보고 속삭이는 말이 자기가 그때 어떻게 하든지 나를 중국 땅에 넘겨오려고 거짓말한 것은 사실었는데, 이제 나의 앞길을 잘 열어주겠다고 달콤하게 구슬렸어요. 이러나 저러나 오도가도 못하고 그 남자의 손아귀에 든 나의 운명이어서 그는 나에게 운명의 神(신)이 되고 말았지요. 다음날부터 나는 그 남자의 「어린 첩」이 되었지요. 그 남자는 마누라가 남새 사러 나갈 때면 미친 듯이 나를 붙잡고 섹스를 해댔고 마누라가 저녁에 마작하러 나가도 마구 나를 물고, 빨고 했어요.
이런 3자의 관계가 한 달이 좀 지나자 마누라도 우리 사이 관계를 눈치채고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급한 그 남자는 처갓집 부모들에게 물건을 사서 들고가며, 마누라 환심을 사느라 벌벌 기었어요. 거의 두 달이 되었을 어느 하루였어요. 그 남자가 나를 데리고 저녁에 나가며, 이제 가면 너의 신랑 될 사람이 있는데 어떤가 보라고 하였어요. 쑥스러운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 남자를 따라가니 어느 한 덩치 큰 벽돌집에 데리고 들어갔어요. 들어가니 마흔 살 안팎의 살이 유들유들하고 뚱뚱한 사나이가 꽤 넓은 집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보기에도 몇 칸이나 되는 번쩍거리는 집안 차림새에 돈깨나 있는 잘 사는 집이라는 걸 짐작케 하였어요.
나를 데리고 간 남자가 의미 있는 눈짓을 하자 그 뚱뚱한 중년남자는 「헤」해서 나를 보더니 벙글 웃는 품이 좋다는 표시였어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끼며 한쪽 구석 바닥에 공손히 앉았어요. 데리고 온 남자는 나를 보며 『이 집 아저씨는 참 좋은 분이시오. 걱정 말고 이 집에 있으라니까』하고 안심시켜 주었어요. 부엌 냉장고에서 간단히 술상을 차린 남자들은 술 몇 잔을 마시며, 북한의 식량기근 참상과 굶어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를 동정해 주기도 하였어요. 그리고 데리고 온 남자는 돌아갔어요.
-돛단배처럼…
뚱뚱한 남자는 나를 보고 자기는 나이가 좀 들어도 나 같은 어린 여자도 존경한다며 자기가 나의 앞길을 잘 열어 행복하게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위로했어요. 그때 어리석은 나는 속생각으로 정말 이런 잘 사는 남자한테 기대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까지 해보았지요. 뚱뚱한 남자는 옷장을 뒤지더니 연한 분홍색 원피스를 한 벌 꺼내 놓았어요. 어서 입어보라 독촉하는 그 남자의 성화에 응접실 곁에 달린 침실에 들어가 바꾸어 입으니 속살이 다 들여다보였어요.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 남자는 나를 보더니 입을 쩍 벌리며 옷이 몸에 맞고 아주 보기 좋다고 탄성을 올렸어요. 가까이 다가와 나의 어깨 품이 좀 넓지 않는가고 더듬어보던 그 남자는 불시에 나를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더니 마구 키스를 퍼부어댔어요.
바삐 웃통을 벗어제낀 그 남자는 나를 들어 침대 위에 눕힌 후 자기 옷을 벗길 사이도 없이 마구 잡아채 찢어놓은 후 그 짓에 달라붙었어요. 자기는 오랫동안 굶었다며, 해대는 그 몸동작에 내 몸은 금세 이불처럼 납작하게 펴지는 것 같았어요. 한참 만에 땀 벌창이 된 몸을 옆으로 쿵 쓰러뜨리며 한숨을 돌린 그 남자는 여자가 나이 어리니 새 맛이라며 칭찬하더군요. 타놓은 커피 한 잔 쭉 마신 남자는 또 달라붙었는데 그 번보다 더 세찬 게 나는 너무 아파 저도 모를 소리를 질러댔어요. 그래야 된다며 더욱 신이 나 하는 그 남자의 공격에 나는 일이 끝난 뒤 쭉 늘어졌어요.
일도 안하며 건들건들 집에서 놀아대는 그 남자는 시내 한 바퀴를 돌고 오거나, 술만 마시면 하루에 댓 번도 달라붙었는데 기절할 지경이었지요. 이렇게 근 보름 동안 시달리는데 하루는 회령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웬 50세 되었을 아줌마와 37세 가량 된 남자를 데리고 이 집에 들어섰어요. 이들은 여느 날 같지 않게 무슨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지 네 명이 모두 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수군수군 거렸어요.
한참 만에 응접실에서 나온 이들은 무슨 토의에서 성과를 거두었는지 모두 희색이 만면해 만족한 표정들이었어요. 나를 불러 다시 침실로 데리고 들어간 뚱뚱한 남자는 자기가 이제 중국 內地(내지) 쪽으로 먼 출장을 갔다와야겠다고 말하였어요. 그러며 『네가 혼자 이 빈 집을 지키고 있으면 중국 말도 모르고, 신분증도 없으니 혹시 파출소에서 검사오면 위험하다』며 『집에 온 아줌마를 따라 그 집에 당분간 가 있으라』고 하였어요. 나는 파출소에서 검사올 수 있다는 바람에 아무 미련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지요.
이어 떠날 차비를 한 나는 그 아줌마 일행을 따라 버스를 타고 어딘지 모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어요. 후에 알고 보니 중국 돈 6천원에 나를 37세 난 홀아비한테 팔아 먹었더군요. 그 뚱뚱보 남자는 마누라가 있는 남자였구요. 그의 마누라는 연변지구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는 업주라나요. 이국 땅에서 어린 내 몸은 돛을 단 쪽배처럼 순풍이 부는 대로 움직여갔어요. 날씨는 이해 막 가을에 접어들어 어수선한 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일행을 따라와 보니 어느 한 농촌의 편벽한 산골 마을이었어요. 여기 조선족 농민들은 기본 수입을 벼농사를 통해 얻어 살더군요. 같이 온 아줌마는 37세 남자의 누나이고, 37세 남자는 아직 돈이 없어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래요. 이 노총각은 자그마한 초가집을 따로 가지고 살았어요. 나를 데려온 돈은 이해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갚아주기로 한 돈이었대요.
난생 제 마누라라고는 처음 가져보는 이 노총각은 처음에 어린 나를 얻은 것을 희한한 일이라며 끔찍이 고와했어요. 그만큼 밤낮으로 나에게 매달려 형편없이 조겨댔구요. 뭐 담배나 술을 늦게 배우면 더 피우고 마신다더니 내 몸은 농사로 굳어진 그의 돌멩이 같은 육체 아래서 풀자루처럼 늘어져 갔어요. 우리는 가정의 궁색한 살림이 펴질 때까지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고 피임환을 해넣기로 합의했어요. 둘러봐도 노루 때릴 막대기도 변변치 않은 이 집 실정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노리개가 되다
마을에서는 어디 가서 저런 仙女(선녀) 같은 어린 북조선 색시를 데려왔는가 하며 칭찬을 하더군요. 하지만 살림궁색한 집안에 싸움이 잦다고 1999년 새해에 접어들며 나는 신랑의 뭇매질 속에 살게 되었어요. 나를 사온 돈 값으로 작년 농사수입을 다 처넣었으니 집에는 먹을 식량도 쓸 돈도 없이 빈털터리로 나 앉았어요. 술 주정이 심한 신랑은 나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며 술만 먹으면 귀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하였어요. 농사꾼들이 할 일이 없는 긴긴 겨울에는 남의 돈을 꾸어가지고 마작놀이나 술놀이를 매일 벌여대는데 재간이 어떻게나 신통한지 돈만 뜯기고 나앉더군요.
올해 2월 신랑이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는 웬 중년 남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와 술상을 폈어요. 신랑이 전에 그 남자한테서 돈을 계속 꾸어 쓴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나도 반가이 맞았어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신랑은 나를 윗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오늘밤 자기는 누나네 집에 가서 자겠으니 저 남자와 같이 자라는 것이었어요. 내가 질겁하며 안된다고 항의하자 신랑은 눈을 뚝 부릅뜨고, 우리가 지금 저 남자한테 진 빚이 만원 가량 되는데 네가 말을 들으면 5천원을 삭감해주며, 앞으로도 돈을 계속 꾸어 쓸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신랑의 사정에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 머리를 흔들자,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뽑아들며 찔러죽이겠다고 위협도 하고, 나의 머리채를 잡아 벽에 쾅쾅 찧기도 하였어요. 미련하고 우둔한 신랑의 성미를 잘 아는 나는 할 수 없어 속으로 눈물을 떨구며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지요.
계획대로 신랑은 누나네 집에 가고 나와 단둘이 남자, 그 중년 남자는 술상을 치우기도 전에 사정없이 나에게 달려들었어요. 새벽까지 잠 한번 재우지 않고 무슨 한국식, 일본식이라며 엎어놨다, 세워놨다 섹스를 들이대는 그 남자의 공세 앞에 정말 힘이 들었지요. 날이 밝자 돌아간 그 남자의 뒤를 이어 집에 들어온 신랑은 자기가 밑지겠는가 하며 또 달려들어 낮에도 봉사를 해야 했으니 그 고통은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연 5일 동안 기어든 그 중년 남자의 노리개로 몸을 바친 나는 자살할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기를 쓰고 살아,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를 아빠, 오빠의 행처도 찾고 좋은 세상 구경도 하고 싶은 욕망에 차마 용단이 서지 않았어요.
그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꼭 그 중년 남자가 와서 나에게 섹스풀이를 하곤 했어요. 결국 나는 두 남자의 소유물로 되었지요. 결과로 신랑의 마작돈, 술돈은 그 남자가 계속 대주게 되었구요.
자기 마누라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런 너절한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이 원망스럽고 한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게 나의 운명이었어요. 같이 살며 날이 갈수록 한스러워하는 나의 눈치를 챈 신랑은 아예 자기가 밖에 나갈 때면 열쇠를 채워 놓고 가곤 하지요. 내가 도망칠까 봐 겁나서 그러는 걸 나도 알지만 별 수 없었어요. 마을에서도 한 달간 이 사실을 모르다가 차음 알게 되어 신랑의 이 非(비)인간적인 처사를 두고 항의했어요. 거의 두 달 만에 집에 갇혀 있던 나는 신랑과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는 합의를 거쳐 다시 자유스러운 몸이 되었어요. 내가 도망친다 한들 중국 말도 잘 모르고, 돈도 없고, 도와줄 형제, 친구들도 없는데 어디 가고, 어디 간들 잘되겠어요.
-『나도 여자예요』
마을에서는 할머니들과 아줌마들이 자기 집에 나를 데려다가 같이 놀며 말동무도 해주곤 했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의 성의 앞에 나는 살 용기를 얻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나의 마음속은 피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요.
나도 여자예요. 어린 나이에 이런 시집 같은 것을 갈 생각이 없는 여자예요. 남들처럼 스물다섯 살까지라도 처녀 시절을 애교스럽게, 보람 있게 보내고 싶었어요. 난 지금 손풍금이나 피리를 가지고 집안에 혼자 있을 때나 마을 사람들 앞에서, 부르기 좋은 한국 노래를 타며 노래를 곧잘 부르곤 해요. 한국 노래는 참 재미있어요. 회령시에서 유행되는 「당신은 모르실 거야」가 한국 노래인 줄은 회령시 주민들이나 청년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이 노래를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배웠고 즐겨 불렀거든요. 한국 노래를 부르면 잡아가는 데 아마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회령에 나와서 몰래 배워준 것이 퍼진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설사 운명의 기이한 장난으로 시집을 간다 해도 여기 중국 여자들처럼 마음놓고 당당히 살고 싶은 욕망이 가득해요. 돌아가신 엄마나 아빠·오빠 앞에서 여자처럼 사는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난 아직도 결혼이란 게, 가정생활이란 게 뭔지 아리송하기만 하는 열아홉 살 어린 나이예요. 또 남녀간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애숭이 여자예요.
사랑과 결혼이 뭔지 알기도 전에 성 풀이 도구로 태어난 것만 같은 내 운명에 기가 막혀요. 어떻게 내가 태어났는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을 것만 찾아다녀야 하는 나의 짐승과 같은 생활이 저주스러워요.
중국 여자나 다른 나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내 운명도 이렇게 기구하지는 않았을 텐데 원통해요. 지금 우리 마을이나, 멀고 가까운 곳곳에 나처럼 어쩔 수 없이 숨막히게 사는 수많은 북한 여자들이 불쌍해요. 태어나게 만들어 놓고는 품어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못하고 정처 없이 헤매도록 만든 북한 사회가 저주스러워요. 더욱이 내가 북한 여자란 걸 저주하고 싶어요.
1999년 8월 김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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