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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나의 북한집결소생활 - 방성운

작성년도 : 2000년 40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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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운(귀순강제노동교화소, 2000년 3월입국)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농포동(지금은 은정동으로 고침)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결소는 함경북도 안전부 산하 최고 예심기관으로서 경제범과 중국으로 탈출하였다가 잡혀서 들어오는 월경자를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심문조사를 마친 후 판결을 받고 처리되는 곳이다.

어릴때부터 공포속에서만 들어오던 농포집결소는 정말로 나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던져준 원한의 집결소였다.

집결소 일과표는 다음과 같다.
5:30 ∼ 7:00 조기 작업
7:00 ∼ 7:30 아침식사
7:30 ∼ 8:00 작업준비
8:00 ∼ 12:00 오전작업
12:00 ∼ 12:30 점심식사
12:30 ∼ 13:00 작업준비(부서진 작업도구 수리)
13:00 ∼ 19:00 오후작업
19:00 ∼ 19:30 저녁식사
19:30 ∼ 20:00 작업총화
20:00 ∼ 22:00 자기반성시간(이 시간에는 감방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다)
22:00 ∼ 취침 및 심문 조사

심문조사는 취침시간에 하며, 자기의 결함이 한가지라도 나오면 그때서야 잠을 재운다. 때문에 이 시간에는 잠을 빨리 자기 위해 하지 않은 짓도 하였다고 하고, 말도 안되는, 기차까지 도둑질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다보니 잠시간을 잃을 때가 너무도 많았다.

내가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은 중국에 월경하였다는 "죄"였다.
나는 1996년 7월 3일 함경북도 무산군 칠성리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길림성 화룡시 덕화진 길지촌에 갔다가 7월 10일 경 덕화진 남평 파출소 변방대원들에게 잡혔다.

다음날 그들은 나를 화룡시 변방대대 감방으로 호송하였다.
변방대대 감방에는 이미 나와 같은 탈북자 7명이 잡혀들어와 있었다. 한때 중국 월경자들을 북송할 때엔 코나, 손바닥에 쇠꼬챙이를 꽤여서 데려갔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모두 겁을 먹고 공포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를 포함한 탈북자 8명은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며 그 어떤 행운이라도, 혹시 중국공안에서 좋은 마음으로 그냥 내보내지 않을 까 하는 허황된 생각들도 해보았다.

불보듯 뻔한 사실은 북송 후 우리들에게 닥쳐올 처벌들에 대하여 생각하며 한숨들만 지었다. 나는 그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항상 옷빈침(옷핀)을 가지고 다녔다. 옷빈침은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종이로 살짝 감아서 삼키면 창자로 내려가다가 아무데나 걸리면 그때엔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게되며 그때 도망치려고 항상 가지고 다니던 빈침을 그날 저녁 몰래 삼켜 버렸다. 하지만 삼켜버린 빈침은 창자에 걸리기는커녕 전혀 소식이 없었다.

중국ㄷ의 감방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데 우리가 말을 하거나 누워있으면 공안들이 와서 참대몽둥이와 전기 곤봉으로 탈북자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한 주가 지난 후 중국 공안에서는 우리 탈북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워 팔목에 수갑을 채운 후 버스에 실었다. 약 2시간 정도 달렸을까? 두만강이 보이고 북한 땅이 보였다. 북한 땅이 보이는 순간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우리를 실은 차는 중국의 길림성 화룡시 덕화진 남평세관에 멈춘 후 북한측에 전화 연결을 한 후 북한의 무산5군 칠성리 세관으로 넘어갔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우리를 넘겨받은 후 다시 수갑을 채운 후 물건짝 다루 듯하며 차에 실어 무산군 보위부로 옮겼다. 무산군 보위부에서 하루종일 취조를 받은 후 탈북자 8명은 한 줄로 서서 무산군 시내를 약 50분간 돌았다. 조국 배반자들을 똑똑히 보라. 조국을 배반하면 이 꼴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 어떻게든 다 잡아온다는 뜻에서였다.

다음 우리는 무산군 안전부 구류장에 감금되었다. 4일 후 나는 거주지인 청진 보위부로 호송되었다. 청진보위부로 옮긴 첫날부터 나는 발목과 손목에 수갑을 채운 채로 20여일 간을 심문 받았다. 심지어는 밥먹 을 때와 변소 갈 때도 풀어주지 않았으며 잠잘 때도 풀어주지 않고 220V 전기불을 켜놓은 감방에서 잠을 자야했다.

보위부에서의 심문 중에 제일 악착스럽게 물어보는 것은 군대에서 무전수를 하였으니 남한 방송을 몇 번 들었는 가와 중국을 통해 남한으로 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으면 영원히 서늘한 감방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끝까지 그러한 마음을 먹었거나 남한방송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자 20일만에 청진시 송평구역 안전부 구류장으로 옮겨놓았다. 북한의 구류장들에서는 수인들은 17시간동안 올방자를 틀고 손은 무릎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정면을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보위부에서 취조받기 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나는 송평 구류장에서 약 한 달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다시 옮긴 곳이 바로 도안전부 산하 최고 예심기관인 농포집결소에 입소되게 되었으며 나의 고달픈 생활의 연장이 시작되었다. 강제노동은 하루 13~14시간을 해야 했으며 그 날 과제를 수행 못하면 끝날 때까지 강요당해야 했다. 노동은 주로 카바이트 재와 진흙을 물에 개어서 블록을 찍어내는데 모든 것을 사람의 손으로 하며 하루 과제는 10여명이 2만장을 찍어낸다. 2만장의 블록을 찍어내자면 작업시간 내 뛰어다녀도 모자라며 소변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밤에 잠자는 문제였다. 위생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감방에서 세탁과 목욕은 꿈도 꾸지 못하며 기상해서 길어들인 물로 얼굴이나 겨우 씻으면 끝이었다. 그러다 보니 몸에 이가 끼고 빈대와 벼룩이가 너무도 많아서 그것들과 싸움에 잠을 설치고 나면 이튿날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낮에는 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담당 안전원들에게 심문 받고 난 뒤 감방안의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벌거벗고 뼈만 남은 몸으로 이 잡이와 벼룩이 잡이 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본 2차대전시 오슈벤찐 수용소와 별로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속에서 두주 정도만 지나면 머리카락에 서캐가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한 것 같았다.
또한 알지 못할 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사람도 두 달 동안 여섯 명이었다. 밤에 옆에서 함께 잠을 자던 친구가 아침에는 숨을 거두고 만다.

한번은 아침에 기상하여 점호를 하는 중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온 친구가 점호에 빠졌다. 당장 찾아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져 그 친구를 찾았으나 온데 간데 없었다. 비상소집을 하고 다시 찾으니 화장실에서 바지도 입지 못한 채 쓰러져있었다. 들추어 업고 나와서 집결소 마당에 내려놓았다. 아직은 숨이 넘어가기 전이었으나 맨 땅바닥에 눕혀놓은 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옆에 사람도 가지 못하게 하였다. 오전작업을 마치고 오니 한시간 후에 죽고 말았는데 마지막 죽을 때 있는 힘을 다해 벗겨진 바지를 입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식사 또한 기가 막혔다. 식사라 해야 밀겨를 증기밥솥에 찐 것을 주는데 주먹으로 꽉 쥐면 계란 알보다 조금 많을까 하다. 국이라고 해야 소금물이 전부였다. 때론 그것마저도 기합받는 날이면 떼이고 만다.

정말이지 밥그릇 가지고 백성을 우롱하고 사람을 우롱하는 북한사회와 북한의 정치에 대하여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개도 배가 고파야 주인을 잘 따르듯이 백성들에게도 사회주의 만세를 부르게 하고는 죽지 않을 만큼 주다가 지금을 굶어죽게 하면서 주는 배급제도, 하루 속히 끝나기 바랄 뿐이다.

집결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먹고살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위하다 들어온 알짜 최하층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배고픔 또한 죽음보다 못한 고통이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함경북도 회령 친구는 집결소에서 기르는 개를 도둑질 해 먹다가 잡혀서 줄매 맞고 하루종일 식사를 주지 않아 굶은 적도 있었다. 하여튼 먹고 죽지 않는 물건이면 풀이든 닥치는 대로 주린 배를 채웠다.

어느 하루는 집결소 직원들의 강냉이 부업 밭 김매러 갔었다. 도주자가 생길 우려로 삼엄한 감시 속에서 작업을 시작하는데 도주방지를 위해 김을 매면서 매 사람마다 번호를 달고 일이 끝날 때까지 자기 번호를 크게 외치며 일을 하는 순간에도 여물지 않은 강냉이 이삭을 따서는 하모니카 불 듯이 먹어 치운다. 풀떡풀떡 뛰어가는 개구리를 보면 벌떼처럼 달라붙어 잡아서 먹어버린다. 이쨋거나 이 곳에서는 체면을 차린다거나 양보한다면 자기 자신이 죽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를 죽도록 맞아도 배를 불리울 수 있는 일이면 집결소내 규정도 무시된다. 또한 부끄러운 신경이 아예 마비상태여야 정상인이다.

나는 집결소에 들어간 지 20일 만에 목수로 임명되었다. 목수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완전 신선 놀음이었다. 집체 행동에 일체 참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속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배고픔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고 중요하게는 나에게 관연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가 두려웠다.

일을 하면서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전기대패 속에 손을 집어넣어 잘리운 다음 작업도중에 실수한 것처럼 하면 빨리 나가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몇 수 십 번씩 하였다.

그러던 중 나는 9월 중순경에 집결소를 탈출하였다. 아주 쉽게 성공적으로 탈출한 나는 먼저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새벽기상과 동시에 탈출에 성공한 줄로만 알았는데 나를 지켜본 한 아주머니가 인차 담당 근무자에게 알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10분도 못되어 우리집은 감시 속에 들어갔었다.

그것도 모르는 나는 친구의 집에서 해준 밀가루 풀죽을 먹고 친구를 시켜서 부모님들을 친구네 집으로 모셔오게 하였다. 집결소에서 도주자가 생기면 도내에 체포령이 내려 사진을 곳곳에 붙이며 있을 만한 곳에는 감시가 붙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방금 전에 집결소에서 안전원들이 왔다 갔으며 나의 사진을 가져가면서 혹시 아들이 오면 용서해 주겠으니 집결소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이제는 죽을 각오를 하고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가겠으니 나를 없는 자식으로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나를 붙잡고 울면서 지금쯤은 기차역전이나 버스정류장 등에 감시가 붙었겠는데 혼자서 떠나면 늙은이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냐며 다시 집결소에 들어가서 자기 날짜를 다 마친 후 탈북을 해도 마음놓고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예심시간 중 도주하면 징역형이 떨어져도 엄중하게 떨어진다. 중국 국경내에서 다시 잡혀들어 올 경우를 생각해서 그것도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나 혼자만 도망하면 부모님들에게 차려질 방해 또한 얼마나 심할까 하는 생각에 망설이고 말았다. 힘들더라도 집결소 생활을 마친 후 부모님 모시고 떠나는 것이 옳은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님들과 함께 다시 집결소에 찾아갔다. 사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집에 가서 실컷 먹고 오자고 도망했다가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용서가 어데 있는가.

그날 저녁 나는 기합을 받았다. 제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손과 발에 수갑을 채우고 무릎을 꿇게 한 다음 6명의 안전원이 나의 허벅다리를 구두발로 사정없이 내리 밟았다. 도주자 새끼는 다리를 꺾어놓아야 한다면서...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을 깨고 보니 감방의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었다. 온몸이 쑤셔서 움직일 수 없었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매를 맞던 도중에 내가 졸도하였다는 것이다. 그후로 나는 왼쪽 허벅다리에 감각을 잃었다. 아무리 꼬집어도 전혀 내 다리가 아니었다. 나는 도주를 시도했던 "죄"로 목수자리에서 쫒겨났다. 노동강도는 나에게 두 배로 가해졌다.
하루는 너무도 힘들어서 작업을 마치고 감방에 들어갈 때 유리조박을 몰래 넣어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 다음 화장실에 가서 왼쪽 발들의 피줄을 찾아 살을 뜯고 피줄을 끊었다. 그러고는 상처에 오염된 물을 떨어뜨렸다. 제발 발등에 파상풍은 오지 않고 다른 독이 콱 차서 아예 발을 쓰지 못하면 하루라도 지긋지긋한 이 생활이 면제되겠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시작했다. 생각 밖으로 발은 부어오르기만 할 뿐 별로 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더 확대되지는 않고 뜯기운 자리만 살점이 허옇게 뒤집힌 채 걸음 걷기가 불편했을 뿐이다. 그럴때면 감시병들은 꾀를 부린다면서 잠시도 쉬우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0여 명이 2만장의 블럭을 찍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약 25㎏이나 되는 블럭장을 1명이 2천개를 들어 옮겼다 놓았다 하는데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든다. 특히 카바이트 재는 알카리 성분이 있어서 살에 닿으면 푹푹 패여 나간다. 열 손가락 끝이 모두 구멍이 뚫어져 새빨간 생살이 들여다보인다. 이튿날 자고 깨면 손가락 끝이 너무도 아파서 입으로 호호 불면서 작업을 한다. 어깨와 옆구리까지 다 달아먹어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끝내 나는 55일만에 심한 영양실조로 층계도 오르내릴 수 없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엉덩이의 살이 다 빠지고 나니 콘크리트 바닥에 앉지를 못했다. 누우면 옆으로 돌아누울 기력도 전혀 없었다. 나는 비로소 60여 일 만에 집결소를 퇴소하였으나 옛 나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영양실조 회복기간이 1년이 걸렸으며 지금은 옛 체력을 가지고 있으나, 집결소에서 생긴 턱관절 골수염으로 인하여 얼굴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나는 1997년 5월 8일 북한을 다시 탈출해 3년 후 한국으로 왔다. 지금도 그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지금 남한 땅에서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살고 있다. 제일 낮은데서부터 시작할 것이며 항상 긍지감을 가지고 살겠다.

2000년 방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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