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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지옥에서 탈출한 소년

작성년도 : 2016년 39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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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탈출한 소년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내가 북한에서 살아 온 기간 인간에게 그런 권리와 지위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고 살았는가. 아니 인권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살았다.

알고 산 것은 다만 당국의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무섭게 제재을 당한다는 것만 알고 살았을 뿐이다.

내 고향은 평안남도 평성시 배산점이다. 1973년생이다.

하지만 난 태어 날 때부터 애초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집에서 태어난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싶은 집에서 마음대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난 잘 못 태어난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 한 번 몰래 중국에 갔다 온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발각되어 감옥에서 이미 7년 형을 살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나지만 아버지 어머니한테는 내가 너무나도 귀한 늦둥이 아들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세 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갑자기 평남도 북창군 득장탄광에 끌려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전과자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로 말하면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수립되기 시작하면서 지난시기 생활이 조금이라고 어두운 그림자가 비껴있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강제 수용소에 잡아 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후계자 수립과는 아무 관계도 없던 아버지였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그곳이 바로 그렇게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악명 높은 18호 정치범 수용소였다.

결국 나의 어린 시절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시작되었다.

이 득장 탄광 정치범 수용소에서 밖으로 나오려면 초소를 세 개나 통과해야 했다.

그 초소에서 검열은 어찌나 세밀한지 지어는 석탄실린 열차까지도 세우고 총창으로 찔러보고 통과시킬 때도 있었다.

거기서 점차 철이 들면서 알게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가지 계급이 있었다.

혁명화 대상자, 대내 대상자, 이주민 대상자. 대우자 대상자였다.

혁명화 대상자는 그대로 중앙당이나 높은 간부로 있다가 어떤 작은 실수를 범하여 본인 혼자만 들어와 고생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대체로 동발 목 운반 채탄작업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3 살면 다시 나가는 것이 보통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초소 밖에 있는 면회소에서에서의 면회도 가능 하였다.

무슨 죄로 들어 왔는지 그때 거기에는 당시 북한에서는 최고의 희극배우로 하였던 채퐁기도 있다 나갔다.

대내 대상자는 우리처럼 불법적으로 외국에 갔다 온 사람. 반사회적 경향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었다.

주로 김일성 사상 연구실 건설, 도로정비, 발파공, 목장, 식당 등 일을 맡아 하였다.

세 번째 이주민대상자라고 하는 것은 해방 전에 지주를 하였던 사람. 자본을 가지고 조그마한 공장을 하였던 사람, 그리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이러 저러한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까지 포함되었다.

이들은 주로 탄광에서도 제일 힘든 채탄, 굴진 일을 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인간세상에서 실컷 덕을 쌓아서 하늘나라에 가 그 덕을 보라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대우자라고 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관리 일군이다.

주로 그 정치범 관리소를 관리하는 당 일군, 행정일군, 그리고 그 경비를 담당하는 보위원들과 그 자식들을 말하였다.

그들만은 자유롭게 외부 출입도 가능했다.

가끔씩 승진하면 밖으로 완전히 나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승진하여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나가면 안에서 만큼 권력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대체로 자기가 무슨 죄로 거기에 들어왔고, 왜 또 언제까지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기약 없이 소처럼 일하며 살뿐이었다.

탄광의 작업조건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갱 작업조건이 어찌나 허술한지 사고 나는 일은 비일비재였다. 저녁에 갱에서 나오면 그 날은 살았구나 하는 정도였다.

때문에 갱에서 일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별로 크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너무 그런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아무 시간에도 닥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안에도 학교란 것이 있었다. 외부에서 10년제 의무교육을 한다고 하면 그 안에도 그만한 기간 공부를 시키었다. 하지만 공부 시키는 자들도 마지못해 하는 것이었고 우리도 자기 앞날이 어떨지 알기 때문에 별로 열성이 나지 않는 공부였다.

소학교 3학년 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안에서는 페라그라(뻬라그라)라는 병이 돌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석산인민학교라는 데서 창밖을 내다보면 앞산 위로 상여가 올라가는 것이 보이었는데 그 상여가 내려오기도 전에 또 다른 상여가 연방 줄을 잇던 모습이 생생이 생각난다.

대다수가 먹지 못하여 걸리는 페라그라 때문이었다.

그 병에 걸리면 손등부터 검은 피부가 벗겨지다 돌 뿌리라도 걷어차면 그대로 넘어져 죽고 만다.

당시 초소밖에는 모르겠지만 관리소 안에는 굶어 죽어 나가는 사람이 상여가 줄을 잇는 정도였다.

그래서 밖에서 한번 친척이라도 면회 오면 정말 경사였다. 먹을 것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경우는 친척들도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니 면회 올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능쟁이라는 돼지 풀을 먹는 것은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 풀은 잘 못 먹으면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 하게 부었다.

학교에서 우리 반에도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데리러 가면 그 애가 누군지 분간조차 할 수 없게 퉁퉁 부은 것을 너무 나도 많이 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그 안에서 처음에는 목수로 무슨 김일성 연구실 건설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나자 당 비서란 인간이 다시 아버지를 탄광 발파공 일을 시키었다.

그래도 발파공은 시간이 좀 있어서 뒷산에 올라가 몰래 농사를 지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남몰래 그 조가 여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물거품이 될 줄이야.

그 조가 여물어 갈 무렵 아버지의 그 조 농사가 당국에 걸려들고 말았다.

일에 빠지고 그런 개인 이기주의를 하였다는 이유고 아버지는 그 조를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한마디로 관리소 안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때 형님은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석산 중학교에 다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형님은 자기 반 담임선생이 아버지를 종파 놈의 새끼라고 모욕했다고 해서 마구 대들었던 일이 있었다.

이 일로 해서 결국 형님은 그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쫓겨나고 철도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원래 공부을 잘 하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원래 우리는 외삼촌과 외할아버지가 월남하여 성분이 나쁜데다가 아버지까지 전과자였으니 그것도 다행한 일이라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듬해 봄 어느 날이다.

아버지가 장약한 폭약이 불발 되었던 모양이다. 그걸 모르고 교대한 채탄공이 곡괭이로 찍었는데 폭발 사고가 났다. 한 명이 사망하고 몇 명이 다치기까지 하였다.

그 일로 다시 아버지는 관리소 안에 있는 노동 교화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놀려 대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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