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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새로운 땅에서의 새로운 인생 - 김성훈

작성년도 : 2003년 69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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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땅에서의 새로운 인생

- 김성훈

 

 

한해를 마무리 하며

 

다사다난했던 한해도 벌써 막을 내리고 새해가 밝아오는 이 시점에서 누구보다도 감회가 새로운 사람들은 제 고향을 떠나 이 낯선 자유의 땅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나와 같은 탈북자들일 것이다.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체류하다가 동남아 낯선 땅을 거쳐 그리던 한국 땅에 들어온 지도 해수로 3년이 되어 간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이 심정을 뭐라고 딱 찍어 표현할 수 없지만 한국 땅에서의 3년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쉬웠던 점, 좋았던 점, 깨달았던 점 등 많은 것들을 경험하는 추억에 남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 바로 알기

 

처음 한국에 들어와서 몇 개월간은 들떠서 지냈다. 모든 것이 신기해서 천국에 온 기분으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 땅을 밟았다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느껴졌으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고생은 끝나고 장미빛 인생만이 남아있으니 앞으로 늘 편하고 여유로운 생활이 거져 주어질 것 같은 안일한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정부에서 정착금도 내주고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것이 평생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면서 누군가 내 삶을 완전히 책임져 줄 듯이 앞날에 대한 대책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몇달을 보내면서 TV나 책자를 통해, 또는 돌아다니면서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대하면서 나의 생각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임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냥 풍요로와 보이지만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는 철저하고도 냉정한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다. 탈북자인 우리의 경우, 한 동족이라는 차원에서 정부가 뿌리를 내리기 전 23년간 정착기반을 닦으라고 돌보아주는 것이다. 그 기간만 지나면 우리도 여느 한국사람과 똑같이 살벌한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지식 정보화 사회! 능력이 없으면 그 어디서든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이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면서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 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대학생활을 꿈꾸며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인 선교사님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었고, 공안의 눈을 피해 도피하던 힘든 시간동안 신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후 기회가 주어진다면 신학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신학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하나원교육을 마치고 대학입시를 치르기까지는 1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 기간동안 대학생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영어와 컴퓨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컴퓨터는 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이기 때문에 기왕 배우는 것 제대로 배우자는 생각에 한국직업전문학교 사무자동화학부 6개월 과정에 지원했다. 하지만 하나원에서 배운 고작 몇 마디 안 되는 컴퓨터 용어로는 수업을 따라 가기가 어려웠다. 학생 30명중 탈북자는 나 혼자였는데, 컴퓨터 용어가 대부분 영어인 탓에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수업시간에 쩔쩔매면서 망신을 당하다보니 한번 해 보자는 오기가 생겨 집에 와서는 혼자 방에 틀어 박혀 밤새도록 용어를 외우다시피 했다. 그렇게 몇 일이 지나자 수업시간에 귀가 트이기 시작했고 차츰 자신감이 생겨 선생님께 질문도 하게 되었다.

 

이쯤 되자 자격증을 한번 따 보기로 욕심을 부려 보았는데 처음 접한 교재가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한숨이 먼저 튀어 나왔다. 컴퓨터로 밥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싶어 중간에 몇번이고 포기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순간 내가 여기서 주저앉아 첫 단추를 잘못 채우고 나면 앞으로 다가올 정착생활에 실패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못할 것 없다. 나라고 남들처럼 손이 없는가, 발이 없는가? 나만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기도하면서 열심히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워드프로세서 2급과 컴퓨터 활용능력 2급 국가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비록 작은 성취였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무엇이든 도전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컴퓨터에 이어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웠기 때문에 영어는 자모밖에 모르는 왕초보 수준이었다. A,B,C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영어단어 10개씩, 회화 1단원씩 소화한다는 계획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컴퓨터를 공부하면서 얻은 요령대로 열심히 외우면서 미국사람과 유창하게 대화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금새 한해가 지나고 그해 12월 마침내 총신대 신학과에 응시, 운 좋게도 합격하게 되었다.

 

캠퍼스에서 영그는 꿈

 

컴퓨터와 영어를 대강이라도 준비하고 나니 대학생활은 사뭇 여유 있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생활은 내게 있어 정말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학문적인 것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폭넓게 배울 수가 있어서 좋았다.

 

물론 이질적인 환경에서 처음 보는 어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신학대학이라서 노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계속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승객들로 꽉찬 만원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등교해서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나면 귀가할 때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시험 기간만 되면 도서관 자리를 구하기 위해 새벽같이 등교해야 했고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더 오랜 시간 공부해야만 했다.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만 한다고 하지만 사람이다 보니 때때로 많은 유혹 앞에서 고민도 많았다. 신학이 과연 나의 길인지, 내 힘으로 저 능력 있는 사람들과 경쟁이 될지 막막하고 좌절하고 싶은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동료들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수업이나 모임이 끝나고 함께 모여 기도할 때면 항상 마지막에 나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다시 힘을 얻고 처음 결심했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아울러 지금껏 곁에서 묵묵히 격려해 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험란한 탈북 여정에서 만나 평생의 동반자가 된 아내는 아직 변변한 돈벌이도 없이 느즈막하게 다시 학생의 길에 접어 든 나를 불평하지도 않고 뒷바라지 해 주고 있다.

아내의 도움이 헛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직 2년밖에 안 된 대학생활을 통해 여러 방면의 지식을 접하면서 나의 시야도 넓어지고 점차 한국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 잡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 새로운 시간들을 보낼 때마다 나의 꿈도 하루하루 영글어 가고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지난 3년 동안 비교적 평탄하게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늘 겸손하게 배우는 입장으로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생활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린이다. 배워야 한다고 마음을 비우고 나니 한결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마다 자존심을 내세워 다가섰더라면 쉽게 좌절했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신앙의 힘이 컸는데, 일주일 내내 열심히 공부하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며 한 주를 정리하고 나면 마음도 안정되고 곁길로 한눈 팔 여지가 없었다.

우리 탈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목표를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표 없이 무작정 생활하다보면 여러 가지 주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한결같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집념이 필요하다. 늘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한해를 맞는 이 시점에서 우리 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서 혜택을 받은 만큼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2003. 12. 김성훈 씀

 

 

2004-11-19 20:55:35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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