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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새롭고 낯선 땅 대한민국 - 최선희

작성년도 : 2005년 58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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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낯선 땅 대한민국 - 최선희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20014월 우리 가족은 5년간의 불안한 중국생활을 뒤로한 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한 것이다. 그동안 신경이 예민해진 탓인지 머리가 아팠지만 대한민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마음만큼은 편했다.

 

입국후 하나원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배우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감수해야 할 것이 많다고 느꼈다. 사춘기 내내 중국에 체류하면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인정받지 못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터라 나에게 하나원의 규율은 답답하기만 했다.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자유를 찾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안정된 삶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고 지쳐 찾아온 땅에서 내가 느꼈던 처음의 답답한 심정은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수업을 받으면서도 교육과정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덜컥 두려움만 앞섰다. 과연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서울 나들이

 

3개월후 서울시내의 한 아파트에 우리 가족은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었다. 드디어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새집에 들어가 느낀 설렌 감정이 생생하다.

 

서울시내의 복잡한 지리를 단시간 내에 익힌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하지만 한국의 수도 서울 나들이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지리탐방을 한다며 사전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버스를 탔다. 먼저 시장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버스를 타자마자 기사 아저씨에게 시장은 어디에서 내리냐고 물었다. 기사 아저씨는 방송에서 나온다고 하며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리둥절한 나머지 자리에 앉았지만 불안한 마음만큼은 가시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 방송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시장이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내가 내린 곳은 바로 시장 전 정거장이었다. 시장소리만 들었지 다음이라는 방송을 듣지 못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시내 구경도 할 겸 시장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순간 나는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겨우 ABC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외래어와 영어로 쓰인 간판은 생소하기만 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간판을 본 순간 나는 덜컥 겁이 난 나머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가도가도 우리 집은 보이지 않고 낯선 건물만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파트 이름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파트 이름을 대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처음에 탔던 버스를 다시 탔다.

 

아파트 이름을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말하자 아저씨는 내가 반대방향 버스를 탔다고 했다. 이런……. 그때 모든 사람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저씨가 이 버스는 순환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버스로 10분이면 가는 거리를 나는 집에 돌아오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집에 돌아와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는지 왜 서러운지도 모르고 눈물만 흘렸다.

 

내 자리를 찾아서

 

난 고향에서 중학교 2학년을 다녔다. 중국에 있는 5년 동안 공부를 전혀 할 수가 없어서 내 나이에 맞게 학교를 다닌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은 검정고시였다. 나는 신설동에 있는 학원을 다니면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5년만에 잡아보는 펜과 교과서는 낯설었지만 내가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렇게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수업은 영어시간이었다. 나는 내 수준보다 높은 수준의 수업을 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지만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공부보다 어려운 것이 한국 학생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담배 피우는 친구들을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화장과 옷차림,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그토록 사귀고 싶었던 한국 친구들이 나에게는 이해할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그들에게 나를 알리는 것도 자신 없었다. 결국 나는 3개월만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사회를 알아가기엔 두려움이 많았던 나

 

결국 나는 학업은 잠시 중단하고 돈을 벌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한 분식점 입구에 붙여진 구인장을 보고 들어갔다. 사장은 내 말투를 들어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연변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대뜸 강원도에서 살다 와서 말투가 이렇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사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며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고 쌀쌀하게 말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무언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쳤고,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한 내가 미웠다. 중국에서의 생활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고향을 숨겨야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나는 바깥출입을 일절 금하고 집안에만 있었다. 오후 늦게 일어나 새벽까지 컴퓨터 게임만 했다.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온몸이 뻐근하고 정신이 멍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면서도 내심 걱정을 하였을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았지만 부모로서 자식을 어떻게 지도해야할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부모님 또한 모든 것이 낯설었고, 자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 가슴아파했을 것이다.

 

어느 날 울면서 기도하는 엄마를 보고 방황하던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목표가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옆에 친구라도 있었다면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친구도 없었다.

 

한국말이 외국어도 아닌데 왜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지? 과연 내가 이 사회에서 불필요한 존재인가? 왜 한국사회가 우리를 이야기 할 때면 나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움츠려지지? 언론에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은 왜 무능력하게만 보이지? 왜 나에게는 그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힘이 없지?

 

진정한 나를 찾아서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수없이 많이 하다보니 마침내 오기가 생겼다. 나는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영등포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7개월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니 각오도 남달랐다.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8월에 있을 고검(중학교졸업)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 나는 아는 언니의 소개로 미술학원에서 도우미로 일했다. 그곳에서 나는 수업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고 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아이들에게 기초도 가르쳤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미술에 흥미와 관심이 있었기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원장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나에게 버릇없이 구는 아이가 있으면 꾸중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원장 선생님과 저녁 식사도 같이했다. 나는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들어내지 못한 나의 속내를 보이며 마음을 열자 원장 선생님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때 받은 돈이 15만원이었지만 나에게는 10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이었다.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과 나도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몇 개월이 흘러 고검을 보려했지만 북한에서의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고검을 볼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북한에서 중학교 2학년을 다녔으면 여기선 초등학교 졸업이 되는 건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방팔방 수소문 해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또다시 학원을 그만두고 다음해 5월에 있는 중검(초등학교졸업)을 기다려야했다.

 

두 손 불끈 쥐고 다시 일어서다

 

처음 한국에 와 방황했던 시간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위안했다. 미술학원은 계속 나갔다. 그때 원장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힘들어하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주말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편의점에서 주말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구인장을 보고 나는 처음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북한에서 왔고 지금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분은 놀란 듯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함께 일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또 다른 아르바이트는 예전의 나약한 내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 통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축도 해보고 부모님께 선물도 했다. 못난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맺혔고, 아버지는 나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람 사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이제야 혼자 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편의점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와 점장 언니에게 나는 가끔 고향이야기를 해주었다.

 

배가 너무 고파 시금치 훔치던 이야기, 도토리 주우러 갔다가 뱀을 보고 놀라 도망갔던 이야기 그리고 보고 싶은 친구 이야기,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마음 졸였던 이야기 등을 나누며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노력의 열매

 

한국에서 두 번째 해를 맞이했다. 나는 검정고시학원을 다시 다녔고 5월에 중검을 무사히 통과했고, 그해 8월에는 고검도 통과했다. 학원 선생님들과도 친해져 선생님들은 자습시간에 개인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지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멀게만 느껴졌던 한국 학생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나는 학원 친구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면 함경북도라고 당당히 밝혔다.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이젠 더이상 나에게 나의 고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출신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바라던 인연

 

나에게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을 알게 해준 소중한 만남이 있었다. 200312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를 설립한다며 선생님 한 분이 내가 다니는 학원에 찾아왔다. 그분은 나와 같은 탈북 청소년들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우리를 위한 학교를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은 탈북청소년을 만나면서 이해안가는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그들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40명과 물놀이 약속을 했는데 결국 참석한 친구는 겨우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황당했다. 친구와 약속 때문에, 그냥 오기 싫어서 등등 뚜렷한 이유도 없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다.

 

선생님께는 분명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국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고 했다. 고향친구들은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대우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우리가 살아온 환경은 대한민국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분은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함께 풀어야한다면서 행복을 위한 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여 나는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2004년을 맞이했다. 조회시간과 명상시간, 난생 처음 춰보는 탈춤 등을 통해 스스로 공부하며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한 가지……. 전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남자들을 만나면 거부감부터 들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은 북한에서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줄 안다. 북한에서야 사회분위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에 와서도 예전처럼 행동하는 남자들을 볼 때면 그들이 무척이나 한심해보였다.

 

한국 남자들과 비교해 보면 무뚝뚝하고 여자를 위하는 마음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북쪽 남자들이 싫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북한 출신 남자들을 회피했고, 한국 남자들에게 대하듯 편하게 대하지 못하였다.

 

고향 남자들의 모습이 나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길들여진 습관에 그들도 힘들어하지만 중요한 것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화가 난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그들의 문제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싶다. 자신을 사랑해야만 내 아내, 내 아이 또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베푸는 만큼 받는 것임을 남자들이 인식했으면 좋겠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와서 새롭게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사회다. 사회에 융화해 함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나는 하나하나 알아갔고 누구와도 자유롭게 어울리는 법을 익혀갔다.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현장학습도 다니면서 나는 차츰차츰 한국문화를 익혀갔고 그것이 주는 신비감에 푹 빠져들었다.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학교에서 배워나갔다. 이젠 선생님과 친구처럼 어울려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속내를 터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나는 지난 세월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개인의 소중함과 우리 마음에 싹트고 있는 능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선생님과 팔씨름하고 레슬링도 하며 업어주고 안아주는 선생님에게서 우리는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20044월에 나는 대검(고등학교졸업)을 통과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고마웠다. 모든 것이 고마웠다. 내가 태어난 북한도 힘들게 지낸 중국에서의 시간까지도 그리고 남모르게 흘렸던 눈물도 고마웠다.

 

대검을 마치고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나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의 길이었다. 23살에 대학교를 들어간다는 것과, 이젠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말씀하신 선생님의 격려에 나는 용기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했다.

 

이제는 더 넓은 세상을 위하여

 

난 지금 대학교 1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다. 아직 이렇다할 결과는 없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재미있고, 만나는 친구가 있어서 학교생활이 즐겁기만 하다. 여름방학에는 대학친구들과 함께 외국여행도 다녀왔다. 외국에 나가서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힐 수 있어 감사하다.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추억이 쌓이고 숨을 쉬는 매시간이 감사할 뿐이다.

 

나에게 정착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정착은 바로 본인의 위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며 노력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해 줄 것이다.

 

20059월 최선희 씀

 

 

2005-11-28 11:13:2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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