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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성공할 수 있는 사회 - 강철환

작성년도 : 1999년 61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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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 수 있는 사회

- 강철환

 

 

나는 1968918일 평양 중구역 경림동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은 제주도로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할머니께서는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8.15 해방이후에는 조총련 창립멤버로 조총련 교토지부 여맹위원장을 지내셨고 할아버지는 빠징꼬를 운영하여 그 당시 재일교포중 몇 안되는 부자로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조국건설에 이바지한다고 막대한 재산을 북한정권에 헌납하면서 조국(북한)으로 귀국하자는 간곡한 설득에 못이겨 북송선을 탄 것이 우리 집안의 비극적인 운명의 전주곡이 될 줄을...

 

처음에는 일본에서 공로를 인정, 평양시 중심가의 고급아파트에 살면서 할머니는 여성동맹 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할아버지는 평양백화점과 상점들을 총괄하는 식료품관리소 부소장에 임명되어 내가 태어나서 9살까지는 북한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어릴때 다닌 평양 대동문 인민학교는 김일성이 수차 방문한 이름있는 학교로 학교시절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그러던 어느날 직장에 나가셨던 할아버지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아 할머니를 비롯한 식구 모두가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소식을 알 수 없어 고심하던차에 난데없이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완전무장하고 구두를 신은채 집안으로 몰려와 할아버지가 조국과 민족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져서 이 땅에서 완전히 없어져야 할 대상이나 당의 배려로 목숨만은 살려주는 것이니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처벌하겠다며 무조건 복종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나서 새벽녘에 아무도 못보게 지붕을 씌운 보위부 전용차에 가족을 싣고는 14시간 이상 달려가 어느 건물앞에 멎었다. 그 당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북한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그런 무시무시한 거대감옥(요덕수용소)이었다. 나는 여기서10년간을 보냈다.

 

평생 수용소에서 죽을 팔자였는데 일본에 있는 친척 덕분에 당시 일본과 북한과의 수교문제가 제기되면서 재일 친척을 둔 수용자들을 석방시키는 바람 에 소위 수령의 은덕으로 아까운 내 청춘을 다 썩인후에 나는 비로소 바깥 세상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 나온 곳은 수용소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이었다. 산골이었지만 수용소에 비하면 천국과도 같아 10년만에 두부국에 이밥(쌀밥)을 먹어 보았다. 그때의 감격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일본친척의 도움으로 우리집은 거지같은 생활에서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다. 중 고이긴 하지만 외화상점에서 일제 옷과 물건들을 구입해 살게 됐으니 모든 북한인이 부러워하는 집이 되었다. 뇌물덕에 직장에서 편하게 지낼수 있었고 평양을 비롯한 많은 곳을 다니면서 사회경험을 하게 되 었다. 이때 친구들과 들었던 남한방송은 내가 대한민국으로 귀순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라디오로 배운 한국노래는 지금도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친구 밀고로 남한방송을 청취한 것이 발각되면서 수용소로 끌려갈 수도 있고 만약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되자 나는 친구 안혁과 함께 목숨을 걸고 북한 땅을 탈출,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귀순을 결행하였다.

 

살아 생전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셨던 조부모님의 고향에서 친척들을 뵈었을 때에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모든게 신기하고 새로웠다. 한양대 대학생활은 일생에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남겼다. 처음에는 한총련 학생들이 데모하면서 부르는 북한노래들과 외치는 구호들이 너무나 귀에 익어 내가 북한에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고 북을 동조하는 학생들과 맞붙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격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차츰 북한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이 일방적인 현혹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운동권 학생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 과정에서 완전히 서로가 납득이 갈 만큼 설득은 안되었지 만 오해의 폭이 좁아지기도 하였다

 

귀순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인권실태를 알리는 기자회견과 강연도 하지만 북한에 관심이 없는 남한사람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 아니면 조작극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북한 인권실태를 폭로하면 남한인 모두가 격분하여 금방 북한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곤 하였다. 하지만 일본, 미국, 프랑스등 뜻있는 사람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얼마전에는 미 상원에서 열린 북한 정치범수용소 관련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의 정치 범수용소에 대해 낱낱이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남한친구들은 나에게 한국에 와서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칭찬 아닌 칭찬의 말을 하지만 그것은 내가 남보다 운이 좋았던데 기인한다고 생 각하고 앞으로 정말 열심히 노력해 이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졸업후 한국전력에 취직하여 회사생활을 하면서 다시 한번 한국사회를 배우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곳은 한국의 가장 좋은 곳이었으나 내가 회사일로 접하는 한 국사람들은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아니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라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 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한 순간도 내 가슴속에는 내 가족을 떠난 적이 없는데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보다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고 민주화되고 자신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사회에서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라 생각하며 남북이 통일되어 북한사람들도 인간답게 살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나는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19996월 강철환 씀

 

 

2004-11-18 00:08:05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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