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결정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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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결정 49호
산 정상에 올랐다. 낮에는 그냥 내려다보아도 도시였지만 어둠이 깃들자 서울의 거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리로 내 눈에 비쳐졌다.
전조등을 밝히면서 달리는 차는 밝게 빛나며 날아가는 반딧불 같았고 밤야경은 정말 “야, 야” 감탄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창문마다 비쳐 나오는 불빛, 야간등, 달리는 차 불빛은 너무나도 황홀했고 너무나도 멋졌다.
이 밤거리를 거닐며 이 거리의 지난 역사와 내가 살아온 삶을 비교하게 되고 즐거우면서도 서글픈 마음 쓸쓸한 마음이 겹쳐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 보게 된다.
여기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나도 여기 자유로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추억을 돌아보게 된다.
불빛 찬란한 거리 화려한 집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고 괴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쁘다.
이 밤거리와 나의 마음을 비추어 보면 이 거리들이 자라 온 기간과 내가 살아 온 시간을 비교하게 되면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살아 온 60여년 넘는 기간은 암흑의 삶이었고 뒤돌아 보기도 싫은 지옥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펜을 들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내각결정 49 호 이후 나의 삶의 변화를 간단히 이 글에 담아볼 것이다.
아마도 여름이었던 것 같았다. 1956년 여름 모내기가 끝나 모가 한 뼘 정도 자라나있었을 때였는데 동네친구들이 너희 아버지가 저기서 전쟁이 끝나서 돌아오시고 있다고 해서 큰 아이들을 따라 고개에 올라서니 5살 나에게 큰 전쟁마당이 펼쳐졌다.
땅크가 우르릉, 우르릉 소리가 울리고 먼지가 뭉게뭉게 피여오르고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뛰는 모습은 내 일생에 화면으로 본 전쟁영화 중 가장 가열 처절한 전쟁으로 뇌에 각인되는 장면이었다. 어린마음에도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줄 알정도로 군인들의 훈련모습이 내 눈에 그렇게 기억된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아버지 자랑, 아버지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나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도 기쁜 일이었다.
그 해까지 어머니와 둘이 외롭고도 고독하게 살아가던 나에게 지금까지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끔찍한 일이 생겼다.
어머니가 땔나무가 떨어져 산에 나뭇잎을 주우려 가고 나는 집 앞에 혼자 앉아 있는데 6살짜리 영실 이와 동갑내기 친구인 영옥이가 나를 찾아 놀러가자고 해서 우리 셋은 서로 손을 잡고 뜀박질을 하며 들판으로 나갔다.
혼자 항상 놀다가 친구들과 같이 노니 너무 좋았고 여기저기 다니며 꽃도 꺾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으며 그 놀음이 싫증나서 이번에는 미역을 감기 위해 늪으로 갔다.
세 명이서 늪으로 내려가자마자 우리는 겉옷을 벗고 물에서 미역을 감으며 즐겁게 놀았고 서로 물을 뿌리면서 한참을 노는 도중 영옥이가 슬며시 깊은 물속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내가 겁이 나서 영옥이의 손을 잡으면서 “애 깊은 물에 들어가면 안 돼. 우리 엄마가 죽는다고 했단말이야” 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영옥이는 나까지도 끌고 점점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들어갔고 나는 깜짝놀라 잡고있던 영옥이의 손을 놓고 걸어서 늪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때 쥐였던 손을 놓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엄마가 물에 빠지면 죽는다고, 늪에 가면 죽는다고 여러번 다짐도 받았건만 영실이의 손을 잡고 늪가에 서서 물에 빨려 들어간 영옥이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왜 영옥이 나오지 않는가 말하다가 우리 집 논으로 향했고 논두덩에 앉아 물장난을 치며 메뚜기도 잡으며 놀다가 엄마가 나무단을 지고 내려오다가 나무단을 집어던지고 늪으로 달려오면서 동네쪽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을 보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영옥이와 나는 꼭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었고 영옥이가 늪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놓은 옷을 보고 어머니가 놀라신 것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먼저 뛰어서 늪으로 오는 것이 보였고 영실이와 나는 좀 전의 영옥이 생각을 다 잊어먹고 우리도 늪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우리가 그렇게 나오라고 불렀지만 자취를 감추었던 영옥이가 물위에 떠있었고 그 순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끌어안고 울었다.
어린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봤고 후에 물에서 죽은 영옥이와 나는 똑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내가 나쁜 일을 당한줄로 착각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전쟁에 나가신 아버지 없이 홀로 저를 키우시며 수없이 혼내시고 아파하셨지만 그 어느 사건보다 어린 나의 마음에 남겨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군대에서 제대되어 돌아오신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으며 촌에서 7살이 되어 평양에 오게 되는 처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 어리둥절해 넓은 도시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평양은 한창 건설중이었고 아파트보다 단층 주택이 많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시골보다 집이 많고 사람들이 많은 것이 너무나 의아했다.
높은 집은 별로 없어 놀라지는 않았는데 평양이라는 도시에 살게 된 것이 너무나 좋았던 것 같다.
1957년 당시 평양 시에는 유치원이 동마다 있었고 그 때 지방에는 유치원이 없던 것에 비해 평양의 사정이 나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에서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던 나는 150원을 주고 다녔고 그 시간이 그 어느 시간보다 내 생애에서 제일 평화로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일반 친구들처럼 유치원 다니다 학교를 가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세 가족이 평화로운 삶을 산 시간은 유일하게 그 시간이었다.
평양에서 꿈같은 2년이 지나가고 악몽 같은 시절이 나에게 찾아 왔고 지금 현재까지 나의 마음에 아픈 상처가 되고 있다.
<내각 결정 49호>가 발표 되었던 것이며 그 순간부터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빨리 철이 들었고 남보다 성격이 변하여 소심하여졌고 남의 앞에 나서지 않는 주눅이 든 아이로 변하였다.
내각 결정 49호는 어린나이인 나에게도 내용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지만 그러나 그 것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가혹하여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헤어나올 수 없었다.
어느 날 부모님들이 매우 근심스런 얼굴로 마주앉아 약한 소리로 주고받다가 내가 들어오니 말을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방으로 갔지만 어린 마음에도 근심이 가득 찬 부모님의 얼굴이 걱정되었다.
그 일은 며칠째 계속 되었고 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큰 일이 닥쳐오고 있다고 짐작하게 되었고 부모님들이 곤히 잠드셨을 때 아버지의 책상을 뒤져 보았다.
아버지의 책상 서랍 안에는 아버지의 자필이 있었고 그 종이를 읽어 본 후부터 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린나이였지만 이 문건이 앞으로 우리가족의 앞날에 폭풍이 몰아쳐 올거라는걸 짐작한 것이었다.
그 자필문서는 아버지가 내각 결정이 나온 이후 계속 고민하시다가 쓴 “자백서”였고 그로 인하여 정말 우리 가족 앞에 시련이 닥쳐오게 된다.
“내각결정 49호”를 8살 어린나이에 읽어 봤는데 그 내용이 지금도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그 구절은 “죄 있는 사람은 죄를 자백하라. 그러면 관대하게 용서해 주겠다.는 내용이었고 북한정부에서 국민을 속이고 가혹하게 인권탄압이 일어난 것이 그때부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56년도 8월 종파사건으로 이미 권력층에 있던 반대파는 다 숙청되었고 그 총구가 권력이 없는 국민들에게 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자백서로 인하여 아버지는 전쟁의 피바다 속에서 받으셨던 조선로동당의 붉은 당증을 빼앗기고 우리 가족은 기차 짐방통에 짐짝처럼 실리어 함경북도의 꼭대기 경원군에 내려졌다.
우리는 집도 없어 남의 허청칸(창고)에서 얼마동안을 살게 되었고 그 때 얼마나 춥고 힘들던지 어린 나이에도 함께 고생하는 부모님들에게 투정을 부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고향에서부터 가지고 왔던 300원으로 헌집을 사서 아버지 혼자 힘으로 집수리를 하여 그리 춥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추방지에서의 생활
그때부터 나의 학창시절은 매 순간 순간이 내 머릿속에 각인될 정도로 가혹했고 처절했다.
경원에 도착하여 금방 학교에 들어갔는데 등교 첫날부터 고통의 연속이 시작되었고 그 것은 같은 반 남학생들이 평양에서 추방되어 온 49호 대상인 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나의 흰 면티셔츠에 잉크를 만년필에 빨아 가지고 휘뿌리여 옷에 잉크 문양이 되게 하는가 하면 갖은 온갖 장난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내가 지방에 내려와 첫날부터 겪은 일이며 결국은 최고 권력자가 인민들에게 거짓말로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나의 머리에 새겨진 날이기도 했다.
평양에서 학교 다닐 때는 평범하고 공부도 잘하고 모든 것에 모범이 되려고 노력ㅎㅆ던 반면 지방에 내려와서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자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친구들에게 반항도 해보고 같이 싸워도 봤지만 점점 세상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뿌리면 받고,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그렇게 내가 무의미하게 받아들이자 그들도 재미를 없어졌는지 잉크 세례도 나를 괴롭히는 것도 점점 사그라져 갔다.
가끔 다른 장난으로 괴롭히기는 하였지만 그런 아이들의 장난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점 없어졌지만 그러나 교원들의 눈초리는 계속 나를 아프게 했다.
내가 인민학교를 다닐 때는 그래도 교원들이 자질이 높아 그리 편애하는 현상이 없었지만 중학교에 올라와 몇 년 되면서부터 햇내기 신참 선생님들이 등장으로 나는 여러 번 어려움에 처하데 되게 그들은 나를 추방 내려 온 성분이 나쁜 아이로 취급했다.
그 선생님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자 중학교 3학년부터 3년간 나는 선생님들의 입에 오를 정도로 말을 잘 듣지도 않았지만 말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 눈초리가 다른 선생님의 수업은 무조건 빠져 산과 들로 다니면서 홀로 놀고 나이 많은 선생님들의 수업은 오히려 더 잘 참가하였고 공부도 엄청 잘하였다.
나를 미워하고 구박하는 선생님들의 수업은 다른 친구들에게서 교과서와 남의 공책을 빌려서 집에서 공부를 하였고 시험을 봤으며 성적이 나쁜 축 이 아니었다.
물론 머리고 남보다 나쁘지 않아 수학 같은 과목은 항상 학교 일등을 할 정도였고 남한테 밀리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의 별명은 앞에서는 안 불렀지만 많이 불렀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선생님 별명으로 통했다.
중학교 3학년에는 1반과 2반이 있었는데 우리 1반은 남자들이 얌전하고 여자들이 조금 센 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사자 아이들은 너무 공부도 하지 않고 여자애들인데도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 속에 나도 속해있었는데 교원들은 나와 2~3명만 불러다 욕을 했고 그러니 우리들은 더 엇나갔으며 이렇게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 기술반 진급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전사자가족 아이들은 다 공부를 못해 전원 떨어져 사회에 진출하다나니 망나니 친구들이 없어져 기술반 2년을 얌전히 다니었다.
학교시절에 이처럼 마음이 아픈일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가끔은 있었으며 그런 일들 덕분에 항상 우울해서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먼저 갑자기 산골에 추방되어 살다보니 범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범의 눈빛은 밤에 여러번 보게 되었는데 한 번은 동네 아주머니들 두 명과 친구 한명이랑 함께 산나물 뜯으로 갔는데 큰 바위 아래에 중간크기의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와 좀 놀다가 아주머니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가자해서 우리는 한 마리씩 안고 내려오고 말았는데 그로인해 그 날 저녁 우리 동네는 전쟁마당이 되었다.
우리 마을은 5리정도 아무것도 없는 무인지경을 지나서 30세대쯤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를 가져간 그 채에는 큰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범 어미가 길길이 날뛰면서 숨어있는 개와 염소를 다 죽이고 울어댔던 것이다. 그때에야 고양이로 알고 가져온 것이 범의 새끼라는 것을 알고 문을 조금 열고 새끼를 내보냈고 그제서야 그렇게 날뛰던 범이 조용해졌다.
우리집은 그 집과 100m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 이튿날에야 알게 되었는데 내려가보니 동네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마을의 개와 고양이가 무려 7마리나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은 하였지만 염소나 개는 키워서 잡아먹을 때는 마을사람들이 나누어먹던 시기였다.
배급을 주었고 상점에는 물건이 아주 많을 때였는데 돈이 없어서 물건을 사지 못했지 훗날처럼 물건이 없어서 못사지는 않았다.
그때 30여가구에서 고기를 실컷 먹었고 호랑이 덕분에 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오다가 호랑이 불을 보면 다시 학교로 가서 저녁도 못먹고 학교에서 자고 아침 일찍 집으로 가서 밥 먹고 밥을 싸가지고 학교로 왔다.
어쩌다가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올 때는 대낮에도 무서운 길이었고 메돼지와 노루는 대낮에도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이런 산골에 다시 추방되게 된 것이다.
경원군에서 삼지연군으로 다시 추방되다나니 호랑이랑, 메돼지랑, 노루를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큰 길 좌우에도 큰 나무가 꽉 들어차 어린나이에도 다니기 힘들었는데 우리가 살던 동네에 들어가는데는 달구지길 밖에 없었다.
우리 마을은 거의 대부분이 이주민 (추방가족), 제대군인 가족들이었고 그러다나니 마을 분위기는 내가 살아 온 마을중 화목한 편이었다.
어린나이였지만 그 때가 공산주의 세상인 것 같았는데 마을인심은 괜찮았는데 학교에 새로운 지식인들이 나타나면서 야박해져만 갔다.
그때 교원들은 신참이 더 많아져 토대가(출신성분) 나쁜 나는 조금만 잘못해도 완전히 몰이(왕따) 대상이었고 그때부터 더 소심해졌다.
그 곳 원주민들은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는데 대부분 김일성부대인 항일부대와 연계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 잘 살았다.
국가에서 그런 가족들에게는 공짜로 주는 것이 많아 우리는 매우 부러워했는데 이느 우리 이주민들은 80%가 성분이 나쁜 사람들이었고 내각 결정 49호 대상이라 갑자기 내려오다나니 사는게 원주민들보다 형편없었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그전부터 화전민들이라 농사짓던 땅이 많았고 우리는 땅이 없어 이삭을 많이 주어서 먹었다.
그리고 그 시절 하루 밤 자고나면 누구네 가족이 통째로 어디로 데려갔는지 모르는 일이 계속 생겼고 그렇게 다른 가족들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소심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였다.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매우 고생하며 살았는데 이는 갑자기 추방되어 내려오다나니 어머니가 산후병으로 잘 걷지 못하고 머리도 혼자 빗을 수 없었던 것이다.
12살부터 식구 다섯명의 배급을 다 내가 타서 대부분을 날랐고 감자 같은 잡곡은 아버지를 기다려 아버지와 같이 지고 왔다.
된장, 간장, 소금 등 집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은 12살 어린 나의 어깨에 매달렸고 아버지의 생활비는 어머니를 거쳐 내가 관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사실 집의 생활을 도맡아하는 반 주부였다.
어머니는 동생을 돌보고 밥을 하고 빨래는 내가 절반했고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은 내가 다 져서 날랐다.
그 무서운 길을 짐을 지고 혼자 정말 무거워서 쉬고 싶어도 무서워서 쉬지 못하고 왔으며 집안에 장녀라는 무거운 짐이 앓는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힘들어서 울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였다.
그때 나는 배급 40Kg을 13살 때부터 지고 이고 다니였는데 지금 나 자신이 생각해도 믿기가 어렵다. 어떻게 그 무거운걸 지고 다닐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놀랍다.
그러다나니 학교에 지각을 할때가 많았고 빠질 때도 많았지만 부모님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도 아무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내가 엄마가 되어 조금은 우리 어머니가 너무 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린 나이에 무거운 것을 보름에 한번이지만 정말 힘들어서 울면서 배급을 날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안해 한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아버지 직장이 내가 17살 때 옮겨져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일이 끝나면 배급을 타서 지고 오셨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 생존해 계시는데 아마도 아버지와 내가 어머니가 앓을 때 그렇게 도와주어 지금도 생존해 계신 것 같어 한편으로는 기쁘다.
물론 아버지는 43살(69년도)에 돌아가셨으며 그 후 부터는 나는 제일 일을 많이 했고 학교에서는 매도 많이 맞았고 욕도 많이 먹었다.
학교에서 욕을 먹으면 약초 뜯으러 다니었고 가을에는 들쭉 뜯으러 다니었다. 아버지 혼자 월급타서 식구 6명이 돈이 모자랐었는데 아버지도 쉬는 날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마른 나무를 해서 팔아서 보탰고 나는 약초를 베고 열매를 뜯고 학용품 사는 것을 다 나 스스로 해결했다.
줄을 서서 배급타고 집까지 날라다 놓고 오면 2시간은 수업에 참가할 수 없었고 된장, 간장도 타서 집에다 가져다 놓고 오면 그날도 2시간은 지각이다.
배급소나 상점은 낮에만 문을 열기 때문에 나는 방법없이 학교생활을 잘 할수없었다.
그리고 말을 안듣던 전사자 아이들과 패를 치다나니 학교에서 욕먹는날은 학교 실습포전에서 감자와 양배추를 도적질해다가 떡해먹고 부친개를 해먹고 들키면 매를 맞고 또 욕을 먹는다.
또한 수업중에도 전사자아이들은 무서운 것이 없으니 나를 계속 장난으로 괴롭히고 그것이 과해지면 싸움이 된다.
수업시간에 싸움을 하니 맞고 쫒겨나고 우리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하면 나는 앓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어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아프시니까 나에게 너무 관심을 두지 않으신 것 같았지만 혼자서 너무 서러웠던적이 많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적증만 확인하고 성적은 괜찮은 편이니 사람들에게 딸이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한다. 딸이 얼마나 피눈물을 삼키며 학교에 다니는지 모르면서, 성분이 나빠서 잘해도 미움받는데 수업시간이 지옥 같아 계속 빠지고 말도 잘 듣지 않아 선생님도 속이 탔을거라고 지금은 생각된다.
그때도 학교에 농촌동원이 가을에만 있었고 삼지연에서 하는 것은 감자캐는일이었다. 처음에는 감자가 주렁주렁 달리어 있기 때문에 재미 있는데 오래 하면 힘들고 하기 싫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정말 좋고 그 시절에는 인심이 정말 좋아서 우등불을 크게 피워 불이 많이 생기면 감자를 100Kg~150Kg 정도를 불에다 쏟아 넣고 한참 있다가 골라 먹기 시작하면 입 주위가 까맣게 되고 군감자를 먹었다.
군감자는 정말 맛있었고 감자를 실컷 먹고 다시 감자를 캐고 저녁에 내려왔으며 높은 학년은 가을에 들쭉따기로 갔다.
사람마다 개인 이기주의를 아무리 없애라 해도 없어지지 않고 생기는 것이 개인이기주의인데 감자 캐기 갔을때는 그렇게 꾀를 부리던 애들이 일 잘하는 애들보다 들쭉은 더 잘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들쭉은 자기가 딴것만큼 돈을 계산해 주고 아니면 물건을 주는 까닭이었다.
들쭉 따기는 나도 매우 재미있었고 학교생활에서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백두산 가까운곳에 살다나니 백두산에 단체로 두 번 갔었는데 천지에 내려가 천지물에 머리를 감으니 머리가 쭉 빠지는 것 같았고 손목이며 발목이 시리다 못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그 후 사회 생활에서나 힘들게 살아오면서 참고 견딘 것은 아무 죄도 없는 부모를 힘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아버지
전쟁의 피바다 속에서 몇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시고 살아오신 아버지가 아무 죄도 없이 고통속에서 살다 가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군대에 가서 7살에 돌아오셨고 다정다감하지는 않으셔도 그래도 우리가정에는 친근한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가 어려웠지만 아버지는 7년만에 처음 본 딸이 서먹 서먹 하셨던 것 같았으며 항상 냉정해 보이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죄책감에 큰 딸인 나에게 더 미안해서 그렇게 대한것같다.
지금은 이해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아버지가 매우 섭섭하고 따뜻한 다른집 아버지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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