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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그 리 움

작성년도 : 2020년 72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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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리 움

안 희경

 

북한은 아픈 땅이고 신에게 조차 버림받은 땅이다. 신에게 조차 버림받은 땅은 다름 아닌 내 고향이고 부모와 형제자매 친인척이 살고 있는 고향이다. 그리고 조국이다. 단어는 그 어떤 의미도 담지 않고 순수 내가 태어난 곳이고, 추억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엄마보다 할머니가 먼저였고, 아버지보다 할아버지가 먼저였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그렇게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 이모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말 못생겨도 공주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저를 봐도 오나미를 연상케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제 삶의 기억의 대부분은 할머니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시장에서 잡화장사를 했다. 북한에서 잡화정도 하면 먹고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탓일까요 남들은 유치원때 글을 배우고 고기”, “아이조차도 모르고 학교를 들어가게 됐다. 반에서 뒤치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아마 그때처럼 공부했으면 한국에서 서울대는 갔을 거예요.

 

하하 하하하하 웃음......................

 

하루는 어른들이 잠자고 있는 나를 집에 둔 채 밖으로 문을 잠그고 나가 버려서 너무 무서워서 창문을 내다보며 울고 있었다. 울면서 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울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그 때 바로 엄마가 할머니 집에 온 거였다. 애들은 울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엄마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저를 지극정성으로 아무리 키웠어도 가장 먼저 찾는 것은 할머니가 아닌 엄마였다.

 

그때가 아마도 제 기억으로는 엄마를 처음 봤다. 처음 봤지만 엄마는 한 번에 알아봤다.

낯설지 않은 얼굴 낯설지 않은 단어 엄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매일 불러서 익숙하지만 다 자라서 처음은 아니겠지만 엄마를 부르니 마음은 한 없이 기뻤다. 엄마가 저를 보러 온 이유는 보고 싶어서도 아닌 학교에 보내야 하니까 할머니 집에 온 거였다.

입학하고 나서 또 다시 엄마와 이별이었다............ 즐거움도 잠시였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는 새벽같이 장마당에 나가고 할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집안일을 거의 다하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보다 조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그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가질 수가 있었고 웬만하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숙제를 하고 부모님의 검사를 받아와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할머니에게 검사해 달라고 하면서 책을 내밀었다.

 

: 할머니 선생님이 부모님 검사 받아오라고 해요…….

할머니: 이모보고 해달라고 해…….

이모: 가져와봐

: 할머니 글 몰라? 왜 할머니가 자꾸 안 봐주고 이모나 할아버지데 시켜

이모: 할머니 글 몰라…….

 

그때 처음 안 사실입니다.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셨던 겁니다. 할머니는 어릴 적 가정형편이 안 좋아서 학교에 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정은 자세히 들어 보지 못했지만 할머니 때는 우리 한글보다는 일본어를 배워야 했답니다. 일본 놈들이 한글말살 정책과 더불어 조선 사람이 조선 글을 못 쓰게 했던 것입니다. 일본 놈들이 일본어를 가르칠 때 교실에는 항상 일본순사들이 칼을 차고 교실 구석구석 다니면서 옆 사람과도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셨던 거구요.......

 

우리 할머니 시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은 공감할 수 없지만 그 당시의분들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겁니다. 쉬운 우리글을 사용 못하고, 어렵고 힘든 일본어를 배워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슬픈 사실은 슬프지만 싫은 것은 정말 싫은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정말 하기 싫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하나는 매일아침 교복치마를 입는 것이에요……. 학생이 교복을 입어야 하긴 하지만 치마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내가 중고등3학년 다닐 때까지는 교복 디자인은 너무 밋밋하고 예쁨은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 특히 땀이 많이 나는 저에게 있어서는 지금생각하면 여름에는 더워서 교복입기 무서울 정도였어요. 5학년부터 교복디자인도 예뻐지고 원단도 좋은 옷을 주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화장도 하고 오고 멋을 부리기 시작하는 때였어요. 고학년부터는 교복을 상·하로 안 입어도 됐지만, 저 학년 때에는 매일아침마다 교복차림에 학교에 등교할 때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반전체가 줄을 지어 서서 학급반장의 구령에 따라 김일성장군의 노래, 김정일 장군의 노래를 빠지지 않고 부르면서 등교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등교 때에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그 반에 처벌이 가해지거나 그 학생에게는 처벌이 과해졌기 때문이다. 그 처벌이 무엇이 될지는 학교 사정에 따라서. 그리고 여름이면 여학생들은 교복치마를 입어야만 학교대문을 통과 할 수 있었다.

 

치마를 입기 싫은 여학사들은 저마다 치마 밑에 바지를 입고 그리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학교대문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도 치마가 입기 싫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강제적인 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하라고 더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반항심이었을까? 아니면 명령 불복종?........... 그냥 하기 싫어서........

 

북한에서 학교에 대한 기억은 공부보다 토끼가죽”, “,에 대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토끼가죽 못 내서 학교 못하고 동 못 내서 학교 못가고, 심지어 돈 못 내서 학교 못가는 일들이 많았다.

 

한번은 내가 돈을 못 내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데리러 집에 왔는데, 문 앞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아이들: 똑똑.... 영옥이 집에 있습니까?

부모님: 누구니?

아이들: 영옥이 학교동무들입니다.

부모님: 아파서 오늘 학교 못 간다고 해라.

아이들: 선생님이 오늘 영옥이 늦게라도 학교에 오랍니다.

 

애들은 숙덕대면서 돌아가고 결국 그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는 지옥이었다. 아침반 조회시간에 어제 학교 못나온 아이들 일어서라고 하고는 이번 주까지는 다 내라고 한다. 돈 못 내서 일어서서 아이들의 시선을 받고, 금요일 생활총회 시간에는 이러한 일들이 누군가의 호상비판거리가 된다.

 

한명에게서만 비판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여러 명에게서 비판을 받으면 그 반에서 말거리는 물론 왕따가 된다. 하루는 생활총화에서 있은 일이다. 반장이 생활총회의 시작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를 읽고 자기비판을 한 후 호상비판 시간에는 나를 비판했다.

 

반장: 영옥동무는 일어서시오. 동무는 이번 주 2번의 농촌동원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동무는 자신이 맡은 일에 모범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부터 고치시오.

.... 고치겠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고칠 문제도 아닌데 말이다. 그 제도에서는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기는 하지만, 개인사정이 안 통하는 제도여서 그런 건가?

더운 여름이면 땡볕에서 김이나 매고, 토끼풀 뜯으러나 농촌동원다니는 북한의 학생들 추운겨울이면 교실에 불을 피우기 위해 산에 나무하려도 가야 했으니 말이다. 학생인가 아님 농부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살면서 그래도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추억들이……. 좋은 추억은 아닐지라도 안 좋은 추억도 추억이고 때로는 배가 고파서 학교에 못가고, 학교에서 내라는 여러 가지의 것들을 못 내서 학교에 못 갔더라도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더 없이 소중한 추억들이 되었다. 그날에 내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있지 않았을까?…….

 

북한이라는 체제 속에서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혹은 북한에서 태어났더라도 돈 많은 백좋은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북한이 아닌 미국, 한국,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그냥 평범한 초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되어 취업과 스펙만을 생각하면서 살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꿈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난 이라는 이 한 글자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게 될 것이다. 북한에서 꿈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있었던가? 나는 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아침 먹고 나면 점심에는 뭘 먹지 저녁 먹고 나면 저녁은 또 뭘 먹지 한 끼 해결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 김일성이 죽고 나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어린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태어나서 뭐가 되고 싶니 라는 부모님들의 질문은 없어 진거 같다. 뭐하고 싶니 보다 끼니를 해결하는 게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 어린이들은 꿈보다 배부른 것이 최고인 세상으로 바뀌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어린아이들에게서 꿈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나에게서도.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리고 되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이다. 대통령도 되고 싶고, 과학자, 의사, 판사, 변호사, 교사 그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은가?.......

 

하지만, 이러한 직업들은 우리말대로 하면 토대가 좋은 자녀들이 다 차지하고 만다. 좋은 학교, 좋은 직업은 그들의 것, 돈 없고 토대가 안 좋은 이들의 직업은 현장인 것이다. 한국도 돈 없고 백없으면 현장이지만 자기가 얼마나 노력 하냐에 따라서 직업이 달라지지만, 북한은 노력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되어있다.

 

, 권력 없으면 노력의 대가도 없다. 세 가지 다 없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뿐 일것다.

나도 그 세상에서 악으로 버텼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초등학교 졸업 때 북한에는 일고등이라는 학교가 생겼다. 일고등을 졸업하면 대학시험을 보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는 학교였다.

그 학교 역시 마찬가지로 공

 

부를 정말 잘하거나 혹은 돈이 있어서, 또는 토대가 좋아서였다.

어찌 보면 자본주의시스템과 거의 똑 같다. 부모를 잘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거니까. 자본주의는 부모를 잘 만난 자식은 태어나보니 스포츠카에 주식이 있고, 북한은 태어나보니 직업과 그들의 삶이 정해져 있다. 둘 다 정해져 있다. 내 삶은 정해진 삶이 아닌 블록버스터다.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 그만큼 삶이 불안하다는 거다.

북한은 저주의 땅이고 신이 버린 땅일 지라도 난 그래도 내 고향이 좋다.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인정이란 것이 있다. 아니 난 있다고 생각한다.

 

명절이면 옆집에서 맛보라고 준 떡 한 접시, 그리고 겨울이면 강내죽옥수수죽 한 그릇 그 정 그 맛 한국에서는 난 느껴보지 못했다. 어릴 적 놀던 땅따먹기, 딱지치기, 빼빼놀이 나의 기억 그리고 우리의 기억들이 있는 땅…….

저주받은 땅이기에 아픈 땅이기에 난 더더욱 그리워진다. 내 고향이니까 우리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기에.......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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