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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우리 가족의 운명

작성년도 : 2005년 56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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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의 운명

- 아침

 

 

저는 200312월 탈북하여 중국에 체류중인 탈북자로서 북한에서의 생활과 중국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사실들을 글로 옮깁니다. 그리고 북한에 계시는 우리의 부모 형제들이 비인간적인 삶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뜻밖에 알게된 사실

 

제가 자란 곳은 함경북도의 어느 농촌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봄이 되면 살구꽃과 사과배꽃들이 만발하는 물 맑고 공기 좋은 아담한 마을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범하고 부지런한 농사꾼이었고 형제는 네 형제로서 맏딸인 저와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 있었고 총명했던 형제들은 이웃과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던 제가 고등중학과정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19948월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강덕동에 위치한 "오중흡사범대학"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농장원의 집안의 자식으로서 대학시험에 응시하게 된 것 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던 저희 부모님은 정성을 다하여 저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송평 역전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낮선 할머니가 저에게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 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께 대답드리고나서 의아한 생각에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한가지 물어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뜻 물어보시라고 했더니 "거기에서도 배급을 안주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질문을 받고 저는 엉겁결에 "우리 있는 곳에서는 다 준다" 고 대답 드리니 할머니 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급카드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카드는 1992년도부터 미정배급카드였는데 할머니는 지금 3년째 미공급 배급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면 줄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왜 국가에서 배급을 안주느냐고 이게 몇 해인가, 먹어야 노동자들도 일을 할 것이 아니냐며 오늘 아침에도 자기 탄광을 다니는 아들은 굶어서 갔다고 이렇게 허기진 채로 어떻게 일하겠느냐며 하소연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청진시 노동자들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저의 눈앞에는 그때의 그 할머니의 모습과 그 할머니의 말씀이 눈에 선하고 귀에 생생히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니 어머니 역시 여기도 마찬가지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할머니가 배급을 탈 대상자였는데 우리 할머니도 배급을 타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수령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식량난은 더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은 그래도 농사꾼 집안이니 이 정도는 되는 것이고 현재 배급 타는 사람들은 식량난이 말이 아니며 모두가 농촌으로 식량을 꾸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자가족의 슬픔

 

그런 와중에서 저는 대학통지서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학 합격 통지서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불합격이었던 것입니다.

 

저의 앞길에 놓여있던 장애를 저는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후에 안일이지만 저의 집안은 남쪽으로 내려간 할아버지로 하여 월남자 가족의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대학시험을 잘 치렀다고 확신에 차 있었던 저는 가정에 이러한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합격 통지서만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오중흡사범대학은 교원양성대학으로서 이런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한 자들은 절대로 합격될 수 없으며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이 좋지 못한 성분의 가족이면 학생교양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저는 다른 수험생들보다 실력이 낮아서 불합격한 것인 줄 알고 재도전하기 위해 시험 준비에 더욱 열중했습니다.

 

낮에는 힘든 협동농장일을 하고 밤에는 눈을 비비며 학업에 열중했던 결과 저는 2년 만에 다시 대학예비시험에 응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다시 대학추천을 받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망을 바꿔 청진시 수남구역에 위치한 고등경제전문학교에 응시했는데 그 때가 아마 91일 개학이 41일 개학으로 바뀌는 등 교육제도가 바뀐 후의 첫 시험인 것 같았습니다.

 

밤낮없이 학업에 열중했던 저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저와 저의 가족은 하늘을 날듯이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온 나라가 식량난으로 힘든 시기였고 집에서는 저의 상급학교 합격통지서에 기쁨보다는 걱정이 더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으며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청진 고등경제전문학교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농사꾼 집으로서는 학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저의 의지는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 했고 학교는 말이 대학교이지 그 안의 최우등생조차 실력이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학교경비를 서는 당번 날에는 당직근무 선생님의 식사비를 학생들에게 부담을 시켰고 학생들에게 수시로 농촌 돕기 과제로 맡겨지는 인분퇴비 그리고 구리등도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저는 할당량을 채울 길이 없어 돈으로 내야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부모님은 저를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제가 속한 학급에는 노동자나 농민의 자식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가족이 굶어 죽게 된 마당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고 곧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허무함과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열정과 의지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괴로워했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되자 저는 3년제였던 학교를 1년 다니고 2학년 1학기에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회에 나오게 된 저는 고향에 자리 잡고 있는 모피공장 후임 부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기라는 직책은 현금을 다루는 직업,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나누어주고 공장 재산 문건을 작성하는 직업으로서 회계원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경험도 없는 상태이고 단지 전문학교에서 일 년 동안 배운 지식뿐이었으므로 현장 일을 하면서 경험 많은 부기원들을 따라다니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공장에 들어간 지 일 년쯤 되자 공장 당비서가 저를 찾아와 간부부 이력서문건을 쓰라고 했습니다. 저는 간부부 이력서를 쓰게 되었고 저의 이력서는 곧 시당간부부에 입송되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저의 비준문건은 부결되었으며 그 때 저는 우리 가족의 숨겨진 큰 아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친할아버지라는 분은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인 625일 전쟁시기에 남쪽으로 가게 되었고 그로인하여 우리 가족은 여기 국경지대로 추방되어 오게 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서러운 가족의 과거를 알게 된 저의 심정은 참담할 따름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부모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얼굴한번 보지 못한 친아버지의 월남으로 인해 어려서 부터 고통을 겪으며 자라야 했으며 이제 와서는 그것이 자식들에게까지 영원한 장애가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프셨겠습니까.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를 이어 상처 받아야만 하는 우리가족에게 기쁨과 희망은 사치였습니다.

 

아버지는 10년간 농장에서 분조장으로 일하면서 목표량 성취를 미달한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일해 왔지만 당에도 가입조차 할 수 없었고 돌아오는 것은 자식들 앞에 놓인 장애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월남이라는 죄아닌 죄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늘 당이 어머니라 하지만 어머니 구실 못하는 당이 과연 어머니 당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어머니는 아홉 자식의 행복보다 불행한 자식 하나에 마음을 더 기울인다는데 어머니다운 당이 어찌 불행한 자식의 슬픔을 더 가슴 아프게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전쟁으로 헤어졌으면 불쌍히 여기고 더 돌봐 주기는커녕 오히려 의심을 하고 박해를 하고 있으니 이런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철없던 저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할아버지가 한없이 밉기만 했습니다.

제 앞에 놓인 좌절과 서러움이 큰 상처로만 생각될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전문학교 시절이 생각났고 그것을 그만두게 되고 이젠 미래까지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움만 커져갔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청진시 도 보안 간부학교에 다니는 남자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와의 관계도 도저히 결합 될 수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우리사랑은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단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죄아닌 죄로 많은 것을 잃게 된 고통은 참으로 컸습니다.

저희 가족이 배척당하고 따돌림 받고 의심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그때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24살 되던 해 10, 월남한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한 번 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급작스럽게도 한 맺힌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작업장에서 뇌출혈로 돌아가신 것 이었습니다.

 

할머니 뱃속에서 부터 월남자 자식의 설움을 안고 태어나야 했으며 희망과 미래도 없이 남들에게 말 한 마디 조차 떳떳이 해보지 못하고 사회의 눈치를 보는 사회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 자식들에게 미안했다는 말밖엔 남길 수 없었던 불쌍한 우리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했던 할아버지의 죄 아닌 죄를 자신이 한 평생 짊어지고 온갖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죽음의 그 순간이 비로소 행운의 길이 되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 없이 가슴이 저며 옵니다.

 

불효하고 철없기만 했던 저로 인해 많이 속 타고 많이 가슴 아팠던 우리 아버지.

자식들에게 마지막 하나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러 나가야만 했던 우리 아버지의 죽음은 적어도 저에겐 순교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끝까지 일하다 일터에서 죽은 아버지의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죽어서도 월남자 자식의 죄만을 안고가야만 했던 불쌍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소달구지에 실려 왔던 아버지 시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기만 합니다.

 

그때의 제 마음은 마치 저로 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뜨게 된 것 같은 죄책감으로 가득했고 철없이 행동한 시절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탈북 그리고 설움

 

그때부터 저의 가족은 아버지 없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저의 가족은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러 나간 저의 여동생이 자정이 지났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리려도 동생은 끝내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집에도 찾아다녔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이미 제 동생은 중국에 드나드는 도강자를 통해 탈북한 뒤였습니다.

 

이제 저의 집은 월남자가족 뿐 아니라 탈북자 가족이란 죄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온 동네에서 수군거리는 마을 아주머니들의 사나운 소리, 사람들 마다 피하는 눈길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보안원과 보위지도원의 감시 속에 우리가족의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시내 친척집에 나들이만 갔다 와도 오늘은 어딜 갔으며 뭘 하고 왔느냐는 등 보안원과 보위지도원의 보고 문건 속에 올려야만 했습니다. 저 역시 같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온 동네의 감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우리어머니는 집을 이사하기로 결심했고 제가 탈북하기 두 달 전인 시내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남동생 두 명은 이미 조선인민군으로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그 때 우리 식구는 어머니와 나 둘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저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점점 이 제도가 싫어졌고 이 모든 것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동생의 무소식으로 눈물 흘리고 밤을 새우는 어머니를 혼자 두고 불효막심하게 저까지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제 결심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지만 어느 부모 제자식 멀리 이역나라로 가는 험한 길을 떠나는 것에 동의하겠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이내 저를 이해해 주셨고 기둥처럼 저를 믿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는 저의 모습은 하염없는 눈물로 얼룩졌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꼭 소식을 보내겠다고, 내가 떠난 후 누구네 집에서 소식을 전해 들으시라고, 부디 건강한 몸으로 앓지 말고 제가 모시러 올 때 까지 살아 계시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면서 저는 한 맺힌 북한 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되었습니다.

제가 탈북한 당시 나이는 26살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연길시 조선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 같은 탈북자들은 한국에 가야만 산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이 조선족을 통해 로녕성 심양시 농촌마을에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집은 마을에서 그리 못 사는 측도 아니고 잘 사는 측도 아닌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저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저와 나이가 17살 차이로 삼춘, 아니 아버지나이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였습니다.

 

저는 글로도 말로도 통하지 않는 이집에 들어와 음식도 생활풍습도 다른 한족들의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마을의 조선족 학교에서 교원을 하는 교포 여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그 교원이 퇴근시간을 기다렸다가 집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와 나이가 같았으며 전 어머니처럼 따르고 또 그 교원은 저를 딸처럼 사랑해주었습니다.

 

제가 음식이 맞지 않아 하는 것을 알고 된장과 고추장, 김치도 가져다주었으며 저녁마다 집에 오면 냉면국수도 말아주면서 친절히 대해주셨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집에는 한국 위성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보며 한국의 현실에 대해 차츰 알 수 있게 되었고 한국 분들이 자유와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시위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이 한족 남자와 더는 살 수 없었기에 집을 탈출하여 저를 팔아먹은 조선족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소식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조선쪽에 경계가 심해 전화도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여기 연길은 검문이 대단히 심하니 다른 곳으로 또 시집을 가라고 했습니다. 또 팔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답이 없자 그는 요번에 가면 돈도 얼마간 주겠다고, 그 돈으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자기가 직접 가서 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거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갈 곳이 없었던 저한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조선족인간들의 돈벌이 농락물이 된 저는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갔으며 또 다른 연변 조선족에 의해 흑룡강성 대경시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온성군에서 왔다는 24살 난 처녀와 같이 동행하였는데 우리가 도착하자 이들은 대경시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한 후 우리를 사기 위해 온 한족 남자들에게 맞선을 보게 했습니다.

 

그 때 남자들이 왔는데 한 명은 30살 난 하체 장애자 였고 한명은24살의 한족 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만 이천이라는 돈을 요구하였는데 다리를 저는 남자는 그만한 돈이 없는지라 24살 난 총각이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 때 나와 함께 온 함경도 온성 출신의 여자는 저보다 키도 작고 인물 또한 못하여 나이가 많았지만 저를 데려간 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저를 차에 태우고 대경시에서 3시간도 더 들어가는 농촌 마을에 데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지붕도 없는 움막 같은 집이었으며 이 집이 제가 앞으로 생활하게 될 그 남자의 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농사로 힘들게 사는 이 마을에서 제일 곤란한 집이었습니다. 앞뒤로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넓디넓은 사막이었고 삼일에 한 번씩 황사바람이 집을 흔들 정도로 불어대는 지역이었습니다.

 

집이란 어찌 더러운지 또 아무리 치워도 치운 티가 나지 않고 아무리 닦아도 닦은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의 동생보다도 더 어린 남자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일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고운 한족 식구들이라 저는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생활하며 농사일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농사일을 하면서 개인 농기계의 우월성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이 남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렇게는 살 수 없었던 저는 또다시 이집을 탈출하여 제가 처음 팔려갔던 조선족을 다시 한 번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 생각으로 돈을 벌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나 깨나 나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눈물 흘리며 가슴 앓을 어머니를 위해 나를 희생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저에게 조선족은 또 다시 저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여기나와 갈 곳 없고 반겨 줄 사람 없는 저를 잘 알고 있는 조선족은 이번엔 자기가 직접 나서겠다면서 다시 한 번 한족에게 시집을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돈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저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돈벌이 농락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탈북자의 운명은 어디가나 같았습니다. 팔리고 또 팔리고... 그것은 탈북여성들의 당연한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이 남자와 같이 산동성 워이방시 어느 자그마한 시내로 가게 되었으며 저는 여기서 또 어느 탈북자 여성의 소개로 한족 집에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좀 잘 살았지만 아들이라는 사람은 25살 이였지만 7살 난 아이의 인식수준을 가진 뇌막염 환자였습니다. 첫날에는 그의 행동에 의문이 갔지만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생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소개해준 탈북여성의 집에 전화를 하게 되였고 그들은 저를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는 소개비만 받았다고 하면서 이 많은 돈을 다시 물어주자면 너는 다시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같은 처지의 동료인지라 저를 따뜻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또다시 흑룡강성 목단강시의 어느 자그마한 농촌에 5살 난 아이가 있는 홀아비 한족 남자한테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여성은 저에게 돈 이천 원을 몰래 주면서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라고 만약에 이 집에서 살기 힘들면 자기에게 연락하면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팔려가는 몸이면서도 그 여자의 말 한마디는 저의 마음을 울려놓았습니다.

 

그 돈 이천 원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어머니를 도와줄 수 있다는 큰 희망 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반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4번이나 운명을 내싣고 다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4번이나 팔려 다니는 서러움을 당해야만 했던 나...

이것은 나 뿐 아니라 탈북여성들의 누구나 겪는 공통의 설움이었습니다.

 

팔리고 팔려 다녀야만했던 이국땅에서의 설움은 나에게는 크나큰 고통 이였지만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체험을 쌓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북한이 중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팔리우는 몸이 되었겠는가, 말로만 강성대국을 부르짖는 저 북한은 어찌하여 한 개 국가로서 많지도 않은 인구를 먹여 살리지 못해 이렇게 수많은 인민들이 이역만리땅 까지 헤매게 하는가. 350만 명의 주민들을 굶어 죽게 한 북한이 과연 국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하는지...

 

지금도 나날이 굶어죽는 사람들을 보고도 아무런 대책하나 없는 지옥의 국가, 또한 인민의 눈을 가리고 눈뜬 소경으로 만들어놓고 입과 귀를 정신적으로 마비시키는 악몽의 국가, 인권유린 국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이리저리 팔리는 몸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저는 이집에서 마음의 자리를 잡으려고 결심하였지만 이 결심 또한 어리석은 결심이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술을 많이 마셨는데 술만 마시면 트집을 걸고 제가 온지 일주일도 안 되어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술질로 하여 본처와도 이혼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비통한 어머니의 소식

 

그리하여 저는 또 이 집을 탈출하여 다시 산동으로 탈북여성을 찾아가게 되었고 여기서 저는 그를 통해 일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가 소개해준 회사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품회사였고 이 회사는 산동성 청도 부근에 있는 교주시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김치 포장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이회사의 상호는 "환영식품회사" 였습니다.

 

월급은 말로는 800원이라도 하였는데 정작 우리 탈북자들에게는 550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므로 말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던 저는 월급을 타 가지고 두 달 만에 어머니가 걱정되어 연길로 나갔는데 우연히 버스 안에서 알게 된 연길 조선족분의 도움으로 저는 어머니와 전화상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돈도 얼마간 보내주면서 다시 제가 연락할 때 까지 뜨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머니와 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연길에서의 일을 끝낸 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연길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여 길림으로 가는 버스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공안경찰들이 올라와 검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증이 없었던 저는 이내 탈북자로 발각되어 공안국에 잡혀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이들은 저를 여기에 오게 된 동기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기막힌 저는 물 한 모금 밥 한 술 들지 않고 눈물로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막연한 생각으로 눈앞이 다 캄캄했습니다.

그러는 제가 불쌍하였던지 파출소장은 식당에 데려가 쉬게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당에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저를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고 제가 겪은 고생에 대해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공안국 경찰들은 제가 가지고 온 가방을 가져다주면서 세수하고 화장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한테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돈900원이 있었는데 이 돈은 고스란히 회수 당하고 말았습니다.

 

식당아주머니는 자기가 20년간 공안국 식당을 해왔다며 이렇게 잊지 말고 빨리 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단 둘만이 있었으므로 아주머니만 눈감아주면 얼마든지 탈출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길까지 알려주면서 짐을 가지고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마운 아주머니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 곳에서 탈출하게 된 저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안국 경찰들이 어느 구석에서 저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고 뒷덜미를 잡힐 것만 같았던 그 때 심정...

 

공안으로 부터 탈출은 했지만 돈 한 푼 없는 저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다 생각 없이 가방에 문을 열었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안에는 돈이 500원이나 있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알았습니다. 일부러 저를 도망치게 도와준 공안경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곧 저는 다시 회사에 돌아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여 이번에는 어머니를 꼭 모셔 오리라... 그러던 올해 3월에 하도 어머니의 소식이 궁금하여 전화를 하였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통한 소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두 딸의 탈북으로 인해 함경남도 어느 이름 모를 농촌으로 추방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뜻밖의 슬픈 소식을 전해들은 저의 마음은 뼈가 저미도록 아팠습니다. 어머니를 데려오지 못한 저의 비통한 후회는 이미 때늦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 하나 지켜주지 못한 단말인가.

나는 어머니 하나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단 말인가.

불쌍하신 나의 어머니 지금쯤 어느 산골짜기에서 헤매며 모진 고생 다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 할망정 또 다시 어머니를 고통을 겪게만 하는 이 죄 많은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어머니. 탈북한 두 딸의 죄로 우리 어머니가 당해야할 고통은 과연 무엇이기에 불쌍한 나의 어머니를 인적도 없는 그런 산골짜기로 추방 보낸단 말입니까.

 

이것이 국가가 흩어진 가족들에게 베푸는 선물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슬프고 비통한 인민의 한가족 한가족에게 주는 대가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김정일이 말하는 인덕정치라는 것입니까.

 

짐승도 주인이 먹이를 주지 않으면 굴 안에서 뛰쳐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창조성, 의식성, 자주성을 가진 인간들이 굶어죽기를 바라며 앉아서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를 죽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이런 정치 고수하겠다는 것은 인민들을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고 과연 무엇입니까. 어찌 피도 같고 언어도 같은 한민족인 저 한국과는 이토록 다른 길을 가는 것인지 ....

 

만약 한국에서 우리가 태어났다면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당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과연 이것이 북한에서 말하는 인간자주화 방침이란 것입니까.

 

6.25 전쟁시기에는 헤어진 월남자 가족들이 남으로 나간 가족들과의 상봉이 두려워 국경지대로 쫒아 보내 서로의 소식을 끊게 하는 것이 바로 북한 땅에서 김정일이 베푸는 인덕정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에서 말하는 인간의 권리이며 자유입니다.

 

어찌 우리가 북한인권문제를 침묵으로, 그리고 "기권" 으로 외면할 수 잇단 말입니까.

한민족이 겪는 고통과 슬픔이 어찌 자기가 겪는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고해서 모르는 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글을 읽는 모든 탈북자들과 북한인권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한국에 존경하는 동포여러분!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고 우리 땅이 하나가 되려면 북한인권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북한에 있는 우리부모형제들을 비인간적인 자유와 권리 속에서 하루빨리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든 힘과 노력을 다 바쳐주기를 여러분께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200512월 아침(중국에서)

 

 

2005-12-07 18:58:0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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