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씨의 증언 > 탈북민 수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민 수기

이미영씨의 증언

작성년도 : 2001년 630 0 0
  • - 별점 : 평점
  • - [ 0| 참여 0명 ]

본문

이미영씨의 증언

- 이미영

 

 

지난 713일 통일교육원에서 열린 본회 주최 제3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생자원봉사자 수련회에서 행한 이미영씨의 증언

 

이 미 영 (탈북자, 20005월 남한 입국)

 

남한에서 진행한 88올림픽 그것을 방해하려고 비행기 폭파사건이라는 것을 만들었잖아요. 김현희. 여러분도 다 잘 아시죠. 하지만 그것은 실패했어요. 그러자 남한의 88올림픽에 맞대응 조치로서 북한의 경제력으로는 감당치 못하는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이라는 것을 벌려놓았습니다. 그때 북한 당국은 군, 인민들에게 제13차 청년학생축전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우리 인민생활은 완전히 풀린다고 그렇게 선전을 하였어요. 그때 북한인민들은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노력적으로 정말 지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13차 청년학생 축전은 성과적으로 대성황리에 진행되었지마는 인민생활은 여전히 하강선을 그었습니다.

 

그 상황에 또 김일성의 죽음이란 것이 북한사람들에게 정말 놀라운 그런 변화를 가져왔어요.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수령님만 믿고 삽니다." 그런 노래가 있어요. 하늘처럼 믿고 살던 김일성의 죽음 앞에서 북한사람들은 정말 당황했습니다. 13차 청년학생축전으로 북한 당국은 통일거리와 광복거리를 비롯한 5·1경기장 등 광범한 건설 대상물들을 많이 벌려놓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적자가 많이 나왔어요. 그때 북한 당국은 주민들을 향해서 우리가 사실 발전할 수 있는데, 잘 살수 있는데, 미제를 등에 업은 남조선 괴뢰도당과 야합한 국제 반동들이 사회주의 말살정책으로 경제제재를 가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제난을 겪고 있다고 남한에 그 화살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정말 배급에 의존해서 살았는데 배급중지라는 당국의 지시 앞에 정말 놀랐고, 또 실지로 공화국창건 이래 발벗은 아이들이 거리와 마을에 등장을 했으며, 아파서 병원에 가도 약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그런 상황들, 실지로 굶어서 죽는 시체들 앞에서 북한 사람들은 정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리와 마을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막 죽어나가기 때문에 97, 98년도에 군인들을 동원하였습니다. 북한에는 화장법이라는 것이 없어요. 죽으면 관에 넣어 가지고 땅에다 묻는데 너무도 많이 죽어서 여름 같은 때에는 그 시체를 미처 처리하지 못해서 신천시장 옆에 쌓아둘 정도였어요. 군인들을 동원해가지고 소달구지에다가 짐짝처럼 시체를 막 걷어가지고 그위에 거적데기를 덮어서 공동으로 합장하는 그런 한심한 형편을 초래하였습니다.

 

다음은 제가 평양의 실례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물론 외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평양의 거리를 보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정말 공원적인 도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제가 지방에 강연을 가보면 임대주택들이 7평 짜리도 있고 13평 짜리들도 있더라구요. 하지만 평양에는 그런 아파트라는 것이 없어요. 제일 작은 아파트가 18평 이상입니다. 그리고 정말 광복거리나 통일거리, 그 거리는 정말 잘 뚫어졌어요.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깨끗합니다. 하지만 주민들이 편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요. 외국선전용으로 지은 그 거리와 마을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평양시민들은 그 넓은 집안에서 거의 이불을 개지 못하고 펴놓고 살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더운 물이라는 것은 전혀 없어요.

 

정말 북한은 권력이나 있어야 살기가 좋은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외화난입니다. 쌀 한 박에다가 사금을 다 일어가지고 정말 손끝에서 피가 날 정도로 국민들이 외화벌이를 합니다. 그것은 다 중앙당으로 올라가는데 다 김정일의 것이 됩니다. 여러분도 다 보셨죠? 김정남이 트렁크에다가 달러돈을 어느 정도로 넣고 다니는가를 북한 인민들이 그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남한방송도 못 듣게 합니다. 라디오가 있으면 주파수를 다 고정시켜 놓고 보위부에 등록을 하게 돼 있어요. 그것을 몰래 듣다가는 정치범으로 체포를 당하게 됩니다.

 

다음은 북한의 군사적 측면에 대해서 간단히 실례를 들겠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강성대국을 요란히 떠들고 있지마는 저는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북한이 비행기나 함선 대수가 남한보다는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능이 낙후하고 매우 노후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난번 서해교전의 실례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잘 아시겠지만, 베트남 전쟁이 북부 베트남의 무력 침공으로 일어났잖아요. 그때 미국의 60만 군대가 투하되고, 우리 남한 군대도 한 개 군단이 투하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후에 정전이 되자 북부 베트남은 교활한 전략 구실로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미국에 호의를 베풀면서 미국에 접근을 했어요. 원래 북한하고 북부 베트남하고는 아주 사이가 좋은 나라입니다. 그때 북한에서도 북부 베트남의 그 전략전술에 속아넘어가서 북부베트남이 수정주의를 한다고 대대적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북한도 속아넘어갈 정도로 북부베트남이 교활한 전술을 썼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됐습니까? 미국은 북부베트남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남부 베트남에 침투시켰던 미국 군대를 철수시켰잖아요. 그러자 북부베트남은 무력으로 일사천리로 남부베트남을 침공하지 않았습니까?

 

원래 공산주의자들의 철학과 신조는 "우리는 과정은 보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결과만을 놓고 생활을 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난 36년 동안 그런 공산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는데 저는 숨이 끊어져 가는 군수공업을 다시 소생시키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원래 함경북도 같은 곳에서는 인민들에게 9년째 배급을 주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전국적으로 볼 때는 거의 7, 8년 째 배급이 중지가 되고 7, 8년째 생활비를 전혀 주지 못했지만, 또 인민들이 300만명 씩이나 굶어죽을 정도가 됐지만, 세계에다가는 어버이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 밑에 우리나라에서는 만풍년을 이룩한다고 선전을 하다가 97년도부터 자기의 자존심을 호주머니에 놓고 해일현상과 한랭전선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고 적십자와 세계의 식량원조를 구걸을 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온 저는 남한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마는, 제가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현대적으로 잘 꾸며진 그 공항이 멋있고 놀라웠지만 그 드넓은 공항 안에 해외 관광객들로 꽉 차있는 그 모습, 그 수많은 해외 관광객이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에 대해서 저는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북한에는 해외 관광이라는 말조차 없어요. 이 해외관광은 고위급 간부들에게도 전혀 해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해외 관광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또 북한 내를 오가는 것도 정말 여행증명서라는 것을 떼고 나서야 오갈 수 있는데 그 여행증명서도 본인의 결혼식이나 부모 사망, 환갑 등 특별한 그런 사유를 제외하고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는 그런 생활입니다.

 

다음은 제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느꼈는데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작은 나라에서 넓은 도로에 물결처럼 흐르는 차량의 흐름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 수많은 차들이 대다수가 자가용차라는 점에서 많이 놀랐습니다. 북한에서는 자가용차라는 것을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여행의 자유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이 되고, 종교·집회·결사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이 된데 대해서도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한두 마디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제가 남한에 와서 힘든 점도 있었습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우선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동물과 다르잖아요. 잘 먹고 잘입는다고 만족을 누릴 수 없잖아요. 물론 제가 북한에서 중류급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경제적인 생활을 비교했을 때 남한과는 비교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집에서 먹는 밥이나 찬 같은 것은 그렇다 치고 과일이라던가 여기서는 한달 월급만 받으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잖아요. 저축을 하자고 생각을 하니까 돈을 아끼죠.

 

제가 한가지 실례를 들겠는데 중국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남한에서는 과일이 비싸니까 중국에서 많이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과일을 먹기가 힘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과일을 많이 먹고 왔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와 보니 비싸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제가 저축을 하니까 비싸게 느껴집니다. 적응이 되어가나 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정도 큰 사과 한 알은 시장에서 50원까지 합니다. 조금 작은 알은 35원까지 그렇게 받았습니다. 한달 월급 70, 80원을 받아 가지고, 그것도 지금은 안주잖아요. 죽기 전에 원이라도 풀어준다고 결혼식상이나 환갑상이나 그럴때만 사먹지, 사먹지 못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북한에서도 잘살았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그것은 아주 풍족하고 만족을 할 수 있었는데 정신적으로는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우선 제가 북한에서는 의사 생활을 하고 남편은 후방일꾼(군수지원)을 하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은 저희 남편이 한마디한다거나 제가 한마디하면 거의 다 거절하는 곳이 없었어요. 그리고 다 사람들이 아는 척 하려고 하고 웃으면서 좋게 대해 주었습니다. 관계를 좋게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의사생활을 하다보니까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그런 면에서 편했는데 남한에 와서는 우선 직업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제 남편도 취직하는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남한에 와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참 성실한 편이거든요. 순박해요.

 

그래서 서울기능대학에서 6개월 동안 용접기술을 배웠습니다. 북한에서는 그런 일을 안 했잖아요. 정수기능대학을 졸업하고 집에만 있기가 그래서 요리학원에 다녔습니다.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쪽으로 취업을 진척시켰습니다. 오후에는 휴식을 하니까 몇 군데 더 취업을 알아보곤 했는데 3일 있다가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연락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회사에서는 금방이라도 될 것 같아서 요리학원도 한달 다니다 그만 두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희 남편이 식사를 참 잘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인데 식사를 안 했습니다. 철이 없는 작은 아이가 "엄마 아빠는 왜 계속 낮에 집에만 있지?"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아이들이 아빠 어디 다니냐고 물어볼 때 창피하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고 고민을 할 때였습니다. 사람이 막 힘들 때 그리고 많이 찾을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습니다. 밤에 잘 때 왕진 같은 것을 자다가도 많이 갔습니다. 그때는 막 짜증이 났는데 그때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가 그때가 보람이 있었구나 하는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데 남한에 와서는 그런 것이 없어졌어요.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갈 때 어느 곳인가 하고 물어 보아야겠는데 억양이 다르니까 말을 하면은 한번 더 쳐다보고 하기 때문에 말하는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서 많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남편은 취직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잘 믿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좋은 회사를 만나게 해주시려고 먼저 회사들이 안된 것 같습니다. 큰 회사에 들어갔는데 참 잘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한에 와서 1년 좀 지났어요. 오래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너무 자유로워서 이 세상이 좋아요. 여러분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너무도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 진가에 대해서는 다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감동을 받은 부분은 자원 봉사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놀랐습니다. 자본주의 나라는 약육강식이 지배되는 나라, 정말 냉정한 사회, 나만 아는 사회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능력만 있으면 인정을 받는 사회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능력이 있으면 인정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좋습니다.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은 능력이 다 있는 분들인데, 어디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간당 다 돈이잖아요. 그런데 대가가 없이 일하는 것이에요. 누가 그렇다고 북한처럼 영웅 칭호를 한다거나 따라배우기 운동을 하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런 자원봉사단이 있다는 데에서도 많이 놀라고, 서로가 자원봉사를 해 주겠다고 전화를 오는 데에서도 남한사회의 인간적인 그런 풍요로움이랄까, 그런데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20017월 이미영

 

 

2004-11-18 00:26:31

출처 : 탈북자동지회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