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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좌충우돌 정착기 - 박영희

작성년도 : 2005년 63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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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정착기

- 박영희

 

 

내가 한국에 들어올때까지만 해도 한해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불과 56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468명의 탈북자가 그것도 한번에 한국으로 들어오다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사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탈북자가 늘어난다는 자체는 북한 당국이 우월성을 운운하며 썩어들어가는 체제에 강력한 항생제를 들이댄다 해도, 자유를 갈망하여 잘못된 체제에 항변하여 뛰쳐나오는 인민들에게는 아무런 효력도 내지 못하며 오히려 반항만 더해갈 뿐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입니다.

 

조부모님이 북한정권을 반대했다는 죄 아닌 죄로 인해 직계자녀는 물론 3세인 우리들 까지도 그 영향을 받으며 북한에서 온갖 차별을 받아왔었습니다. 그렇게 가슴에 한을 담고 살다가 끝내는 견딜 수 없어 고향을 떠나서 죽을 각오로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의 나라 땅을 가로지르며, 어렵고도 먼길을 지치도록 떠돌아다니며, 마침내는 희망에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환희와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그 이후로 내 인생은 새롭게 다시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북한에 있을때는 남조선이라 부르며 적대시하던 이 땅을 이제는 당당한 우리나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주 까끔은 인터뷰 중에 한국정부에 대해 이라고, 국군을 말할 때 괴뢰군이란 명칭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곤 합니다. 북한에서 30년 동안 배워온 것이라 쉽게 바꿔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을 목적지로 정하고 떠나올때부터 큰 포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내 뜻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살아가는데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들어와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어려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생활풍습이며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북한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집을 배정받아 와보니 새로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아파트이고 우리가 첫 입주자여서 슈퍼도 없었습니다. 밥은 먹어야하는데 시장은 어디서 봐야할지, 지리도 모르는데 교통은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밖에 나갔다가는 집도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우선 이곳에 와서는 한국말과 함께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탓에 의사전달이 잘 안되는 떄가 많았습니다. “사회에 나가게 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거라는 말에 좋은거면 많이 주세요"라고 해서 주변사람들에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적도 있고 또 상대의 도움에 나로서는 최대의 고마움의 예의 표시를 하는라고 북한에서 처럼 일 없습니다고 했다가 오히려 그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적도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황당했던 일들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 황당함으로 남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면, 또 사회에 정착을 해나가려면 많은 것을 스스로 터득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착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직장문제였습니다. 이 점은 어느 탈북자나 똑같이 겪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일자리를 찾아 무슨 일이든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가늠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직장생활만 했던 것으로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내게 어느 누구도 어떤 일을 해보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어떤 방향으로 일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물어보는 이도 충고를 해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고민하던 끝에 먼저 한국에 온 한 탈북자의 소개로 들어간 곳이 식당이었습니다. 그곳은 한국에서의 첫 직장이었다. 나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낯선 말씨에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은 나를 한 번씩은 다시 쳐다보곤 했고, 어떤 손님들은 빈정대는 말까지 곁들였습니다.

거기에다 식당종업원 중 일부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는 통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끝내는 쓴 소리 한마디를 남기고 5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야 말았습니다.

 

남한에서 잘살아 보리라고 마음먹고 문화가 다르면 어떤가, 언어이해가 좀 안되면 또 어떤가, 한 동포인데 차별이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사회생활에 발을 내디뎠던 터라 그 아픈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그 후로는 직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렵기만 하고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사화로 발을 떼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넘도록 직장에 나갈생각을 못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집으로 우편물 한통이 왔습니다. 거기에는 생활보호 대상자를 위해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직업훈련교육이 진행되니 신청을 하라는 내용 이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 공부라도 해보자고 결심을 굳히고 서울 직업전문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아마 그때 좌절하고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대한민국에 정착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서울직업전문학교에서 6개월간 공부하는 동안 나는 또 다른 남한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에게 서 친근감과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편견을 두지 않고 친구가 되어주었고 살아가는 지혜를 주었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 속마음까지도 들어주고 진심어린 조언도 해 주었습니다. 또 사회생활에 대한 자심감도 심어 주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그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남의 사람이나 북의 사람이나 우리 서로 한 동포이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져 50여 년 동안 완전히 다른 체제에 살아오면서 생활방식도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심지어는 언어까지도 달라졌습니다. 이런 현실 조건에서 탈북자들이 남한사회에 정착하기란 매우 힘들었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제일로 가슴 아픈 것은 한 핏줄을 나눈 동포라고 희망을 갖고 찾아왔다가 그들에게 받는 차별과 냉대였습니다.

 

억압과 기아에서 벗어나 자유와 안정된 생활을 위해 동포들을 찾아온 탈북자들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생사를 건 탈북과정에서 받은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해 준다면 탈북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며 마음에 평안을 찾고 정착을 잘 해나갈 것입니다.

 

또한 탈북자들 스스로가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고 경쟁사회에 뛰어들어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잘 정착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59월 박영희

 

 

2005-12-02 14:50:44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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