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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햇빛을 그리며

작성년도 : 2008년 64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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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그리며

- 햇빛

 

 

1999년 북한을 탈출해 여러 사람과 함께 우리는 중국에 들어섰다.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한 두만강 물살에 온몸을 가누며 그래도 죽지않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드디어 중국에 왔던 것이다.

 

7명의 사람 중에 그중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렸고 중국땅 도착해서부터는 각자 뿔뿔히 흩어졌다. 어디로 어떻게 팔아버리는지 조선에서 워낙 굶고 앙상한 몸을 이끌고 온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귀찮기만했고 눈앞에 보이는 건 오직 먹을 것 뿐이었다.

 

16살밖에 안된 나를 팔아먹으려던 사람들은 너무나 앙상하고 뼈밖에 없는 나를 보고서 혀를 찼고 그날부터 영양제며 맛있는 음식도 갖다주었다. 먹어도 먹어도 자꾸 먹고싶고 누가 빼앗을세라 뭐든지 눈치를 보면서 게 눈 감추듯 했다. 배가 부르면 잠을 자고 깨면 또 먹고...

 

몇 달이 지나 나의 몸과 건강상태는 몰라보게 달라져있었고 북한에서 올 때 나의 몸무게는 31키로밖에 안되였지만 그 후에 50키로를 흘쩍 뛰어넘었다. 얼굴색도 이제는 어엿한 여자로 보였다.

 

나의 갑작스런 변화에 사람들은 많이 놀라워했고 나를 보살펴주던 그 집 아줌마도 나에게 잘해주었다. 하지만 그 아줌마의 남편은 인신매매군으로써 이런 식으로 해서 어느 정도 몸이 제 상태로 유지되면 한족들에게 팔아버린다. 마치도 새끼돼지를 데려다 키워서 살 많이 찌게하고 팔아먹는 격이였다.

 

어느날 한 남자가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 집에서 나는 첫 생리도 하게 되였고 임신도 하게 되었다.

 

그 동네에 북한여자들 몇 명 홀아비들과 살고 있었지만 그들을 만나는 일은 절대 금지시켰다. 혹시나 우리끼리 도망을 칠까봐 그랬던 것이다.

 

임신 8개월 되던 날 우리동네 북한여자들이 다 잡혀갔다는 소문이 나의 온몸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아기도 낳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기를 억지로 떼여놓고 엄마들만 잡아갔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날부터 나는 집안에 있는 감자움에서 잠자리를 펴고 잤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래도 잡혀가는 것보다 나아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랑 집에서는 나를 다른 데로 팔아버리려고 음모를 꾸몄다. 중국돈 9000원으로 친지들과 동네사람들한테 빌려서 샀는데 잡혀가면 끝장이라는 눈치였다.

 

다른 잘사는 부잣집 가서 살면 돈도 많고 내 호적도 만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이 인간의 탈을 쓰고 뱃속에 있는 자기 핏줄도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단돈 9000원에 목이 메여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까지 하는 망할 놈의 집안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하여 나는 또다시 다른 집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신랑 얼굴 한번도 보지 못하고 갔다. 그 집에 가니 대머리에 말조차도 못하는 벙어리 아들한테 내가 시집을 왔던것이다. 흑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갔다.

 

그 집에서 나는 얼마 안되여 아이를 낳게 되었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신랑은 나에게 뭐라고 자꾸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바보멍청이가 또 뭐라고 하나 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와 살면서 단 한번도 내가 이 남자의 마누라라는 생각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하면 여기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나의 온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냥 히히 웃어주었지만 속마음은 아예 딴방향으로 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기회를 타서 어린딸을 데리고 나는 탈출을 시도했다. 눈 안보이는 시어머니 보고 잠깐 동네 놀러 갔다 온다 하고 드디여 나는 버스에 탔다.

 

그런데 아이가 자꾸 안가겠다고 우는 바람에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 다음날 잠자고 있는 아이를 남겨두고 혼자 떠날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아이가 아무리 안가겠다고 해도 나만큼은 여기를 꼭 떠나고 싶었다. 깨여나면 제일 먼저 나를 찾으며 울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나는 가고 싶은 내맘을 잡지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시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식당일도 해보고 고생이란 고생 다 겪으면서 살다가 몇 년 지난 지금 한국에 오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 아이가 보고싶어 미칠지경이다. 눈만 감으면 내 앞에서 재롱부리는 것만 같고 그리고 넘넘 보고싶다. 그 집과 연락도 안된다. 그 동네 전화 한통 밖에 없는데 그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고 동네이름밖에 모른다.

 

아 미칠것같다. 지금쯤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까? 불쌍한 우리애기 너무도 어린나이에 부모 없이 살아갈 아이가 불쌍하다. 그 아이는 죽어서도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이 나로 하여금 오늘도 눈시울을 적신다.

 

200812일 햇빛

 

 

2008-01-03 03:19:1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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