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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목숨과 바꾼 자유 - 김길송

작성년도 : 1999년 51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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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2년 평양시에서 고급군관이시던 아버지와 간도 특산물 판매 상가의 책임자이시던 어머니의 3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당시 골수 공산주의자로 전쟁에 참전, 60년후반까지는 그런대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6.25때 남조선 군인에게 밥과 식수를 제공한 사실이 탄로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동자로 전락하여 노동자의 천국이란 선전과는 달리 나도 심한 차별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고등중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음에도 학급간부가 될 수 없어 부모를 원망하며 좌절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을 위하여 청춘의 열망을 더 바쳐야 한다며 군에 입대하였다. 남한방송 아나운서의 간지런 음성과 야한 선전문을 믿기보다는 사상적으로 나를 와해시키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행인지 10년간 군복무후 나는 노동당원도 되고 대학도 추천받아 갈 수 있게 되었다. 내 성분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당시 소련의 붕괴,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 등 공산국가들이 다수의 국민이 바라는 대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자유,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벌목공으로 자원하였다. 당시에도 해외로 돈벌러 가는 것은 젊은층에서 가장 선호하는 최고의 직업으로 손꼽힐 때였다.

그러나 벌목공 생활도 결코 쉬운것이 아니었다. 봉급 50%를 당자금으로 바치라는 지시에 분노한 나는 동료 7명과 합세해 당 간부를 두들겨 패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벌목장을 탈출하여 넓고 넓은 시베리아 땅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그 넓은 러시아 땅도 북한 안전요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3개월간의 은신생활에 두려움을 느낀 나는 러시아 화물선에 몰래 숨어들어 4일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며 숨죽인채 고통을 이기고 남한으로 귀순하게 되었다.

성장환경이 다른 사회에서의 정착생활은 쉽지 않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 뉴스를 접할 때마다 북한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하던 정치인 비리, 강도, 사기사건… 과연 이사회가 내가 적응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사회인가 하여 불안하기도 했다. 지금에야 언론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가 나에게도 있음을 알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 자유로 인해 탈북자들이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정말 싫다. 탈북자들이 죄를 지으면 큰 범죄처럼 생각하는 언론의 눈길에 나는 불만을 가지기도 하였다. 남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아무렇지도 않고 북한인이 실수를 하면 뉴스가 되는 것이 싫었다.

나는 목숨과 바꾼 자유가 헛되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나아가서 나 때문에 부모형제가 당하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론도 배울 겸 대학교에 입학해 어린 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남북의 보이지 않는 벽을 무너뜨리려 한다. 학교생활중 공부할 때는 부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던 여학생들이 강의를 마친 후에는 커피숍 등에서 남학생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고 때로는 서슴없이 담배를 요청하는 여학생들… 이들의 태도를 수용하는데 한참 걸렸다.

학교를 다니며 병행하던 직장생활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북한과 전혀 다른 회사체계, 인간생활, 상사와 부하관계 등….

업무는 큰 문제가 안됐지만 동료들이 북한에서 왔다는 나를 화제로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문제가 언론에 나오기라도 하면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잘 대답해 주었지만 그것도 하도 지속되니 짜증이 나고 나중에는 "내가 북한 전문가인가? 내가 아는 것도 당신과 똑같다"라고 퉁명스럽게 툭 쏘아 붙인다.

지금의 경제상황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북한에서 온 동료중 직업없이 방황하는 친구들,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어도 도와달라고 할 부모친척, 동료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럽다. 물질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에 든든히 두 다리를 뻗고 설 수 있도록 얼마동안아리도 도와주었으면 싶기고 하다.

이제 나는 가정도 있고 2세도 있어 귀순 당시처럼 외로움은 없다. 그러나 북한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적응을 못하고 혼자 왔다는 죄책감으로 방황하는데 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었으면 싶다. 아울러 우리들도 누가 도와주기를 바라기보다 스스로 열심히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999년 9월 김길송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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