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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녘땅에서 의사로 봉사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 김은철 (1)

작성년도 : 2004년 56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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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누구에게나 딛고 있는 땅이 있는 것처럼 각자에겐 태어난 땅이 있고 태어날 땅이 있다. 그렇게 정해진 땅은 삶의 시작을 배우게 되는 터득의 현장이고 무대가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조국이란 말과 더불어 사람들은 그곳에 얹혀있는 이유를 알기에 앞서 뇌리 속에 하나하나 조각을 새기듯 환경이 가르쳐 준 내용을 익히며 그들 삶의 정체성을 갖춰가게 된다. 그래서 쌓여진 그 정체성은 부정할 수 없거나 거부하기 힘든 운명이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삶에대 해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학교 선생들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마음은 어느새 어릴적부터 갖고 있는 낯설지 않은 정서가 되어 버렸다. 그 정서와 더불어 신성시해야 할 또 다른 사회의 분위기를 익혀야 했는데 그 결과 조국은 실제의 모습, 말하자면 땅이나 가로수, 한가로이 엎디어 살갗을 태우곤 했던 강변이 아니라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일관되었다. 그 조국의 마주켠 변에는 한사람의 영웅이 나란히 서서 등식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땅위에서 살려면 한 영웅을 숭배하는 목가를 되풀이해야 만 했다. 그리고 그 목가는 삶의 지속을 위한 기초적인 방식이었으며 필수요소였다. 어려서부터 배우고 연습된 행동은 전혀 거부감이 없어 생존의 기초질서가 되었으며 파블로프의 사회적 실험형태, 길들여진 습관이자 본능을 너무 쉽게 떠올리게 한다.

1967년 봄 그런 환경에서 나는 태어났고 세상으로부터 아득히 분리되어 있음직한 그곳은 그때에도 그랬을 것이라 본다. 그땅이 태어 날 곳으로 지정된 것은 어쨌든 우연이었고 그 토양의 풍토에 스스로를 길들이며 세상의 색깔을 배워 나가며 살아야 했던 것도 정해진 운명이 었다. 그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뿐더러 그것을 부정할 이유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확고한 신념뿐이었다. 운명앞에 소명을 다하는 것뿐이었고 그땐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었다. 태어난 곳은 인구 30만명의 작은 공업도시였다. 해방후에 많은 행정개편이 있었고 할아 버지 말에 의하면 미인과 포수가 많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지형상 분지모양을 하고 있는 그곳은 독로강과 청천강이 중심을 관통하여 흐 르고 있는 요충지라고 했다. 대학에 가기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74년 시작된 초급학교 교육과정은 하나의 사고와 양식을 익히는 연습의 시작이었다. 선생님들의 지시봉에 의해 가리켜진 글이나 종이 걸이위의 그림들은 태어나 받아들이게 되는 그대로의 사고가 되었으 며 또한 뇌리속에 선명한 기록을 남기는 것들이었다. 잘 연습된 행동 과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유일 사고는 삶의 지침이었고 그후로도 오랫 동안 삶의 보증서였고 보험증서가 되었다.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가 운데 그런 것들은 분명히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그러니까 당연한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하루의 일과는 "한 영웅"에 대한 충성의 목가와 한 손을 높이 들고하는 정직한 자세의 다짐으로 시작되었다. 매일 20분간의 이런 의전행사는 어려서부터 처음 익히는 자음이나 모음, 또는 산수문제 이상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행사의 주인 인공인 국가 통치자는 보통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인 으로 생각되었다. 행사가 있는 날이면 애국가대신 "장군의노래","만수 무강 축원"등을 열창해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식식립(의식화)이 보다 많아지는 계기를 갖게되었다. 초급학교 2년때 소년단이라는 아 동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다. 아동단체에 가입하면 붉은 스카프를 매고 다녔는데 이 단체의 목적도 사회전체의 분위기와 분리될 수는 없었다. 이 단체는 모두 가입해야 하지만 가입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의무적 으로 가입해야 하면서도 초기에는 가입시기를 달리하여 영웅에 대한 충성을 상호 경쟁토록 하였다. 먼저 입학한 애들은 자랑삼아 교내를 누비고 나머지는 당연히 아쉬운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이 아동단체의 가입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고 가르쳤다. 영웅 이 부여하는 일명 "사회적생명"이며 그것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부모 에 의해 부여되는 "육체적생명"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 명 상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다고 수없이 되풀이했고 겁도 주었다. 모든 것이 "영웅"의 덕이라 했으며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하나의 질서였다. 물론 기쁘나 슬프나 마주한 세상과 더불어 자기에게 주어진 토막분의 삶을 살다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활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각자에게 삶이란 영웅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항상 자각하며 사는 것이 편한 것으로 되었다.

학교생활은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만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일체의 개인행동은 허락되지 않아 등교할 때나 귀가할 때나 군인들처럼 모여 다녀야 했고 정해진 교복차림을 해야만 했다. 단체생활이 학교생활의 전부라고 받아 들였으며 이런 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경우에는 "자유분자" 라 는 별도의 호칭과 함께 색다른 관리를 받곤 했다. 한사람의 영웅이 신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신과 관련된 모든 부분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를테면 그 영웅의 생일이 가장 큰 국경일로 간주되고 태어난 곳은 성지로 되었으며 잠시 머물렀던 저택이나 현장은 "사적지"로 특별관리되는 상황이었다. 일요일에는 사적지 청소를 하러 다녀야 했다. 쓸고 닦고 또 옛 주인의 전설같은 설명도 듣곤 했다. 해마다 신정, 영웅의 생일 이면 동상앞에 진달래꽃 바구니를 증정하는 것이 중요한 행사였다. 그 시기를 맞추기위해 한 달 전에 산에서 진달래 나무를 꺽어 방안에서 키워야 했고 꽃 색깔을 진하게 하기위해 빨간 물감을 탄 물통에서 꽃을 피워야 했다.

초급학교 4학년 과정이 흘러갔다. 북의 사람들은 의무과정인 4년간의 초급학교 과정을 거쳐 외부세계의 상이한 사고를 배웠고 그외의 것에 는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되었다. 적어도 인간에대한 독특한 정의와 삶 에 대한 색다른 정의가 뇌리 속에 들었다. 그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 교과정을 합친 5년이란 고등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1982년 10월 평양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중 1985년 8월경 체코유학생으로 선발되 었다. 발표당시 "항상 잊지 말고 열심히 배워 나라에 이바지 하겠노라" 라는 영웅과 나라에 대한 충성의 선서를 했다.

86년 8월31일 다시는 밟지 못할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9월4일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처음보는 외국의 환경은 생김새만큼이 나 달라 도시의 건물이 색다르고 고풍스러웠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밝 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낙원이라는 상상도하기 어려운 것들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을 접하면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와 더 불어 뇌리속에서는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웬지 갖고 싶었다. 프라하에 도착하여 대학과 주거를 등록한 후 지방 에 있는 어학연수원으로가 1년간 어학과 기초과목을 공부하였다. 1달 에 1번 대사관은 생활비를 지급하였고 한달에 1,000코로나를 받았다. 기숙사비와 교과비는 별도로 받아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해외 에서도 주말마다 같은 지역에 회의를 하고 그 상황을 대사관에 보고하였는데 보고내용이란 학교생활, 이성교제, 타국학생과의 관계 등이었다. 3개월에 한번 모든 유학생은 대사관에 모여 사상검증을 받았다. 서구 물질만능을 조심하라는 것과 국가정책에 대한 별도의 세미나 및 공부도 했는데 이는 몸은 해외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평양과 함께 할 것을 주문하였다.

유학생활은 재미있었지만 달라진 환경에서의 1년이란 기간은 생각해 볼 줄 조차 몰랐던 많은 것에 관심을 갖게했다. 단순히 낙후된 환경탓 으로 돌리던 부분에 대한 인과관계와 함께 부정적인 생각도 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만들어 냈다. 거리에는 빨간 바탕 에 흰 글씨체의 사회적 광고가 없었고 주먹을 들고 있는 관청광고, 총검 들고 있는 선동적인 전시광고도 없었다. 어느 뒷 골목에서 검은안경 쓴 공안원들이 차안에서 감시하는 지는 몰라도 보기에 그들은 나라에 의한 광적인 긴장을 느끼고 살지 않았으며 통치자나 나라는 개인의 삶에서 주인도 선구자도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스스로에 대하여 그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체들이었다. 그들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의 정체성이 아닌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추구하는 생활 의 만족과 행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라하는 삶의 의미를 새로 찾는데 가르침을 준 어머니 같은 두 번째 도시였다. 결국 국가는 인간을 초월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가장 깊은 소명의식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던 상태였으므로 이전에 교육받았던 본인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완전한 부정을 할 수 없었다. 그 부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불안정하지만 흔들림이 있고 아주 찰나적이고 편안한 상황덕분에 사실 이전 집주소 의 번지조차 망각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전에 속했던 부류에 관한 것들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제일 높은 지도자는 국가를 초월하고 또국가는 인 간을 초월한다는 독특한 사고에 절어있는 환경에서 당국은 부분적인 부정마저 스쳐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부정, 그것은 전부에 대한 가치 상실이자 너무 당연하다시피 사람들 앞에서 표본을 보여주려고 했다. 프라하에서의 생활은 모든 유학생들에게 적어도 1년반이상 생 활한 사람이라면 평양의 영웅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구 시가의 호프집에서 유행에 취해 버린 사람들의 행상에 비해 한편 으로 약간의 결함으로 보일 만한 옷차림을 하고서 후미진 구석에서 맥주 잔을 기울이며 평양 광기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다. 너무도 믿었던 것 에 대한 부정은 그만큼 준엄했다. 평양은 한 영웅과 그 외 몇 사람만을 위한 삶의 터전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영웅을 각색한 언덕위 동상의 빛나는 광이었다. 그것이 그 몇몇 사람들 에게는 희망과 재미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평양은 희망이 아스라이 사라져 버려 알고는 다시 적응하기 곤란한 삶의 불모지로 느껴졌다. 그들 몇 사람의 감성적인 재미를 위해 평양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개선하는데 써야할 돈을 동상의 광을 내는데 써왔고 쓰고 있는 상황이 었다. 그럼에도 그들 몇 사람은 단 한번이라도 쑥스러운 표정한 번 짓 지않았다. 어쩌면 쓱스러운 표정짓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자라온 땅에 대해 외국인들에게까지 사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불모지는 뭐라해도 자라온 땅이었다

89년 드디어 나는 희망을 찾기위해 떠났다. 당시의 생각으로서는 그 곳이 평양만 아니었으면.... 욕심으로는 하던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우연히 한국에 대한 책자와 TV화면을 보고 평소 이웃나라보다 더 아득하게 생각했던 남쪽 절반의 반도땅이 그 때 희 망으로 보였다. 어릴 적 지리시간에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반도의 남쪽 지역에 망명을 청했고 구원해야할 동포라고 생각해 왔던 남쪽은 따뜻 이 받아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남쪽은 대한민국이라 불렀고 대개들 한국이라고 했다. 조선이라는 말에 익숙했던 나는 한국이라는 말이 낯 설었다. 그냥 서울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삶은 나 름대로 안정을 찾게 해주었다. 서울에서 예과1년부터 6년동안 대학을 다녔다. 이곳에서 마주한 환경이 인내하기 쉬운 것만은 아니어서 때로 는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때로는 아련히 평양이 떠오르기도 했다. 대한민국 주민증이 있는데도 때론 찰나적으로 얹혀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연으로 생각되는 분들이 계셔 새로운 환경을 인내하는 것은 훨씬 부드러웠다.

몇 년 전 졸업을 했고 히포크라테스의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 으매선서에 이어 의업에 종사하고 있다. 인체를 다루는 의사로서 항 상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생명은 그 어디에서나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는 것이다. 항상 뇌리에 담고 그렇게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 소한 노력은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생 명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삶의 한가지 의 미란 생명의 보존에 있다고 했다. 생명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생명이 보존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저울위에 올려진 한줌의 쌀과 혼동되는 평양의 TV화면은 살아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평양의 어린이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강변에 널려 져 먹거리를 찾고 있다. 생체대사가 장애를 받을 정도의 영양섭취 부 족과 성장의 지체현상은 이미 그렇고 그런 뉴스거리가 되어 버렸다. 뉴스거리의 뒷면엔 생명의 보존을 위한 또 다른 "인간들"의 힘없는 움 직임이 있다. 지난 여름 세계가 낯설지 않은 찬사를 보낸 비탈리 카네 프스키 영화 "Freeze, Die, Come to Life"(꼼짝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를 보았다. 비록 폴리비닐에 담겨 1차원의 평면에 비쳐졌지만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임계환경에서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것을 위해 사람들은 움직였다. 사람은 영화장면 따위 같은 비현실적인 것들에 가 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를테면 눈물과 같은 감정표현을 했다. 제도 ,사상,질서,규정과 같은 것은 그들에겐 의미가 없다. 강변을 거닐고 있 는 아이들의 뇌리속엔 오로지 생명의 보존이라는 직감만이 뇌리에 들 어있다.

생명의 보존을 도와야 하는 의사의 눈은 그들에겐 초라한 삶일지라도 그것마저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부분이라는 본능을 갖고 있는 것 같 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본다. 아직은 희망이 있을 때 작은 힘이나마 봉사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램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련다. 남녘과 북녘이 하루빨리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마주앉아 삶에 대해 자연스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

2004년 4월 서울에서 김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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