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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마지막 종점에서 평범한 서울시민으로 태어나기까지 - 고영환

작성년도 : 1999년 54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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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3년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7월14일 자강도 강계시 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강계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휴전직후 개성시 판문군(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건너보이는 땅)인민위원장을 하시다 개성시 인민위원장으로 조동(이동)되어 개성에서 소년시절과 인민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래서 나의 고향은 강계보다 개성인 것처럼 마음속에 남아있다. 인민학교 졸업무렵 아버지가 "외교관이 될 생각이 없는가?"라고 물었 을 때 나는 007가방 같은 것을 들고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나 베이징 ,파리를 다니는 외교관을 상상하고 외교관보다 더 멋있는 직업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간부 자제들만 모이는 평양 외국어 혁명학원 불어과에 전국에서 모인 4천명중 50:1의 경쟁을 뚫고 80명에 뽑혔다.

오랫동안의 기숙사 생활이 힘들기는 했지만 모두가 부러워하는 혁명 학원의 군복과 군모를 쓰고 가슴에는 혁명학원 뺏지까지 달고는 일반 학교 학생들 앞에서 가슴을 쭉펴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1972년에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입학하여 5년과정을 괜찮은 수준으로 졸업후 외교부에 들어갔다. 그 때의 심정이란 하늘의 별이라도 딴 것같은 기분이었다. 일반인들은 꿈도 못 꾸는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남들이 못 먹고 못 보고 하는 것도 먹고 보고.... 얼마나 좋은가?

한국에 오기까지 14년간을 그렇게 외교관으로 지냈다. 중부 아프리카 담당과장도 하고 해외에서 7년정도를 생활했다. 마치 100m선수처럼 휴가 한번 안가고 앞만보고 달리면서 사회주의가 남조선까지 뻗치리 라는 신념 하나만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고르비의 개혁,개방정책과 동구권의 몰락, 동서독의 통일,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등은 나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허물 어 버렸고 내가 꼭 허상을 위해 달려온 것 같은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정신적 혼란은 무의식중에 내 말 속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국 가안전보위부 파견원 감시망에 걸려 들어 사상검토를 이유로 평양으 로 끌려가는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서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계에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서울에 마포 종점이라는 말이 있듯이 평양에는 팔동교 종점이라는 말 이 있다. 91.5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이 바로 마지막버스를 타고 팔동교 종점에서 내렸을 때의 막막한 심정, 바로 그것이었다. 더 갈데도 없고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한알의 좁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두고온 모든 것 귀중하고 친근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한 가 슴저리고 아픈 심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지 대사관을 활용하여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2개월 동안의 기나긴 숨막히는 기간, 순간순간 느껴지는 긴장감과 절망감, 7천만 민중중에 왜 하필 나냐는 하늘에 대한 원망감, 모래알같이 쓰디 썼던 음식들과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 던 긴 시간이 어찌보면 끝난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새로 시작되기 도 한 것같은 고뇌가 덩어리로 엄습하여 나의 몸과 마음은 지치고 지치고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져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노정에서 차창밖으 로 얼른얼른 재빠르게 지나치는 서울의 복잡한 모습이 평양의 단순한 모습보다는 더 골치 아프게 다가오기도 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나는 참으로 많이 울었다. 임진각에서 부모를 생각 하며 울었고, 밤 달빛을 쳐다보면서 울었고, 지나가는 행복해 보이는 단란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도 울었다. 참으로 몇 달동안 나의 생 가 운데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정도로 많 이 울었다.

그러나 눈물은 내려가고 밥술은 올라간다고 오직 세월만이 약이라는 옛날어른들의 말씀 그대로 나는 살아 남았고 더 중요하게는 나 자신과 의 싸움에서도 이겼다. 남한생활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부모형제 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6형제중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셨던 어머니! 나이가 어려 12살밖에 안된 나를 평양 기숙사에 보내놓고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빨래는 제대로 하는지 늘 걱정이셨던 어머니! 외교관이 되었을 때 그 렇게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나 때문에 겪으실 가혹한 탄압을 생각하면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였다.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날 때면 TV에서 군인들이 어머니!하고 외치는 장면을 볼 때면 눈물이 저절로 주르륵 흘러 내린다.

다음으로 괴로웠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혈혈단신 온 나는 마치 거친 바다속에 팽개쳐진 조그마한 쪽배 같았다. 밥도 제대로 못먹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다 보니 건강도 약해지고 감기도 자주 걸렸다. 열이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도 누구하나 들여보는 사람도 없을텐데....

옛날 외할머니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나의 손금과 사주를 보시곤 인 복을 타고 났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그 미신이 맞았던 것일까?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해준 사람 들이 주변에 참 많았다. 그들은 마치 병자를 다루는 진정한 간호사 누 나들처럼 하나하나 보살펴 주었다.

내가 울면 같이 울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나의 곁에서 나의 걸음마를 도와주었기에 직장 동료보다 더 심정적으로 가깝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지낸 다. 그런 분들이 있어 나의 서울생활은 힘들지만은 않았다.

현재 평범한 서울 시민으로 출근길에 차가 막히면 짜증도 내고 얌체차 가 끼어들면 하지 않던 욕도 저절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하루하루 를 살고 있다. 멀지 않아 통일이 된다면 통일된 한국의 자랑스런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북한의 체제가 싫어 떠나왔음에도 고리를 끊지 못하고 북한을 연구하 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긋지긋하 고 보기 싫었던 북한 책자들과 마주하며 씨름을 하면서 뛰쳐나가 식당 이라도 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바로 통일한국을 위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각오를 다지며 열심히 일한다.

저녁은 나에게 있어 완전한 자유인임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다. 밤에 집에 있을 때 그 누가 찾아올까봐 전전긍긍하던 평양생활에서 완 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보위부 사람들이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갈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밤에 누가 집 문을 두드려도 내가 나가고 싶지 않으면 안나가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되는 권리,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서울에서 제2의 삶을 누리고 있다. 당당히 내 한자리를 차지하고 일에 대하여 긍지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부한다.

1999년 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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