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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기분 좋은 만남 - 김창선

작성년도 : 2003년 59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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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만남

- 김창선

 

 

2년간의 정착생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기회의 시간이었던 만큼 생각할수록 가슴 벅차다. 남한생활을 시작하며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과 설레임은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도전과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지난 정착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한층 여유롭고 즐겁다.

 

만남 1 - 서울, 그리고 희망

 

2000년 봄, 김포공항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세월의 회한과 남한생활의 부푼 꿈들이 어지럽게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우선, 서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섰다. 북한에서 선전해 오던 그 모습은 아닐 테고, 자본주의라는 미지의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차창 밖의 서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 활기찬 모습이었고, 난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서울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만남 2 - 형같이 따뜻했던 경찰관 선생님

 

탈북자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남한사회에 적응할 때까지 신변을 보호해주는 경찰관과 많은 것들을 같이 한다. 나도 사회생활의 시작을 마음씨 좋은 경찰관 아저씨와 함께 했다. 막상 하나원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내가 물건을 살 때에는 세심히 살펴주시고 싼값에 사게 해주려고 애를 쓰셨다. 냉장고가 텅 빈 것을 보시고는 집에서 김치며 밑반찬을 잔뜩 싸다 주시곤 했다.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을 때면 나도 꼭 데리고 가셨다. 사람들과 될 수록 많이 어울려 보라는 뜻이었을 게다. 이런 자리에서는 농담이 곧잘 오갔다. 아저씨가 평양 촌놈이 서울 와서 많이 출세했지하면 평양 시내 사람보고 촌사람이라 하시네?”하며 서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아저씨 덕분에 외로움도 모르고 사회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아저씨가 직접 골라주신 옷을 입을 때면 그분의 넉넉한 웃음이 생각난다.

 

만남 3 - 캠퍼스의 학우들

 

나는 북한에서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하고 교향악단의 일원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음악에는 자신 있었지만 남한에서 이 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쟁쟁한 음악대학을 졸업한 경쟁력 있는 음악가들도 많았고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나질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 곳 사람들과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대등한 실력을 갖추고 당당히 경쟁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수소문 끝에 입학 가능한 대학을 몇 군데 찾아냈다. 결국 북한이탈주민 특례전현을 통해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시장경제 체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업에서 내 꿈을 펼쳐보리라 생각하고 경영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막상 학교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니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생활비 문제였다. 등록금은 학교와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충당되었지만 학생인 나로서는 특별한 직업을 갖기 힘들었다. 일정한 수입 없이 공부만 할 처지는 못되니 뭘하긴 해야 하는데... 북한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 가르치는 일을 해보려고 전단도 붙여보고 생활정보지에 광고도 내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서 음대를 졸업하지 않아서 인지 선뜻 내게 아이를 맡기는 부모가 없었다. 결국 새벽 일찍 신문배달을 했다. 일이 고되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일도 많았지만 공부하기 위해 고생하는 거라 생각하니 신문배달 일이 그리 고달프게 느껴지진 않았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하루를 설계하기도 하고 내 삶을 구상해보는 것도 꽤 괜찮은 생활이었다. 지금은 아는 분의 소개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몸도 덜 피곤하고 공부할 시간도 많아져 예전보다는 한결 여유롭다.

 

대학생활은 내게 지식을 전달해 주기도 했지만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어울리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처음엔 대화를 건네기가 어색하여 동기들과 어울리질 못했다. 북한 말투로 선뜻 나서기가 어려워 쭈뼛쭈뼛 하는 내 모습을 본 동료드이 먼저 말을 건네며 다가와 주었고, 우리는 점점 친해지게 되어다. 공부하는데 어려운 일은 친구들이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었다. 이제는 서로의 사소한 감정까지 허물없이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우루러져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만남 4 - 또 하나의 가족

 

정착생활을 하면서 나에겐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고등학생들에게 북한실상을 설명해 줄 기회가 있어 학교에 간 적이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학교 선생님 댁에 초청을 받아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가끔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다. 선생님은 자제 분들이 없어서인지 혼자 생활하고 있는 나에게 무척 잘해주셨다. 나도 혼자 사는 외로움에 선생님께 많이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남편이 고혈압으로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마침 내가 방학중이라 병간호를 해드렸는데 그러면서 두 분과 더욱 정이 많이 들었다. 지금은 두 분의 아들처럼 지내고 있다. 남한에 와서 내가 너무 복을 많이 받는구나 하는 느낌이다. 더구나 남한에서 계속 살고 계시던 외삼촌과 이모를 만나 친척들이 갑자기 많이 생겼다. 사촌형, 누나, 조카가 생겨 심적으로 많이 안정된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생활하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새로운 만남과 도전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너무나 좋은 만남이 이어졌다. 경찰관 선생님, 학교 친구들, 교장선생님, 친척들... 이제 난 또다시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곧 미국에 어학연수를 갈 예정이다. 영어도 배우고 경영학에 대해 좀더 공부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지금은 영어공부를 하며 유학준비에 한창이다.

 

아마 교장선생님의 도움과 조언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것이다. 아직 한국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부딪혀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내 미래에 도움이 되는 배움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자신도 있다. 땀방울 없이 이루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유학을 기반으로 나의 경쟁력을 좀더 담금질하여 훌륭한 기업가가 되고 싶다.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난 끊임없이 도전할것이다. 훌륭한 기업가로 변신할 나의 성공기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언젠간는 마침표를 찍고 싶다.

 

2003년 김창선

 

 

2006-02-06 10:50:5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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