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으로 오기까지 - 김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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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으로 오기까지
- 김원경
오늘은 8월 10일, 한국사회에 정착한지도 3달이 되였다. 지금도 나는 내가 지금 남한사회에서 생활한다는게 꿈만 같다. 아직도 길을 가다가도 경찰차 소리만 들으면 날 잡으러 오는것 같아 소름이 끼치곤 한다. 언제면 이 모든 생각을 버리고 안정된 생활을 할지... 지금도 불빛이 환한 밤거리를 내다보느라면 두고온 고향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억울하게 시작된 1차탈북
나는 함경북도 청진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어렸을때는 그래도 아빠, 엄마의 사랑 속에서 근심걱정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런 행복한 생활도 다 지나가고 우리 앞에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가 들이닥쳤다.
국가에서 주는 배급에만 묻혀 살던 모든 사람들이 배급을 주지 않으니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였다. 다음달엔 준다고 한 배급은 주지 않았고 김일성이 죽은후 부터는 더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집의 가산을 팔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이 산과 들에 돋아나는 풀과 나무껍질을 캐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갔다.
우리가 제일 힘들게 산 때가 96년도부터였을것이다. 지금도 내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군대로 나가기 전의 오빠의 말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엄마는 장마당에서 음식장사를 하셨다. 밑천 없는 사람들이 다 음식장사를 하니 그것도 팔기 힘들었다.그래서 저녁에 집에 올때면 비지 30원어치에다 국수 500g을 사가지고 오면 그걸로 온 집안 식구들이 끼니를 에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학교에 갔다와서 하는 말이 “어머니, 계속 비지죽만 먹으니 한 시간이 끝나면 변소가고 두시간이 끝나면 변소가고 세번째 시간부터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민망해서 못앉아 있겠습니다.” 이말에 엄마가 눈물을 흘리시자 오빠가 “괜찮습니다. 어머니, 비지죽이라도 많이 끓여주세요. 그것도 쌀물이니 맹물보다 배고픔이 덜합니다.” 하고 말하는것이였다.
그해 오빠는 군대로 나갔다. 오빠를 군대에 내보낼때 우리 온가족은 울기도 많이 울었다. 군에 나가기 전까지 밥 한그릇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굶기다가 내보내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오빠는 자기는 군대에 나가니 자기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말라면서 어머니가 입 하나가 덜어서 좋을거라고 엄마를 위로해 드렸다. 오빠가 군대에 나가고 우리집 살림은 점점 더 쪼들어만 갔다.
동생하고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기만 하면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산으로 올라가 산과 들에 돋아나는 풀이란 풀은 다 캐여먹으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토끼풀, 돼지풀, 쑥, 독쑥, 그때는 누구나 다 산에 가서 그런걸 뜯어먹고 살다나니 그런 풀도 산속 먼데로 가야 뜯어올수 있었다.
그해 나는 풀독이 올라서 죽을 번 하였다. 독이 온몸에 퍼지면서 밑을 내려다보지 못할 정도로 온 몸이 부어있었다. 손이고 발이고 빵처럼 부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해는 나같은 환자가 너무 많아서 병원에 사람천지였다. 다행히도 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링겔이라도 맞을 수 있었다. 그해 풀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거기다가 파라티브스병이 도져서 숱한 생명들을 앗아갔다.
나는 독은 내려앉았지만 상처가 너무 흉악해서 병원에 가서 여러 선생님들이 나를 붙잡고 억지로 팔가죽을 한 벌 벗겨내고 말았다. 지금도 날씨가 쌀쌀해지면 그때 상처자리가 보라색으로 된다.
그래서 그런 날이면 장갑을 끼고 될수록이면 사람들한테 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아빠는 동원 판에 나가시고 안들어오시고 엄마는 오늘내일 하면서 다 죽어가고 동생하고 둘이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하루하루를 연맹해 나갔다. 그런 생활 속에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게 되였다. 막상 사회에 나오니 그때는 배급을 안주니 직장 다니는 애들이 별로 없었다.
나도 돈을 벌어볼려고 친구와 함께 친구가 빌려온 이자돈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말이 장사지 나이도 어리고 그런거 해본 경험이 없는지라 몇 번 못굴리고 그만 물을 만들고 말았다. 참 일도 안되기로서 돈 주인은 매일 돈 달라고 재촉을 하지 그 빚때문에 나는 집도 못 들어가고 친구 집에서 주숙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신매매에 걸려들고 말았다. 밑천 없이 장사에 같이 가면 돈을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가지고 그 길에 따라나서는걸 동의하였다. 근데 그것이 나를 중국으로 들어오게 한 첫 탈북 이였다.
세사람의 손으로 팔리고 또 팔리고 연길까지 들어온 나는 그때에야 내가 인신매매에 걸렸다는걸 알게 되였다. 나중에 그것을 알고 제발 나를 팔지 말라고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안했다. 영화에서만 보아오던 인신매매에 내가 걸려들었다고 생각 하니 하늘땅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계속 애걸복걸하면서 사정을 했지만 그들은 콧방귀만 끼였다.
나는 두 무릎을 끌고 앉아 그들앞에 엎디어 빌고 또 빌었다. 나를 팔지 말고 조선으로 보내달라. 난 아직 시집이 뭔지도 모르는 미성년이다. 그래도 그들은 보는 척도 안했다. 나중에 내가 반박을 하자 갑자기 가마뚜껑만한 손이 나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었다. 억울하게 중국 땅에 팔려온것만도 그런데 매까지 맞으니 나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너무 악이 나서 소리 지른 덕으로 나는 많이도 맞았다.
다음날 너무 통증이 와서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온 얼굴이 새파랗게 멍 져 있었고 입에서는 피가 말라있었다. 정말로 이 세상이 저주스러웠고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보아야 차례지는 건 매뿐 이였다.
다음날 나는 그들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팔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는것 같다. 나는 한분의 도움으로 거기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98년 8월부터 2000년 3월까지 농촌에서 정말 힘들게 일하면서 살았다.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저녁엔 9시까지 봄부터 가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일하였다. 가을걷이 다 끝나면 산에 가서 남자들도 하기 힘들어하는 나무 베는 일을 하였고 이듬해 봄이면 그 자리에다가 나무를 심을 일을 하였다.
거기서도 나는 억울한 매를 많이도 맞았다.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 온 사람이라고 업수임을 당했다. 2~3일이 멀다하게 눈두덩이가 퍼렇게 매를 맞고 쩍하면 들어서 세면트바닥에 메치고 팔다리를 비틀고 목을 조이고 이렇게 매를 맞아도 누구하나 가슴 아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죽게 일하고 죽게 매 맞고. 무슨 놈의 인생이 이렇게도 고달픈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도 나를 괴롭히는 것일가? 나는 살기 싫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하고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19살 먹는 해에 나는 약을 한줌이나 먹었다. 그저 이 약을 먹고 조용히 자고 싶었다. 근데 뒤늦게 소식을 알고 사람들이 달려와 병원으로 업고가 온 밤을 포도탕을 맞아 다음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아~ 하늘도 무심하지. 다른 사람들은 수술을 하고도 죽는다는데 나는 죽을 몸이 아닌지 약을 먹고도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왜 이 몸은 죽고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단 말인가? 그런 날이면 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면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들을 원망하면서 온 밤이 지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이런 눈물겨운 생활도 다 지나가고 그 이듬해 나는 누구의 소개로 벽돌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벽돌공장에서의 하루도 정말 힘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저녁 9시 반까지 쉬는 시간이라야 밥 먹는 시간 제외하고는 계속 일만 했다. 몸도 약하고 남자들도 힘들어서 겨우 하는 일을 어린 처녀가 한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일했다. 하루빨리 고향으로 가고 싶어서 불쌍한 부모님들이 다 굶어죽는것 같아서 열심히 일했다. 남들이 다 매점에서 뭐 사먹어도 나는 배 아파서 안 먹는다고 말하고 단돈 1전이라도 아끼려고 사탕 한알 안사먹으면서 일하였다. 거기서도 때로는 인간으로서 받을 수 없는 인격모욕을 받으면서도 억울한 매를 맞으면서도 혼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모든 아픔을 참고 나갔다.
그런 속에서 나는 병이 오고 말았다. 작업장에서 배를 끌어안고 둥글면서 아우성을 쳤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 한 할아버지가 내 곁에 다가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개인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는데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30분이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를 한발자국 걷고 뒹굴고 또 한발자국 걷고 뒹굴고 하면서 드디어 그 집에 도착하였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운영하는 병원이였다. 나의 몸을 진찰하시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이 몸으로 어떻게 일을 하였는가고 하시면서 만성위염이 왔단다. 그 때는 자꾸 위가 아파서 밥도 못 먹으면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 소리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나의 지나온 생활을 다 이야기 하였다. 그 분들도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어린 나이에 너무나 고생이 많구나! 우리도 북한에 친척이 있는데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빨리 빠져나가라고 하셨다.
그때 가는 곳마다 북한사람을 신고하면 5000원씩 준다고 광고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주신 길로 거기서 탈출하게 되였고 누구의 소개로 룡정에서 일하게 되였다. 룡정에서 몇 달을 일하다가 중국에서 대 호구조사가 있어 더는 있지 못하고 누구의 소개로 상해로 들어오게 되였다.
거기서 그 분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3년을 일하였다.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구나 하면서 열심히 살던 어느날 조선족의 신고로 나는 상해 공안에 잡혀 2003년도에 상해간수소에 3달을 갇혀 있다가 신의주보위부를 걸쳐 신의주안전부 집결소로 이관되였다.
거기서 정말로 상상도 못했던 힘든 노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앓았던 만성위염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고 나는 거의 영향실조가 와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작업장에 끌리워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고생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병보로 집에 나오게 되였으며 나는 그때부터 부모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였다.
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이 나타나자 모두들 나를 끌어안고 울기도 울었다. 근데 제일 가슴아픈 게 5년 만에 집에 가니 아빠가 병이 와서 다리를 못쓰는 것이였다. 너무 가슴 아팠다. 온밤을 신음소리 내면서 앓으시는 아빠가 너무 불쌍했고 그 옆에서 시중을 드시는 엄마도 불쌍했다. 그런 부모님들을 남겨두고 다시는 탈북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3년 만에 결심한 2차탈북
그때부터 나는 하루빨리 북한사회에 정착을 하려고 모진 노력을 다 하였다. 돈을 벌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자니 나 혼자만이라도 뛰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부터 나는 장사를 시작했다. 조선 각 지방을 다 다니면서 돌아다녔다. 그래도 말이 장사지 한번도 경험이 없는 내가 장사를 한다는 건 사람 웃길 노릇이었다.
장사란 다른 사람을 속여가면서 해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내가 속히여 여러 번에 걸쳐 그만 협잡 맞히고 말았다. 그 돈을 찾겠다고 나는 집에도 못들어가고 안전원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사람들 찾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어쩌면 세상엔 이리도 사기군 천진지…….
왜 세상은 이렇게 변해갈가? 나는 너무나 억울했다. 잘살아볼려고 노력에 노력을 다 하는데 왜 나한텐 한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것일가? 너무나도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온갖 못된 짓 다 하며 사는 사람들은 잘살고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날이가면 갈수록 생활은 점점 더 해만 가는 것인가? 차라리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만 고생하지 말고 다 같이 없어지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사람을 찾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막막하기만 했다. 평남도 지방은 수해가 나서 망하고 북쪽 지방은 가물어서 농사를 망쳤다. 밭으로 올라가 보니 아빠가 새하얀 머리로 지팡이를 짚고 땅에 다리를 끌면서 감자가을을 하고 있었다. 감자라는게 애기주먹만한 것이였다. 그걸로 어떻게 한해를 넘긴단 말인가? 생각해도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 내려온 나는 며칠을 고민했다. 더는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방법을 생각하자. 드디어 나는 고민 끝에 2차탈북을 시작하게 되였다.
더는 아빠, 엄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들한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나는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냥 엄마하고 3년만 돈 벌어가지고 다시 온다고 약속하고 나는 길을 떠났다.
엄마가 어찌나 반대하시던지... 굶어도 같이 굶고 제발 그 위험한 길을 가지 말란다. 이렇게 커가도록 시집도 못 보내고 고생만 시켰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부모를 잘못만나 너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다고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와 나는 울기도 울었다.
겨우 엄마하고 3년을 약속하고 헤여졌는데 엄마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한발자국 걷고 뒤돌아보고 또 한발자국 걷고 뒤돌아보고 하실 때 나는 엄마~하고 달려가 엄마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의심을 받을가봐 멀리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나는 두만강을 넘었고 중국에 와서 일주일 만에 먼저 한국으로 온 언니들의 도움으로 좋은 분을 만나서 한국까지 오는데 성공하게 되였다. 근데 그렇게 헤어진 부모님들,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중국에서 한국까지 여러 나라를 걸쳐서 한국으로 입국할 때 이게 꿈인지 생신지... 제발 꿈이 아니었으면하고 내 무릎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비행기에서 서울의 거리를 내려다 보면서 우리 모두가 울었다. 이날을 위해서 우리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던가? 또 이런 날을 보지도 못하고 몽골의 사막지대에서 캄보쟈의 악어강에서 수림지대에서 죽은 영혼들은 또 얼마였던가?
이렇게 살아있는 내가 너무 행복했다. 지금은 모든 수료과정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한지 3달밖에 안되였지만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
나오자마자 좋은 분을 만나서 일자리도 얻어 지금 사무일을 하고 있다. 사무일을 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많은 나이지만 모든 분들이 북한에서 왔다고 이제 배우면서 하면 잘 할거라고 믿어주시면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래서 많이 미안하다. 빨리 배워서 일을 열심히 하여 모든 분들께 보답하여야 하겠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많이 안타깝기만 하다. 언제면 그런 날이 오겠는지...
하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하루빨리 사회정착을 하여 이 남한 청년들속에 끼워 나도 이 사회를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 십몇 년을 포기했던 나의 꿈과 미래를 위하여 더 높이 분발할 것이다.
오늘 이 수기를 쓰면서 먼저 온 우리 탈북자분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힘을 얻고 나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금 가지게 되였고 수기에 나왔던 나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자분들이 겪었던 눈물나는 지난날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모든 분들이 무더운 여름철 건강에 조심하시고 항상 좋은 날만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
2007년 8월 10일 김원경
2007-08-11 14:24:39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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