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2) - 김광일
본문
무죄(2)
- 김광일
나는 예심을 한 달도 못되어 끝맺었다. 한 것은 나한테는 예심할 것이 없었으며 사건으로 된 일에 대한 증명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수감자들은 1년이 넘겨 하는 것도 있지만 나는 이번에 사건으로 취급되는 일들에 대하여 먼저 취급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시기에 비법월경을 자주하였지만 단속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한 번은 인계리 유정에 사는 남호철이라는 친구가 자기 처남과 감정상의 암투를 하다가 집에 불을 질렀는데 그 통에 그 집에서 관리하던 농장소가 타죽은 일이 있었다.
그것으로 하여 사회보장으로 일을 못하고 부양가족 분배만 타 먹는 그에게 농장관리위원회에서 분배 몫에서 소 값을 변상처리 시켰는데 분배로는 살수 없는 실정에 더구나 바쁘게 되다나니 어떻게 소를 변상 할 수 없으니 중국에서 소를 훔쳐다 농장에 바칠 궁리를 했고 관리위원회에서도 그렇게 하면 변상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는데 중국에 어찌 갈지,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다가 실수 없이 도강하는 나를 보고는 믿음이 생겼는지 자기를 좀 데려가 소를 가져오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여태껏 도강하면서 남의 집에 들른 적이 없었는데 그 집만은 겨울에 도강하면 얼고 뻣뻣한 처참한 내 모습이 가긍하여 경비대 군인들이 이 집은 정말 믿음직한 집이라고 몸이라도 녹이고 가라고 해서 들어간 것이 정말 젊은 부부간이 마음이 훈훈하여 믿음이가서 오고 갈 적마다 들려가곤 하다나니 정 뿌리칠 수가 없어 들어준 것이 내 일생의 실수가 되었던 것이다.
2003년 어느 날 그를 데리고 맞은편 중국마을에 가서 소를 가지고 돌아와서 팔려다가 그렇게 되지 않자 그에게 고삐를 들려주며 집으로 가서 관리위원회에 바치고 분배를 받으라고 경비대 초소를 피해갈 길을 대주어서 돌려보냈는데 소 값을 치르게 되었다는 기쁜 마음에 술을 마셨던 그가 술 호기에 대준 길로 가지 않고 경비대 초소로 지나다가 단속을 당하여 중국소라는 것이 밝혀져서 보안소에 갇혀 취급을 당하다가 나를 말했는데 비법월경동범으로 되어 나도 잡혀가서 취급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취급을 받으면서 보안원에게 “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이 보안원동지한테 있지 않습니까? 나를 살려주십시오. 보답하겠습니다.”하고 은연중의 암시를 하였다. 정말 보답하겠는가 하고 회심의 물음을 하던 그는 또 나를 위해 시당과 보위부에서 내놓으라고 건의가 오기에 그 점에서 앞으로의 이용가치를 보았는지 약간의 실랑이가 있고는 내보냈는데 결국 나를 살리자니 호철이 일도 무마시켰는데 이 자식이 그 일로 그만 조용히 살 것이지 먹을 것이 없다고 작업반 창고에서 벼 150Kg 도적질을 한 것이 들장 나서 검찰소 취급을 당하였는데 거기서 또 나하고 도강하여 소를 가져온 것이 알려져 연루죄로 나도 취급당했다. 이때도 역시 뒤공작으로 수습하여 그는 형사소송 되고 나는 노동단련대 4개월로 처리되었다.
노동단련대라는 것은 교화소에 가지 않을 정도의 법위반자들을 집결하여 단 기일 내에 강한 노동으로 처벌하는 교양기간이라는 명분으로 시, 군 단위로 조직되어 운영하는 것인데 처벌기간은 1달부터 6달까지이고 노동강도는 사회노동의 2~3배에 달한다. 이곳에서는 강제성의 법 규률이 적용되는데 그 규률이 준수를 위하여 구타 폭행이 보안원들의 묵인조장 하에 공공연히 자행되는 것이 한때 남한에 존재 했던 ‘삼청교육대’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 이해될 것이다.
이 단련대에 가게 된 동기가 비법월경 5차로 돼있었는데 그중에 한번이 소를 가져온 것으로서 결국은 훗날 교화소에 가게 된 주법조인 117조 비법밀수 죄인 것이었다.
단련대에 가게 되였었던 내가 왜서 그 다섯 건 그대로를 가지고 교하 6년형을 받았는가? 그것은 북한에서 군중우에 군림하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관과 일개 평민사이에 오해로 해서 암투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단련대 4개월도 가지 않으려고 뒤 공작을 했다. 그러다 그중 합리적인 방법으로 아예 회령을 떠나버리자고 생각하고 청진의 어느 회사와 교섭하여 직원으로 입직하게끔 해놓고 수속중이였는데 그즈음 해서 이혼 문제가 제기된 것이 악영향으로 되었다.
북한에서는 토대(출신성분)라는 것이 본인의 전도에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데 우리 집안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출신들이고 처갓집 쪽은 처남들이 보위원 두명에 보안원 한명, 처도 인민군중대장 출신으로 너무 대조적이었다. 하여 결혼 전부터 탐탁지 않은 상대로 반대가 많았고 결혼 후에도 나와 특히는 보위원을 하는 큰 처남과 암투 속에 많은 신경전을 하다나니 서로가 배척하게 되었고 그 오빠 덕을 많이 보던 처가 동요하게 되면서 집안에는 엉성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 없는 우리는 이혼하기로 했다.
이혼하면 남남으로 되는 것인데 어떤 상황이라면 서로가 잘되길 바랄까. 나는 아직도 잘 이해를 못하겠다. 서로 잘되길 바란다면 왜 이혼 하는가. 결국은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을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기에 갈라진다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이런 경우들이 생활 속에 상대가 자기보다 잘되면 질투와 심술이 날수도 있는 것이 인간 심리인 것 같다.
나의 처도 이혼을 한다고는 했지만 서로가 나쁜 기억보다 다분히 좋은 기억이 더 많이 있을진대 한번은 함흥에서 18살부터 알고 지내던 여성이 찾아와서 중국에 갔다 오게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그 일을 처리해주느라고 거리를 함께 다닌 적이 있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그 여성의 모습을 동네아줌마들이 보고 처에게 “네 남편이 이혼하자고 한 다음날부터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 원래부터 딴 여자가 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전한 것이 동요 속에 있던 처의 심경을 질투심으로 번지게 했다.
처는 보안서에 찾아가 나를 취급하였던 예심원에게 내가 그런 촌 순사들한테는 안 잡힌다고 흰소리를 쳤다고 날조하여 고발해 그 예심원의 감정을 유발시켰으며 내가 알고지내는 시당, 보위부, 검찰소 사람들과 내가 속한 회사의 책임자한테까지 찾아가 나를 비난하기에 열 올렸다.
여기서 기본은 예심과 보안원의 감정이었는데 내가 찾아가 사실대로 말하는 바람에 무마돼 가던 것이 돌변하여 체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예심원이 처남이 근무하는 회령 22호 정치범관리소 출신이라 보안서에 너무 자주 드나드는 처남과 예심원의 은연중의 암약이 있은 것 같았다. 그것을 나는 예심중에 “넌 실은 교화 갈 죄가 아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말을 드문히 하는 것을 듣고 짐작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나는 예심이라고 해야 먼저 취급된 자료들에 한해서 확인 진술하는 격이 아닌 형식적인 예심이었다.
북한법이란 것이 이렇게 일개의 법관의 마음에 따라서 자의대로 해석 적용된다. 구류장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안원들한테 뭇매질을 당해 ‘K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K자’라는 것은 취급 시 자기들이 의사에 따라 진술이 잘되지 않을 적에는 “너 이 새끼 오늘 좀 K자 되바라.”하고는 늦은 저녁에 끌어 내여 계호들을 시켜 뭇매를 안겨 쓰러진 모양이 영어 K처럼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붙여진 구류장 용어이다.
때리는 자들의 고함소리, 매 맞는 자들의 비명소리로 구류장안의 수감자들은 공포에 전율한다. 죽도록 때려놓고는 감방에 들여보내어 족쇄로 살창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매달아 놓고는 2~3일씩 굶기며 제대로 불지 않으면 이처럼 된다고 수감자들을 위협한다. 그렇게 매달려 2~3일 있다가 풀어 놓으면 실신한 상태로 죽어나는 수도 있다. 이런 고통이 너무도 끔찍해서 변기 모서리를 들이 받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이래도 저래도 죽을 바에야 하는 악만 남아 계호들의 무기를 빼앗아 발악적인 항거를 하는 수감자들도 있다.
내가 구류되었을 적에도 한 수감자가 철창 앞에 다가온 철원이라고 하는 계호원의 무기를 뺏으려다 실패하여 끌려 나가 죽도록 매 맞았다.
그 시기 보안원들의 폭행에 악에 치받힌 청진시 수남보안서 구류장에서는 계호들의 무기를 빼앗아 보안원들과 총질하다가 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주제가를 부르면서 세명이 다 자총(자살)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초보적인 인권도 버러지처럼 짖밟아 버리는 현 북한 정권에 대한 사람들의 쌓이고 쌓인 원한의 폭발인 것이다. 지금도 북한의 구류장들에서는 이렇게 보안원들의 전횡 속에 알게 모르게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
예심이 종결 된지 얼마 안 있어 변호사가 왔다. 그는 가족관계를 물어보며 친척들 속에 비행사, 잠수함, 특수부대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를 묻고는 없다고 하니 내일 재판한다고 했다.
그날 저녁 예심원이 너는 4년 되게 233조 비법월경으로 했으니 내년 노동당창건 60돌 대사에 나오게 된다며 일 년만 고생하라고, 나오면 찾아오라고 했다. 나도 내 죄가 아무리 많아도 4년 이상은 안 될 것 같았다.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5년 인데 기껏 다섯 건을 가지고 그 이상 받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런데 예심원이 “재판소에서 너를 겨누고 있다. 주의하라!” 고 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은 이혼 문제가 제기되었을 적에 쪽 팔리게 재판소에 가기 싫었던 나는 처남에게 “당신들이 능력이 있으니 문건상 처리를 하라. 그 비용은 내가 다 댄다.”고 하며 내가 군소리 없이 있겠으니 근심 말고 영상스럽지 않게 처리하자고 했었는데 그렇게 처리했다가 훗날에 문제가 생길까 우려한 처남이 보안서 수사과장과 재판소 사람들은 데리고 집에 와서 나를 차에 태워 재판소에 데려가려고 한적 있었다. 당시 재판소 사람들에게 내가 “나도 권리와 의무를 지닌 이 나라 공민이라고 법정에 출두시키겠으면 합법적인 절차로 직장 초급당으로 호출장을 보내라.”고 면박을 주어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법관들이라는 사람들이 무참당한것 때문에 재판소 소장과 서기가 앙심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두 명의 계호에게 호송 당해 재판소로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걸어서 너무도 낯익은 거리를 오늘은 범죄자로 되어 재판 받으러 가는 내 운명이 처량하기만 했다.
내가 계호들에게 이끌려 들어서니 재판소장이라는 자가 “그래, 그리 당당하더니 잡히니 어때?” 하며 이죽거린다. 마치 도마위에 마음대로 탕칠 수 있는 고기를 보는 식이였다.
분했다. 이혼 문제 같아서는 이런 자들에게서 모욕당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범죄자로 되어 판결 받으러 와서 릉멸을 당해야만 하는 내 처지가 억울했다.
재판은 재판장, 검사, 서기, 인민참심원, 변호사가 형식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하여 진행했는데 검사가 논고하고 재판장이 확인하는 식으로 몇 분을 하더니 잠시 휴정하자고 했다. 그러고는 소장방으로 가서 20분정도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기본 법조를 233조 비법월경에서 117조 비법밀수죄로 하여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잠시 후 중국에서 소를 훔쳐온 것이 비법밀수 1항에 적용 되여 4년, 비법월경 4차로 하여 2년, 합하여 6년을 구형하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엄청난 형기였다. 이 형적용에 대하여 인민참심원과 변호사에게 의의를 물었으나 북한의 사법제도 앞에서 무용지물인 이들은 재판부를 구성하기위한 형식에 불가했지 피소자에게 이로운 그 어떤 변론을 하지 못한다.
나한테도 의의를 물었지만 나는 묵묵부답 했다. 재판에 대한 상소기일을 10일 주었지만 그 어떤 상소도 안했다. 상소해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상소를 하면 도리어 법에 맞섰다고 보복적으로 10년 형이 15년, 사형으로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내가 왜 4년형이면 족할 것이 6년형으로 되었는가? 한 것은 기본 법조를 233조 비법월경으로 하면 그 법조는 많아서 3년이고 그렇다고 3년 될 죄가 못되니 소를 가져온 것이라 해야 1년을 더해 4년이면 다음해에 있는 대사에 나오게 되니 악심을 품고 형기를 길게 적용할 잡도리로 기본 법조를 117조 비법밀수로 하여 재판하면 이 법조는 작아서 4년형이니 거기에 비법월경죄를 덧씌우면 능히 6년형이 될 수 있어 이 기간에 고생을 하다가 면회를 와줄 사람이 없는 내가 죽기를 바라고 한 악랄한 술책인 것이다.
재판이 끝나고 변호사가 찾기에 가니 이혼신청서가 있었다. ‘이혼을 신청합니다’ 한 문장 한 줄의 이혼신청서에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수표 했다. 이것으로 다난했던 나의 결혼생활은 끝났다.
묵묵히 살아온 생을 돌이키며 상소기간을 지내고 다음날이면 교화소에 가게 된 날 저녁이었다.
어머니와 남호철의 처가 면회 왔다. 남호철은 사회불량으로 10년을 받았는데 그도 그렇게까지 안 될 줄로 알았는데 그렇게 되였다고 억울해하며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6년이라는 말에 너무도 억울해 하시며 “내 살아서 너를 볼 수 있겠니?"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됐소. 엄마 울지 마오. 내 꼭 살아서 나올게 기다리오.”
다른 수감자들은 구류장에서 먹을 것에 허덕였지만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원래 신경성 위염이 있는 나는 신경이 곤두서면 먹지 못하고 토할 때가 있었는데 구류장에서 저락된 운명에 대한 고뇌로 위가 멈추어진 것 같아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오는 음식을 절반도 먹지 못했다.
“엄마 내일 가오. 앓지 말고 사오. 그리고 내 꼭 살아서오니 진짜 찾아오지마오.”
“야 내 꼭 간다. 응. 근심 말라. 내 호철이 안까이('아내'의 함경도사투리)하구 꼭 한 달에 한 번씩 가마.” 하며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해지신다.
이런 순간을 맞고 보니 어머니에게 도움을 안준다고 원망하던 시절도 죄다 후회됐다. 좀 더 잘할걸, 좀 더 약 바르게 어머니 비위를 맞추어 주었을걸 하는 소용없는 후회가 갈마들었다.
“엄마. 앓지마오. 그리고 오지 마오.” 나는 더 있으면 눈물을 또 보일 것 같아 내 스스로 돌아보지 않고 구류장으로 들어섰다.
구류장 입구 철문이 닫히자 철창 속에 있는 나를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릴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다음날 새벽 5시경 나와 남호철 그리고 옥수수 15kg을 훔치던 도적을 잡는다 것이 잘못 잡아서 살인을 한 3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교화소로 가기 위하여 버스정거장까지 걸어갔다. 그들은 매부(매형)과 처남 사이로 매부가 되는 대성이는 주범으로 7년형이고 처남들인 대섭이와 준섭이는 6개월형이었다.
족쇄를 차고 늘 다니던 거리를 죄수가 되어 사람들이 눈길을 피하며 걸어가던 그때의 소외감…….
버스대기소에 도착하니 송이철이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행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구류장에 갇혀서야 비로소 나는 정말 이 세상을 어리석게 살아왔구나 하는 원통함에 탈북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지지리 고생하면서도 좀 생활을 유지해 보려고 법을 어기면서도 나라를 떠나는 것은 반역행위로만 생각되어 언젠가는 잘사는 나라가 되겠지 하는 바람에서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던 나를 이 나라는 무참히도 죄수의 운명으로 밀어버렸던 것이다.
너무도 속고 너무도 억눌리며 살아온 인생이 억울했다.
- 다음에 계속 -
2010년 5월 김광일
무죄(1) - 김광일
2010-05-30 23:38:18
출처 : 탈북자동지회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