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우인희 총살사건(북한판 정인숙사건) - 강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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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우인희 총살사건(북한판 정인숙사건)
- 강철환
우인희는 1960~70년대 북한 주민들에 의해 최고의 미인으로 꼽힐만큼 미모가 뛰어났던 여배우였다. 그는 목란꽃, 한자위단원의 운명, 세동서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북한에서 최고의 여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우인희가 1970년대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 지시에 의해 총살을 당하게 된 것은 돈 많은 재일 교포 주정기가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그와 정사를 가진 후 숨진 사건이 발단이 됐다. 당시 이들이 발견되었을 때 주정기는 벌거벗은 채로 가스에 중독돼 완전히 숨진 상태였고 우인희는 목숨이 겨우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주정기는 필자의 가족과 함께 한배를 타고 일본에서 북송됐던 성실한 학생이었다. 필자는 이 사건의 내막을 거의 소상히 알고 있다. 또 주정기가 살던 아파트는 돈 많은 재일 교포들이 살던 아파트로 필자의 가족이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 살던 집이었다. 이 때문에 필자의 가족에 이어 주정기까지 참변을 당하자 그 아파트는 무슨 귀신이 붙은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났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주정기는 필자의 둘째 삼촌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에 함께 입학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북한 생활에 누구보다도 잘 적응해 나가던 착실한 학생이었다. 그런 주정기가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그의 부친이 사업에 크게 성공해 김일성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면서부터다. 주정기의 부친은 조선중앙방송에 최신 일본제 설비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주기도 해 당시 북한 당국이 주목하던 해외상공인이었다. 결국 돈이 그의 생을 마감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즉각 김정일에게 보고되었다. 김정일로서는 죽은 주정기의 부친이 북한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이 사건을 단순한 불륜사건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일단 북한 당국은 우인희를 살려낸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우인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등 심하게 반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알만한 고위층에 나를 안 건드린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는 식이었다고 한다(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김정일 이름까지 우인희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으로선 우인희를 놔두었다가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우인희의 화려한 외모와 애교 앞에서는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웬만한 고위 간부들 중에 우인희의 자유 분방한 성격 때문인지 그에게 추근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더우기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우인희는 매력이 넘쳤다고 한다. 우인희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백조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외모는 북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타고난 영화배우였다. 그는 영화 촬영 시 거의 두번 반복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연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영화인들은 우인희를 인정했다. 사람들은 우인희가 천성적으로 마음이 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파국을 맞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짐작이다. 그러나 우인희에 대한 평은 나날이 나빠져 영화예술인들의 사상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그에 대한 비판 사업이 종종 있었다고 하는데 우인희는 무엇을 믿고 있는지 거의 주눅들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예술계에 종사하다가 우인희의 공개 처형을 직접 목격한 탈북자만 해도 2명이나 된다. 귀순 무용배우 신영희 씨와 북한의 제2자연과학출판사 정치선동부 기자생활을 했던 김길선 씨다. 이들은 그 때의 참담한 광경을 보고 거의 며칠간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었다고 한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행사가 있다는 통보가 전달되었고 한꺼번에 수천 명이나 되는 예술인들이 그 아름다운 여배우의 처참한 공개처형을 목격해야만 했다.
처형 장소에 나온 사람들 대부분 왜 우인희가 사형장에 사형수로 서 있는지 어리둥절 할뿐이었다. 곧이어 그에 대한 재판(규탄 비슷한 죄폭로)이 진행되었고 딸과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소속으로 AK 소총을 든 사형집행자들이 우인희를 향해 총을 쐈다. 북한 최고의 미인이며 영화배우였던 우인희의 몸은 총탄을 맞아 피로 얼룩졌고 그 끔직한 광경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그 처절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 있지만 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즉 어머니는 당을 배반한 반역자이지만 자신은 당에 충실한 사람으로 끝까지 살 것을 맹세하고 지방공장에 내려갔다고 한다. 일설에는 현재 문화예술계에 종사한다는 말도 있다. 우인희의 남편 류호선은 북한영화계의 이름 있는 연출가다. 우인희가 처형될 당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우인희의 바람기에 견디다 못해 이혼신청을 했지만 당에서 허락하지 않아 같이 살았는데 결국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실력을 인정해 김정일이 특별히 사면해 다시 평양으로 올라와 영화계에서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인희가 추방되자 추석봉을 비롯한 많은 북한의 영화인들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한다. 그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우인희의 처형소식은 전 북한 주민에게 전해졌고 주민들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는 주인공이 교체된 채 다시 만들어졌다. 비록 그가 처형되었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동정했다. 물론 그의 미모를 떠올리는 북한의 남자들은 그 미인을 꼭 그렇게 죽여야 했나, 기껏해야 바람피운 것뿐인데... 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또 일부에서는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것은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사람을 처치할 때 주민무마용으로 상투적으로 써먹는 소문이기 때문에 그런 소문은 억측에 불과하다. 또 보수적인 주민계층 중에는 그런 문란한 계집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인희 처형사건은 이처럼 북한 사회를 뒤흔든 유명한 사건이었다
--- 강철환 ---
2004-11-17 01:52:35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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