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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잃어 버린 꿈을 찾아서

작성년도 : 1999년 62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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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 버린 꿈을 찾아서

- 김승철

 

 

흰눈, 솟구쳐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 끝없이 펼쳐진 수림의 바다, 아름답고 깨끗한 러시아의 시베리아는 일견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 나 그 수림에는 돈을 벌기위해 멀리 두만강에 "양심을 파묻고"온 사람 들이 힘겹게 땀과 기름에 절은 허름한 솜옷을 걸치고 자그마한 소망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내 가족과 등 따습게 강냉이 밥이나마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단란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어가리라...

 

우리는 20여년간 15평 남짓한 두칸의 좁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결혼한 형님가족 3명과 우리가족 3, 남동생 1명과 여동생 2, 어머님 등 10여명의 세 집 식구가 살아 신혼생활은 꿈도 못 꾸었지만 돈을 벌어 뒤늦은 신혼생활을 가지리라 다짐했다.

 

나는 615월 함흥시 사포구역에서 안전원(경찰)을 하시던 남한출신 아버지의 3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노력 때문인지 형님은 수재들만 다닌다는 평성이과대에 나는 78년에 함흥수리대에 들어갔 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한 집에 두명이나 대학에 다니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980년 안전원이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하여 울타리가 없어진 후 집안의 경제생활이 급속히 어려워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설계사업소에 배치되었지만 비당원인데다 아버지가 남한출신인 탓에 성공을 위한 출세는 오르지 못할 나무와 같았다. 점 점 어려워지는 생활난이 우리 집이라고 비껴가지는 않았다.

 

80대말은 러시아 벌목장의 황금기로 월급을 루블로 받고 수입은 북한 노동자의 몇 십배를 능가했던 것이다. 바닥에서 어렵게 사는 서민들에 게 벌목공은 풍요로운 낙원으로 가는 길목같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말 못할 서러움과 가난 때문에 돈을 벌어 잘 살아보려는 "분에 넘치는 욕망" 때문에 열악한 벌목장에 자원했다. 아무런 희망없이 배급표와 술 몇 병과 고기 두 세근을 구입하면 없어지는 월급을 받고 살던 어느 날 가까운 친척이 벌목장을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벌목장이 험하고 사고사도 많으며 소련이 망해 돈을 벌 수도 없을 것 이라는 충고에도 기어코 벌목공을 지원했다. 다니던 공장, 노동성 노동처, 중앙당 3처에 이르는 14단계의 심사에 합격하기 위해 밤낮없 이 뛰어 다녔다. 돈도없고 권력기관에 줄도 없어 단계마다 불합격 당 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오기로 힘들고 어려운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내 삶의 고난을 해결할 열쇠가 벌목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벌목공으로 선발되어 고향 함흥역을 떠나던 날 장기간의 류머티즘으로 보행이 불편한 어머니는 역까지 나오셨다. 마디지고 튼 손을 흔들어 주시던 어머님, 아들의 고사리 손을 쥐고 흔 들던 아내 모습을 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돈을 벌어 오리라고 결심했 다 .

 

그러나 현실은 내편이 아니었다. 돈을 벌려는 마음에 험한 벌목장에서 허벅지에 난 종기에 약대신 소금을 뿌려가며 억척같이 일했다. 첫해 겨울, 내가 속한 소대에서는 계획을 초과해 그 당시 스테레오 녹음기 1대 값을 더 벌었다. 기쁨도 잠시... 어리숙한 나는 중대 경리지도원에 게 약 절반을 사기당하고 말았다. 좌절로 희망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욕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19945월 김포공항에 첫 발을 디딘 남조선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물질적 풍요과 자유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다시 희 망을 갖게 되었고 가슴은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기자회견 당시 나는 이렇게 말했다. " 나도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라고...

 

삶은 내가 원하는 바대로 되지 않았다. 밤마다 꿈을 꾸며 북한으로 되 돌아가고자 탈출을 계속했다. 전에 한 민족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남한은 모든 면에서 너무 달랐다. 50년이라는 분단속에서 남과 북의 문화, 관습, 의식등은 완전히 달랐다.

 

964월 나는 정부가 마련해준 직업을 뿌리치고 백수의 길을 선택했 다. 물위에 뜬 기름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소외된 북한사람도 남한사람 도 아닌 이방인이 되어갔던 것이다. 소외감을 느낄수록 벌목장을 탈 출하여 방랑하던 시절의 외로운 고독이 그리워졌다. 자신을 소외시키 고 과거로 치닫던 나는 TV에서 북한실상을 볼 때마다 가슴을 후벼내 는 아픔으로 욕실에 들어가 어머니를 부르며 소리내어 엉엉 울기도 했다. 나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망향의 쓸쓸함에서 또 다른 탈출을 시도하였다.

 

1997년 봄 고향의 바다와 잇닿아 있는 동해바다를 찾았다. 어쩌면 어머님의 눈물젖은 뺨을 스친 바람이라도 나를 감싸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낮게 드리운 구름이 뒤덮은 바다는 싸늘한 냉기와 파도를 끊임 없이 기슭으로 몰아올 뿐이었다. 이제 더는 나를 통제할 과거의 배급 제와 조직생활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1여년의 백수생활에서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삶은 내가 책임지고 미래도 내가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직하려고 이력서 와 자기 소개서를 만들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세상은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고 정성으로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 정 말 감사하다. 이러한 도움으로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열심히 일하고 얻어진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알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던 삶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나를 사랑해주고 옳은 길로 가도록 이끌어 준 집사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변명같지만 역설적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은 의외로 쉽게 나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통제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와 불평불만이 몸에 배고 타인에 대한 의 심, 가부장 권위주의의 관습에 익숙한 북조선 남자와 남조선 여자는 충돌도 있었다. 가정생활과 사회에 대한 견해차로 모든일에 충돌이 있곤 하였다. 아내와 나는 자그만 통일을 위해 엄청난 "전쟁"을 치렀다 몇 번씩이나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는 과정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 게 되었고 아내는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리고 내 정신과 삶에 행복을 느끼고 감사 할줄 아는 여유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 행복과 성취감으로 인한 보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과거를 잊어 버리고 현재에 만족해 서도 아니다. 가슴아팠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책임지고 반성하 면서 이루어 내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들이 가며 가졌던 꿈,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리 라던 어릴적 꿈에 대한 기억을 이제야 다시 찾았다. 나는 그 꿈을 실현 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19996월 김승철 씀

 

 

2004-11-18 00:08:38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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