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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역사에 고발합니다. - 리백용

작성년도 : 2000년 60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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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결심과 좌절

내가 독재자 김정일을 호위할 때는 외부와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잘먹고 잘산다는 TV, 라디오, 신문 잡지로써 잘 사는 것으로 알다가 제대되니 사회생활이 내가 배우고 듣던 것과는 80%로 달랐던 탓으로 대한민국 방송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KBS 사회교육방송은 북한 기차칸에는 창문도 없고 려행다니려는데 려행증 검사를 하는 등 북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 후부터 대한민국 방송이 나를 대한민국의 품으로 인도하였다. 방송이 북조선 현실과는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인민대중에게 돼지고기에 입밥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도록, 즉 사회주의 지상락원에 살도록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위한 허위와 기만이라는 것을 때늦게 알게 되었다.

1994년 10월 1일 중국 국경절을 계기로 나는 중국 화룡에서 태권도로 돈을 벌어서 연길 자치주에 들어와서 조선족과 어울려서 나의 소감을 말했다. 1994년 11월 26일 대한민국 대사관원이라고 하는 김영호를 만났다. 알고 보니 그는 중국주재 북조선 대사관 국가안전대표였다. 그는 중국조선족(특무)의 말을 듣고 연길에 비행기로 온 것이다.

그는 나를 유혹하기 이하여 연변대학 수학 강좌장 집에서 한국에 가려면 기자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쓰라고 하여 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왕조독재라고 비난하는 말과 대한민국의 생활수준이 북한보다 높다는 소리, 그리고 김정일이 어느 통로로 어느 시간에 다니며 사무실과 별장들의 위치와 집무실 구조, 지하도로, 행사일정, 수행원의 특징, 김정일의 산보시간과 수행원들의 부화방탕 생활, 행사시의 군무 전투 기술기재에 대한 설명 등을 썼다.

이에 만족을 느낀 북한 국가안전대표는 나를 데리고 도문-북경행 렬차를 타고 1994년 11월 29일 북경 역전 연길 연변식당에서 하루 자고 북경 천안문 광장옆에 있는 조선족 려관에서 삼일동안 자면서 사진과 대한민국 달력과 대한민국 입담배 하나로라는 담배를 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 옆에 있는 사진관에서 나의 려권사진을 찍는다고 하면서 사진을 직고 12월 3일 저녁 6시 30분 대사관 차에 태워서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간다는 것이 들어가 보니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사진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북한대사관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하여 1994년 12월 4일 베이징-평양행 비행기로 저녁에 북조선 순안비행장에 압송되었다. 그때 나는 옴몸에 키브스를 하고 마취약과 모르핀 주사를 맞고 평양시 연못동 국가안전보위부 예심국(제3국)에서 1호감방 1번 수감자가 되었다. 이때 나를 담당한 예심원은 김순철, 방은 2층 216호에서 조사를 받았다.

예심 기간의 고통

국가보위부(3국) 예심국장은 록음기로 나의 말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렇게 비방과 권위훼손, 심지어 적들이 노리는 호위사업비밀까지 루설하느냐. 우리 장군님께서 얼마나 신변안전에 위험을 조성하였는가. 너는 우리 민족의 원쑤이며 처단 받아야 할 놈이다."라고 하면서 총살하라고 호통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독감방에서 고문을 당했다. 보위원들이 발과 총으로 구타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었고 고막이 터지고 이빨이 깨지여 나갔다. 그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재우지 않았고, 잠자는 시간에는 계호원들이 들어와서 나의 머리에 물을 부어놓고 몸을 얼구었다. 그런 속에서 매일과 같이 손과 발을 맞바꾸어 족쇄를 채우고는 문틈 구멍으로 내보내게 하고 참나무 몽둥이로 발등과 다리뼈를 두드리고 고통을 주었으며 어느 하루도 빼어놓지 않다.

또한 족쇄로 묶어 공중에다 달아매놓고 쇠꼬쟁이와 참나무 몽둥이로 두드리였다.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누구의 임무를 받고 그런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의 말은 록음이되었다. 어떤 때는 변기 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틀어서 머리를 깨끗이 씻겨준다고 하면서 몇시간씩 구박과 구타를 하면서 고통을 주었다.

12월부터 5월까지 한 겨울에 내가 겪은 고통은 표현하기 어렵다. 밥은 하루 3끼 옥수수쌀 33그람을 김장배추국과 함께 주었는데 수저없이 먹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류장에 들어갈 때 94킬로이던 내 체중은 나올 때는 54킬로에 불과했다.

예심받을 때 6~7명씩 들어와서 나를 눕혀놓고 주전자로 물을 먹이고 배를 발로 누르고 물을 다시 토하게 하였다. 때로는 콧구멍에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나는 재채기와 심한 열병까지 앓았다. 죽지 말아야 한다는 정신력 때문에 나는 이 고통을 견딘 것 같았고, 또 배고픔도 시름도 잊을 수 있었다. 때로는 금식처벌이라하여 하루 2끼 66그람 밖에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국가보안법 44조 46조, 47조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던 4월 어느날 예심관 김순철이가 나를 불러 나오게 하였다. 나는 집에 있는 록음기와 KBC 방송을 들은 데 대하여 현지 확정을 한다고 하면서 평양에서 무산까지 내려와서 나의 안해를 희롱질하고 롱락질한 다음 올라와서 집에 록음기가 없다고 하는 부모와 안해가 손도장을 찍은 문전을 가져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내가 쓴 문건 중에서 록음기로 KBS 방송을 들었다고 쓴 대목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록음기는 김순철이 가로챘다.

누구와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의 동생이 김정일의 승용차 운전수로 있는 관계로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나를 국가보위부 요덕관리소(15호) 대속리라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제15호 (요덕) 관리소 생활

요덕으로 갈 때는 평양시 연골동에서부터 소련제 차 신지르에 실려갔다. 관리소 입구에서 내가 살 대속리까지 가는 데 2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신입자들은 15일동안 훈련을 받고, 그 이후에 반, 소대에 배치된다. 우리 구역안에는 천명 가량의 수인이 있었다. 1반, 2반, 3반, 녀성반, 가족반, 공무반으로 되어 있다. 매 반별로 사방에 4미터 높이의 전기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집은 나무 판자집이다.

밤마다 경비대 깡패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초소에서 근무를 선다. 아침 5시까지 식사를 하고 작업장으로 진출한다. 한 개반이 170명 정도이고 한 개 소대가 56명 정도인데, 3개 소대로 되어있다. 신입자는 한 달에 5~10명 정도인데 꾸준히 들어왔다.
작업은 아침 5시부터 저녁 어둡기 전까지 계속된다. 점심은 밥을 본인이 들고 와 먹는다. 작업 내용은 매일 다르다.

우리 중대, 우리 소대는 산에 올라가서 한 사람이 하루 평균 1.5㎥의 나무를 도끼로 패서 놓은 것이다. 나무는 사회에 내다가 판다. 때로는 보위지도원들의 집에 가져간다. 다른 중대는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한 개 소대당 밭은 20정보다. 하루 120지게의 나무를 산에서 밭까지 1000m 거리를 걸어서 옮겨 놔야 숙소로 올 수 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담당 보위지도원들 한테서 옷을 벗고 팬티만 입은 채 물푸리(재목이 단단하고 질긴 나무 이름) 나무로 10대가 끊어질 때까지 땅에 엎드려 맞는다.

이런 때는 남자는 그래도 낮다. 여자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팬티만 입고 잔등으로 10대가 끊어질 때까지 맞아야 한다. 또 제가 본 똥을 제손으로 옥수수 한 포기 한 포기에 흙을 파고 묻어야 한다.

하루 식량은 일인당 옥수수 150g 줄 때가 있고 100g 줄 때가 있다. 그것은 하루, 과제와 그 해 농사에 따라 다르다. 국은 소굼국 밖에 없으며 배추씨래기와 무씨래기가 떠있다. 휴일은 1월 1일, 2월 16일, 4월 16일 밖에 없다. 구역안에는 구호 간판들이 많다.

"계급적 원수들과 한보의 양보와 타협도 하지 말자!"
"반당, 반혁명분자들은 경각성 있게 대하고 감시하자!"
"농사는 생명이다. 농상를 잘 짓자!"
"도주 분자는 현장 총살, 또는 교수형이다."

등등 어마 어마한 글들로 되어 있다. 수인들은 보위원이나 경비대 군인, 사회사람이 오면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멀리에서라도 저들을 보았다 하면 땅에 박은 머리와 허리를 총박죽 아니면 발로 또는 돌맹이로 마구 때리며, 때로는 사람의 뇌수가 땅에 흘러나와 죽는 일도 빈번히 벌어진다. 호주머니에 소금을 가지고 다니거나 프시(즉, 불을 켜는 차돌 쇠쪼박, 또는 쑥을 말리운 것)을 가지고 다니면 도주기도분자로 몰려서 총살 또는 교수형, 생매장 당한다.

실례로 한승철의 경우가 있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동에 살다가 대한민국으로 가려다 회령땅에서 잡혀 왔다. 그가 수용소 생활 4년 만에 호주머니에서 소금이 나왔다하여 구역 끝에서부터 구역 끝까지 소련제 차 우와즈 련결차 꼬리에 발목을 쇠줄로 매여 4km을 수인들을 길 량쪽에 세우고 초소 앞에서 끌고 다녔다. 그 결과 허리 가죽과 머리 가죽이 다 벗겨져서 죽었는데, 시체를 교수대에 묶어 놓고 매 사람이 피를 만지게 하고 도주기도분자는 이렇게 죽인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때 경비대 1개 중대 가량이 수인들을 포위하고 기관총과 자동소총으로 성을 쌓고 감시하다가 다른 기미가 나면 총으로 갈긴다. 이날 평북도에서 온 안성은 늙은이(60세)가 죽었다.
일본시기보다 김일성, 김정일이 더 악독하고 파쇼적이다고 말했다는 루명을 쓰고 들어온 사람이다. 그 늙은이가 "사람이 어떻게 그것도 소금 한줌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차에 끌고 다니면서 죽일 수 있느냐. 게다가 죽은 사람을 교수대에 매놓고 산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사람의 피를 만지게 하느냐."고 뛰어나가서 호소하였다. 그때 그는 그런 잔인한 광경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즉사했다. 이런 일은 한 달에 6명 내지 10명 정도 일어난다. 또 산 사람을 생매장한 경우도 있다.
반정부 음모와 대한미국 탈출기도로 96년도에 무산에서 들어온 김승철(28세)은 밤에 보위지도원이 나오라고 하여 밖으로 나가자 머리에 갓모자를 씌웠다. 집밖에서 경비대가 지키는 가운데 수인 5명으로 하여금 구덩이를 파게 하고 또 조명을 켜게 하고 나오라고 하여 모두 나가보니 구덩이 앞에 그를 세워놓고 반혁명 분자들은 이렇게 죽인다고 망치로 머리 정수리를 쳐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쳐넣고 흙으로 매장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수인 한 사람이 제대로 삽질하지 않는다고 총을 이마에 쏘고 그 자리에서 같이 매장하는 것이었다.
인체 실험의 제물이 돼 죽은 두 사람에 대해 말하겠다. 정현수(26세)는 국군포로의 아들인데. 평북도 신의주시 락원기계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도주하다가 잡혀온 사람인데 인체실험의 결과로 죽었다. 황해북도 청단군 군당책임비서 아들 리청근(36세)은 독일에서 한국 간첩으로 포섭돼 암호와 은행비자를 받고 간첩질을 한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건장한 몸이라 하여 인체 실험실로 실려갔다.

시험장소는 남포시에 있으며 6·25 전쟁 때 국군포로를 인체실험으로 쓰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 비밀은 일본인 처 미쯔비시 후미꼬가 그곳에서 살아 돌아와서 국부적으로 폭로되었다. 하지만 비밀 누설로 인해 후미꼬는 96년 8월에 구류장에 끌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후 경비대원들이 쏘련제 지프차 련결고리에 손을 쇠줄로 맨 다음 그대로 차를 몰고 가 하체 바지가 다 없어진 상태에서 아래구역으로 끌고 내려갔는데, 그녀는 내려가는 도중 죽었다고 한다.

또한 귀국자 한신옥 역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는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 귀국해서는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살았는데, 김정일을 비방했다가 잡혀 왔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돌아갈 수 없다는 김정일의 말에 대하여 비평했는데, 김정일 같은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존재가 어떻게 지구를 서게 한다고 그러는가 등등의 말을 했다. 보위지도원이 창고에서 족쇠를 채워놓고 때리다가 반항한다고 하여 5일 동안 밥과 물을 먹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굶어죽었다.

담당 보위지도원이 계급적 원쑤라고 하는 수감 여성을 성의 노예로 삼는 경우도 있다. 리창옥은 재중동포 출신이고 평양시 예술단 지휘자였다. 중국의 실태와 북조선의 현실차이를 말하고 김정일이 나쁘다는 소리를 했다고 해서 관리소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길림성 육문중학교 교장이라고 한다. 보위원이 하루는 녀성들을 밖에 다 모이게 하고 "이 개간나, 바지를 벗어"라고 하고 집의 문을 닫고 그녀를 롱락질하고 성욕을 채운 후에 나무 꼬쟁기로 녀자의 자궁을 찔러 놓고 나무로 하반신을 두드리며 한 주일만에 죽게 했다.

요덕 관리소에 전직 고관들도 갇혀있었다. 심양주재 북조선 총령사를 지낸 김정남은 1997년 관리소에 들어 왔는데, 김정일의 정책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폐쇄정책이라고 바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앙당 3호청사 통정부 책임지도원이었던 한 노인은 장성택의 오른팔이었다고 하는데, 보위원이 말하는데 잘 움직이지 않았고, 머리를 땅에 대지 않고 무릎을 꿀지 않았다고 하여 팬티 바람에 땅을 100m 정도 기게 했다. 그런데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하여 돌로 허리를 쳐서 앓아 눕게 만들었다.

굶주린 창자를 안고 죽어가는 정치범들

요덕 관리소 정치범들은 하루 평균 120g(한끼40g)옥수수 죽물을 먹고 하루 15-16시간 로동제에 따라 강한 고역에 시달리고 있다. 수용소 당국은 정치범들에게 강한 로동과 배고픔 속에서 김정일의 배려가 얼마나 큰가를 각자가 생각하라고 강요한다. 처음 관리소에 가게 됐을 때 관리소라는 곳이 그래도 인간이 사는 곳이니 살 만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그 신체적·정신적 고달픔, 강한 로동, 배고픔, 시달림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기소에서 15일간 있다가 작업반에 배치되니 옷은 죽은 사람의 옷을 입고, 숙소는 옥수수 보관용 창고로 쓰던 것이어서 돼지우리보다도 못한 게딱지같은 집이었다. 비 오는 날에는 물이 새고, 추운 날에는 눈보라가 그대로 밀려들어 왔다.
수인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능재(풀의 이름)나 찔장구(질경이), 다래나무순, 도라지, 뱀, 개구리, 쥐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뱀가죽까지 그대로 먹고, 쥐털과 밸까지 다 먹어치우는 끔찍한 그 모습을 더 이상 묘사할 수 없다.

관리소 보위원용 닭과 게사니, 오리에게는 옥수수가 제대로 공급된다. 수인들은 소가 싼 똥에서 옥수수 알을 주어먹고는 힘이 난다고 좋아한다. 이들은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간다. 초기에는 이빨과 상처자리, 머리통이 다 쫄고 사람의 키가 줄어 기형화된다. 얼마 후에는 얼굴과 온몸이 부어서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죽기 전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늘중천아 나를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그러다가 죽으면 나머지 수인들이 시체를 아무 곳에나 묻는데, 물을 뚝뚝 떨구면서 산에 시체를 메고 올라가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시체와 함께 산밑에까지 굴러 내려온다. 어떤 사람은 일어서지 못하고 같이 죽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호소한다.
진정으로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하여 투쟁하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북한 탈출자들이 중국이라는 타향에서 이리저리 쫓기면서 구차하게 사는 모습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2000년 리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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