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6군단 사건의 어제와 내일 - 박태영 > 탈북민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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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한군 6군단 사건의 어제와 내일 - 박태영

작성년도 : 2001년 61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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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상위 출신 탈북자의 수기

나는 북한을 탈출한 전 인민군 (군관 =장교) 상위 박 태용이다.
나이는 서른살, 고향은 평양시 모란봉 구역, 제도와 주의 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독재를 숭배하는 제 1선의 총알받이로 젊은 혈기를 키웠던 나다.
살수가 없어 탈 하면서도 세상 보는『눈』이 어두웠던 나에게, 이국 땅은 눈을 띄워 주었다.
눈을 조금씩 뜨니 나의 북 한 생활이 다시 금 돌이켜 짐과 함께 그 실상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남과 북의 군이 서로 마주서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내가 북한에서 겪은 일들과 체험들이 한국이나 국외에서 자못 관심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
진솔한 마음으로 피력하는 이 글이 아무쪼록 북한을 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하는 바람으로 글을 내놓으니, 국내나 국외에 사는 동포들 모두가 반갑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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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건의 생존자 김도연 여단장
나는 1970년도에 평양시 모란봉 구역 비파 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구역 행정 행정 위원회에서 근무하셨고 어머니는 구역 도서관에서 근무 하셨다. 모란봉 구역 비파 인민 학교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1986년 8월에 학교 당국의 강박 강압으로 군『집체 탄원』바람에 걸려들었다. 평양 외국어 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던 나에게 뜻밖의 암초였지만 피할길이 없었다. 구역 당 위원회와 학교 당국의 강박으로 우리 졸업생들은 집체적으로 군에 입대할 (맹세문)을 써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앞으로 올렸다. 학교 당국은 (김정일)의 감사문을 받았지만, 우리졸업생들 1백 50명은 울며 겨자 먹기로 군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물론 북한 헌법에 군복무는 의무적이라 하지만 이건 강제 『의무병역제』였다. 부모님들도 외아들인 나를 대학 공부시키려고 하던 꿈이 수포로 돌아가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 부모님께서 바라는 건 꼭 건강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라는 부탁이었다. 군에 모집된 우리는 평양시 군사 동원부에 갔는데 예상 외의 환영을 받았다.
『자원탄원』한 우리에게 향한 접대 였다. 군사 동원부는 특별우대로 거의 1천명 가량 붐비는 초보생 들속에서도 우리에게 먼저 가고 싶은 병종을 고르라고 우선권을 부여했다.
나는 평양과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 평양시 옆의 황주 비행장 부대에 가고 싶다고 졸라댔다. 나의 제기는 수락되어 이해 8월에 조선인민 공군 사령부 제 3비행사단 직속 통신결속소에 배치되었다.
당시 제 11여단장은 1968년께 한국에서 소란을 일으킨 북한 게릴라 들의 청와대 습격사건 당시, 게릴라로 참가하였다가 배에 총상을 입고 터져나온 배를 움켜쥔 채 간신히 빠져 나온 김도연이었다.
부대안의 소문은 그가 서울 버스 주차장에서 경찰 30명과 격투를 벌였는데 지지 않고 도망쳐, 김일성으로부터 『일당백』상과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 한다.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신병훈련만 잘 마치면 김도연이가 꼭 좋은 곳에 배치해 준다는 것 이였다. 하여 나는 공군사령부 제 3비행사단 통신결속소에서 신입병사 훈련을 받게 되었다. 통신 결속소는 6개 의 무전 유선 중대로 구성된 대대보다 규모가 좀 큰 부대였다. 신병 훈련은 70명 정도가 교육받았는데 습관되지 않는 규율 상태에 적응하자니 정말 힘이 들었다.

신병들은 중국 군인들처럼 개별 침대가 아니라, 큰 함짝 같은 것을 짜서, 그 안에 널판자를 놓고 베개를 넣은 마다라스를 깔고 자곤 하였다.
이렇게 잇달아 누운 침대에선 베게 먼지가 풀썩풀썩 일곤 하였다.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열리지 않는 눈을 비벼 열고, 달리기와 격술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나른해지곤 하였다. 하루종일 대열, 체육 , 격술 훈련에 겨우 따라다니다시피 하였다. 북한군에서는 태권도 훈련을 격술훈련 이라고 호칭하는데, 격술은 태권도 종목과는 좀 달리 눈알 빼기, 목울대 치기 등 반칙에 속하는 야만적인 동작이다. 신병 훈련은 거의 고정 격식화되어 있었다. 오전 정치상학 (학습) 2시간, 대열 훈련2시간, 체육훈련 1시간이다. 오후에는 또 대열 훈련 1시간, 태권도 훈련 2시간을 하곤 하였다.
-6개월간 신병훈련

정치 상학 시간에는 김일성과, 그 후계자 김정일 이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분이시며 ,그때 어린 그 당시에도 듣기 거북할 정도로 과장된 『혁명업적』들이 었다. 또 북한군이 역사와 발전 과정에 대한 학습이었는데 모두 김일성과 김정일이가 현명하게 이끌었다는 내용이90‰를 차지했다

주목할 것은 6.25 전쟁을 미군과 한국군이 도발했으며 오늘도 북한을 먹어보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인데, 어찌나 매일 매시각 삽입 하는지 골수에 사무칠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6.25 전쟁 발발의 배경을 말하라면,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줄줄이 토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수 있다.

...덜레스의 한국 행각, 덜레스와 (이승만) 의 분계선 시찰 6.25전날 미 국방성 고위관리들의 도쿄 휴양, 6.25날 북한쪽 50리 구간을 밀고 들어 온 국방군의 진격....하지만 이국땅에서 책을 보고 방송을 들으니, 사실은 전도 된듯하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회담, 북한군의 분계선 무력집결 , 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 후방의 예비군조직, 북한군의 무력 증강. 나자체로 판단해 보건대 확실히 6.25 전쟁도발은 북한쪽에서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신병훈련 중에서 대열 훈련이 제일 힘이 들었다
내리 쪼이는 태양열에 달아 오른 운동장에서 소련식으로 발을 60(m이상 올려 정보로 걷는 훈련을 하고 나면 다리에 쥐가 올라 잠을 못잘 지경이었다.

반대로 운동체질이 되어서 그런지 ,손발을 건들 건들 놀리는 격술이나 체육동작은 흥미도 있었고 힘들지 앉았다. 잘못하면 기합만 돌아오는 지긋지긋한 신병훈련은 6개월간이 흘러 마감 짓게 되었다. 신병훈련은 군복무를 거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마 제일 힘든 고비였을 것이다. 부대에서 한달에 한번씩, 명절을 계기로 삼거난 아니면 다른 조건으로 『특식』을 치려 주곤 하였다.

특식이란 살코기는 다 어디 달아나고, 주먹만한 비겟덩이가 한두 개씩 떠오르는 돼지 고기국에 쌀밥이었다. 신의주 쪽을 거쳐 중국에서 들여보낸 냉동한 이 비육 돼지고기들은 우리 신병대원들을 절반쯤 죽여주었다. 한창 먹을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염장무나 배추에 쌀을 조금섞은 통밀밥을 먹으며 훈련하는 어린 신병들은 모두 굶주린 이리떼 같았다.

오래 간만에 차려지는 절호의 기회라 모두 주먹만한 비겟덩이를 한 사발씩 먹고는 열이 나 타는 속안을 달래느라 냉수를 몇 사발씩 들이키곤 하였다. 식사가 끝나 얼마 지나면 열명 정도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부대 변소에 부대 군인들이 일렬종대로 기다리는데 가관이다. 거개가 신병들이었는데 거기에 구 대원들까지 섞여 있어, 모두 너무 바빠 바지춤을 쥐고 발을 동동 구르곤 하였다. 기다리기에 지치니 ,화장실로 들어가 는 병사들은 모두 사타구니에 물찬 것처럼 오리걸음으로 기우뚱거리며 걸어 들어가곤 하였다.

열악한 식량공급에 내모는 훈련은 병사들을 속이 텅빈 쇠약한 체력만 가지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북한이 식량난에 그렇게 허덕이지는 않았을 때였다. 훈련을 마치고 정식으로 부대에 배치 받으면서 우리는 군인 선서를 다졌다. 군인 선서 내용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목숨바쳐 보위하고 사회주의를 무력으로 옹호하겠다는 것과, 우리 대에 조국통일을 위한『성스러운 싸움』에 나서서 한몸 바치겠다는 것이다.

또 전투에서 적에게 포로 가 되지 않고 자결 하겠다는 내용이다. 군인 선서를 마치니 김도연은 약속대로 나를 제 3비행사단장의 타자수로 배치해 주었다. 제 3비행사단은 황해북도 황주군 읍 옆에 위치한 황주 비행장을 둘러싸고 부대가 전개되어 있었다. 황주 비행장은 북한 공군 사령부 소속의 최전연 전투기를 움직이는 전방 비행장으로 평양을 지켜선 관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아마 김포 비행장과 거의 맞 먹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배치 받은 사단장 타자수라는 직무는 공군 사령부의 각종 명령과 그 하달을 타자로 쳐서 인쇄화 된 문건을, 사단장과 작전,부서들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사단장 타자수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한 개 분대였다. 당시 우리 사단장은 북한 이 월남 전쟁 당시 비행사들을 파견하여 지원하고 있을 때 , 월난 (파병) 비행사로 가서 미국 비행기 세 대를 쏴 떨구었다는 월남 영웅 겸 북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 받은 박 남형이었다

-묘지 밥

우리 타자수분대는 통신 결속에 귀속되어 일체 훈련과 군무 생활을 통재 받게 되었다, 처음 신대원으로 배치 받으니 청소란 청소는 도맡아 놓고 해야 했다. 군대라는 것이 내리 지시로 움직이다 보니 시마부름도 역시 도 맡아 해야 했지만 할수 없는 일이었다. 제일 그리운 것은 잠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사람이 인간 생활에서 제가 바쁘고 고달프면, 부모 , 형제 들에 게 편지도 하고 감정의 교류를 함께 나누고 싶어함을 느꼈다.

반대로 후에 군복무 생활이 헐해지고 익숙하게 되어 편안해지니 편지도 하게 되었다. 우리 식사는 주로 절인 배추를 비롯한 절인 남새류들을 볶은 것에 옥수수나 통밀을 절반쯤 섞은 밥이 주식이었다.
취사원은 없이 군인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며 자체로 밥을 지어먹었다. 항상 모자라는 남새로 인해 매끼 두 세가지 반찬을 한 젓가락씩 놓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식량은 하루 8백그램 공급한다.
하지만 위의 군관들로부터 내려오며 층층이 떼어 먹어, 늄 밥식기가 항상 곯군 하였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차려지는 밥 이름도 각이하다.
[폭탄밥, 골짜기밥, 수평치기 밥, 묘지밥 ]등이다.

이 중에서 불룩한 묘지밥이 차려지면 군인들은 제일 좋아한다. 작은 밥량으로 인하여, 군인들 속에서는 별 해괴망칙한 일이 다 벌어졌다. 넓은 식당으로 들어갈 때 먼저 열을 서서 들어가는 군인들은, 벗어든 모자 안에 차려 놓은 밥 그릇을 연속 엎어 가지고 들어가 [곱배기]를 만들곤 했다.

이 현상 때문에 식당안은 없어진 밥 그릇찾기로 항상 소란하고, 식당 직일관들은 두 눈을 부릅떴지만 [소란]은 그칠 사이 없었다. 배가 고프니 어린 신 대원들은 [취침 ]시간이 돌아오면 슬그머니 일어나 식당 주변을 맴돌군 하였다. 남은 밥이나 누룽지라도 얻어먹을까 해서였다.

내가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끝마칠 때까지 인상에 남는 것은, 인민군 협주단과 공군 선전대의 공연이었다. 그들은 자주 공연종목을 가져와 공연하곤 하였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때가 반질반질한 국군 복에 모자를 비뜰어 지게 쓴, 전라도 태생 사병과 경기도 태생 사병이 나와 재담을 엮어간다.
『야 임마, 니 취사 당번 나가면 나 좀 누룽지 달라는 기여, 나도 기회 있으면 너한테 누룽지 그만큼 주겠다는 기여』
이때 다른 사병 하나가 식당에서 누룽지를 훔쳐 가지고 뛰어나와 먹어댄다. 굶주렸던 사병들은 서로 누룽이를 놓고 꼬집기 내기를 벌이며 빼앗기를 한다.
『야 이 꽁초다리야 .보리밥 누룽지는 내가 훔친거란 말이야』
『임 마 , 누룽지에 네 이름 붙여 놨는기여』
『이 씨팔 새끼들아, 누룽지가 없으면 내 배는 병 걸린다』
이런 재담 형식을 너무 많이 보고 들어 우리 군인들의 머리 속에는, 한국군이 모두 보리밥에 멀건 소금국 먹는줄로 인식 되어 있다.

-한국군에 대한 인식

북한 군인들에게 가장 크게 인식되는 것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다. 미국의 조선 침략 전쟁사와 그 참상, 결과를 모든 군인들이 무조건 암기하게 만든다. 한 미국은 한반도 평화 통일의 장애물이며, 한반도의 절반 땅을 만들고 북한땅을 마저 먹어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식의 교육이다. 적개심 교육을 위해 군에서는 하루 평균 2시간을 소비하군 한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미제 침략자들을 소탕하라]는 구호를 합창하고 훈련을 해야 한다. 한국군에 대해서는 좀 아량 적이고 관대하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허수아비 ] 군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군인들은 미국에 대해서는 모두 반사적으로 악랄한 마음을 품고, 끝까지 싸움해야 된다지만 한국군은 얼마든지 쉽게 [제낄수]있는 군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교육이 군인들이 진행하는 학습 토론에 그대로 반영된다. 수백명 군인들이 모인 토론회 마당에서 집행하는 군관이 나서 군인들에게 전문한다
『미제 침략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오?』
모두 한결 같은 대답이다.
[예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무조건 철저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
[남조선 괴뢰군은 어떻게 해야 하오 ]
북 한에서는 한국군을 [남조선 괴뢰군] 이라 부르고 있다.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예, 손들지 않으면 총으로 쏘아 버리겠습니다]
[함화 귀순 공작을 들이대 투항시키겠습니다 ]
[예, 사병들은 투항하라고 권고하고 장교들은 모조리 쏘아 버리겠습니다 ]
이것이 현 북한 군인들의 한국군에 대한 관점이다. 북한군에서는 아직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같은 동족을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반민족 적인 감정을 주입 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 복무 시작부터 군관으로 자라기까지 인식하는 한국군에 대한 관점도 이러하다. 마주서 싸움하면 같이하고, 서로 양보하면 같이 하고, 악질적으로 놀면 같이 악질처럼 놀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관점이 어쩌면 옳은 것 같다.
제 민족을 죽여 봤자, 없어지고 녹을건 제 민족 뿐이기 때문이다.

-203 연대에만 월남전 참전 비행사 50명

우리 타자수분대에는 통신 결속소 제 4중대에 소속되어 검사난 식사, 군무 생활 총화를 짓곤 하였다 4중대는 유선 통신들을 조작하는 남자 두 개 소대와 여자 교환소대 , 여자 전신 소대로 되어있었다. 군의 하루 정규 생활이 시작되는 아침 검사는 까다롭기 짝이 없다.

항상 목 달개를 새것으로 달아야 했고, 모표를 반짝반짝 닦아야 했으며, 더워도 목 단추를 하나 풀어놓지 못하고 서로 서로 검사하여 시정해야 했다. 우스운 것은 나란히 선 여자들의 아침 검사였다.
곁눈질해 보면 손톱검열을 할 때 월경날이 된 여자 군인들은 손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보이게 되어있다.
그러면 군무생활에서 빠져 그날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게 되어있다 . 남자 군인들은 아침 검사 때면 흘끗 흘끗 곁눈질 해 보고, 그런 여자들을 발견하는 것을 흥미로 여긴다
『저 계집애 또 고장났구나 ?"』
[나도 아래에서 뭘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땅땅 마르기만 하니 야단 아니야]
말썽 많은 군인들은 여 군인들의 월경 날짜를 완전히 [통달 ] 하고 있다. 우리 통신근무 장소는 유사시 [적의 습격]을 피한다고 갱도 안에 있었다 . 갱도는 비행장 옆 큰산에 통째로 굴을 뚫어 만든 것이다.

유사시 1천명은 수용할 수 있게 각종 지휘 , 작전, 통신시설을 갗춘 대형 갱도안에 있다 나오면 무릎 관절과 허리 통증이 심하게 왔다. 여기에서 복무하다가 제대하는 군인들은 거의 관절염이나 신경통 후유증을 가지고 갔다. 우리 타자수들은 부대 안의 각종명령, 지시를 타자로 새기다 보니 부대안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덕에 항상 입을 다물도록 부대 보위 지도원들의 엄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나는 보위 지도원들의 요구에 의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 에 군복무간 몇 년이나 지장을 찍었다.

-황주 비행장은 김일성 부자의 사냥터

황주 비행장은 북한 비행장의 모든 시범 훈련을 도맡아 놓고 진행하여,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대표단이 오면 으레 시범비행을 진행하곤 하였다. 나는 군복무 과정에 김정일의 2회에 걸친 부대 지도와, 전 무력상(오 진우) 의 열댓 번도 되는 부대 지도를 목격 하였다

후에 3비행사단을 군단 병력과 거의 맞먹는 3비행전단으로 승격시키면서, 북한에서 [항일 투사 ]로 권력을 부리던 오 백용의 맏 아들을 김 정일이가 직접 전 단장으로 임명해 내려 보냈다.
3비행사단은 최전선인 황해북도 과일군과 태탄군에, 각각 비행연대를 배치하고 비행장을 부설해 놓았다. 여기서는 한국의 섬 백령도를 비롯한 조선 서해의 해상봉쇄와, 개성 이남을 조준한 출격 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다.

이외에도 각 미사일 3개 연대들을 더 가지고 있다 .
또 황주 비행장 안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냥터이기도 하다.
비행장안에는 1천 마리 정도 되는 꿩과 50마리 가량의 사슴과 노루를 기르고 있었다. 우리 군인들도 모르게 김일성과 김정일은 비행장에 와서 하루 사냥을 즐기고 가곤하여 비행장안에는 그들의 별장까지 따로 지어놓고 있다. 나의 군복무는 이 드넓은 비행장 안의 풀 다듬기와 청소로 거의 절반을 보냈다고 말 할 수 있다.

-1년에 석 달은 [감방훈련][산돼지 훈련]

열악한 식량공급에 간식 같은것은 생각해 볼 수 없는 북한에서, 비행사 들에게는 그래도 매끼 쌀밥에 돼지고기, 초콜릿이 차려졌다.

부대안으로 실어들이는 이 물자를 보며 군인들은 내내 군침을 삼켰고, 비행사 식당 옆을 지날 때면 누구나 눈길을 쉽게 떼지 못했다.
그래서 군인들은 모여 앉으면 비행사들은 고기는 먹기 싫어서 그릇에 계속 남긴다는 것과, 초콜릿이 어떻게 생겼더라는 것을 서로 이야기 하였다 . 자연히 꿀떡 꿀떡 군침을 넘기는 속에 먹어 보았다는 음식 이야기를 떠올리는 [이론식사 ]를 제일 많이 벌이는 것이 공군부대 군인들일 것이다.

북한 군부에서는 북한군의 위상을 돋우느라, 자주 한국군의 참상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비디오를 보여주곤 하였다.
제일 인상에 남는 비디오는 [백정의 탈을 쓴 여색 군단]이라는 제목의 비디오였다. 이 프로그램 주제는 사실인 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다는 여자 군단의 이른바 [만행]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살인적인 훈련, 돼지피를 소랭이채 받아서 마시는 장면, 여색으로 반대파 군 고위장성들의 뒤를 파내는 장면 ....
특히 기본 구성 부문을 이루는 것은 귀순자들을 세워놓고, 눈알 빼기 훈련 칼 뿌리기 훈련 , 태권도 집중타격 인체 각 부위들을 끊어 놓는 장면이다. 그러면서 긴 설명을 다는 것이 한국으로 넘어가면 [맞아 죽는 것] 으로 선전하여 대부분 병사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

그런데 이국땅에 나와 한국 방송을 들어보니 , 넘어간 (탈북자)들의 처지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 한국군이 어떤지는 몰라도, 북한군은 일년에 석달 가량은 [실전 연습]을 벌인다 . 정말 이 기간에는 고달프기가 그지 없다. 두달 동안은 습기 축축한 갱도 안에서 잠을 자며 생활하는데 입은 군복은 언제나 눅눅하였다 . 이 훈련을 군인들은 일명 [감옥 훈련] 이라 부른다.

여 군인들인 경우는 생리상의 압박을 받아 배아픔, 메스꺼움 등, 더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빨래를 해도 제대로 마르지 않으니 , 곰팡이내가 물씬물씬 풍겼고, 여 군인들이 자는 병실은 악취가 더 풍겼다.
두달동안 갱도안에 박혀 [실전 연습]을 치르고 나오면 모두 해방을 맞았다고 기뻐서 야단들이다 . 나머지 한 달은 또 야외 훈련을 하는데 산과 들에 나가 반 토굴집을 짓고 통신 보장 훈련을 한다.
군인들은 이 훈련을 [산돼지 훈련] 이라고 한다.

-『군사 쿠테타 』에 대비한 군 무력 구조

북한군 부대의 군병 종별 분류는 매우 각이하다
크게 육군, 해군, 공군으로 나누면 기본 병력이겠거니 생각 할 수 있지만 이게 아니다. 인민 무력부 산하 육군에는 1 군단부터 8 군단까지 지상군이 있다.

이 지상군 외에 또 호위 총국 사령부, (김정일 호위부대) 교도 지도국 (저격 , 경 보병으로 꾸려진 특수 병종), 보위사령부 (국가 안전 보위부 소속 경비병), 공 병 지도국 (사회 안전부 소속 건설 및 경비병), 8.15훈련소, 4.25훈련소 , 6.25 훈련소가 모두 지상군으로 꾸려진 군단 병력의 규모이다. 이외 해군 공군사령부도 군단 병력의 규모를 초과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있다. 1988년 도 까지만 하여도 북한군은 인민무력부 산하에 모두 지상군을 집결 시켰다. 그러던 것이 들리는 소문에 김정일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라파 사회주의 공산권 국가들이, 허물어 지는 경험을 교훈삼아 병력을 재편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하의 호위부대 역량이, 일반 육군 병력보다 약하면 정권의 안보에 위태롭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군사 쿠테타 발생을 전적으로 염두에 든 것이다. 그래서 전 호위사령부를 군단 병력정도 되게 끌어올려 호위총국 사령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는 무력부가 전에 가지고 있던 탱크들을 빼앗아 평양시 주변 호위총국 부대들을 무장시켰다. 그 대표적 실례가 평양시로 들어가는 길목인 중화군 골짜기에, 난데없이 호위총국 탱크 여단이 둥지를 튼 것이다. 만약 무력부 산하의 서해안 군부대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평양시로 들어오려고 해도 탱크 여단이 맹렬히 저항 할 것이다. 호위총국 사령부는 김정일 호위부대 명칭을 갖고, 장교대우와 예복을 모두 입고 다닌다.

또 쿠테타 발생시 각 군부들의 협동작전을 막기 위해, 국가 안전 보위부 안에 전에 없던 보위사령부라는 뚱딴지 같은 기구를 편성해 놓았다.

8,15 훈련소 6,25훈련소 4,25 훈련소라는 군단 무력의 막대한 기구도 새로 편성하여 직접 당국자의 지시를 받게 만들어 놓았다. (훈련소는 기계화 군단들이다). 그러니 전에처럼 북한 인민 무력부 장이 군의 총책임자가 아니라 군 한개 부서의 책임자 격이다.
물론 모든 작전 지휘는 인민무력부 작전부에서 설계한다.
하지만 부대 출동시에는 최고사령부의 최고사령관 김정일의 지시가 있어야만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모든 무력들 중에서 인민 무력부가 가지고 있는 1군단부터 8군단까지와 해군, 공군 병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못지 않게 호위총국 ,8,15 4,25 6,25훈련소들은 북한군에서 가장 신형기계화 장비를 가지고 있다. 또 게릴라 전을 목적으로 하는 교도 지도국은 유일한 특수 병종 군단으로 당국자의 지시를 받는다.

-김정일의 황주 비행장 [현지지도]

같은 군인이라 하지만 군종 병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군복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갈등과 모순을 겪어 보았다.
1990년도에 김 정일이가 황주 비행장을 [현지지도 ]할 때였다
이른 아침 새벽 4시에 기상하여 황주 비행장 활주로 들과, 주변을 거울처럼 닦으라는 지시로 부대 군인들이 모두 내몰렸다.

군부대 정치위원 김 득관의 창발적인 [안]에 의레 우리는 모두 새 세면 수건들을 가지고 나가 무릎걸음을 하며 활주로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침 9시가 되니 구 소련제 신형트럭 [신형지르] 10대에 완전 무장한 호위총국 군인 3백명이 타고 들어섰다. 전 독일의 게스타포라 자처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활주로 양 옆에 얼을지어 서 있는 우리를 [맵 짠] 눈으로 둘러보더니 , 우리를 활주로와 10m쯤 떨어진 풀밭에 가 서게 하였다.

그 다음 금속 탐지기로 군인들의 몸을 샅샅이 수색하여, 몸에 지닌 손 칼이나 손 톱칼까지 모두 회수하여 휴지통에 넣어 버렸다.
오전 10시 반쯤 되자 대형 벤츠들이 비행장에 들어섰는데, 일행이 어찌나 굉장한지 같은 모양의 대형벤츠가 열대가 되었다.
어디에서 김 정일 이가 내리는 가 두리번 거리는 데 세 번째 대형 벤츠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이미 1989년도 평양시 무력행사 때 동원 되여 본 그 모습 이어서 첫 대면은 아니었다. 키는 작은 편에 몸은 실했는데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우리의 환영에 답례를 표하며 웃고 있었다.

『만세!』를 부르며 좀더 가까이에서 구경하려고 몸을 솟구어 한 발자국 나가려 하니 , 우리 앞에 1미터간격으로 막아선 호위총국 군인들이 총 탁 (개머리 판)으로 사정없이 배를 쿡쿡 찌르며 제지 시켰다.
김정일 이가 비행장 지휘소 안으로 들어가자 군인들이, 뒤에서 호위총국 군인들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 위 국 새끼들 뭐 지네만 센줄 아는거야? 』
『개새끼들 우린 뭐 군대가 아니구 사민이야?』
『호위국 새끼들 보문 눈 꼴 사나워서 못살겠다!』
투덜는 군인들을 보며 역시 우린 3등군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 군종들에 대한 이런 열등의식 때문에 북한 곳곳에서는, 군종이 다른 군인들 사이에 무리 싸움이 빈번히 벌어지군 하였다.

-반 특공대 훈련

1991년 2원에 있은 일이다. 북한군에서는 [반 특공대 훈련 ]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우리 사단장 타자수 분대는 갱도 안으로 은페하지 않고 사단장 사무실을 호위할 임무를 받았다.
습기가 눅눅한 지긋지긋한 갱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분대 대원들은 좋아했지만 분대장인 나는 근심스러웠다.

[특공대] 습격으로 사단장 사무실을 지켜 내지 못하면 화가 미칠것 같아서였다. 훈련이 시작되자 사 단장은 갱 도안에 들어가 작전 지휘를 하고 방은 텅 비었다. [특공대]는 방에 들어와서 사단장 책상과 작전함에 표 딱지를 붙여놓는데 그러면 사단장이 납치되거나 암살 당하고, 작전 문건은 털린 것으로 된 것이다. 특공대는 빈손으로 침입하지만, 우리는 공탄을 넣은 자동보총을 휴대하게 되어 있었다.

자동 보총 탄알은 실탄과 공탄으로 나누는데, 실탄은 실지 인명살상 탄알이고 공탄은 소리만 나는 훈련용 탄알이다.
만약 특공대를 발견했을 때 정확히 코앞에 들이대며 공탄을 발사하면, 그 특공대 인원은 죽은것으로 간주하고 ,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5명으로 꾸려진 타자 분대를 가지고 어떻게 방어 할 것인가 하고 속 궁리를 하던 나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여덞개의 방 창문과 출입문에 몽땅 가는 통신줄을 연결해 놓아 들어와서 조금만 다치면 공중에서 시멘트 벼락을 맞게 할 생각이었다

제꺽 부대 창고안에서 시멘트 다섯 포대를 가지고 와 천장 위에 골고루 매달아 놓고 줄을 연결하였다. 규정에 k한 명씩 교대제로 보초를 서게된 우리는 속이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특공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5일째 되는날 새벽 1시경, 달콤하게 자고 있는데 위층의 사단장 방에서 [땅 ,땅, 땅] 하는 자동 보총소리가 연이어 울려 왔다.
신발을 신은 채로 대기 상태에 있던 우리는 제꺽 총을 쥐고 우리는 사단장 방으로 달려갔다.

사단장 방안은 천장에서 떨어진 시멘트가루 로 눈앞을 가려 볼 수 없을 정도로 먼지 투성이였다. 그 안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쓴 [특공대 ] 군인 세명이 얼굴에 묻은 시멘트 가루를 닦아내느라 야단이었고 그 앞에 총을 쥐고 발사한 우리군인이 마주서 있었다.
이들은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와 창문 유리를 묘하게 빼내고 침입했던 것이다. 조금있어 경비 중대 군인들이 쭉 밀려들었다.

사단 경비중대 군인들에게 [호송] 되어가는 [특공대 원]들을 보며 우리는 기뻐서 춤을 추며 돌아갔다. 훈련이 끝나 총화 때였다.

나는 상급으로부터 보초만 서라는 규정을 어기고 장난질을 했다는 약간의 비판과 함께 ,어째든 지켜 냈으니 모범이라는 평가를 크게 받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였다. 황주군 읍으로 외출했던 경비중대의 한 동료가 와서 귀뜀해 주는 말이 나를 바싹 긴장하게 만들었다.
읍에서 우리에게 붙잡혔던 그 특공대원들을 만났었는데 습격이 실패한 때문에 [표창휴가 ]를 모두 취소됐다 한다.

그러며 이제 자기네가 그 사단장 타자수 새끼들을 모두 찾아 병신을 만들어 놓겠다며 벼르더라는 것이다. 그 특공대란 중화군과 황주군의 경계선에 위치한 교도 지도국 정찰대대 군인들이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보수 할 것인가를 타산해보다가, 분명 밤에 우리 타자수 분대 병실로 쳐들어와 주먹질을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분대 대원들에게 정황을 알려준 나는 개별 행동을 절대 금지 할 것과, 그들이 오면 한번 해보자고 말하니 모두 기상이 범 같았다.
하지만 전문 격술훈련에 몸이 단련된 그들과 맞서면, 1분도 못 가 모두 맞아 쓰러질것이 뻔했다. 궁리하던 나는 군 규정을 어기고 , 탄약함에서 실탄을 꺼내 자동보총 세 자루에 만탄창을 하였다.
그리고는 침대 밑에 깔아두고 자게 하였다.

-
특공대의 보복을 물리치다

아닐 세라 이튿날 저녁 11시경에 안으로 문을 건 우리 병실문을 탕탕 두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떡 일어난 나는 "기상"구령을 치는것과 동시에 침대 밑에 깔아두었던 자동 보총을 꺼내 들었다.
뒤이어 문이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전에 보았던 그 특공대원들 세 명이 기세등등 하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뜻밖에 총구를 들이대는 우리를 보자 주춤 하던 그들은 웃으며 욕을 했다.
『이 새끼들 빈총을 가지고 개 지랄 이야, 오늘 모두 죽여 버리기 전에 잠자코 있어 』
『네 새끼들 모두 병신 만들기 전에는 가지 않겠어 』
나는 밸이 솟구쳐 나 고함을 질렀다.
『이 새끼들아 고스란히 물러가라』
그러나 그들은 한 발자국 , 한 발자국 다가 들었다, 내가 총의 격발기를 확 당겨 놓자 ,옆의 대원들도 잇달아 격발기를 당겼다.
빈 탄 알통으로 탄알이 굴러드는 둔중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진짜 탄알이 채워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넋을 잃었다. 후에 내가 전해들은 데 의하면 이때 그들은 마주한 총구멍이 대포 아가리 처럼 커다랗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나는 또 소리쳤다.
"좋게 말할 때 고스란히 가지 않으면 골통을 박살내겠어, 빨리 나가"
그렇게 사나운 표정이던 그들은 우리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뒷걸음질로 출입문을 나서더니 냅다 도망을 쳤다 .

너무 통괘해 한바탕 웃고난후, 나는 대원들에게 이일을 절대 비밀에 부치라 당부했다. 그런데 하루도 못 지나 다음날 오후 나는 상급 부서들에 연이어 불려 다니며 눈알이 빠지도록 욕을 먹었다.
다섯명 우리 분대 안에 [고발자 ] 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 보위 지도원한테서 임무받은 끄나불이었다.
짐작이 간 나는 대원을 1년 동안 알게 모르게 바쁜 일만 골라 시키며 실컷 구박을 주었다. 사단장은 이일을 그 정찰 여단장에게 통보하여 다시는 엄중한 일이 발 생 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하여 문제는 더 커지지 않았고, 나는 [배짱]이 있다는 평가로, 부 대안에 불명예스러운 소문을 내게 되었다.

이렇게 북한군은 각이한 군종간의 알륵과 승벽심이 매우 강하다.
쿠테타를 제압할 목적으로 가득 만들어 놓은 불공평한 군 관계가, 서로의 알륵끝에 더 큰 후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 북한군의 구조이다,
나는 1994년도 스물 다섯 살 되던 해에 공군 사령부 군관 단기 강습반에 가게 되었다. 공군 군관 육성은 함경북도 주 을 에 있는 공군대학에서 공부시켜 키우게 되어 있으나 수요를 충족 못했다.
그래서 매 군종마다 군관 강습반을 따로 두어 모자라는 군관수요를 보충하곤 하였다. 강습반은 평양시 중화군에 있는 공군 사령부에 있었는데 기한은 1년제 이다. 군복무 경험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에게 군관 강습반은 별로 새로운 것이 되지 못했다.
다만 배웠다면 대오관리 ,강습 제강 짜기 ,훈련 집행법 같은 것 들 이었다.
군관 강습반은 규율이 어찌나 센지 하루종일 눈을 꼿꼿이 뜨고 지내야 했다. 1년 이 지나서 소위 군사 칭호를 주어 군 관복을 입힌 다음 도로 제대로 송환 하였다.

부대에 온 나는 통신 결속소 4중대 2소대장으로 배치 받았다.
사업임무는 3 비행사단 관할 각 연대들과의 유선 통신선 관리를 맡은 25명의 군인들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병사 생활 기간에 익숙한 군인들과 사업단위여서 별 애로는 없었다.

-민가에 뛰어드는 군인들

1995년도에 들어서며 북한에 들이닥친 식량난, 경제난은 군부 안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식량을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하는 대대 식당에서는 군인들에 게 낟알이 생기는 족족 음식을 해주었다.
그 음식종류는 다양해 통강냉이알 삶은 것 반사발 , 통밀밥 반사발 , 밀가루 죽 한사발, 무우나 배추를 넣고 끓인 쌀죽 한사발, 하여튼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특식]들이 연이어 차려졌다.
식용 기름은 1그램도 공급되지 않아, 배추와 무를 가마에 삶아서 접시에 담아 주는 것이, 풀냄새만 쿡쿡 코를 찔러 메스꺼움을 자아냈다.

식량이 규정대로 공급 될 때에도 허기 졌던 군인들이 이 [타격]앞에 제꺽 무릎을 꿇게 되었다. 식당으로 식사하러 갈 때마다 우렁차게 부르던 군가는 군인들의 목에서 더 나오지 않아 부대에서 당분간 중지 시켜 버렸다.
항상 떠들썩 하던 군인들은 영감처럼 말없이 담 배질만 하였고 ,움푹 패여 들어간 눈 확 들에는 정기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
우리 군관들은 이 상태에서 군인들에게 도무지 훈련을 시킬 수 없었고, 다만 기계적으로 부대 통신보장만 겨우 겨우 해나갔다

인간은 조건과 환경에 따라 순응하고 적응된다더니 , 25명 우리 소대 안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발 생 하였다. 전에는 그렇게 유순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던 군인들이 황주읍 내 주민가옥과 주변 농촌들에 나가 계속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기회가 있는 대로 낮이건 밤이건 주민 가옥들에 뛰어 들었다. 해놓은 음식을 도적질해 먹었으며 , 배낭속에 음식을 훔쳐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 소대뿐 아니라 황주군 에 자리 잡은 부대들이 모두 주민들을 습격하니, 읍에는 아우성 소리가 그칠 사이 없었고 군에 대한 원망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아무리 통제하자 해도 앞에서는 안 그러겠다 대답하지만, 돌아서서는 먹을 것이 있을 만한 산너머 저쪽만을 쳐다보는 군인들이었다
하니 군률은 말 할 것 도 없이 문란해졌고, 명령지시에만 움직이는 부대라기 보다 ,마음대로 움직이는 [토비] 들 집단처럼 변해 버렸다.

처벌도 시범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지 온 부대 군인들이 다 날치니 도무지 적용 할 수 없었다. 주변 주민들은 군인들을 보고 [도적놈 집단] [토비 새끼] [깡패 무리 ]등 별명이란 별명은 다 달아 붙였다. 군인들을 보면 자기 물건 방어 태세에 일제히 들어가니, 마을은 [전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군인들의 한국 방송 보고 듣기

이럴 때 군에는 감격스러운 미담이 전해졌다.
김정일 장군님께서 나라에 들이닥친 식량 위기때문에 잠 못 이루시며 고통받는 부대 군인들을 생각 하시어 ,매끼 통 강냉이 알 삶은 것 한두 숟가락으로 끼니를 때우신다는 설이었다

어느 부대에 가셔서는 자신에게 차려진 쌀밥을 놓으시고, 부대장들을 심히 책망하시며 차려진 밀가루 죽도 절반 갈라 다른 군인에게 주시며 더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북한 군인들에서는 일제히 이 사실을 가지고 [따라 배우기 토론 ]을 벌렸다 북한군 총 정치 국의 대대 적인 선전 바람이었다
군인들은 연단에 서서 가슴을 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장군님처럼 억세게 살겠다고 맹세했다 하여 며칠은 잠잠 하더니 모두 장군님처럼 못하겠는지 소란은 또 시작되었다.

식량난 경제난에 나라가 소란하고 규율이 문란하니, 군 안에는 이상한 색채도 떠돌기 시작했다.
소련과 중국은 먹을 것이 많다는 둥, 외부세계에 귀를 기울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무전 통신 중대인 통신 결 속소1,2,3, 중 대 에서는 군인들 속에서 무전 교신 시간이 아닐때면, 한국 방송을 청취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저녁시간에는 레 시 바를 귀에 걸고 귀가 솔깃하여 남한 방송을 듣곤 하는 현상이 노골 적으로 나타났다. 부대 보위 지도원은 눈이 빨개서 그 현상을 축출 하느라 올려 뛰고 내리 뛰고 하였다

사건이 엄중하다고 간파한 부대 보위부에서는 제일 많이 한국 방송을 청취한 분대장 두 명을 선택하여 잡아냈다
부대에서는 공개 총화를 열고, 비판대회를 벌인 다음 그 자리에서 노동 연대에 넘겨 버렸다 한동안 뜸한 것 같더니 1996년도에는 황해남도 옹 진군에 파견된 통신 결속 소 1중대 4소대 군인들이, 모두 한국 위성 텔레비전을 관람하는 현상이 발로되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온 소대가 모두 관람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근무시간 에 나가면 으레 한국방송 듣는 것을 [생활화 ] 하였다. 부대에서는 소란이 일어나 소대 전원 25명을 새로운 인원으로 바꾸어 버린 다음 구속하였다.

나이 어린 신대원 10명을 내 놓고는 15명이 모두 군사 공개 재판에 나서게 되었다. 주모자로 된 소대장 과 분대장 3명은 서해 지구 군사 재판소 의 결정으로 15년형을 언도 받았고 , 나머지 11명은 5년 이상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 한국 방송과 텔레비전을 본 군인들은 처형되었지만 이들이 부대 안에 바람처럼 퍼뜨린 한국의 실상은 소문에 소문을 달고 퍼져 갔다 . 군관인 나도 그때 처 음으로 한국이 발전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고, 모순된 두 제도의 실상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훗날 나의 탈북 계기가 바로 부 대안에서 일어난 이 사건들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1996년 6군단 쿠테타 사건의 전모

1996년도에 군에서는 하나의 큰 충격사건이 일어나 소문이 자 자 했다.
함경북도 주둔 군단인 무력 부 6군단 안에서 군사 쿠테타 준비를 하던 중 탄로 났다는 것이다. 사연은 군단 정치위원 (정치위원은 군단장과 급이 맞먹는 정치일꾼)이하 밑의 군단참모장 ,각 사단장들을 비롯한 군 장정들이 모두 쿠테타 계획을 짜놓고 한국과 유사시 협동 작전을 계획했다 한다.
이들은 중국쪽을 통해 거액의 달러와 상품을 넘겨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북한군의 작전 지휘 체계를 변경시켜 , 유사시 쿠테타 계획대로 군 배치와 포 집중 사격 제원을 짜놓았다고 한다.

이 사건에는 함경북도 (도) 안전국장도 관련되어 있고 , 도당위원회의 일부 일꾼들도 관련되어, 함경북도가 하나의 큰 반정부 집단을 구성해 놓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움직임을 눈치챈 부대안의 한 보위지 도원이 중앙당에 신소하는 바람에 부대가 전면 검열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또 한 가지 설은 새로 파견된 군단장이 내려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 중앙당 집중 검열을 요구했다는 등 두 가지 소문이 돌았다 . 어째든 사건 해명을 위하여 중앙당 검열 그루빠가 몇 달 동안 악전 고투하였으며 ,사건 출처는 군단 정치위원을 비롯한 군 장정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에서 잡았다고 전해졌다. 또 한가지는 그 자식들의 외국제 상품 구입과 외화 돈을 쓰는 정형에서 출처를 캐냈다는 것이다

소문에 6군단 은 자기 실태를 모두 한국에 정상적으로 통보하였으며, 협조를 요구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돕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하였다
쿠테타 집단을 축출하기 위하여 김정일은 무력부 작전국과 호위국 사령부에, 돌발 할 수 있는 사태에 대처할 작전을 세우게 명령하였다 한다. 특수 병종으로 꾸려진 호위총국 사령부 별동대 군인들은 새벽 4시 , 불의에 6군단 지휘부와 고위장성들의 주택을 봉쇄하여 체포작전을 벌였다고 했다. 이 [적발 작전 ] 에는 수 십대의 군용 트럭이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군단 청치 위원이하 군 고위 장성들과 군관들은 무리로 체포되어 끌려가고, 그 가족들은 따로 실어 정치범 수용소에 모두 넣어 버렸다고 하는데 아직 이 비밀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적발 작전 후 북한에서는 함경북도 6군단과 함경남도 7군단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대 수송작전이 개시 됐다. 밤이면 군인들이 무리로 교대 후송길에 올랐고, 운수수단이 모자라 철도도 이용되었다 정확히 20일간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철도는 완전히 군 인원과 군수품 수송으로 사용돼, 주민 수송과 경제 수송은 중단 되었다. 나는 출장 길에 함경북도 청진시내 갔다가 이것을 목격했다

20일간 청진시에 갇혀 꼼짝 못 하게 붙잡혀 있으면서, 이 수송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때 청진시 주민들의 여론은 이러 하였다.

이 쿠테타가 발각 되지 않았으면 조국이 통일 되거나, 정치제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여론까지 분분한것을 나는 여러 주민들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
- 백성의 국가에서 군국주의 국가로

식량난, 경제난으로 인한 북한의 참상에 군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독재 당국은 정책적 변동을 일으켰다
몇 십년간 북한 혁명의 주력군은 노동자, 농민이라고 하던 주민 위주의 이데올로기 관점을 주력군은 장병들이라고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김정일 장군께서는 군을 위주로 한 선군 정치 , 간 군 정치를 펴 나가심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완수 할 결심을 확고히 내리셨다고 하였다. 이 에 북한군에서는 독재 당국의 각본에 따라 일제히 연 5 일간 대 토론회를 부대마다 벌였다.
[군인들을 이렇게 앞장에 내세워주시고 믿어주시는 장군님의 은덕에 천 백 백로 보답하자 ] 는 식의 사상바람 이었던 것이다.

이 토론회 진행과정은 김 정일이에게 아주 만족을 주었고, 재차 인민군 장병들은 [최고 사령관의 전사 ]들이라고 , 또 [분에 넘치는 믿음 ]을 내려 보냈다. 군부대들은 [믿음 ]에 또 연이어 [결의 모임 ]을 며칠간 벌였다. 이제부터 군인들은 [그저 군대가 아니라 최고 사령관 동지의 전사 ] 라는 것이다. 이에 맞게 독재 당국은 북한 어디서나 군인들을 최우선적으로 우대해주며 , 군 활동을 보장할 데 대한 공문을 연이어 떨구었고 집행을 위해 당 사법 , 안전 , 행정 기관들이 앞장서도록 조치를 취했다.

지시를 받아 안자 , 군인들은 어디가도 어깨를 으쓱하며 대우를 요구했고 대왕 행세를 하려 했다. 심지어 장마당이나 , 주민가옥, 공장 기업소들에 나가 먹을 것과 물건을 훔치면서도[최고사령관 의 전사들을 어떻게 보고 그래]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우게 되었다.
또 군에서는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해를 입히면 처벌하던 규정을 바꾸어 [어떻게 함부로 최고사령관의 전사 ]들을 처리하겠는가 하며 관대 정책을 펴 나갔다. 법질서를 집행하는 사회 안전 기관도 위의 이 지시를 집행해, 법을 어기는 군인들의 횡포를 무작정 눈감아 주게 되었다
과연 독재 당국은 바라던 대로 흔들리던 군 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어 다소 가라 앉히게 되었다. 대신 북한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독재를 위한 군국주의 국가로 철저히 탈바꿈 하게 되었다

북한의 식량난에 백성들은 무리로 굶어 죽으면서도, 군인들만은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고통에서 다소 벗어났다.

재작년부터 군안에서 선전하기를 장군님께서 귀중한 당 외화를 들여 외국에서 쌀을 사다가 군인들에게만은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부대 정치부에서는 장군님의 이 은정넘친 사랑에 꼭 보답하자고, 밥을 먹을 때마다 강조하였고 군인들은 감격 해 하였다.
그런데 나는 탈북해서 우리 군 안의 쌀밥들이 모두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들여 보 낸 [ 지원미 ]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결국 모두 북한군을 지원한 셈이다.

-교환소대장과 연애

1997년 2월 16일을 맞으며 나는 상위의 군사 칭호를 받고 통신 결속소 제 4중대장으로 임명받게 되었다. 이때 내 나이는 스물 여덞살 , 한창 사업의욕이 북받쳐 맡겨진 군 임무를 수행하는데 전력 할 때였다.

북한 당국은 이해에 들어서면서 병사들이 스물 일곱이 되면 으레 제대 시키곤 하던 군 제대 법을 수정하여 서른살까지 복무하도록 규정하여 놓았다. 소위 장군님의 사랑속에 베풀어진 [충성의 군사 복무 ]라며 병사들을 속이는 판이었다. 또 이처럼 군 복무기간이 긴 나라는 북한밖에 없었다. 하여 북한의 온전하다는 청년들은 죄다 젊음과 청춘시절을 독재 기구를 연장하는데 고스란히 바치게 되었다 서른 살 이전은 사랑과 젊음이 꽃피는 시절이다. 하지만 이 시절에 군 병영의 울타리에서 독재 당국에 사랑과 청춘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은 좀 억울한 일인 것이다.

나는 병사들과는 달리 군관이라는 자유로움에 , 다행히 사랑을 맛보게 되었다. 병사들은 열 일곱 살에 입대하여 서른살 까지 휴가 한번 없지만 우리 군관들은 1년에 한번씩 휴가가 차려졌다.

고향인 평양에 이해 초 휴가를 가니, 부모님들은 나에게 이제는 스물 여덞살을 먹었으니 왔던 김에 좋은 평양 처녀를 섬 보라고 권고하였다. 이때는 이미 나에게 사모하는 처녀가 있을때였다. 아직 서로 군복무를 하고있어 결정할 상태가 되지 못했기 떄문에 차마 부모님들에게 속마음을 비칠수 없었다. 그가 바로 나와 같이 군복무를 하는 통신 결속소 4중대 5소대장인 교환 소대장 이 향란이었다.

그의 나이는 스물 여섯 살이었는데 키는 중키에 얼굴이 동그스름한 살결 맑은 처녀였다. 우리는 늘 하루 사업 총화 때마다 나란히 앉아 하루 군복무 정형을 총화 했다 그는 얌전하고 마음씨 고운 매력있는 여자였다. 수줍음을 잘 타며 말할 때마다 약간씩 붉히는 얼 굴속에 패인 보조개는 영 나의 마음을 죽여 주었다. 은연중 우리는 서로 만나면 괜히 얼굴을 붉히는 사이가 되었고, 서로 보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찾으면 애써 눈길을 딴 데로 돌리곤 하였다.

우리는 하루 종일 부대 병영 안에서 같이 맴돌며 , 대원들을 움직이는 같은 군관인 처지에 대원들의 눈치가 무서워 서로 만나기를 꺼려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중대장으로 승급하면서 우리 관계는 더욱 묘연해졌다. 그가 나에게 처녀 교환소대 근무 정형을 보고 할 때면 나는 색다른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도 전에 없는 버릇으로 괜히 말을 더듬거리며, 눈길을 허공에 팔고 나를 슬쩍 슬쩍 훔쳐보았다. 우리의 만남은 너무 자주 있었다, 나는 그의 상급으로 그의 보고를 받아야 했고,, 마음속에 치미는 사랑의 불씨도 함께 받아야 했다

화산의 격정은 폭발해 이해 9월 나는 사업보고를 하러 들어온 그에게 다짜 고짜 말했다
『5소대장 나를 어떻게 생각하오?』
『예 ? 무슨 말씀인지요?』
『중대장이 내가 아니라 남자인 나를 말이오 』
그의 얼굴은 대번에 빨개졌다
그는 맑은 두 눈을 들어 눈물 이 그렁한 눈으로 나를 정 차게 바라만 보는 것이었다 순간 나의 마음속을 때리는 말이 있었다
[아차 내가 먼 저 말해야지 약한 여 자 보고 먼저 요 구 하다니 ]
『나는 향 란 이를 좋게 생각하오 !어떻소 ?』
『나도 중대장 동지를 좋게 생각해요』
[난 좋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단 말이오 ]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나는 사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그 에게 다 가 갔다
그의 손을 꽉 잡자 그 는 나의 품에 선뜻 안겨 들었다 훗날 의 사랑 만남은 끝이 없었다. 나는 구실을 만들어 그를 자주 만나 임무를 주었고 그도 그러기를 내심 바랐다. 중대 군관 7명이 참가하는 저녁 하루 총화때에는 총화가 끝나면 그를 우정 임무 줄 것이 있다고 떨구어 놓았다
그럴 때면 으레 열정적인 키스가 오고 갔고 끝없는 희망에 대해 속삭였다
나는 [고위 장성 ] 그는 장성의 [현숙한 사모님 ]이었다
향란이 같은 여자 군관은 스물 일곱 살에 제대 시키니 그때까지 우리서로 변치 말고 사랑을 유지하자 굳게 맹세했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채 꽃피기전에 서리를 맞을 줄 우린 몰랐다
새해 1998년도 2월에 그에게 새로운 청혼자가 나타난 것이다.
청혼자는 3비행사단 203연대 비행사 김 승국이었는데 그는 그 부대가 시범 비행사로 내세우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 철호는 203연대 의 오랜 비행사이며 , 연대장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참가 하여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 받았다.

-처벌 제대

나이가 많아 제 대 하며 그는 아들을 비행사로 키워 자기가 복무하던 연대의 비행사로 내세웠다. 애비의 당당한 세습과 안면 속에 김 승 국은 김정일이가 1997년 부대 방문시 , 비행사 대표로서 나서 시험 비행을 한 후 직접 담화도 나누어 그의 군 출세는 발바닥에 날개가 붙게 되었다
서른 살 나이에 벌써 소좌(소령)의 군사칭호를 수여 받고 비행부대 대장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대 안에서 매미 날개처럼 맴도는 이 향란을 보고, 꼭 마음에 들어, 자기 애비와 부대 정치부 책임자들에게 혼사를 시켜 줄 것을 요구 하였다. 부대에서는 나와 이 향란의 관계를 조금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주저하였다. 허나 김 승국이 하도 완강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정황은 달라졌다. 그가 이 향란 을 내놓고는 다른 여자 한 테 절대로 장가를 갈 수 없다는 것을 애비와 부대 관련 책임자들은 향란이를 연속 불러들여 설복하기 시작했다. 김 승국이도 향란이를 여러차례 만나 청을 들였다. 그러나 나와의 사랑관계가 이미 맺어진 때문에 향란은 매번 거부했다.

부대에서는 나중에 비행사한테 시집가는 것은 당과 혁명을 위한 일이며, 거역하는 것은 당의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정치적 위협까지 해댔다 하지만 향란은 자기는 군복을 벗고 처벌을 받으면 받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맸다. 향란이에게서 이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나는 이것은 순수한 남녀 사랑을 훼손시키는 인권침해 현상이라고 항의를 들이댔다

허나 나의 말은 권력을 틀어쥔 부대 상층부들에 통할리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말을 개방귀 만큼도 안 여기며 나더러 [혁명의 이익의 견지 ]에서 향란이를 포기하고 그를 설복할수 있는가, 없는가, 따져 물었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며 군복을 벗으라면 벗겠다고 땅땅 맞섰다. 향란은 나에게 변치않을 우리 사랑을 약속하자고 자기 몸을 정복해 달라 간절히 부탁을 했다

나는 비장한 결심으로 비행장 활주로 옆 잔디 밭에서 밤 이슥할 때 그의 첫 정조를 정복해 버렸다. 주어진 환경 때문에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일생 잊지 못할 여자와의 첫 살 섞음 이였다. 여운은 가라않아 두어 달 잠잠한 것 같더니 , 뜻밖에도 나에게 제대명령이 떨어졌다.
원인은 나의 지휘 능력이 무능하고 부대안에 남녀 풍기 문란을 조성했기 때문이라 한다. 소위 처벌제대가 내려진 것이다

-애인과 함께 군복을 벗고

향란에게도 똑같이 제대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제대 이유도 나와 같았다. 부대 상층부와 짜고든 김 승국과 그애비의 안면 관계에 의한 비열한 복수였다. 분개한 나는 공군 사령부와 중앙당에 신소를 하겠다고 향란에게 말했다 그러나 열흘 안으로 군복을 벗고 제대되어 고향으로 가야 하는 우리가 신소 처리는 언제 받느냐 하는게 향란이의 말이었다
나도 생각 해보니 설사 해명된다 한들 그세력들이 있는 부대에서, 다시 군 복무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 우리는 백을 놓고 고스란히 부대를 떠나리라 결심하였다.

그때 나는 향란이를 데리고 평양에 가서 단란한 살림살이를 하며 , 깨가 쏟아지게 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리라 생각했다.
부대를 떠날 때 나와 향란은 많이도 울었다

우리의 청춘시절이 있는 곳이고, 앞날의 꿈을 키워왔던 곳을 불 명예스럽게 떠나기 때문에 설음이 더 북받쳐 울고 또 울었다
같이 생활하던 군관들은 전처럼 군에 피복 공급이 잘 되지 않아 군복 여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던 것이나마 나의 배낭 안에 연속 넣어주었다.
또 이들은 차곡 차곡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봉급들을 꺼내 사양하는 나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두 배낭 가득히 담은 군복배낭과 불룩해진 돈 봉투를 받아 쥔 나는 온전치 못한 그들의 군복 차림새와 생활실정이 헤아려 차마 다 가지고 떠 날수 없어 몰래 남겨 두었다. 거의 모든 중대원들은 황주 역전까지 따라나와 차표를 끊어주었고, 열차 안에 나와 향란이의 자리를 잡아 준 후 따나는 열차를 따라 뛰며 오래도록 손 흔들어 주었다

이날이 작년 5월2일이다. 나는 향란이를 데리고 먼저 평양에 들러 부모님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며칠 후 향란이를 그의 고향인 함경남도 고원으로 내려 보냈다. 내가 다닐 직장을 수속 한 후 인 차 결혼식을 올리고 평양에 와서 살림을 펼 것을 굳게 약속했다. 당장 직장을 구하자니 애로가 한 두 가지 아니었다. 경제난에 평양시 대다수 중소기업들은 문을 닫을 형편이었다 출근해도 원료가 없어 설비들을 가동시키지 못하니 노동자들은 앉아서 말 장단만 하다가 퇴근하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취직을 신청해 보았지만 퉁명스러운 대답뿐이었다
[모두 나가야 될 판에, 들어올 자리는 없어요,]
[일할 것 도 없고 노임 줄 것도 없어요,]

-추방 령

나라가 이 꼴이니 할 수 없었다.
작년 6월초 한달 쯤 집에서 지내는데 뜻밖의 벼락이 떨어졌다.
평양시 행정 위원회의 결정으로 우리 가정에 [추 방 령]이 떨어진 것이다.
급히 알아보니 내막은 평양시의 안을 정돈한다는 것이다.
군 처벌 제대로 나는 과오대상자 부류에 속한 것이다.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누구도 나의 하소연을 받아 주지 않았고, 쓴 참외 보듯 하니 마음속 오열만 삼키게 돼 [자살 ] 할 생각까지 다 났다

태어나 정든 고향인 평양을 버리고 지방으로 가기도 싫었으며, 외아들인 나 때문에 인생 말년에 부모님들이 지방으로 쫒겨가야 할 기막힌 신세에 온몸이 다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한쪽켠 에서 울고 불고 하는 부모님들과는 상관없이 집안의 가장 집 물들을 추방차에 쥐어 올려뿌리는 안전원들의 모습은 내가 버릇처럼 눈앞에 그려보던 악마의 무리 같았다.
나는 멍히 서서 이모든 것을 제 정신없이 보기만 하였다.
차가 떠나려 하자 부모님들을 부축하여 차에 태우고 나도 올라탔다.
달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완전히 맹목적인 순종이었다.
부모님들과 침숙 해진 동네 사람들은 모두 떨쳐 나와 울며, 한가지라도 우리손에 쥐어 주려 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부옇게 나타나곤 하지만 딱히 기억 은 없다. 서 평양역에 나가니 평양시 추방 민들을 따로 태워 수송하는 짐차 행렬이 길에 늘어서 있었다.
우리 가정은 아직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함경북도 새별군 용북탄광 쪽으로 이틀 동안 열차를 타고 갔다.

저녁 9시경, 새별 역에 도착하니 반가이 맞아 주는 사람도 없는 썰렁한 풀랫트 폼에 우리 일행 다섯 세대는 저마다 자기 짐을 부려 놓았다
안내 해 주는 사람도 없는 생소한 역전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이불짐을 헤쳐 모두 뒤집어 쓴 채 스산한 밤을 지내 보냈다
다음날 역에서 용 북 탄광에 전화를 하니 마지못해 차를 가지고 마중 가겠다는 대답이 왔다. 마중 온 차는 10t급 대형 트럭이었다
쥐새끼들이 우글거리는 곰 팡이 낀 널따란 탄광창고에, 우리 다섯 세대의 짐을 부린 탄광측은 여기에서 지시 날 때까지 참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쯤 집이 해결 되는가 물으니 1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단다

도착한지 열흘 만 에 워낙 건강이 좋지 못하던 아버지는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다 집 아닌 이런데서 아버지를 치료 할 수 없어 용북구 골짜기에 있는 간염 병원으로 입원시키니 아버지는 그날 나의 손을 잡고 의미있는 말씀을 하셨다.

『태용아 사람이 살다가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 와보니 여기는 본토박이 사람들도 무리로 굶어죽는데 우리도 얼마 견디지 못할게다. 나라가 난장판인데 네가 살 곳 좀 찾아라. 어머니는 누이네 집에 모셔다드리고 향란이를 찾아 살 곳을 잘 정해라, 내야 이제 몇 달 살면 죽을 몸이니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다 』
나는 그때 아버지 말씀이 훗날 무엇을 의미 하는지 다 예상하지는 못했다.
다만 부탁대로 어머니를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누이네 집으로 모셔다 들리고 돌아오는 길에 향 란 이네 집에 찾아 들어갔다.
향란이 어머니는 수선을 떨었다
『아 이 구 데리러 온다는 서방이 이제야 왔어, 하루가 열두 달이 되도록 자넬 기다리는 향란이야, 어서 빨리 평양가서 도시맛을 보여야 할 게 아니야』
가는곳마다 심산이라 더니, 이 미래 장모님이 또 암초가 되었다, 나는 차마 장인 장 모될 분들 앞에 우리 가장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향란이를 끌어낸 후 사연을 다 이야기 하였다.

-술 한 병과 국수 놓고 결혼식

향란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머리를 싸쥐고 우리앞은 왜 이렇게 서리맞은 호박꽃 처럼 이모양인가고 한탄하였다.
나는 나의 속생각 있는지라, 향란에게 후회하는가 하고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말했다
『다른 길이란 뭐예요 날 가라는 거예요 』
그는 무섭게 항의하며 나의 앞으로 다가와 부르짖었다.
『난 영원히 태용씨의 사람이에요 오늘 당장 죽는대도 태용씨의 몸이란 말이에요』
그가 진정한 뒤 그럼 어떡하겠는가 물었다.
향란은 자기를 키워준 부모님들은 속일 수 없다고 그대로 말하고 결정 받자고 하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향란의 부모님들 앞에 우리가정에 들이닥친 불행을 이야기 하였다.

향란이 어머님의 푸념 섞인 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아이고, 우리 향란이 도련님 한양 가서 어사가 되는줄 알았더니 진짜 거렁뱅이가 되어 나타났구나, ]
향란이 아버지는 향란이 어머니를 달랬지만 막무가내였다,
[당장 걷어치워라, 우리 향란이 저 인물 저 마음씨에, 고원군 총각들 다 모여 들 수 있으니 당장 걷어치워라 ]
향란은 옆에서 울고만 있었고, 나는 다시금 비장한 결심을 다졌다
[그럼 전 가겠습니다, 제 처지에 향란이를 책임질 형편이 못되니 전 아무도 탓하지 않고 물러가렵니다]
순간 항변하는 향란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 이미 저이의 사람이니 어디든지 끝까지 따라 가렵니다.]
잡아 찢을 뜻한 장모님의 말씀이 또 울렸다
[아이고, 이 미친년아,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내 사람, 네 사람이냐, 가지 못한다]
장인님의 무거운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 여보 노친네, 진정하오. 난 저 사람의 사람됨이 꼭 우리 향란이를 거둘 것 같으니 보내고 싶구려, 우리도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를판에 끼고 있다가 무슨 원을 남기겠소? 젊은 것들이야 어디가서든 제 밥벌이를 찾아 야지]
향란이의 집도 하루 세끼 풀 죽이나마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옹근 낮과 밤 장인, 장모님과 옥신각신 하던끝에 향란은 끝내 부모님들의 승인을 얻어냈다. 부모님들은 지금 당장 결혼식을 치러 줄 치러줄 식량도 없고 술도 없으니. 후에 좋은 날이 오면 그때 가서 꼭 결혼식을 다시 하라며 술 한 병에 국수를 마련했다.
장인님과 장모님에게 큰절을 올리고 술 한 잔씩 부은 나는, 그대로 남편이 되고 향란은 아내가 돼 버렸다

향란이를 데리고 멀리 북방의 용북 탄광에 다시 돌아온 나는 창고에 간소한 우리 신혼 살림을 펼쳤다. 새 색시를 데리고 왔다는 소문만 났 을뿐 누구 하나 얼씬 거리지 않아, 평양에서 내려온 [추 방민]들끼리 자리에 앉아 서로 위로를 나누었다. 향란을 데려 온지 열흘 후부터 우리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가지고 온 물품을 헐값으로 옥수수와 다 바꾸어 먹으니, 손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탄광 구내 도로 수리공으로 일하는 나에게 식량배급은 차려지지 않았고, 갱 안에 들어가 직접 탄을 캐는 채탄 굴진 공들에게만 한달에 열흘 간 식량을 보장했다. 며칠동안 향란이가 뜯어온 풀만 우려 먹으며 출근하던 나는 끝내 허기져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 방송듣기 시작

집안에 누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궁리만 하던 나는, 은연중 한국 방송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 했다. 작은 라디오가 없어 전부터 우리 집에서 쓰던 털레비전 보다 조금 작은 옛 (구식) 큰 라디오를 가지고 이불속에서 열성적으로 듣는 나에게 희망이 생겼다. 라디오가 사람 몸체 만큼커서, 밤마다 라디오는 향란이 대신 내 옆에 잠자리를 정하게 되었지만 괜찮았다. 향란이는 처음에 이러다가 들키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텐데 어쩌자고 그러는가, 나를 뜯어 말리더니 신기하듯 그도 귀를 기울렸다.

평양 말씨보다 퍽 좋은 부드러운 서울 말씨와 진상을 그대로 알려주는 방송채널은 우리의 고통스러움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특히 탈북자, 귀순자들의 소식이 나올때마다 귀가 항아리만큼 되어 듣곤 하였다. 어느날 나는 환성을 지르며 무릎을 쳤다.
방송을 들으며 이불속 안에서
[귀순하겠다 ]
하고 외치니, 향란은 눈이 둥그래졌다.
[이걸 들어보 라 여기가 어디 사람 살데야 우린 한국에 가야 돼,]
[한국에 가면 정말 우리 살아갈 길이 열릴까요]
[열리지 않 구 집도 주고 열심히 일하면 돈도 배급도 다 제대로 주는데 왜 못 살아 ]
[정말 그런데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래 가자니까? 우 린 여기서 이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나는 탈 북을 다 한 것처럼 흥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향 란 이를 덥석 안아 빙빙 휘두르며 키스를 해댔다.
향 란이도 좋은듯 다시 물었다.
[거기 가면 뭘 하지요 ?]
[난 군인 출신이니까 군대 에 복무 할 테야]
[예?, 군대에요, 그럼 자기가 키우던 대원들과 마주서겠단 말 이예요?]
나는 마음속이 섬뜩했으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제 깍 말머리를 받았다.
[마주 서지 마주서 내 너희네 중대장이다 총을 버리구 해변가에 꽃게 잡으러 나가자 하고 명령 할 테야,]
[나도 그러면 명령 하겠어요 여자 군인들은 모두 내 구령을 들어라, 군복을 치마 저고리로 바꿔 입고 화장할 것, 하구 말이예요,]
우리는 그 다음날에 언제 탈북 결심을 했던가 싶어 [탈북꿈]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서뿔리 결론할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허나 나와 향란이가 풀 뜯으러 산등성 길을 헤매다가 집에 들어와, 풀죽만 한 사발씩 차려 놓고 마 주 않으니 다시금 울화가 터져 올랐다. 향란이의 말은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나도 태용씨 한 테 밥 한 그릇도 못해주니 가고 싶어요, 가서 실컷 쌀을 사가지고 출근하는 태용씨 도시락에 쌀밥을 가득 담아 주고 싶어요.]

-식칼 두 개를 쥐고 두만강을 건너다

나는 밤새도록 잠 못 이루며 [탈북구상]에 따라 새별군으로부터 중국 훈춘 쪽으로 건너가는 두만강시찰도 이틀동안 연속해 보았다.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보초 근무 교대시간도 기억해 놓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다음날 탈 북 준비로 장 마당에 나가, 식칼 한 개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탈북하다 붙잡히면 너 죽고 나 죽고 해볼 판 이였다.

향란에게 농담 비슷하게 말을 건네니, 그도 내가 불의 의 정황에서 총만 뺏어준다면 군에서 배운 솜씨대로 총을 휘두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날 오후 우리는 저녁시간을 이용해 도강[월경]하기로 계획하고 풀을 뜯는 주민들처럼 바구니를 옆에 낀 후 두만강 뚝 에 붙어 섰다.
시간이 좀 지나 자 저녁 이 되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슬렁 어슬렁, 순찰했던 군인들이 분명 저녁 먹으러 초소막으로 가는 것 었다. 교대할 순찰병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빈 공간이었다. 우린 제꺽 강둑에 붙어 섰다. 정황을 살폈으나 기척이 없었다. 이공간에 행동하지 않으면 더 큰 암초에 맞다 들 것이다.

우리는 급히 강 뚝 을 넘어 두만강에 들어섰다.
나는 식칼 두 개를 양손에 움켜쥔 채 죽더라도 향란이를 보호할 각오로 가슴을 불태웠다. 허리까지 치는 물 속에 들어서 허우적 거리며 헤쳐 나가노라니 어느새 우리 몸은 중국 땅에 닿았다.

급히 강뚝 우에 올라서 수풀 속으로 정신 없이 들어간 우리는 우뚝 멈춰 섰다.

『향란이, 성공했어! 우리 성공했단 말이야!』
『그래요. 우린 성공했어요 우린 이겼어요』

향란은 나의 품에 와락 안겨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잔 등 을 쓸어 주며 [이제 우리는 한국에 갈 거야 가면 행복할거야] 하고 목메 여 부르짖어댔다. 우리는 산을 타고 걷기 시작했다.
산봉우리를 몇 개 넘으니 마을이 나타났다. 개들이 컹컹 짖어대는 마을의 외딴집에 찾아 들어가니 중국 조선족 중년 내외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요즈음 탈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다고 그러우? 우리 집에만 해도, 몇 명 들어왔다가 다 무사히 가고 싶은 데로 갔소,]

주인 내외는 배고프겠다고 밥을 사발에 그득 그득 담아 주었다.
곁눈질로 향란이의 모습을 보니 그는 정신 없이 밥을 퍼먹어 댔다.
얼마만큼 배를 곯았으면 저러랴 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실컷 먹었다. 앞으로의 장애물을 넘길 마음속의 장탄을 가득 하는 심정으로 먹고 또 먹었다.
다음날 낮에 우리는 넘어온 두만강 변에 버젓히 다시 나갔다.
경비가 없는 중국 쪽은 아무 일 없어 마음놓고 북한 땅을 넘겨보며 구경 할 수 있었다 나는 말 못 할 감회가 북받쳐 소리쳤다.

[야 북한 아, 너 나쁘다 ]
향란이도 분개하여 소리쳤다
[ 독재자야, 너 사람 그렇게 굶어 죽게 하면 되니,? ]
우린 마음속 말을 합창이라도 하듯 같이 웨쳤다 .
[이봐라 니 한 테서 살수 없으니까 도망치지 않는가 ]
이날은 작년 7월 20일 이었다

-향란이와 헤어지다

중국땅에 들어서면 한국 귀순행이 쉽게 열리는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바다 건너 한국은 쉽게 갈 길이 아니었다.

중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는 우리 같은 한국 귀순 요청 자들이 부지 기수였다. 외교관계 때문에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꿈이 깨지니 허무했다.

이제는 중국 공민으로 위장하든지, 아니면 밀선의 뱃길을 이용하여 한국으로 가는 수 밖에 다른 길이 더 없었다. 이 길은 우리에게 천문학적 숫자와 같은 중국 돈 10만원을 내야 하는 길이었다. 아무리 올려 뛰고 내리뛰고 혹시나 연줄을 찾으려 했지만, 매 번 헛물을 켰고 오히려 도와주려 나섰던 중국 동포에게 빚만 가득 지워놓게 되었다.

게다가 언어까지 통하지 않아 가는 곳마다 애를 먹어 설상가상이었다. 나와 향란이는 삯일을 닥치는대로 찾으려 했지만 배 번 손에 쥐는 돈푼으로는 하루하루 먹고 살, 푼전으로 밖에 안 되였다.
이런 식으로 중국땅에서 머물 거리다가는 한국 귀순 길은커녕, 이국 땅에서 제 고국의 말과 풍습까지 다 잊어먹는 국제 유랑아 신세에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하루하루 고민 속에 몇 달 동안 어물거리는데 반갑지 않은 제의가 들어왔다. 우리가 의지하고 사는 동포들 속에서 한남자가 향란이를 보모로 쓰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중년의 그 남자는 한국에 7년 동안 갔다 왔는데, 중국 돈으로 60만원을 벌어와 인근의 부자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 남자의 마누라는 재작년에 또 한국으로 갔는데 아마 돈벌이가 잘되는지 2년 더 일하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남자의 돈을 좀 쓴 뒤여서 면목이 있었고, 그 남자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그 남자가 향란이의 미모에 반해 "향란이가 북한 여자 아니면 중국이나 한국 같은 데서 인물을 크게 우려먹을 미녀"라고 칭찬하는 것을 말끝마다 들었다. 눈과 귀에 거슬렸지만 그런걸 따질 경황이 되지 않는 나였다. 하루는 그 남자가 와서 말하기를 우리 꿈이 한국에 가는 것이라는데, 자기가 도와주면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반가와 하는 우리 기색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그 남자가 제의했다
향란이는 자기집 보모로 2년 동안 일하고, 나는 여기에서 한 5백리떨 어진 산골에 가서 북조선 태권도를 배워주는 교관을 할 수 없는가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겠다고 문의하자 그는 우리가 이일을 해주면 정확히 2년 만에 한국으로 넘어갈 돈 10만원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그 돈으로 한국행 수속까지 다 맡아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중국에 들어와 삯일을 해보아 알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큰 떡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각되는 것도 있고 그의 성의를 봐서 단 마디에 결론을 내릴 수도 없어 좀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 주었다. 그가 돌아간 뒤 우린 열정적으로 토론을 벌였다. 향란은 나에게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대로 주저앉겠는가고 설복했다.
향란은 굽힘 없는 나의 한국 귀순행 결심에 감복되어 말했다.

[우리 결심에 반대 없지만 한가지 근심이 있어요]
무슨 근심인가 묻자 향란은 웃으며 말했다
[태용씨, 여자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꺼림직 하지 않아요?]
나는 성이 나서 외쳐댔다
[내가 왜 그런 생각 못하겠어, 그러니 더욱 말이 떨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나 이것저것 다 생각해 사양하면 끝장이니 어쩔 수 없지 않아,]
금시 향란은 울음을 터뜨리며 너무나 현실이 안타까운 듯 어린애 처럼 발 버둥 질을 쳤다. 스물 여섯살 청춘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안게 된 것이다 나는 향란이를 품에 안으며 비통하게 말했다.
[내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2년은 참아 낼거야, 정확히 2년 후에 한국으로 가든지, 아니면 배반한 놈들을 같이 데리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겠어, ]
내 말의 의미를 감수한 듯한 향란이의 말이다.
[저두 그럴 거예요. 한국이든 저승이든 다 따라 가겠어요]
중년 남자의 소개로 우린 헤여 졌다.
군복을 벗었는데도 전투는 계속 되는 것이다.

-라디오가 통일을 앞당긴다

이국땅에 탈북 해보니 느끼는 바가 많다.
같은 사회주의권 이래도 북한과 중국은 하늘과 땅 차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민주독재를 실행하는 단계였고 북한은 봉건 사회 독재를 고집하는 단계라고 말 할 수 있다. 중국땅이 개방되어 이렇게 점차 인간이 살수있는 땅으로 변했다는 것을 북한 군인들은 모른다.

페 쇠된 국가에서 또 그 안에 완전히 페소시킨 울타리 안에서, 숭배와 우상화 아편만 먹고 자라는 북한 군인들의 경우는 노예주 사회 안의 고용노예들과 같은 처지 인 것이다. 그 군인들이 그토록 미워해야 되고 반 대 해야 되는 한국은 중국 보다 더 발전하고 살기 좋은 자유 민주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깡 보리밥에 소 금 국만 먹는다는 한국군 군인들이 북한 조종사들 보다도 더 높은 대우속에 군복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결과는 뻔히 보이는 듯 하다.

함경북도 6군단과 같은 군사 쿠테타가 매일 건너 일어날것이고, 장성들 보다 병사 대중이 우선 먼저, [우린 이대로 더는 못살겠다 ]하고 일어 날 것이다. 지금 북한에는 당국의 제한으로 라디오가 없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녹음기를 비롯한 제품에 붙어 있는 라디오들도, 한국방송을 듣지 못하게 모두 주파수를 고정시켜 놓았다. 그러니 북한 군인들이나 주민들에게 지금 갈급한 것은, 식량보다도 한민족의 나아갈 길을 깨우쳐 주는 한국 방송을 들을 라디오이다. 자그마한 라디오들이 북한 전역에 알게 모르게 공급된다면, 군인들도 알게 모르게 가지고 다니며 방송을 청취할 것이다. 그 엄한 통제 속에서도 교신을 가져야 할 군 무전수들이, 주파수를 변경시켜 한국 방송을 몰래듣는 호기심은 본능적이다.

새것에 민감하고 진취성이 강한 젊은 군인들의 본능을 되살려 줄 무기가 북한에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나보고 북한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 보라 하면, 제일 먼저 소형라디오 1천만 대 이상을 북한에 싣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통일 된 한반도는 나에게 북한영웅 한국 영웅 칭호 다 수여 할 것임이 틀림없다. 북한 군인들은 김정일을 보고 [공격형 ]성격이라고 평하고 있다.

북한 출판물들을 뒤 져 보아도 김정일의 자라난 과정과 성격은 날카롭고 무 자 비하며, 야망적 이라는데 대해 많이 암시해 주고 있다. 아마 독재를 유지하고 군국화를 실현시키자니 이런 [인품] 이 생겼으리라 생각한다. 이 인품이 군인들에게 전파되어 군인들은 외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주먹만 보다 보니, 세상 [무적 강군 ]으로 자기를 생각한다.

비행기도 제일, 탱크도 제일, 함선도 제일, 그저 모든 것이 제일이라 생각한다. 허나 군관이었던 내가 이국에서 외부 세계를 보니 이 관점은 허황하고 맹랑한 것이었다. 북한이 상대하는 적군 무력은 발전된 수준에 맞게 기계화 장비가 고도로 현 대화 되었으며, 현대전에 적응하게 실전화 되 어 있었다. 특히 거대한 경제적 잠재력은 전쟁의 단기화 , 장기화에도 끄떡없이 받침 할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단기화 는 어떨는지 몰라도, 장기전에는 며칠 못 가 거덜나고 주저 앉을 상태이다. ...군수품 미조달, 후방의 불안전성, 주민들의 제도에 대한 불신임, 군인들의 허약한 건강상태 ...꼽자면 다 부족하고 다 미지수다. 그러니 한반도의 전쟁결과를 예측해 봐도 북한 쪽에 전혀 낙관적이 못된다. 탈북해 언젠가 향란이가 나에게 물었다.

[왜 한국 가면 군복을 입자고 그래요?]
[난 북한 쪽과 마주서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린 싸우면 안 된다는 임무를 수행하고 싶어서야,]
[그래요 ? 나도 그럼 따라서서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가, 소리 칠 거예요 ]

한반도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 총부리를 맞대고 싸워야 하는가 ?
세습 독재를 위해서 ?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 독재를 지키면 노예가 되고 , 자유를 지키면 진 인간이 되니, 북한 군인들은 알아야 한다, 독재를 더 지켜선 안되며 , 자유민주주의와 싸우면 세상이 더 어두워짐을 ...

2001년 7월 25일 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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