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편이 필요 없습니다.” - 김대길
작성년도 :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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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편이 필요 없습니다.”
- 김대길
다른 탈북자들이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는 나의 자랑만 가득한 이런 글을 내가 굳이 쓰는 이유는 북한에서부터 부부였던 탈북자들이 죽음의 사선을 넘어서 이 자유로운 땅에 와서는 왜서인지 이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같이 살아가는 나의 생활경험을 간단히 적어 보는 것이다.“여! 내가 잘못했어.”내가 이 남한에 와서 해당 기관들의 수료과정을 마친 후에 처음으로 잠자리를 편 곳은 부천시 역곡동의 한 빌라였다. 우리 가족에게 임대해줄 집이 나오지를 않았다고 하면서 나가서 잠시만 기다리라 하였는데 다행이도 역곡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이 추운 겨울에 어디를 가겠는가?”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이용하려고 마련했던 집을 임시로 우리에게 내주었던 것이다.북한에서 50여년을 살아오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돈밖에 모르는 인정사정이 없는 사람 못살 사회이다.”라는 반자본주의 사상교양에 찌들었던 이 공산빨갱이의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하는 인간 대 인간의 배려였던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북한이 그리도 반대하고 부정하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우리 부부는 너무도 감사하여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는 그날까지 몇 달 동안 매일 새벽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첫날부터 무엇을 해서 벌어먹으며 살아가야 하겠는가를 많이도 고심하였다.50살이 넘은 나는 어디에 가서 노가다를 뛰자 해도 쉽게 받아주는 곳도 없었다. 아내 역시 직업을 얻는다는 것은 나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였다.한 2-3일 동안을 고심하던 중에 우리는 ‘북한식 순대’ 장사를 한번 해보자고 생각을 모았고 즉시 나는 전철을 타고 금천구 독산동이라는 육류시장에 가서 돼지 한 마리 분의 밸과 피를 사들고 와서는 아내를 보고 당장 순대를 만들라고 했다.일자리를 알아본답시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하루 종일 카드놀이를 하고 술까지 마시고 저녁 늦게야 집에 들어가 보니 집안은 가관이었다.일생동안 순대를 한 번도 해 본적은 없고 어머니가 하는 것을 한두 번 본적이나 있다는 아내는 동네에서 큰 그릇들은 다 빌려다가 방안 가득히 벌려 놓았고 방바닥은 큰 소라도 몇 마리 잡은 양 온통 피 칠갑이었다.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순대를, 그것도 돼지 한 마리 분을 혼자서 다 하느라고 하루 종일 수고를 했을 아내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나는 “아직도 이러구 있는 거야?”하고 벼락같이 화를 내며 옆방으로 들어가서는 자리를 펴고 누워버렸었다.새벽기도를 가느라고 4시 45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려서 깨어나 보니 아내는 그때까지도 순대와의 씨름이다. 그런데 얼굴에는 난감한 표정과 죄책감이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왜 그래?”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그러자 아내가 하는 말이 순대 밥을 다 넣고 가마에 안친 후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순대가 몽땅 터져 버렸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큰 가마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밸 한 두 개만 남고 모두 터져서 순대 죽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순대가 익어 갈 때에는 긴장하여 참대 꼬챙이로 침질을 잘 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잠을 잤으니 남아 날 리가 없는 것이었다.쭝해서 내 눈치만 보고 구석에 서있는 아내 앞에 나는 솥뚜껑을 휙 하고 던지며 “그것두 하나 제대루 못해? 다 퍼다가 오물통에 버려!”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새벽기도에 갔다.그런데 목사님이 그날 새벽기도에서 하는 설교는 신통히도 우리 가정과 지금까지 ‘가정의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던 나를 겨냥하고 하는 설교와도 같아서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나의 심금을 울렸다.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성경의 에베소서 5장 24-28절을 놓고 진행한 그날 아침 목사님의 설교는 그 후 나의 남한 살이의 인생관을 확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들어간 나는 나에게서 무슨 벼락이 또 떨어질지를 몰라서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여!! 내가 잘못했어.”그 말을 들은 아내는 왜서인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운다.................나는 그때에 아내 앞에서 처음으로 하기 힘든 말을 했었지만 지금 보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그 후 우리 부부는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부지런히 일하여 돈을 모아 2006년에 영어학원을 세웠고 또 돈을 모아서 북한의 자식들도 데려 왔고 2010년에는 새로운 학원을 또 내왔다.나는 아내를 학원의 원장으로 내세워 주었고 그에게만은 자그마한 빨간 승용차도 하나 사주었다.
“지도원동지 저는 저런 남편이 필요 없습니다.”나는 북한에서 산하에 수출품 생산기지들과 공장들을 적지 않게 관리해왔었다. 특히 평양에서 가까운 강선 편직공장은 북한에서 니트 즉 편직제품들을 수많이 수출하는 매우 큰 공장이다.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원료의 부족과 전력부족으로 공장이 거의 돌아가지 못했다. 1995년도에는 북한 전국의 공장들이 다 그러하듯이 강선편직공장도 완전히 멎어섰다.국가에서 배급도 못주는데다가 공장에서 생산마저 멎으니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개인장사에 나섰다.그러던 중 어느 날 공장 생산과장에게서 전화가 올라왔는데 담당지도원인 나를 좀 급히 내려와 달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차를 타고 공장으로 내려갔다.정문에서 나를 맞이한 공장 생산과장은 미안하다고 하며 하는 소리가 생산과 당세포비서이며 지도원인 송동무의 아내가 남편과 이혼을 하겠다며 집을 나가서 며칠 동안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송지도원의 아내라면 나도 잘 아는 아주 예의 밝고 반듯한 여자였다. 그 공장에 내려 갈 때마다 공장의 기본 생산 지휘부서인 생산과에 머물면서 과장의 집 아니면 세포비서인 송지도원의 집에 가서 여러 번 술도 마셨었고 그만큼 집주인과도 친하게 지내던 사이었다.절대로 그럴 것 같지 않던 여성이 갑자기 이혼을 빙자로 가출이라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원인을 물으니 역시 그 당시에 북한을 휩쓸었던 극심한 식량난이 불러온 불행이었다.송지도원의 가정은 시부모 내외와 아이들 셋까지 모두 7명이나 되는 대 가정이었다. 어느 집 보다도 식량난이 제일 무섭게 덮쳐들었다 한다. 공장만 조금이라도 가동이 된다면 생산과 세포비서까지 굶을 형편은 안 되는 것이었다.갑자기 닥쳐든 식량난 때문에 급해난 송지도원의 아내는 장마당에 나가기 시작했단다.그러자 송지도원 자신은 어쩌지도 못하면서 “세포비서의 아내가 장마당에 나가면 어찌하는가?”하며 호령질을 했다 한다.마음 약한 아내는 할 수 없이 조개잡이 배를 탔는데 그때부터 외화벌이 사업소에 있는 한 인간의 꼬임에 빠져서 가까이하며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다.인간들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법, 뒷소리가 결국은 공장 당위원회에까지 들어가고 송지도원은 당위원회에 불려가서 가정교양을 잘못하여 세포비서가 당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켰다며 비판을 받았다 한다.그날부터 송지도원은 매일 술독에 빠져서 아내를 쥐 잡듯 했다고 한다. 아내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지키려고 할 수 없이 그 길을 갔다고 빌었건만 사내는 욕설과 폭력이 인간의 도를 넘어섰다고 한다.아내는 참다못해 애들 셋은 자신이 데리고 나가겠으니 이혼을 하자며 집을 나가서는 며칠째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생산과장은 나를 보고 지금 송지도원의 아내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았으니 한번 만나서 좀 설득을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내가 세상 태어나서 얼마 살지는 못했지만 이런 난감한 부탁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전혀 설득할 자신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지간에 피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한번 만나보자며 과장네 집에 갔다.생산과장 아주머니와 함께 있던 송지도원의 아내는 나를 보는 순간 놀람과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더니 오열을 터뜨리며 섧게 울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며칠을 어디서 지냈는지 지치고 피곤이 실려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그 앞에서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한참 뜸을 들이던 나는 아주머니가 좀 진정된 틈을 타서 “아주머니가 이러시면 어쩝니까?” 하고 설득을 시작했다.울음을 그치고 설움이 분노로 변한 아주머니는 다시는 ‘보기도 싫은 남편’ 소리는 하지도 말란다.아주머니의 말이 다른 집들은 식량이 없어서 벌써 집을 팔고 이혼을 하고 온가족이 뿔뿔이 헤쳐진 가정들이 주변에 여러 집이 된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정의 파탄을 막아보려고 별별 짓을 다 해 왔건만 그런 자신을 이해 해주기는 고사하고 오직 남자의 권위와 세포비서라는 직위만을 중요시하며 아내를 무시하고 구박만 하는 그런 남편과는 이제는 절대로 같이 살 수가 없단다.“지도원동지! 저를 설득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런 남편은 절대로 필요 없습니다.”이것이 송지도원 아주머니의 강경한 마지막 답이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독재정치가 낳은 전체 북한여성들의 피타는 절규였던 것 같다.능력 부족을 느낀 나는 과장 아주머니를 밖으로 불러내서 가서 송지도원 부모님들을 데려 오라 하였다.조금 후에 송지도원의 양부모님들이 왔으나 그들은 나를 보고 반갑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다.내가 그들에게 “며느리를 버리려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하시며 펄쩍 뛰신다.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참으로 경우가 밝고 대가 있으신 분들이었다.그래서 내가 집안에 며느리가 있으니 가셔서 안정을 시키고 빌어서라도 데리고 가야 한다고 말하고는 송지도원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니 집에서 아직도 일어나지도 않고 끙끙 거리고 있다하며 자기네도 참 답답해 죽겠단다.부모님들에게 빨리 들어가서 며느리를 안정시키라고 이르고는 송지도원의 집으로 갔다.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야! 송춘섭이 이놈아 집구석에서 뭐하고 엎드려 있는 거야?”하며 소리를 치자 그제야 푸시시 눈을 뜨더니 일어나 앉으며 알은체를 한다. 솔직히 한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꾹 참고 옷을 입고 가자고 했다.“어딜 말입니까?” 첫말이 터진다.“어딘 어디야. 당위원회루 가자우.”“거긴 왜요?”“야 이놈아 네가 당의 권위를 지킨다고 하면서 너의 부모님들과 자식들을 지키려는 네편네를 때려서 내쫓았는데 그것이 당원으로서 인간으로서 옳은 처사인지를 너의 당위원회에 가서 밝혀 보잔 말이야.”“싫습니다.”“싫어? 그러면 이제 당장 가서 옥이 엄마한데 제발 잘못했다고 빌고 데려 올거야?”“아니, 지도원동지! 남편이 욕 좀 했다구 집 뛰쳐나가구 이혼까지 하자는 그따위 년에게 내가 왜 빌어요? 쳇. 갈테면 어서 콱 가라지요. 쌍년”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언어가 더는 통하지를 않는다. 저런 것이 무슨 세포비서랍시고 지금까지 대중 앞에 나서서 떠들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나는 홧김에 간다온다 소리도 없이 훌쩍 일어나 공장 후문을 통해 공장 당위원회로 찾아갔다. 당 비서는 구역당에 회의를 가고 젊은 부비서만 있었다.부비서에게 내가 찾아온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고나서 우리 산하공장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 성 당위원회를 통하여 중앙당에 보고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사실 이 공장의 행정은 우리 경공업성 산하 생산공장이지만 당 소속은 남포시당과 천리마구역당 소속이었던 만큼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형편은 아니지만 나를 통하여 공장의 실정이 중앙당에 보고되면 좋은 것은 절대 없었다.부비서는 “지도원동지 참 미안합니다. 비서동지가 돌아오면 알아보고 잘 처리하겠습니다.”“부비서동지, 그때면 너무 늦습니다. 지금 송동무의 아내를 생산과장네 집에 겨우 붙들어놓고 있는데 지금 놓치면 다시는 수습하기 어렵습니다. 송동무의 아내는 자살까지 할 태도인데 시간을 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송지도원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래도 부비서동지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부비서를 설복하여 데리고 송지도원의 집으로 갔다. 그사이에 생산과장이 송지도원의 집에 와있었다.부비서가 나타나자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내 앞에서 공장 당위원회의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해서인지 부비서는 첫마디부터가 엄한 틀을 세운다.“세포비서 동무! 왜 문제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듭니까?”“아주머니를 오늘 중으로 가서 빨리 데리고 오십시오. 생산과장 동무랑 같이 가서 빨리 데려 오고 결과를 당위원회에 보고하십시오.”그러자 송지도원의 푸념은 한결 풀이 죽었고 옆에서 생산과장이 부추겨 일어 세운다.나는 부비서에게 감사하다고 눈인사를 했고 부비서 역시 일이 잘 될 것이니 안심하고 올라가라고 나에게 말했다.나는 친구인 송지도원의 개인적인 일을 당위원회에 고자질 한 것이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송지도원은 쓸데없는 자존심과 고집을 꺾었고 그 후 일은 바로 잡혔었다.훗날 생산과장에게서 전화로 들으니 송지도원은 “그때에 부비서만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덜 되먹은 네편네를 다시는 집안에 불러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뻥을 치고 다닌다고 해서 웃었다.이것은 1990년대 중반기부터 북한의 가정들에서 빚어진 수많은 불행들 중 하나의 이야기꺼리에 지나지 않는다.당시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조각나고 부모를 잃은 어린 꽃제비들이 얼마나 많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는지는 우리 탈북자들 외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위에서도 썼지만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부부들이 사선을 넘어 이 땅에까지 와서 뭐가 부족하여 다시 갈라진단 말인가?단지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위하지 아니하고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대접과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던 나머지 벌어지는 비극인 것이다.자유롭고 모든 것이 풍족한 이 남한 땅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남편의 존엄’이나 ‘꽃 같은 아내의 자존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린자식들이 일생동안 겪을 불행보다는 더 큰 이혼의 원인이나 조건으로 될 수는 없다.1990년대에 북한 땅에서 독재자에 의한 재앙으로 빚어졌던 참극의 산 증인들인 우리 탈북자들이 또다시 가정의 분열과 이별을 만들어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고아가 아닌 고아의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다면 고향의 부모형제들과 친구들, 아니 고향땅이 분노할 것이다.
2011년 5월 14일 김대길
2011-07-24 15:18:22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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