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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굶주림과 발맞춰 찾아 온 전염병들 - 아침이슬

작성년도 : 2005년 59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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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과 발맞춰 찾아 온 전염병들

- 아침이슬

 

 

저는 요즘 들어 대한민국과 중국사이에 사건화 되고있는 식품에서 유발된 기생충 문제의 논란을 접하면서 너무나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희가 북한에서 살던 사고방식대로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작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렇구나하고 넘길 수밖에 없는 극소수의 사건이라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소중함을 인정하는 이사회,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권리를 당당하게 누리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다시금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저와 같은 탈북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북한의 인권실태를 악몽처럼 머리에 떠올리곤 할 것입니다. 저희가 북한에서 살 때 굶주림만큼이나 가난한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던 전염병이 악마처럼 인간의 생명 문을 사정없이 두드렸습니다.

 

1995년 후기부터 찾아온 급성 설사증인 콜레라의 공포는 그러잖아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허약해 질대로 허약한 사람들의 몸을 사정없이 병마 속에 휘말려 끌어들었습니다. 금방 저녁까지 두 눈이 시퍼래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는 병에 걸려 병원에 업혀 갔다합니다.

 

병원에 업혀 간들 어찌 하겠습니까. 열악한 북한 병원들의 처지는 병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고 병자를 감옥에 처넣는 수용소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콜레라는 당시 변을 통해서도 감염 율이 아주 높다고 북한 위생보건부문에서 이야기하지만 화장실의 방역 및 위생관리는 엉망이었습니다.

 

그 상황이라면 건강하던 사람도 화장실을 사용하면 도리어 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경마를 하듯이 찾아온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발진티푸스"의 전염병들은 가난에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을 겨냥하여 큰 입을 벌리고 마구 쳐들어오는 죽음의 사자와도 같았습니다.

 

1997년 초여름, 저는 그때 고향 아오지에서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니 텅 빈집에 혼자 있기 너무 고독스럽고 무서워 함경북도 새별에 있는 언닌 집에 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당시 북한의 철도 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한 달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하는 열차 편은 몸이 허약한 사람과 노인 어린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간만에 지나치는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생결단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서식하는 맹수들이 먹이를 보고 뒤쫓는 하나의 무리와도 같이 무서운 기세들이었습니다. 그 틈에 끼워 만약 자칫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면 그야말로 압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간신히 열차에 오른 사람들도 안도의 숨과 미소가 잠깐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열차의 몸체 어느 곳에나 사람이 붙잡고 버틸 수 있는 자리면 사람이 다붙어 있었습니다. 승강대에는 물론이요 열차지붕 위에도 사람사태가 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기차가 가는지 사람으로 묶어진 한 덩어리가 가는지 가늠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마치도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파를 그려보는 듯 하였습니다.

 

이런 철도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어 길을 떠나 아오지 역에 도착하니 그 날도 예외 없이 기차는 미정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역전에서 걸어 한시간은 실히 걸릴 거리를 돌아들어 갈 수는 없었습니다.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사이 어느 시각에 열차든 화물차든 지나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그냥 역 대합실 한 쪽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위를 들러 보니 눈에 보이는 사람들마다 먹지 못하여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구석구석 꽃제비들이 움츠리고 앉아 눈뜰 기력마저 없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죽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불쌍한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니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고 또 언젠가는 나도 저들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 공포가 저를 몸서리치게 하였습니다.

 

자기들 옆에서 숨진 시신을 치울 기력도 없는지 이미 싸늘히 식어져 있는 시체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는 그들의 모습은 산사람이라 말하기에는 이미 그 표현이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그리 쓰러져있는 사람들의 머리와 옷섶으로 이들이 벌벌 기여 다녀도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 속에 저는 아오지 역 대합실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사흘만에 언니 집 쪽으로 가는 석탄을 싫은 화물열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그 기차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기관사와 승무원들이 저와 같은 사람들을 사정없이 발로 차서 내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기회를 보다 기관사에게 술 1리터를 제꺽 건네주어 화물차에 타는 것을 승낙 받았습니다.

 

드디어 언니 집에 도착하여 마음의 긴장을 풀고 보니 주제가 정말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눈앞에서 누워있던 꽃제비들의 모습이나 저의 모습이나 피차 일반이었습니다. 언니가 내어주는 옷을 갈아입고 보니 옷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들을 보고 저는 기절초풍하였습니다. 역 대합실 의자와 시멘트 바닥으로 기여 다니던 이들이 저의 몸에도 사정없이 묻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이상하게 몸이 오싹 오싹 추워나고 열이 오르고 감기 기운이 들면서 구토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도 언니와 함께 먹을 것을 찾아 들에 나물 뜯으러 제 몸집보다 큰 누더기 배낭을 들러 메고 길을 나섰습니다.

 

저녁이 되어 풀이 잘 안 보일 즈음이 되여 집으로 향하였지만 왠지 몸은 자꾸만 비틀거리게 되고 눈앞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 도저히 집으로 갈 수가 없어 얼마를 못 가서 푹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언니가 저를 돌아보고 당황하여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힘이 없어 가만히 쓰러져 있는데 언니가 다가와 저의 이마를 만져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불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쓰러져 가만히 생각하노라니 이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나면 온 하루종일 애써 뜯어낸 나물이 너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일어나 한치 한치 언니 집을 향하여 걸었는데 그 길이 얼마나 멀어 보이던지... 드디어 언니 집에 거의 도착하게 되니 인제는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뜨고 보니 제가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내려다보고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언니가 하는 첫마디가 너 발진티푸스에 걸렸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정신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보니 제가 누워 있는 병실에 성냥곽 마냥 빼곡이 누워 있는 저와 같은 환자들과 그들이 뱉어내는 신음소리는 마치도 내가 지옥에 와있지 않나 하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말이 병원에 입원이지 하루 링거 한 통과 약 하루 세 번, 그것도 12알씩(무슨 약인지 모름) 먹는 것 외에는 병원에서 해주는 것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어는 환자복도 없이 그냥 입고 간 옷을 걸치고 있었고 하루 세끼 식사조차도 병원 측에서는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집들에서 가져다 주는 죽이나 시래기 밥을 먹어야했고 그마저도 먹을 것이 없어 못 가져다 주는 환자들은 그냥 누워서 굶는 것이었습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안하고 죽도 나누어 먹으며 병과 싸우는 모습은 정말로 눈물을 자아내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고열과 싸우고 나니 차츰 열이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난감한 문제가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열에 들떠 아플 때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무심히 스쳐 보냈지만 정작에 인제는 저의 차례가 된 것입니다. 저처럼 그런 병에 걸렸던 사람들은 열이 내리니 하나 같이 귀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에서는 윙윙 전선줄에서 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상대방이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는 서로가 자기 좋은 소리를 하고 또 상대방의 입놀림을 보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러자 간병으로 있던 가족들은 너무 기가 막혀 웃음보를 터뜨렸습니다.

 

어느덧 퇴원을 하였지만 심한 고열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몸을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밖에 용변을 보러 가려고 해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중풍에 걸린 사람 마냥 한참을 서서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 겨우 한발자국씩 내디디면서 다녀와야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 한사람만이 당한 아픔이겠습니까. 착하고 순진한 우리의 백성들은 김정일 정치깡패의 손끝에서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맞아 죽고 총구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습니다. 어제만이 아니고 지금 이 시각도 수많은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언제면 우리도 잘살 날이 올까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김정일 인간살인마한테 기대하고 살고 있습니다.

 

너무 너무 속고만 살아온 백성들, 아니 지금도 매순간 순간들을 속히 우면서 살고 있는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 김정일은 자기가 어떤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과연 알기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봅니다. 수천만의 저주가 자기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지만 자기의 그 더럽고 간사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깡패의 근성을 못 버리고 썩어 빠진 군사독재를 유지하려는 인간말종의 발악은 아직도 끊이질 않으니 살이 떨리고 치가 떨립니다.

 

수백만의 주검으로 만들어진 무덤 위에 호화로운 궁전을 짖고 여색을 탐하고 있을 인간의 탈을 쓴 악마는 아직도 배를 내밀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저승으로 갈 열차는 이미 대기 중이건만 아직 그를 태우지 못하여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해도 멀리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날 다 꿰진 동화(솜을 넣어 만든 겨울 신발)를 신고 추위에 떨며 열심히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계실 고향의 혈육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희는 이 좋은 사회에서 옷 하나에도 타박을 하며 고르고 음식도 먹다 남은 것은 쓰레기통에 들어가지만 그것이 없어, 그것을 얻기 위해 정처 없이 삶을 찾아 헤맬 우리 형제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집니다. 혼자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자니 그것 또한 죄악처럼 생각됩니다. 제가 누리는 행복, 제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 일부분이라도 그들에게 나누어 드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남북의 길이 열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 병마와 굶주림에 뼈만 남은 그들의 몸에 제가 입은 옷을 저의 체온그대로 입혀주어 차갑게 얼어붙은 그들의 마음을 녹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먼저 달려가 하얀 쌀밥을 지어 굶주린 그들의 입에 떠 넣어 드리고 싶습니다.

 

설날이 와도 쌀밥 한 공기 떠올려 가족이 오붓한 명절을 보내기나 하겠는지, 추운데 집에 불이나 뜨끈 뜨끈히 지피고 있는지, 물이나 제대로 길어 먹는지, 올해겨울도 가물어서 우물물이 다 말라 물통을 들고 한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지, 아프면 약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는지..... 근심과 걱정은 저의 몸에서 피를 말리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굳세어집니다.

 

제가 열심히 살아야 언젠가 서로가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다시 만날 형제들에게 저만 욕심스레 가지고 있던 행복도 자유도 웃음도 깡그리 나누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부디 이 추운 겨울날 앓지 말고 건강히 잘 보내고 김정일이 망하는 그 날까지 억세게 살아주길 천번 만번 간절히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어둠이 가시면 반드시 해가 떠오르는 법, 김정일의 군사독재도 어느덧 종말이 올 것이고 그러면 고향의 형제분들께도 희망의 빛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200512월 아침이슬

 

 

2005-12-05 10:29:57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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