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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우리도 여자처럼 살고 싶다 - 김영옥

작성년도 : 2001년 57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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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친 여자의 일생을 내놓기가 부끄럽지만,원에 사무친 나의 마은은 실컷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에 태어난 여자치고, 큰 근심,작은 근심 없는 여자 따로 없으련만 탈북자로,노리개로,국적없는 난민으로 굴러다니는 내 처지가 안타깝고,한스럽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히고 원망스러워 글을 내놓으니 보시며 욕하지 마시고 동정해주시기
바란다.

- 잘못 만난 땅.잘못 만난 사회

나는 태어날 적부터 세상에 할 말, 못할 말, 내놓을 것, 숨길 것을 안고 태어난 여자이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던 나는 꿈도, 윤리도 다 잃어버리고 찢겨버렸다. 잘못 만난 땅과, 잘못 만난 사회에서 나의 인생은 몇 년여간에 엉망이 됐다.

망친 여자의 일생을 내놓기가 부끄럽지만, 원에 사무친 나의 마음은 실컷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에 태어난 여자치고, 큰 근심, 작은 근심 없는 여자 따로 없으련만 탈북자로, 노리개로,국적없는 난민으로 굴러다니는 내 처지가 안타깝고, 한스럽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히고 원망스러워 글을 내놓으니 보시며 욕하지 마시고 동정해주시기 바란다.

나는 1973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60만명 가량의 인구를 가진 도회지에서 태어난 나는 분망한 환경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90년에 청진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게 된 나는 꿈과 희망이 가득찬 앞날에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해보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무용에 대해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 독무가가 되어 황홀한 무대를 누벼보고 싶은 욕망이 가득찼던 나는 17세에 청진예술전문학교 무용과에 입학했다.

예술전문학교는 3년제인데 성악,기악,화술,무용과로 나위어져 예술인재들을 키워 중앙예술단과 도예술단을 비롯한 지방예술단에 예술인으로 배치하곤 하였다.

날려가는 가랑잎을 보고도 웃음을 터뜨리곤 하는 꿈많은 처녀시절의 예술전문학교 시절은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술을 보고 황홀한 생각만 할 뿐,그 뒤에 숨은 피나는 노력을 모른다. 목이 쉬도록 발성연습을 하는 가수나, 손가락에 짜개 바람이 일도록 악기와 씨름질하는 연주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무용수들도 군사연습을 하는것처럼 북을 두드리며 구령에 따라 팽이처럼 돌아가야 했다. 하루종일 온몸을 놀리고 나면 저녁에 집에 돌아와 꼼짝못하고 늘어지곤 하였다. 무용수들에게 주어지는 하루 영양보충이란,식용기름50g과 옥수수 과자 200g,달걀 한 알이었다. 이것도 식량난이 시작된 1994년 전의 일이다.

1993년도에 끝나 전문예술단체지망 시험이 치러졌다.
외국을 다니며 공연을 자주 치르곤 하는 평양 만수대 예술단이나,피바다 가극단이 그때 나에게는 희망의 대상이었다.

우물안의 개구리처럼,폐쇄된 북한사회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외국이란 세상밖은 별나라처럼 생각되었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외국땅에서도 외국인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가극을 장식해주는 우아한 무용수 대열에 끼어보고 싶은 환상은 소망으로 간직되었던 것이다. 가극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나,가극 피바다의 주인공 복순이의 형상과 위치는 우리 무대 예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염소떼처럼 풀 뜯어

그때는 가극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의 역을 맡은, 인민배우 최혜영이가 북한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하기 2년전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평양에서 우리 학교에 시험 치러 온 예술시험관 들이 보내는 합격 통지서가 오지않았다. 북한에 식량난,경제난이 들이닥치면서 예술단체들을 대폭 축소해 많은 예술인들이 남아 돌았으므로 우리 같은 애숭이 무용수들이 예술계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나는 또래무용수들과 함께 전문 무용수 자격증만 손에 거머쥐고 다른 지방예술단체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지방 예술단들도 인원을 축소하는 바람이 불어 발 붙일 자리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에서 노는 무직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른 지방들보다 산이 많고 밭 면적이 적어 공업형 구조를 이룬 함경북도는 1994년부터 식량 타격을 받아 다른 지역보다 먼저 굶주림 속에 허덕이게 되었다.

노동자 가정인 우리 가정은 이 타격에 꼼작 못하게 되었다. 어느 큰 기업소의 노동자로 출근하는 우리 아버지와 오빠 두명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은 큰 부닥거리여서 어머니와 나는 사방팔방으로 옥수수를 구하러 다녔다.

우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가정부인들이,경제 불경기를 이룬 기업이나 봉사업소들에서 사직하거나 밀려나 식량을 마련하는 전투에 달라붙는 때였다.

어머니와 나는 청진시 청아구역 반죽동 주변의 야산과 풀밭을 누비며 독이 없는 미나리,쑥,능쟁이 등을 매일 한 배낭식 뜯어오곤 하였다. 풀을 뜯는 주민들로 반죽동 주변은 마치 염소 방목떼가 항상 덮인 듯 하였다.

1995년부터 식량공급은 더욱 줄어들어 한 달에 열흘 가량의 삭량만 공급하게 되었다.이 식량을 타자고 해도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며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이 열흘 분량의 식량을 타기 위한 전투에 거의 보름 이상의 시간을 바쳤다.

내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2시부터 배급소 앞에가서, 줄을 서 그날 카드를 타면 아침을 해잡순 어머니가 와서 교대해주곤 하였다. 한번은 교대하고 집에 돌아와 죽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하였는데 조금 있더니, 옆집 아줌마가 와서 어머니가 다쳤다는 것이다.단숨에 달려가보니 배급소 담벽옆에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 혼잡 틈 속에 끼인 어머니가 힘이 없어 기진해 넘어진 것이다.어머니를 담벽 옆에 기대여 앉힌 후, 나는 용기를 가다듬으며 밀고 당기는 사람들 틈 속에 끼여들었다.

"이거 먼저 주세여!" "이거 먼저 주오!"

여자들과 남자들의 엇갈린 목소리가 배급소 안을 째지게 했다, 전에는 배급소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않던 남자들이 이제는 자기 힘과 육채를 믿고, 서슴없이 여자들 속에 끼여들어 식량 타는 일에 개입하는 판이었다. 서로 악을 쓰며 밀고 당기는 속에서 두시간 남짓 걸려, 식량타는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거 주세요!"

소리치며 손을 내미는데 옆 사람들속에 누군가가 나의 식량 카드 쥔 손을 탁 치며 또 소리쳤다.

"이것부터 주세요!"

여자였다. 나는 옆사람들에 막혀 누군가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속이 발끈해 그의 손목을 치며 소리쳤다.

"누구야? 머저리 같은게"

그러자 옆사람 사이로 손이 불쑥 들어오며 나의 머리를 쥐자 나도 맞받아 손을 내밀며 그의 머리를 끄당겼다.

-배급소에서 동창생과 싸움질

서로 머리칼을 쥐고 싸움질하자, 옆사람들이 슬쩍비키는 사이 둘이 마주섰다. 서로 쳐다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예술학교 동창생이던 성악과의 김영이었다. 영이도 나를 알아보고 놀랐다.

"이게 누구야? 영옥이로구나."

얼굴이 먼지범벅이 된 우리는 마주보며 계면쩍은 웃음과 말을 건네었다. 입구 옆구석에서 우리가 싸움을 벌이는 동안 뒤에섰던 몇사람이 이미 옥수수 가루를 받는 참이었다.

싸운덕에 밑지기만 했다는 말을 주고받은 우리는 다시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입구를 가로막고 식량을 받았다. 생김새가 환하고 귀여워 무대위의 청신한 꽃을 연상시키던 영이의 얼굴은 그동안 볕에 타 검시검실해지고 살이 쪽 빠져있었다.

3kg씩의 옥수수가루르 손에 든 영이와 나는 담벽 옆에 기대어 앉은 우리 어머니를 부축하여 우리집까지 왔다. 기어코 가겠다는 영이를 붙잡아 둔 어머니와 나는 그가 고마워 같이 옥수수가루 떡국을 만들어 한 사발씩 맛있게 먹었다. 이일이 연줄이 되어 영이와 나는 그 후 자주 접촉하였고, 낯설은 이국땅까지 모험의 길을 함께 걷게 됐다.

하루는 성미가 괄괄한 맏오빠가 풀범벅을 만들지 못해, 술병에다가 죽을 넣어 꽁무니에 차고 출근하였다. 점심시간에 그 술병을 내놓아 식사하자니, 화가 난 오빠는 술병을 휴게실 담벽에 던져 박살내 버리고 돌아왔다.

그 후 오빠 둘은 쌀이 좀 나온다는 황해도 쪽으로 떠났는데,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행방불명이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화병을 얻어, 가슴에 돌덩이 같은 것이 자꾸 치민다고 자주 자리에 드러누우시곤 하였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기업소에 찾아갔던 일이다. 점심을 준비 못한 아버지가 빈 몸으로 출근하신 것이 마음에 걸려,어머니와 나는 이웃집에서 얻어온 한줌의 밀가루를 가지고,부지런히 풀범벅을 만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헐레벌떡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에 도착한 나는 공장접수구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는 내가 신문지 꾸러미에 싼 도시락을 내밀자, 접수구 구석으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범벅 떡 두개 중 한 개를 내 손에 쥐어준 아버지는 내가 먹고 왔다고 굳이 사양하자 아버지도 안먹겠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고 돌아서서 한입한입 떼어먹는 나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설움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기는 오랜 노동당원이고, 핵심 노당자인만큼 일터를 비워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굶으면서도 출근하셨고, 지금도 아마 다니고 계실 것이다. 이런 아버지와 같은 어진 분들은 먹을 것도 안주고 일만 내오는 북한 제도가 정말 밉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식량난 때문에 첫사랑도 중단

식량난이 겹쳐 여러 해 되는 이 해에 나는 순결함과 깨끗한 순정으로 맺었던 첫사랑을 중지해버렸다.청진예술학교를 다닐떄 마지막 졸업을 앞두고 나는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조아 앞으로 전도가 유망한 성악가수 김모를 사랑하게 되었다..

체격이 미끈하고 마음씨 고운 김모는 그 때 나를 열정적으로 따라다니며 첫사랑을 고백하였다.
사랑이 뭔지 몰랐던 나는 처음 당해보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쩔 바를 몰라 쩔쩔맸다.헌데 그가 매일 매순간 무용실도 따라다니고,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가는 골목길마다 숨어 있다 나타나서 하도달콤한 말로 구슬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졸업실을 가진 날 청진시 반죽동 산위에 자리잡은 잔디밭 공원에서 밤 12시까지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이 공원은 청진시의 유일한 남녀 사랑공원으로 수백 쌍이 매일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소문나 있었다.

공원 으슥한 구석의 잔디밭에서 나는 그의 뜨거운 키스와 불같은 맹세에 감동되어 소중한 정조를 바쳣다.

나의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반죽동 공원은 1993년까지만해도 푸른 잔디들이 정결하게 깔린 곳이었다.그러나 1994년도부터 시작하여 이 드넓은 공원의 풀들은 식량을 구하려는 주민들이 삽과 칼질로 여기저기 어지럽게 파헤쳐져 쑥대밭으로 변해버렸다.

나와 첫사랑을 나누었던 김모는 졸업 후 하도 목소리가 뛰어나,노가수들을 물리치고 평양 xx예술단에 취직하게 되었다.

평양과 청진간에 수없이 오가던 우리의 정열적인 사랑은 자연히 식어갔다.
식량난으로 인해 평양 쪽보다 청진족인 내가 먼저 피하곤 했던 것이다.
평양쪽은 그래도 한 달에 보름 가량은 식량을 공급해주었지만 청진쪽은 아예 한 달에 하루 이틀분의 식량만 주고 뚝 떼먹엇다.

하다 보니 평양쪽에서 만장의 편지가 와도 회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배고픔에 배안이 쪼르륵 쪼르륵 소리가 나는데,사랑한다고 회답할 영양분이 나올 리 없었다.

골이 날대로 난 그는 청진쪽으로 밤중에 내려와 두 눈을 지릅떳다.허나 우리집에서 대접받은 풀즉 한그릇을 내려다보며 그는 눈물 방울을 떨구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첫사랑을 언약했던 반죽동 공원에 올라가 보았다.함께 뒹굴던 부드러운 잔디밭은 독풀들이 키 높게 자라,앉을 자리조차 변변치 않았다.

키 높은 풀대들을 쓰러뜨린 우리는 나란히 누워 마지막 사랑을 나누었다.우린 어떻게 하든 이 고생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영원히 변치말자는 맹세를 했다.지금은 당장 북한 시대에 맞지 않는 사랑을 중지하는데 합의 하고,이것을 정전으로 이름 붙였다.

우리는 꿈과 소망보다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이 안타까워 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이런 사랑을 정지당한 청년들의 슬픔은 우리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 온 북한이 다 겪고 있다는 그의 말에 얼어드는 나의 마음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생활이 안착될 때 다시 불같이 사랑하자 맹세하고 헤어졌건만 해가 바뀌어도 그 시각이 오기는커녕 멀어져 가 우리 사랑도 까마득해진 옛말이 되고 말았다.

다만 사랑을 해볼수 있는 것은 소수 권력층이나 산골 농민들이다.권력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사회주의하에서 권력층 족속들을 쌀밥을 먹고 같은 족속들끼리 사랑을 속삭인다.
나올 것이 없는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런 여유가 없으니 먹는 것 외에는 다 중지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어제 누렸던 삶도 사랑도 꿈같이만 생각되고 희망은 까마득해만 가는 것이다.주지 않는 식량을 집 안에 앉아서 해결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하여 1996년 겨울에 황해남도 송화군 쪽 농촌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내가 식량을 얻으러 떠나게 되었다.

빈 배낭 두 개를 걸머진 나는 여행증을 뗄수가없어 가만히 개찰구를 빠져 열차에 올랐다.나뿐 아니라 수두룩한 주민들이 다 여행증을 떼주지 않으니 열차에 마구오르는 판이었다.

-여행증 없으면 짐짝 취급

떼주는 여행증이 모두 권력층 족속들에게만 들어가는 상황에서 할 수 없는 현상이다.나는 열차가 얼마 못가 단속에 걸리게 되었다. 여행증이 없다는 나의 대답을 들은 열차 안전원은 대뜸 큰 소리로 호령했다.

"일어서,이 간나새끼 어디루 싸다녀?"

속이 한 줌만 해진 채 꿈쩍 놀라 일어나자 안전원은 나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열차 칸 복도에 세워 놓은 뒤 엉덩이를 구두발로 걷어찼다.

"빨리 걸어!"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발길로 걷어차는 것은 조상적부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항의는 꿈도 꾸지 못했다.

독재의 권력이 하늘과 땅에 쩡쩡 울리는 사회이니,굴종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나뿐만 아니라 숱한 아줌마들과 처녀들이 열차 복도에 양무리처럼 발길에 채여 끌려가고 있었다. 열차 한칸에 모두 모이자 안전원은 벌금을 물리기 시작했다.

열차 안전원은 "황제"여서 할아버지 할머니보고도 "야""네" 하며 반말을 해댔다.벌금 낼 수 없는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두세명의 안전원이 달라 붙어 실컷 때린 후 열차가 서면 아무데나 내려놓았다.나는 다행이 벌금 낼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매를 면했다. 그러나 평성에서 다시 열차를 바꿔타고 가던 도중 또 단속되었는데 돈이 모자랐지만 봉변을 면한 열차 안에는 발 디뎌놓을 자리도 없거니와 단속을 피해 남녀노소 할 것없이 열차 꼭대기에 올라 앉아 가는 것은 그때는 보통 현상이었다.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열차 꼭대기에 기어올라 한 아줌마 곁에 자리를 잡았다.남녀가 등을 서로 붙이고 한 덩어리로 뭉친 것이 흡사 개미 같다고 생각되었다.

도중 도시락으로는 옥수수 알을 한끼에 두줄씩 씹어 먹었다.거의 모든 주민들의 공통도시락이나 같은 이런 식사에 서로 창피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열차 꼭대기에 앉아있는 주민들은 애기 업은 아줌마를 보호해 주는 등 서로 위로하느라 애썼다.살벌한 분위기가 도는 열차안의 정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백성들의 세계가 열차 꼭대기에서 피고 있는 것이였다.

열차에서 내릴 때 나는 얼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옆의 남자들이 안아줘 겨우 내릴 수 있었다.고모네 집에 가서 보니 그래도 함경도보다 퍽 나아 옥수수 알 한가마니를 가지고 있었다.올 때 고모네는 배낭 한 개에다가 옥수수 알을 가득 담고 또다른 배낭에다가 입쌀 5kg과 도중 먹을 도시락을 해서 넣어 주었다.

오는 도중에 여행증이 없으니 또 단속에 걸렸다.열차 안전원들은 쌀을 보자,입이 함박만하게 째져 돈대신 회수한 뒤 무사히 갈수 있다는 벌금증서를 친절히 떼주었다.

살점과 같은 쌀을 떼이는 것이 분하여 악을 쓰며 항의하자 짐을 몽땅 빼앗기 전에 군말말고 가라는 것이었다.옥수수 배낭은 그후 우리가정의 두달 식량으로 우리 식구 세 목숨을 살려주었다

-식량위기에 집안 보물도 팔아

1997년 에 들어서면서 더욱 악화된 식량 위기는 온 북한을 죽음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다.이웃과 친척지간에 서로 돕기가 거의 없어지고 능력이 없는 인간은 지옥의 대열에 끼어야 했다.

우리 집안도 살아남기 위한 "전투"에 달라붙었다.이 해에 완고한 아버지도 할 수 없는지 가문의 귀한 유물을 내놓았다.몇 대를 내려오며 전해오던 이조시기의 인문도장이 찍힌 청자기와 엽전,놋그릇,은수저 두 가락을 거간꾼에게 팔았던 것이다.

북한돈으로 도합 만원을 받은 우리는 날 듯이 기뻤다.장마당 옥수수값으로 계산하면 200kg값이고,노동자의 노임으로는 12년 분의 봉급과 맞먹는 대단한 돈이었다.후에 중국에 들어와보니,이렇게 수집된 골동품들과 그 값이 우리가 받은 것보다 몇백배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부모들은 이미 장가갈 나이가 지난 맏오빠의 결혼을 치러주려고 5천원을 저금하고,나머지로 두부를 만들어 팔기로 하였다.

결국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고 나는 장사에 나서게 되었다.두부장사는 갈탄 덩어리와 풍로를 가지고 새벽 일찍이 장마당에 나가 불을 피워놓고 두부모를 끓여 술과 같이 파는 일이었다.

이런 장사를 하는 여자들로 청암구역 장마당은 5백m나 긴 행렬을 이루었는데 나도 그 속에 끼었다.
집안에 들어가 보았댔자속만 타는 남자들은 주머니에 돈잎이 조금 있게 되면 두부 한모에 술한병씩 마시고 울분을 터뜨리곤 하였다.

이 점을 간파한 장사꾼들이 많았다.
밤10시까지 석유등잔을 켜놓고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는 여자들은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취기가 올라 돈도 없으면서 여자들의 얼굴을 뜯어보며 추파를 던지는 일은 이루 셀 수 없었다.

밑천이 부족한 여자들은 술을 마시는 남자가 돈을 꺼내 놓으면 따라나서 몸을 주고 50원 이상 벌어 들인다.하루종일 영업 수입보다 높은 액수로 옥수수 1kg값이다.저녁 7시 후에는 양쪽옆자리 여자들이 모두 남자들과 동행해 버려 혼자 남는 경우도 많았다.

못했으므로 남자들의 추파에 웃음으로만 대해주며 슬슬피했다.
살기위해 몸파는 여자 수두룩

하루는 서른살이 갓 지났을 남자가 다가와 술을 마신 후 돈 50원을 내놓으며 말을 걸어왔다.

"처녀,나와 같이 재미를 보지 않을래?"
"싫어요,난 그런 여자가 아니니 미안해요."
"왜?돈이 싫어.그럼 1백원을 주지,응!"
"돈이 적어 그러는게 아니에요.난 주인있는 여자에요."

그러자 그 남자는 대뜸 성을 냈다.

"이 간나 요즘 어디 네 것 내것이 있어? 얼굴이 빤빤하다구 1백원두 싫다고 해.주제넘게끔"

큰 소리가 나자 주위 여자들이 나를 동정하기는커녕 그 남자에게 애교의 웃음을 듸웠다.이에 더욱 도도해진 그는 마시던 술상을 발로 걷어차고 다른 여자에게로 갔다.나는 주위에서 이런일을 수없이 보았으므로 별로 슬프지도 어색하지도 않아 깨진 그릇만 주워 담았다.

몇 달동안 부지런히 영업을 한 덕분에 나에게는 밑천이 좀 생겼다.헌데 이 밑천이 나를 구렁텅이에 쓸어넣을 줄은 미처 몰랐다.나는 욕심이 커져 중국 담배장사에 나서기로 했다.중국담배를 넘겨받으러 갔다.

그런데 대낮에 아파트 골목길에서 강도들과 마주친 것이었다.두명의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무작정 나를 주먹으로 때려 눕힌 후,안주머니에 깊숙이 감춘 돈을 몽땅 털어 갔다.후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담배거간꾼과 짜고 저지른 짓 같았지만,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 동안 몇 달동안 아글타글 모은 돈을 졸지에 잊어버리고,멍이 든 몸과 금이 간 왼팔 치료 때문에 오빠의 장가밑천까지 거덜나게 하였다.

부모님에게 죄진 것이 마음에 걸렸고 앞길은 막막했다.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동창생인 김영이가 나를 찾아왔다.예숙학교시절의 였던 영이으 흰 얼굴은 홀쭉하고 가무잡잡하게 변해버렸다.

변하지 않은 것은 웃을 때 드러나는 인상적인 덧니뿐이었다.엊지간히 나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된 나는 생각다 못해 영이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아직 남자와 관계해 본 일이 없는 영이는 펄쩍 뛰며 다시 그런말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튿날 맥없이 방안에 누워있는데 얼굴이 불그레해진 영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섰다.그는 집안을 살리고 자기 생명 부지를 위해 몸을 희생하겠다며 비장한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다음날부터 경험이 없는 햇내기들인 우리를 이끌어줄 동행자를 찾았다.나는 술과 두부를 팔 때 안면을 익혔던 한 아줌마 과부를 찾았다.
아주마라지만 우리보다 세 살 위인 27세의 과부였다.그 아줌마의 남편은 전해에 결핵과 영양부족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딸을 친정집에 맡기고 두부장사를 하면서 남자들과 솜씨있는 교제를 벌이곤 하는 활동적인 여자였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고 주위의 여자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었다.
장마당에 나가 그 여자를 찾은 뒤 우리의 의향을 슬쩍 비쳤다.

-식구 살리려

눈이 동그래진 그 아줌마는 정말 그런 일을 할 거냐고 다시 반문했다.
그렇다는 우리의 진지한 결심을 들은 아줌마는 눈물을 흘리며,지금시대를 한탄했다.
자기는 한번 시집을 갔기에 까짓 것 물에 배 건너간 격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있지만,꽃같은 처녀들의 앞길에 생각만 해도 가슴아프다고 하였다.하지만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살리려는 우리의 주장에 아줌마는 동의하고 말았다.

아줌마는 "젊고 인물이 환한 너희들이 나서면,남자들이 줄줄이 따를것"이라며 환성을 올렸다.우리의 행동은 구체적으로 계획화되었다.행동거점은 혼자 사는 아줌마의 2층 아파트 집으로 정했다,집은 35평방으로 부엌과 아랫방,윗방으로 된 청진시에서는 괜찮은 집이었다.

우리는 하룻밤을 그 아줌마의 집에서 자면서 하루종일 손님 맞을 준비를 하였다.
준비라야 술상 안주감 만드는 것과 이불 빨래,잠자리 준비였다.그날 밤에는 서로의 비밀을 터놓으며 경험을 교환했다.경험자인 그 아줌마가 남자를 상대할때의 묘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피임약으르 한줌씩 주며 피임법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이틀후 우리 셋은 화장을 진하게 하고 아줌마가 술파는 장소로 나갔다.그 아줌마의 주위에서 영이와 나는 빙빙 돌며,남자를 낚아채는 행동을 배워 나갔다.

오전 10시경 남자 손님 댓 명이 술을 마시고 간후 옷차림이 깨끗하고 돈깨나 있어 보이는 35세 전후의 남자가 다가왔다.
처음에 그 아줌마는 눈웃음을 슬슬지으며 공손이 술과 두부를 대접하였다.술을 반병쯤 마셨을 때 눈에 취기가 돈 그 남자는 담배를 태우며 야릇한 눈을 번쩍거렸다.

-첫손님 맞는 세여자

그는 아줌마 옆에 앉은 우리와 아줌마를 번갈아 훔쳐보며 말을 걸었다.

"아줌마,이 처녀들은 누구요,?"

말씨가 평안도 말이었다.아줌마가 살작 웃어 보이며 애교있게 말을 맏았다.

"내 사촌동생들인데 나한테 장사배우는 중이에요."
"아 그래요,어린 처녀들이 이런거나 하면 수지가 맞아요?"

아줌마의 능청스런 한숨소리다.

"할수 있나요,이일밖에 뭘 해먹을게 있어야지요,"

남자의 호기심 어린 말소리가 이어졌다.

"아줌마의 집주인은 어딜 다녀요?"
"사망했어요,하도 답답해 이 애들을 데리고 있지요."

그러자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남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줌마,.내 청진에 출장온 평양손님인데 여관이 추워 그러니,며칠쯤 숙박시키지 않을래요?돈은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줄수 있어요."

그러자 아줌마가 한 수 더 떴다.

"여관은 하루 15원이지만 우리집은 하루에 300원 이상 내야해요."

말뜻을 제꺽 알아차린 남자가 흐물흐물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 쌩쌩한 처녀들 앞에 내 통이 작게 300원만 주겠나요.500원은 내놓을수 있어요."

옆에 앉은 영이와 나는 주고받는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반대로 아줌마는 애교있는 자새를 흩트리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자요,잘 모실테니,에라 오늘 장사는 그만하자,"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경이었다.우리는 술상을 거두고 아줌마와 함께 걸어가고 그 손님은 10m쯤 떨어져 따라왔다.집에 들어서자 남자는 2백원을 내놓으며 말했다.

"아줌마 점심술상좀 푸짐하게 차려요"

우리는 쌀밥에 두부와 돼지고기,김치를 놓고 오래간만에 푸짐한 점심상과 마주 앉았다.먹을줄도 모르는 술을 자꾸 먹으라고 남자손님과 아줌마가 권하는 바람에 나와 영이도 한잔 마셨는데 벌집 쑤시듯 속이 쓰렸다.남자 손님과 아줌마는 너도 한잔 나도 한잔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아줌마가 우리 손에 돈 1백원을 쥐어주며 말했다.

"너희들 오늘 오후는 돌아다니며 사먹고 싶은 것 실컷 사먹어,어둡기 전에 꼭 돌아와."

영이와 나는 기다렸다는 듯,황급히 그 장소를 빠져나와 깔깔 웃으며 떠들어댔다
부모한테는 장사한다고 속여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선 집 식구들생각이 나,50원씩 나눠 가진 다음 옥수수가루 1kg씩 사가지고 집으로 향했다.부모님들에게는 며칠씩 장사하러 다닌다는 거짓말을 하였다.오후6시경에 약속대로 헤어졌던 장소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아줌마 집에 들어섰다.

아랫방에 아줌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앉아있었고,남자손님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다.아줌마는 제꺽 머리를 고쳐 다듬으며 애써 웃음짓고 말했다.

"실컷 놀았니?많이 사먹었구?"

우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자,제꺽 저녁을 지어먹자.나와 영이는 저녁 장사를 하러 나가구,희옥이가 집에서 뒤처리를 하려무나."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왔구나,생각하니 가슴이 방망이질을 쳐 저녁 먹고 아줌마와 영이가 나가는 것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였다.떨리는 손으로 상을 치운 후 방을 거두자 저녁 7시경이 되었다.남자는 능글능글 웃으며 물었다.

"몇 살이오?"
"스물 네 살이에요"
"오,한창 나이로구만.지금 꼿꼿하게 사는 사람은 다 죽는 시대요.능통성이 있어야 하오."

제 혼자 좋아 더벌여 대는 남자의 말소리가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아 나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런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집게 같은 손이 내 손목을 덥석 거머쥐었다.본능적으로 손을 빼다가 셋이서 다짐하던 생각이 나 저절로 기운이 쑥 빠지는 듯 했다.

남자는 술 냄새와 더운 입김이 얼굴에 닿았고,발광적인 키스가 시작되었다.고개를 돌려가며 피했으나,남자의 입술은 총구멍처럼 계속 내 입술과 목을 찾아 다녔다.한참 만에 가슴을 헤치는 더듬질과 함께 손가락이 젖가슴을 꽉 잡더니 빨래 주무르듯 하였다.

옷이 훌훌 벗겨지자 몸이 오싹 추워지더니 더운 살결이 몸에 닿았다.더운 감을 느껴 볼 새도 없이 순간적으로 째지는 아픔과 함께 저도 모르게 "아,아"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김빠진 공처럼 남자가 옆으로 털썩 떨어지는 것과 함께 뜨끈뜨끈한 것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순간 우리가 꼭 무슨 노동을 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만에 정신이 번쩍 들어 옆자리에 누운 남자를 보는 순간 부모님들에게 죄를 졌다는 생각이 들었고,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절로났다.

-매춘에 팔리는 친구의 첫 性

일어나서 속옷을 걸친 남자는 담배를 피워 물며 자기는 평양 대성총국지도원이라는 것과 청진에 수출할 물고기를 접수하러 왔다고 신분을 밝혔다.
이어 여자들만 사는 이 집에 물고기를 넉넉히 떨구어 주겠으니 장사를 크게 해보라고 말했다.대성총국이라면 당 외화벌이 기관으로서 물자를 마음대로 쌓아두는 곳이었다.
대성총국 수출 물자는 북한에서 우선적으로 보장하고,그 누구도 못 건드리게 되어있는 노동당의 소유물이라는 점을 청진 시민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정말 잘만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저녁 9시경이 되자 이 말 저 말 하던 남자는 또 일을 벌릴 자세로 나를 덥석 안았다.내가 이제 곧 아줌마랑 들어온다고 하며 거부하자 그 남자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밤11시에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걱정말어"
이미 아줌마가 남자와 같이 행동일정을 짜놓았구나 생각하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끌어안고 발광적인 동작을 해대는 남자를 보니,허약한 우리 맏오빠와는 달리 살도 유들유들하고 기름기도 번지르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일이 끝나자 그 남자는 팁으로 1백원짜리 지폐를 주었다.저녁 11시경이 되자 아줌마와 영이가 들어섰다.

아줌마는 사 가지고 들어온 안주감들로 술상을 차렸다.나와 영이는 오징어만 씹고,그 남자와 아줌마는 술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술상을 치운 후 영이와 나는 아랫방에 눕고,아줌마와 그 남자가 윗방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극도로 긴장했던 기분이 풀리자 나는 곯아떨어졌는데,영이는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말하기를 무섭기도 하고 호기심도 동한 그는 윗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는데 서로 간질이기도 하는 듯한 웃음소리와 무슨 물 첨벙 소리가 나는 것까지 들렸다는 것이다.다음날 아침 아줌마는 나와 같이 장마당에 나가면서 영이를 집안에 남겨 놓았다.

겁에 잔뜩 질려 말똥말똥 눈을 뜨고 바라보던 영이를 뒤에 두고 나가는 내 심정은 서글펐다.
장마당에 나가 손님 시중으로 술상을 차려주면서도 마음 속엔 내내 영이가 곧 당하게 될 일에 대해 근심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었다.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아줌마가 나의 잔등을 두드려주며 위로의 말을 해 주엇다.

"어쩌겠니.죽기보다야 낫다고 생각해.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 우리 탓이 아니야.다 잘못 태어난 탓이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다시 말하면 이 땅,이 제도 탓이라는 말이다.아줌마는 소곤소곤 이야기하였다.

"어젯밤 그 남자는 정말 너에게 홀딱 반했다고 말하더라.다 좋다고 말이야."
나는 창피스러웠다.점심때가 되어 우리는 집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니 방구석에서 영이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옆에서 그 남자가 영이의 잔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며 달래고 있었다.겉옷을 대충 걸친 영이속 내의는 피가 벌겋게 배어 있어 대뜸 짐작이 갔다.첫 정조를 빼앗긴 서러움에 울고있는 것이다.그 순간 나의 눈앞에 앉아있는 그 남자가 그 무슨 마귀처럼 여겨졌다.
"돈 벌어 남자 노리개 벗어나자"

점심 식사 후 그 남자는 일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줌마는 영이의 손을 꼭 쥐며 달래었다.
"우리 어떻게 하든 돈을 벌어서 더는 남자들의 노리개로 살지 말라"

아줌마는 우리 손에 돈 1백50원씩 쥐어주었다. 영이가 후에 말해주기를 그 남자는 영이의 첫 맛을 본 팁으로 2백원을 주더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저녁에 나타났는데 양쪽 손에 큼직한 지함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수출용 마른 오징어 1백마리와 마른 명태 2백 마리였다.

돈을 받은데다가 희귀한 수산물까지 받게 된 아줌마는 너무 좋아 어쩔 바를 몰라 했고,나도 속으로 은근히 그 남자가 고맙게까지 여겨졌다. 아줌마가 "우리 이번에 귀인을 만났다."며 수선떠는 것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녁상을 거둔 후 아줌마는 오징어 10마리와 명태 20마리를 영이와 나의 손에 쥐어 주며 오늘밤은 집에 가서 자고 아침 일찍 오라는 것이었다.

뜻밖에 횡재하게 된 우리는 각자 집으로 줄달음쳐 갔다. 부모님들에게는 이번 장사가 아주 잘 됐다고 거짓말을 했다. 믿어지지 않아 반신반의하면서도 부모님들은 나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살아갈 여유가 좀 있으면 집안에 가두어 놓고 벌써 매를 들었을 아버지도 쓰다 달다 말이 없었다. 아침 일찍 약속한 장소에 가서 영이를 만나 물어보니, 그의 부모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오전에는 내가, 오후에는 영이가 밤에는 아줌마가 돌아가며 그 남자와 같이 있었다.그 기간에 우리는 아예 임신을 막기 위해 아줌마를 따라 병원으로 가 피임 환을 해 넣었다.

그 남자는 일주일 후에 돌아갔는데 아줌마의 계획은 그 남자 같은 대상을 찾는 것이라지만,북한에 그렇게 돈푼이 넉넉한 남자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여서, 손쉽게 걸려들 리 없었다
옥수수 받고 농촌 총각과 동침

한번은 며칠이 지나도 대상이 걸려들지 않아 애를 태우던 중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농촌 총각 둘이 우리 술상 앞에 다가왔다. 옥수수 한 배낭씩 멘 것이 틀림없이 처분하러 나온 농촌 청년들이었다. 나와 영이는 아줌마의 눈치에 따라 그 총각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그 옆에 같이 자리를 잡고 손님인 체 하면서 두부 한 모씩 청했다. 우리는 두부를 먹으면서 총각들의 양옆에 앉아 팔굽으로 슬슬 건드리며 자극을 주었다. 이성의 반응은 금방 일어나 그들은 모른체 하면서 싫은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우리는 아예 허벅다리를 그들의 다리에 붙이면서 "외지에서 오셨는가 보지요"라며 말을 붙였다.
처녀들이 자기 몸에 다가드는 것이 좋은 듯 몸을 비키지 않고, 공손히 대답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어디서 사는가, 뭘하는가 되받아물었다.

우리는 부모들은 황해도 쪽으로 벌이를 떠나고 여자 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서로 눈을 끔뻑이며 신호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한 총각이 이 낟알을 값이 좀 높을 때에 팔려고 하는데 집에 재워주면 얼마간 내놓겠다고 흥정을 걸어왔다. 예견한 대로여서 우리가 선선히 대답하자 그들은 배낭을 메고 우리 뒤를 따라나섰다. 집에 도착하자 그들은 우리에게 술과 안주감을 사오라고 돈을 내놓았다.

사온 술 세병을 다 마신 그들은 취기가 부쩍 올라 양옆에 앉은 영이와 나의 어깨를 잡고 희롱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뿌리치는 척하면서 이 낟알을 한 배낭 줄 수 없겠는가 미끼를 던졌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자면 주겠다고 쾌히 승낙했다. 이에 영이는 한 총각을 데리고 윗방으로 올라가고, 나는 아랫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연속 달라붙는 행동이 꼭 밤일에 주린 농촌 숫총각들이었다. 저녁때가 되어 맛을 들인 그들은 갈 생각을 안하고, 하룻밤 자다가 가겠다는 것이었다. 딱해진 우리들이 어쩔 바를 몰라 속을 태우는 참에 아줌마가 들어섰다.

아줌마는 웃으며 자기는 이 애들의 사촌 언니인데 지나가다 들렀다고 변명하였다. 아줌마는 내가 변소가는 척하며 나가자 곧 뒤따라 나와 정황을 물었다.
그는 값을 계산하면서 18㎏이면 9백원이니, 우리가 이익을 본다며 하룻밤 재우라고 하였다. 이러한 우리의 일이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식량난 이후 매춘 성행

물론 이런 행위를 하는 여자들이 우리뿐이 아니었다. 얼굴이 좀 반반하다고 하는 젊은여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거의 다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일은역전, 시장, 장마당 등을 거점으로 어느 구석에서나 벌어지고 있었다.

나쁜 기미를 챈 아줌마가 돈을 가지고 가 구역담당 안전원에게 찔러주며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구역 안전부에서 이젠 꼬리가 잡히면 잡을 도리밖에 없으니 그만두라고 했다.

하여 우리의 일은 석 달로 일단락 짓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부모 형제들을 먹여 살렸고, 한두 달의 여유식량도 준비해 놓는 성과를 거두었다. 대신 잃은 것은 나와 영이의 신성한 육체였다.

1997년 새해에 접어들며 청진시에서는 양력설과 김정일의 생일 2월16일을 맞아 한두 킬로씩 내준 입쌀과 밀가루 외에는 식량공급을 중단하였다.

나와 영이는 자주 접촉하며 술장사, 물고기 장사를 닥치는 대로 해보았으나 그 수입으로 먹고살기는 정말 어려웠다. 어떤 날은 풀죽 한 그릇도 차려지지 않아 점심을 건너뛰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진절머리 나는 지난날의 매음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장마당에서 영이와 내가 술장사를 하면서 얻어듣는 말 중에 제일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에 대한 정보였다. 장마당의 눈에 띄는 상품의 99%가 중국 상품인데다가 먹는 것마저도 다 중국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장사를 하는 아줌마들마다, 떠도는 남자들마다 중국에 대한 부러움과 경탄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중국이 개혁, 개방돼 잘살게 되었다는 것, 배고픈 것을 모르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말을 자랑스레 하였다. 또한 살고 싶은 곳에 가서 마음대로 살 수 있으며, 여행증이 없어도 넓은 중국 땅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있다는 것이었다.
듣는 것마다 희한한 소식이었지만, 우리 여자들의 마음을 제일 끈 것은 먹을 걱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도 많이 듣다보니 눈앞에 보는 듯했고, 마음속엔 환상이 가득 차게 되었다.

듣는 소문에 무산, 회령, 온 성을 비롯한 두만강 주변의 주민들이 많이 도주하여 중국 땅에 건너가 사는데 그 중 잘된 주민들은 집에 식량과 돈을 계속 보낸다는 것이었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들이 건너가면 여자가 귀한 중국 땅에서는 아주 값있게 취급받는다는 말은 더욱 호기심을 자아냈다.

-중국에 대한 憧憬

나와 영이가 나누는 말 중에 자연히 중국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이윽고 우리는 뛰고 뛰어야 풀 죽 조차 얻기 힘든 이 땅을 벗어나 실컷 먹어보고, 돈도 벌어 부모형제들을 구원해 보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이때가 1997년 10월이었다.

중국 땅에 몰래 밀입국을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중국 물건을 날라오는 국경 주민들에게 이것 저것 많이 물어 어지간히 이해하게 되었다. 지형도 잘 모르고 더욱이 여자인 우리가 두만강을 몰래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국경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중국 친척 집에 쌀 가지러 갔다온다는 명목으로 두만강을 넘기로 하였다.

돈이 문제여서 나는 집에서 기르는 돼지를 판 돈으로 밑천을 삼고, 영이는 친척집을 다니며 돈을 꾸기로 하였다. 우리 집의 유일한 재산인 돼지를 팔자니 속이 뜨끔하였지만 나는 强心(강심)을 먹고 물고기 장사 밑천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부모님을 졸라댔다.
부모님이 안 된다고 딱 잡아떼는 통에, 아예 사흘 동안 드러누워 떼를 썼다. 내가 밖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으니, 집안 식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어머니가 뜯어오는 풀은 사람이 다 먹고 돼지 먹일 풀이 부족했다. 결국 부모님은 돼지를 3천원에 팔아 나에게 2천원을 내놓았다.

나를 키워 준 부모님을 속이는 양심의 가책을 눈물을 삼키며 나는 2천원의 돈을 받아들고 아침 일찍 영이네 집을 찾았다. 그도 울며불며 친척들에게 사정하여 돈 천오백원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저녁에 만나 자동차를 이용하여 국경 지역인 무산으로 갈 약속을 하였다.

낮동안 집에서 밀린 일감을 처리하기로 하고 돌아온 나는 부모님의 빨래와 집안 청소를 다 해놓았다. 그리고는 돈 50원을 꺼내 술 한 병과 국수 두 그릇을 받아 챙겨놓았다. 떠나는 인사였다.

정든 집을 나서며 꼭 성공하여 부모님께 도움 주고 이 난국을 타개하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지자니, 이별의 서러움에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약속한 장소에 가니 영이도 눈언저리가 팅팅 부어있었다. 그의 심정 역시 나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돈 50원을 내고 자동차에 올라 무산으로 향했다. 자동차가 3시간 남짓 달려 무산에 도착하였는데,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자동차에서 내려 정황을 알아보려고 장마당으로 갔더니 사방으로 개인집 숙박을 하겠다며 물어왔다. 우리는 믿음직해 보이는 한 중년 여인을 따라가 돈 10원씩을 내고 그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집안을 들어가 보니 할머니와 자식 두 명을 데리고 사는 여인이었다. 자리에 누워 할머니와 그 여인이 나누는 말이 어젯밤에 중국 땅으로 앞마을 누가 누가 돈 5천원을 내고 또 넘어갔다는 것이다.

-친구와 脫北 감행

그 여인은 자기도 넘어갈 「줄」을 쥐고 있는데 자식들 때문에 꼼짝 못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 여인을 통하리라 마음먹고, 그 여인에게 우리도 넘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여인은 우리에게 돈이 있는 가고 물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돈이 각기 2천원도 안되지만 중국 친척한테 갔다올 때 마저 갚겠으니 꼭 넘겨달라고 졸랐다.
그 여인은 우리의 애원과 간청에 동정되었는지 승낙하였다. 그는 중국 친척네 집에 며칠 안으로 갔다가 돌아와야 하며, 돌아와 못 낸 돈을 마저 물고, 또 넘어오는 비용으로 중국 돈 5백원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인의 안내로 두만강에 도착하니 두만강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넓은 강 같았다. 경비병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니, 30m쯤 떨어진 곳에 총을 쥔 두 명의 군인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우리를 안심시킨 여인은 강줄기 어디 건너가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이런 일을 많이 해본 여인 같았다. 늦가을 날씨라 두만강 물이 차가웠지만 그런 걸 느낄 경황이 없었다. 허리까지 차는 물 속을 둘이 손잡고 허둥지둥 건너니 한숨이 푹 놓였다. 돌아보니 북한쪽 강뚝 뒤에서 그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허나 우린 답례를 할 겨를도 없이 중국쪽 나무숲으로 냅다 뛰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이』하는 조선말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私服(사복)을 입은 두 중년사나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마나. 잡혔구나」
우리는 그만 오금이 저려 그 자리에 딱 굳어지고 말았다. 다가온 그들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우리 모습을 훑어보며 『처녀들 어디서 왔소』하고 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기만 하는 우리를 본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두만강을 건너긴 했지만...

『빨리 우리를 따라오오. 조금 있으면 변방대가 오니 잡힐 수 있소』
시비를 가릴 경황이 없었던 우리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일행은 오솔길을 돌고 돌아 산기슭의 어느 외딴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중 주인인 듯한 남자가 『강을 건너온 조선 여자요』라고 소개하자, 중년 여인은 측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올라오오. 빨리 옷을 갈아입어야지』
우리는 옷도 갈아입고, 당장 불을 때서 해준 쌀밥도 실컷 먹었다. 그 동안 옆에서 주인 여자가 수선을 떨었다.
『아이구, 이렇게 몸매가 곱구, 인물이 환한 처녀들은 보다 처음 본다.』
윗방에서 각종 광고가 나오는 탤래비전을 구경하며 수근덕거리던 남자들 중 주인 남자가 묻는 것이었다.
『그래 어디 가려구 그러오』
우린 아무 대답도 못했다. 정작 넘어왔지만 친척도 없고, 갈 곳도 명확치 않은 우리들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대뜸 짐작한 듯, 다른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줄 테니, 우릴 푹 믿소』
여기가 중국 어딘 가고 물으니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 속한 농촌이라는 것이었다. 주인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저녁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앉아있는데, 부엌문이 열리더니 우리를 맞았던 한 남자가 들어서며 주인 남자에게 다급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자리를 떠야겠소. 변방대 아이들이 무슨 냄새를 맡은 것 같소.』
우리는 급히 옷을 입고, 그 남자를 따라나섰다. 간 곳은 큰 거리를 돌고 돌아 철대문을 높게 한 집이었다. 방안은 화려하게 장식되고 응접실도 있었으며, 침실도 세 칸이 되는 잘 사는 집이었다. 안경을 낀 서른 댓 살쯤 되어 보이는 땅딸보 같은 남자가 응접실에서 우리를 맞았다. 그는 우릴 보고 고생이 많겠다고 인사를 차리며 수박과 귤을 내놓았다. 이 집에 여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때까지 귤은 몇 번 먹어보았지만, 수박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큼직한 게 아주 희귀해 보였다. 이들은 우물쭈물 하는 우리에게 수박도 짜개주고 귤 껍질도 벗겨주며 어서 먹으라며 권했다. 우리가 수박을 껍질만 내놓고 흰 살 째로 씹어먹자 남자들은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수박을 못 먹어보았소』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그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땅딸보 같은 남자가 응접탁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뭐라고 중국말로 전화했다. 조금 있더니 신사복 차림에 키가 말라깽이처럼 큰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우리를 쭉 훑어보더니 환성을 올렸다.
『야! 넘어온 처녀들 중에서 제일 낫구만』
그 말을 들으니 이 사람들이 탈북자들을 많이 대해 보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를 데리고 온 남자가 그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말했다.
『이 분들이 여기 변방 대에서 처녀들을 잡아 도로 보내겠다는 걸 돈을 먹이구 못 데려가게 막아주었소. 그러니 안심하고 이 집에 당분간 있소.』
말을 마친 그는 가겠다며 그들에게 허리를 굽실굽실했다. 땅딸보가 돈 봉투 같은 것을 들고나가 그들을 바래다주었다. 빈손으로 다시 들어 온 땅딸보는 냉장고에서 술과 맥주 갖가지 안주 감들을 응접탁에 내놓았다.

-性의 노예로 전락

마실 줄 모른다는 술을 너무 권해 억지로 몇 잔 마시고 난 나와 영이는 소파에 그만 고꾸라졌다. 그 후 누가 나를 안아 끌어가는 게 기억나고, 아래를 파고드는 감각에 몸을 움츠리다 도로 잠든 기억이 난다.

두어 시간 후 눈을 떠보니 웬 침대에 베개 두 개가 놓여있고, 한 옆에서 내가 팬티만을 걸친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아래가 끈적끈적한 게 정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응접실에서 말소리가 나기에 침실문 틈으로 가만히 내다보니 안경쟁이와 꺽다리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가고 싶었으나 부끄러워 옷을 주워 입고 침대 구석머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한 시간 후 꺽다리가 들어섰다. 벌떡 일어서서 어쩔 바를 모르는데, 그는 걸친 옷을 벗어 내치고 잠옷 바람에 침대에 털썩 눕는 것이었다.

『어 처녀, 여기와 누워. 이게 바로 인생이라는 거야.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게 인생이란 말이야』

지껄이던 그는 내가 구석에 계속 서있자 일어서더니 나를 꼭 껴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춘 다음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싫다고 하는 나의 몸부림엔 아랑곳없이 우격다짐으로 내 옷을 벗겨 버렸다. 한참 씩씩거리던 그는 김빠진 공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내 몸 위에서 중얼거렸다.

『여자들이란 게 같은 것 같으면서도 맛이 다르단 말이여. 영이는 나른한 맛이 있고 희옥이는 센 맛이 있어』
나는 그 때에야 비로소 좀 전에 내 몸을 정복했던 것이 이 자가 아니라 땅딸보였다는 것을 느꼈다. 영이를 깔아버린 이 자가 또 나를 깔아버렸다고 생각하니, 치사하기 그지없어 그 자를 왈칵 밀어버렸다. 그러자 털썩 떨어진 꺽다리는 제풀에 흥이 겨워 지껄여 댔다.
『뭘 그래, 다 된 풀 자루인데. 우리만 믿어. 낭패가 없을 거야. 하지만 조금이라두 딴전을 피웠다가는 당장 잡아가게 하겠어. 여긴 중국 땅이란 말이야』
옳았다. 여긴 중국 땅이었다. 우리는 고소할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탈북자로서, 좋든 나쁘든 운명에만 오직 자신을 맡겨야 했다. 이렇게 일주일동안 밤에는 땅딸보와 꺽다리의 상대를 해주고 낮에는 문을 땅땅 걸어놓은 집안에 갇혀 음식도 하고 빨래도 했다. 땅딸보의 여편네는 돈벌러 한국에 나간 지 3년 지났다는 것이다.

-홀아비촌의 끔찍한 경험

꼭 일주일이 지난 후, 하루는 꺽다리가 택시를 가지고 와서 영이를 데려가려 하였다. 겁에 질려 어디 가느냐고 우리가 묻자, 갔다가 이틀 후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우린 죽어도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하자 지금 좋은데서 너희들을 받아주겠다고 하는데, 수속비를 많이 요구하고 있어 돈을 보태야 한다고 역설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떠나는 영이를 바래며, 택시에 아직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나는 영이가 결혼식 하러 가는 것 같은 은근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약속대로 이틀 후 영이가 택시에 실려 돌아왔다. 그런데 그 곱던 눈은 정기가 없어 풀어져 실성한 여자같이 보였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나를 끌어안고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계속 흘리는 것이었다. 낮에 땅딸보가 나간 후 영이 에게 물어보니, 그는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택시로 산을 수십 개나 돌고 돌아 끌려간 곳은 한 심심산골 농촌마을이었다. 농가는 몇십 호밖에 안되었는데 조선족과 한족이 섞여 사는 마을이었다.
저녁이 되자 문 밖에서 종소리가 울리더니 청장년들이 한 열댓 명 모여 술판이 벌어졌다.

술안주를 준비하느라 쉰 살쯤 돼 보이는 여인도 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심심산골에 남자가 70명쯤 되지만 여자는 중년 여인들과 할머니까지 합하여 8명밖에 없는 「홀애비」촌이라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열 일곱 살이 되기 바쁘게 한국으로나, 도시로 다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꺽다리를 가운데 놓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벌이는 남자들은 조선족들과 한족들이 섞여있었다. 밤 10시쯤 되었을 때였다. 꺽다리는 영이를 불러내더니 오늘 밤 남자들을 치러야 돈을 뽑는다며 참아달라고 하였다.

영이는 방안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못 그러겠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자 꺽다리는 거역하면 희옥도 못 만나고, 이 산골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한다면서 하룻밤만 견디고 내일 떠나자고 하였다. 무서움에 그만 기가 꺾인 영이는 할 수 없이 꺽다리가 하라는 대로 윗방에 들어갔는데, 좁은 방안에 이불 한 채만 놓여있었다. 미닫이를 통해 아랫방의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조금 있더니 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 조용하기오. 오늘 우리에게 보름달처럼 환한 아가씨를 물색해서 데리고 오신 분에게 박수로 감사를 표시하기요』
방안에 요란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사람이 많으니 30분 안에..』

『에, 이제부터 오늘밤 일을 시작하겠는데 모두 고상하게 처신하길 바라오. 사람이 많은 것만큼 시간은 30분을 초과 못하오』
영이는 혹시 무슨 회의 같은 것을 하려는가 보다 생각도 해보았다. 이어 꺽다리를 보고 말하는 소리였다.
『저어, 아가씨를 데리고 오신 분 들어가 먼저 합소』
아랫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귀에 익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꺽다리의 목소리다.
『난 싫소. 어서 시작하오』
중년 사나이의 고집스러운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도 우리 동네의 예절인데 어서 합소』
할 수 없다는 듯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선 꺽다리는 방안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영이를 보고 말했다.
『난 오늘 밤 그럴 생각이 없는데 눈을 꼭 감고 참아. 참으면 뭉칫돈이 나와』
꺽다리는 담배 한 대를 태우더니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자, 시간만 때우겠소. 빨리 해야지』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제일 수고한 형님부터 먼저 들어가오』
『옳소』
『형님 다음부터는 돈 낸 순서대로 하기오』

뒤이어 들어오는 것은 말을 하던 중년 남자였다. 그는 앉아있는 영이를 보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히죽 웃더니 와락 끌어안는 것이었다. 한낱 농사만 하던 손이어서 어찌도 우악스러운지 숨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파르르 떨던 영이는 어느새 옷을 다 벗기우고 침습을 당하였다. 째지는 듯한 아픔에 『아, 아』소리를 내던 영이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아랫방에서 영이의 소리를 듣고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터졌기 때문이다. 거센 숨을 씩씩 몰아쉬며 당장 먹어버릴 듯하는 것이 꼭 황소 같았다. 하체의 아픔만 생각하는데 이미 사정해버린 그는 담배를 찾아 물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자 또 달라붙은 그는 몸이 부서질 지경으로 마구 비벼대며 돌아갔다. 섹스에 주린 인간의 발작이었다.

이어 두 번째로 들어온 것은 스무 살이 갓 넘었을 애숭이였다. 영이를 보고 한참동안 어쩔 바를 몰라 쩔쩔매던 그는 용기를 내며 다가들어 입을 맞추더니 또 영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빨리 이 순간들을 모면하자면 시간 단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영이는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세 번째로 들어온 것은 서른 살쯤 된 한족이었다. 조선말을 모르는 그는 영이 옷을 벗기며 내내 한족말로 씨부렁거렸다. 옷을 벗기고 영이 위에 대뜸 엎드린 그는 벙어리처럼 끙끙 소리지르며 그 일을 했다. 입을 맞추는 그의 몸과 입에서는 땀 냄새인지 기름 냄새인지 모를 꼭 반찬 냄새 같은 것이 풍겼다. 음식이 입에 당기지 않아 저녁도 못 먹은 영이는 그만 역해져 졸도했는지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눈 떠보니 아침 7시

시간은 흘러 무엇이 몸을 내리누르는 감각에 눈을 뜬 영이는 몸 위에 있는 남자를 보며 아직 그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방안은 분명 밤이었는데 창문으로는 날이 밝아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였다. 몸을 일으키자니 아래가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쓰려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엉덩짝이 축축하여 손으로 만져보니 깔고 있던 이불은 온통 젖어있었다.

옆으로 돌아 누운 영이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고 옷을 주워 입은 후 방문을 열고 나서려 하였다. 그런데 미닫이 문이 드르륵 열리며 꺽다리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아직 한 명 더 남아있어. 기다려』
아침 7시가 지났는데도 한 명 더 남았다니 영이는 기가 막혔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고 또 들어온 영감같은 남자를 치르고 난 영이는 「이젠 됐구나」하는 생각에 악을 쓰며 옷을 입고 벽에 몸을 의지했다. 조금 있더니 히죽이죽 웃으며 들어선 꺽다리는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지친 영이가 눈을 감고 응답이 없자 알아차린 듯 부축하여 나갔다. 이 광경을 보던 방안의 남자 두 명이 달라붙어 영이를 맞들어 택시에 실었다.
시골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난 영이는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개인지, 사람인지 나도 모르겠어』
나는 내가 당한 것 같아 몸을 떨며 영이를 꼭 껴안고 말했다.
『영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안라 구멍이 있다는데 우리 꼭 이 고생을 이겨내자

-본격적인 性 봉사

보름쯤 지나자 집안에 웬 손님들이 댓 명 몰려 들어왔다. 부엌에서 땅딸보의 귀띔에 의하면 공안기관의 일꾼도 왔으니 잘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이와 나는 남자들 틈에 억지로 끼워 앉히는 통에 할 수 없이 시중을 들게 되었다.
술잔에 술을 따라주자 몇 잔쯤 마신 손님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허물없는 친구나 되는 것처럼 영이와 나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는가 하면 싫다는 입을 억지로 맞추는 것이었다. 한 손님은 술상 밑으로 손을 넣어 내내 나의 허벅다리를 슬슬 만지는 것이었다.
너무도 무안하여 영이의 눈치를 흘끔 살피니 그의 몸도 농락당하고 있었다. 왼손으로 영이의 어깨를 껴안은 손님은 오른손으로 다른 남자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영이의 젖통을 주물러 대고 있었다. 흉측하여 나와 영이가 일어나려 몸부림치자 땅딸보와 꺽다리의 부릅뜬 눈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위압했다. 참아야 했다.
조금 있더니 이 자들은 술상에서 일어나 넓은 홀에서 디스코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와 영이가 번갈아가며 그들의 상대가 되었는데, 춤추는 동작들은 완전히 性的(성적)인 동작들로 되어 있어 우릴 아연실색케 하였다.
예술학교 졸업생들인 영이와 나는 춤이나 노래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노는 춤은 꼭 껴안고 볼을 비벼대며 목과 얼굴에 키스를 하고, 젖가슴을 끌어당겨 자기 가슴에 꽉 붙이는가 하면, 엉치를 끌어당겨 서로 아래를 딱 붙이고 흔들어대는 치사스런 춤이었다.
한참 춤을 추어대던 이들은 기진했는지 술상에 모두 앉아 또 마시며 우리를 보고 노래를 하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아는 노래는 북한 노래밖에 없었다.
둘이 먼저 이중창을 하자 그들은 모두 눈이 퀭해졌다.
『아! 가수들도 왔다가 울고 가겠다』
『본래 노래를 하던 여자들이 아니냐』
이어 우리는 개별적으로 노래를 하게 되었다. 먼저 좀 더 당찬 내가 노래를 불렀다.
『야! 가라오케감이다』
『몸매나 목소리가 딱 맞아』
다음 영이가 부르는 노래를 듣던 그들은 술상을 두들겨 댔다.
『야! 이건 완전한 가수야, 가수』
『 애간장이 다 녹는다』

-『북한 노래는 재미없어』

천성적인 영이의 목소리에 반한 이들은 영이에게 무려 한시간이나 노래를 시켰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은 수근덕거렸다.
『목소리는 기막히게 좋은데, 북한 노래를 부르니 재미없어』
『야! 노래 끝 마다 그 분, 그 분 하는데 북한의 인간은 그분밖에 없는 모양이지』
『저것들이 한국노래를 부르면 「카세트」에 녹음해도 되겠다』
우리도 그동안 땅딸보네 집에서 축음기를 들어보니 한국 노래는 우리가 부르는 북한 노래처럼 딱딱한 맛이 없고 진실하고 건드러진 정말 듣기 좋았다.
북한 노래처럼 그 어떤 사상에 대한 찬송이나 권력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평등한 인간의 자유스런 감정의 생활을 그대로 표현한 진짜 「대중예술」이었다. 노래하는 동안 내내 놀라워 입이 벙글해 있던 땅딸보와 꺽다리는 남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어디서 저런 돈 덩어리들을 끌어왔어』
『하여튼 김형과 이형의 솜씨는 누구도 못따라』
칭찬에 어깨를 으쓱하던 땅딸보는 영이와 나를 부르더니, 제각기 침실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였다. 우물쭈물 하는 우리에게 말 안 들으면 오늘밤 중으로 일이 잘못된다는 위협을 하며 억지로 침실로 들이밀었다.
침실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우리는 또 힘겨운 일을 당하게 되었다. 이자들은 아예 침실에 맥주와 안주감을 들여다 놓고 우리를 性봉사로 내몰았다. 제각기 서로 다른 동작으로 나의 몸을 만신창이 되도록 만들어 놓는 그 앞에서 견디어 낸다는 것은 전문 性연습을 연마한 선수라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네 명의 남자들을 다 치르니, 새벽 두시 가량 되었다. 나는 기진해 일어설 힘도 없어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영이와 나는 다음날 낮까지 꼬박 누워 있게 되었다.

-가라오케와 남한노래

이 날 저녁이었다. 밤 늦게까지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기진한 듯 방에 들어섰는데 뜻밖에도 방안에 주인이 앉아있었다.
『오늘 춤추는 솜씨를 보니 과연 괜찮아』
그는 웃음을 띠고 침대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하였다. 침대 옆 원탁 위에는 깡통 맥주 몇 개와 안주감들이 차려져 있었다. 계속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다시금 앉으라고 권한 그는 입을 열었다.
『중국이란 곳은 북한하고는 달라. 능력이 있는 것만큼 돈을 버는 곳이야. 열심히 일해봐. 너희들도 돈벌러 왔겠지』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주인은 만족한 듯 웃었다.
『일 잘하면 돈을 많이 벌게 해 줄 테니 근심 푹 놓아』
그는 깡통 맥주 뚜껑을 뜯어 나에게 내밀고 자기도 뜯어 마셨다. 내가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앉아 있는데 어느 새 주인은 몇 통 다 마셔 버렸다. 그는 나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목을 뒤틀자 그는 『여긴 들어오면 로반(주인)한테 먼저 몸을 주게 되는 곳이야』라며 단추를 주르륵 풀어냈다. 주인의 권세에 압도되어 반항할 엄두도 못 내고 가만있자 그는 제 마음대로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 다음날 오전에 영이가 나오지 않아 그의 침실을 찾아가려 했으나, 복도에 항상 보초를 서는 남자들 때문에 저지 당하고 말았다. 오후에 영이가 나왔는데 내가 웬일인가 물으니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오전에 주인한테 당했다고 하였다. 내가 할 말이 없어 영이의 손을 꼭 쥐어주자 그도 나의 손을 꼭 쥐며 의미 담긴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사흘 직후부터 우리는 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영이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 옆에서 노래를 돕는 춤을 추었다. 가라오케 방 겸 무도장은 6개였는데 영이와 내가 한 방을 운영하게 되었다.
찾아드는 손님들은 남자가 60%가량 되고, 여자가 40%쯤 되었다. 여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중국 땅에 넘어와 보니 중국이란 곳은 개방돼서 북한과는 대비도 안되게 정말 살기가 좋았다.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능력만 있으면 잘살 수 있는 곳이었다. 옷을 잘 입고 연인들과 마음껏 사랑을 속삭이고 다니는 중국 여자들의 모습은 항시 우리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우리가 이용하는 가라오케 설비들은 모두 한국 것이었는데 질이 좋았고 현대적이었다. 우리 예술학교에도 이런 설비는 없었다.
중국 조선족들은 모두 한국을 숭배하며, 한국 노래를 거의가 잘 부르고 있었다. 이들은 할아버지 代(대)가 거의 두만강을 넘어 온 북한쪽 이주민들이었건만, 그들의 마음속엔 고국을 한국으로 간주하고 북한은 안중에 두질 않았다.

2001년 7월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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