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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뛰뛰! 빵빵! 난 희망을 배달하는 트럭기사 - 강석남

작성년도 : 2002년 55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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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뛰! 빵빵! 난 희망을 배달하는 트럭기사

- 강석남

 

 

내가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남한사회에 나왔을 때만 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쁨으로 가슴 한가득 부풀어 있었다.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하면 다 될 것 같았고 금방 부자가 될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처음 정부가 마련해준 임대주택에 입주하던 날, 생활용품을 사려고 슈퍼마켓에 갔다. 뭘 사야 할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갖가지 알지 못하는 상품으로 가득찬데다, 상품이름이 퐁퐁이라든지 참그린등 아리송한 말들로 되어 있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멍하니 서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중국에서 생활할 때도 이런 일이 있기는 했다. 달걀이 중국말로 뭔지 몰라 입으로는 "꼬꼬대 꼬꼬"를 외치고 손과 몸짓으로 닭이 알을 낳는 시늉까지 해가면서 겨우 산적이 있었다. 그야 내 조국이 아닌 곳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민족이 사는 남한에 와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북한식 말로 세척제가 어느 것이냐고 물어보기도 어색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사회에 첫발을 디디며 가졌던 막연한 기대가 많이 사라졌다. 현실적으로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고 싶은 물건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하는 내가 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사실 난 북에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하여 군대생활만 해온 사람이다. 그래서 사회물정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다. 심지어 넥타이도 맬줄 모르는 촌놈이다.

 

결국,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능력이 닿는 만큼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인간이 사는 것이 바로 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난 아는 것도 없고 기술도 없다. 단 하나 잘 알고 있는 것은 10년 동안 몸에 배인 군사동작뿐이었다. 그렇다고 앉아서 놀 수만은 없는 노릇, 무슨 직업이라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과연 어떤 직업이 자본주의 사회에 날 적응시키는데 도움이 될까? 며칠을 고민하다 문득 생각난 것이 시장이었다. 자본주의란 시장경제이고 모든 것이 시장에서 시작된다는 얘길 들었던 것 같다. 서민들의 치열한 삶을 느낄 수 있는 시장에서 뭔가 시작해 보기로 했다. 결국, 나의 첫 직장은 영등포 시장이 되었다. 도매상점에서 배달일을 했다. 새벽 5시에 출근하여 핸드카를 몰고 물품박스를 나르며 열심히 일했다. 퇴근은 10시가 넘어야 가능했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아 늘 활기찬 생활이었다. 자본주의 생활방식, 돈이 돌아다니는 생생한 현장과 갖가지 물품들.... 모든게 생경했지만 생활의 청량제가 되는 느낌이었다. 또 경험하고 연구해야 할 대상들이 많다는 것이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때 내가 받은 첫달 월급이 80만원 이었다. 처음에 사장이 80만원을 준다고 할때는 그것도 많은 돈인가 싶었다. 큰돈이긴 하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옆의 동료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만 월급을 적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개월이 지나고서야 사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사장은 "그래! 내 다 생각하고 있었지. 100만원으로 올려주면 되겠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탈북자라고 하여 돈을 적게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다. 능력대로 대우받고 일한만큼 돈버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라 생각했는데....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난 사장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그래! 탈북자라고 무턱대고 남한에서 동정이나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하면 안되겠구나! 차별받지 않으려면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트럭 기사직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장사를 시작할 밑천을 마련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여러 곳에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 보았지만 선뜻 날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도 그럴만 하다. 운전기술도 서툴고 지리도 모르니 고용주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은 것이 당연하다. 이곳은 치열한 경쟁사회이니 만큼, 나 같아도 능력있는 사원을 고용하고 싶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이런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이 과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이겨낸 사람들은 분명 나름대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면서 정부에서 준 지원금으로 근근히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겨우 주류(酒類)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2.5t 트럭으로 각종 주류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길을 잘 모르고 운전기술이 서툴러 처음엔 사고도 많이 냈다. 화물차는 다른 차들과 달리 조금만 운전을 잘못해도 술 박스가 땅에 떨어지는 등 사고가 나기 일쑤였다. 깨진 술값을 변상하고 나면 월급이 반밖에 남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지도책을 독파하는 것과 밤새 서울 거리를 운전하며 다니는 것이었다. 먼저 지도를 보면서 도로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본 다음 직접 차를 몰고 몇 번이고 답사하는 방법으로 길을 익혀 나갔다. 서울시내 각 구의 위치, 주요 지하철역과 사거리 명칭 등을 외우며 2개월을 돌아다니다 보니 웬만큼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지리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길도 많이 알고 운전기술도 늘어 회사일을 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운전일을 처음 할 때 어려웠던 점을 스스로 극복하고 나니 나 지신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되었고 일도 즐겁게 느껴졌다.

 

지금도 아침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한다. 일은 고되지만 먼 훗날 발전된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생이 달게만 느껴진다. 회사와 주변에는 날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분들이 많아 심적으로 안정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난 확신한다. 나의 미래는 분명 멋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그래서 난 오늘도 열심히 차를 몰며 서울거리를 누빈다. 뛰뛰! 빵빵!

 

2002.4 강석남 씀

 

 

2004-11-19 04:02:10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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