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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책가방 찬가 - 김성민

작성년도 : 2003년 67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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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찬가

- 김성민

 

 

마흔살에 00학번이 됐다. 만학도라고 했던가... 공부는 꼭 해야겠는데 남들에게 늦깍이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리기가 싫었다. 다행히도 이북처럼 교복을 꼭꼭 입어야 하는 대학생활이 아니었다. 이 나이에 20대 초반의 학생들과 똑같이 대학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학교 배지까지 달고 학교에 가야 한다면 오늘의 나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책가방도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다행스러운 발견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동대문시장과 명동바닥을 두루 뒤지다가 학과장님 것과 비슷한 가방을 골라샀다. 노트 몇 권에 참고서 몇 권을 달랑 들고 학교로 갔을때, 누가 보기에도 내 모습은 대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차람새로 봐서는 회사의 중역이거나 대학교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모양새로 한 학기를 보낸 나에게 소리 없이 다가온 여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시내, 탈북자들과 남한 대학생들의 동아리에서 간사를 맡고 있는 스물 세살의 앳된 여학생이다. 그 여학생이 두툼한 사전 두권을 생일선물로 내게 주었다.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배우다가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영한사전과 남북한의 이질화된 언어 때문에 실수가 빈번했던 나에게는 고맙디 고마운 국어사전이었다. 없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사용하고 보니 그림자처럼 함께 해야할 것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겉보기만 그럴듯했지 턱없이 내부 공간이 협소한 책가방에 두툼한 사전을 넣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전들을 학교 사물함에 보관해 놓고 사용하자니 집에서 공부할 때가 문제였고 집에 보관하고 사용하자니 학교에서가 또 문제였다. 학과장님의 것과 비슷한 가방을 포기할 때라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 다른 것 같은 친구들의 가방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책을 넣으려고만 한다면 한도 끝도 없이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 친구의 책가방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니 볼펜 가득 들어있는 필통에서부터 각종 사전과 참고서들이 가방 안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책가방의 부피나 무게가 높은 학점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자료나 사전에 기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과장님의 것과 비슷한 가방을 샀던 명동의 그 가게에서 다른 학생들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책가방 하나를 골라들었다. 참고서며 학습노트며 마음먹고 넣어보니 열 일곱 권이나 들어가는 책가방이었다. 그런 학생용 가방에 양복이 어울릴 리 없었고 당연히 옷차림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말 그대로 만학도를 바라보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눈길이 어느덧 따뜻해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 공부 못하는 놈 가방만 크더라고 진담 반, 농담 반 놀려주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학생의 무기는 책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뒤늦게 터득한 나에게 책가방의 크기는 노력과 실천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굳이 믿어본다. 이제 부피가 점점 커지다 못해 터질 정도로 되어버린 탈북 대학생의 책가방, 이제 그속엔 지난 시절의 아쉬움까지 차곡차곡 쌓여진다. 교재가 없어서 닳을 대로 닳아진 선배들의 교과서를 손이야 발이야 빌어서 사용하던 지날 시절의 아쉬움...

 

학습노트 한 권을 놓고 처음에는 연필로 쓰고 다음에는 볼펜으로 쓰고 또 다음에는 먹물 찍은 깡필로 세 번씩이나 겹쳐 쓰던 서럽던 날들의 그 아쉬움.. 식량난이 대두하던 90년의 방학 때는 교내식당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숙사 학생 전체가 동원되어 칡뿌리를 캐야했던 북한의 대학생활... 그러했던 부족함과 배고팠던 설움까지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의 책가방은 조용히 불어난다.

 

20034월 김성민

 

 

2006-02-06 09:56:2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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