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배달해 드립니다 > 탈북민 수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민 수기

희망을 배달해 드립니다

작성년도 : 2003년 692 0 0
  • - 별점 : 평점
  • - [ 0| 참여 0명 ]

본문

희망을 배달해 드립니다

- 명철환

 

 

세계 최고의 역사(力士)가 되겠다고 열심히 운동하던 때가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열심히 했다. 마치 세상을 들어올리려는 듯 힘차게 역기를 들어올리며 나만의 꿈을 꾸던 그 시절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무너진 力士의 꿈

 

나의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타고난 체격과 부지런함 덕분에 청소년 시절부터 많은 대회에 입상하며 역도계에서 주목받는 선수로 부상했다. 좀더 실력을 키워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리라는 일념하나로 힘든 운동을 참아내며 훈련에 몰두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의 성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의 교화소 수감경력은 내가 국가대표선수가 되는데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목표가 이렇게 무너지자 허탈함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사회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고 불합리한 것들만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날들이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왔다. 결국 탈북을 결심하고 긴 여정 끝에 2001년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힘만 센 남자

 

남한에서 난 말 그대로 힘만 센 남자였다. 이 사회에 대해서 너무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선 뭘 해서 먹고 살까하는 문제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사지 멀쩡한 건장한 남자가 앉아서 놀고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게다가 난 사랑하는 아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알게된 아내는 의지할 곳 없는 나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였다.

사회에 나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같이 살았지만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식을 올리기에는 이른감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난 한 여자의 남편이요 가장이었다. 뭐든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건 아마 아내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몸이었다면 역도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이 사회에 정착하는데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달원으로 힘좀 써볼까?

 

북한에서 익혔던 역도를 남한에서도 해볼까 생각해 보았다. 관련학과에 진학하여 북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남한에서라도 펼쳐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북후 남한에 입국하기 전까지 힘든 생활을 하면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선수로서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곳은 마음만 먹으면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이 많은 곳이니 그것으로 위안하며 새로운 계획을 짜기로 했다.

 

막상 일자리를 구하려고 나서보니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나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였던 것일까? 많은 탈북자들이 실업자로 지내는 것이 기술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깨끗하고 좋은 직장만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심히 보니 이 사회는 궂은 일이라도 자기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었다. 이것을 깨닫기 까지는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늦게라도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농협 하나로마트의 배달직으로 채용되었다. 손님들이 잔뜩 구매한 물건을 집까지 배달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힘 하나는 자신있던 내게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단지 운전이 서툴고 서울 지리를 몰라 초반에 고생을 좀 했다. 물건을 몇 개씩 빼놓고 배달하러 간적도 있어 점장님께 꾸중듣기가 일쑤였다. 사실 처음엔 상품을 보고도 이름이 뭔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모를 때도 있었으니 너무 나무라는게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생각과 업무자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고객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지 어설픈 변명은 필요없다는 식이었다. 이 사회에서 좀 생활해 보니 이젠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서비스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과 점장님은 내게 친형제와 같은 분들이다. 사실 남한에 정착생활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의지할 부모·형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나의 이런 외로움을 채워주는 다정한 벗이자 형·동생이었다. 점장님은 명절에 나와 아내를 집으로 초대해 쓸쓸하게 보내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마음이 있어도 실제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 부부는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한번은 저녁에 술을 많이 마시고 회사에 늦게 출근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버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회사에 쭈삣쭈삣 나가보니 모두들 난리가 났다. 무슨 사고가 생긴거냐, 다친데는 없느냐고 묻기 시작하는데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동료들은 이렇게 날 걱정해 주는데 난 술먹고 아무 생각없이 잠이나 자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난 혼자가 아닌 회사 조직의 일원으로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함께 할 미래

 

얼마전에 이쁜 딸이 태어났다. 요새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집에 가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날 반겨주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행복한 만큼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이젠 한 아이의 아빠로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딸아이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기는 싫기 때문이다.

 

희망을 배달하며 열심히 일하는 나를 지켜보는 가족이 있기에 오늘도 난 즐거운 마음에 회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2003.3 명철환 씀

 

 

2004-11-19 20:13:55

출처 : 탈북자동지회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