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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한 화가의 죽음 - 유지성

작성년도 : 2004년 59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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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있던 아파트에 한 화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대학과 영화계를 넘나들며 표면상으로는
북한에서 한때 잘 나가던 사람 이였다.
그런데 언젠가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려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병 문안 겸 그 집을 방문하니 그는 피기 없는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집안의 돈 될만한 물건은 모두 팔아치우고 눈에 보이는 집안풍경은 한산 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그는 나를 반기며 이렇게 말했다.
" 그 동안 돈 한푼 없어 술 한잔 못 마셨는데
네가 왔으니 한잔 마시게 되겠구나"
"앓는 다면서 술은 어떻게 마신다고 그러세요?"
"괜찮아
내 병은 고치기도 힘들고 또 고칠 돈도 없어
너 술 권하는 세상이란 말 들어봤지?
우리 나라가 바로 그래
멀쩡한 정신으로 바라보기엔 너무 신경질 나는 세상이야"
할 수 없이 술을 사와 그와 마주 앉았다.

그의 세상에 대한 푸념은 술을 마시면서도
계속 되었다.
"난 그래도 영화 미술계에선 모두가 알아 주는 화가야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내게 차례진게
뭐가 있어
이제 죽게 되었지만 자식에게 뭘 남겨줄게 있어
그런데다 요즘엔 식량까지 내주지 않지
담배조차 없어 배추 잎을 말아 피우는 형편이야
미국에 있는 나의 4촌 형은 어떤지 알아? 백만 장자야
나처럼 그림만 그리는 화가인데 말이야
이 땅은 재능이나 지식으로는 살수 없는 세상이야
더는 살고 싶지 않아
빨리 죽고 싶어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없어
나도 끝장이지만 이 나라도 오래지 않아 끝장일거야"
그리고는 흑 흑 흐느끼는 것 이였다.

벽에 그의 대학생시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지적으로 보이는 눈과 굳게 다문 입이 야심차 보였다.
지금의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모습 이였다.
나는 지금의 그의 모습 속에서 앞으로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싶었다.

(나 역시 이 땅에서 계속 산 다면 저렇게 허무히 죽어가야 할 거야
희망과 꿈은 고사하고 한 달 후의 나의 운명도 점칠 수 없는 북한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그날 그날을 부대끼다가 저렇게 속절없이 죽어 갈거야" 하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등에 쭉- 소름이 끼치는 것 이였다.
(세상은 하루가 다루게 변모하고 있다
조금 있으면 21세기인데 이 나라는 언제까지나 중세기적 암흑과 가난 속에 허덕 이여야 하는가?)

그 집을 나서면서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탈북 결심을 굳게 다졌다.

한 달후 그 화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쓸쓸히 접할 수 있었다.

--- 유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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