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절 많은 내 운명 - 김광혁
작성년도 : 2011년
567
0
0
본문
곡절 많은 내 운명
- 김광혁
난 때때로 조용한 시간이면 생각에 잠기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다.추억의 돛을 달고서 저 멀리 올라가보면곡절도 많은 내 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대한민국 사랑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리었네정다운 어머니같이 두 손 잡아 이끌어주는대한민국 사랑의 품에 나의 운명 맡기리영원히, 영원히물론 이 노래는 북한영화 “곡절 많은 운명”의 주제가인데 내가 좀 가사를 바꾼 것이지만 어쩐지 이 노래가 나와 같이 인생사가 복잡한 사람들을 비유하여 지어진 노래가 아닌가 생각된다.나는 원래 중국에서 태어나 열네 살까지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자기 조국을 찾아간다고 북한으로 갔다.그런데 중국에서 살 때는 조선사람이라는 이유로 중국사람들한테서 민족적 멸시와 모욕을 많이 받았다.거리에 나가면 중국애들이 ‘꼬리빵즈’ 즉 ‘고구려 몽둥이’라고 하면서 놀려주고 돌멩이를 던지고 하였는데 고구려 때에 일본의 민족이간 정책으로 고구려에 있는 중국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중국 사람들이 대를 이어 가면서 그 앙갚음을 한 것 같다.그러다가 1966년 10월 14일 여권을 떼고 조국을 찾아 하얼빈에서 국제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는데 마음은 마냥 즐겁고 설레었다.중국 단동을 지나 신의주를 거쳐 평양으로 가면서 창밖으로는 황금벌에서 낫으로 벼 가을하는 농부들의 흥에 겨운 모습들이 스치곤 하였는데 “아, 이곳이 나의 조국이구나! 선조의 무덤이 있는 조국, 한줌의 흙 한포기의 풀도 한없이 정다운 그곳이구나!”하는 생각에 어쩐지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리였었다.그런데 정작 북한 땅에 도착하여 생활을 시작해보니 부풀었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 절망감만 작은 마음을 꽉 채웠다.집이 없어서 2년간 여관생활을 하였고 배고픈 고생을 엄청 많이 했다.여관생활 2년에 이어 합숙생활 2년을 하면서 “중국에서 그대로 살 것을 왜 왔냐고?” 후회를 많이 하였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배고픔이었다.합숙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 안 구조가 한 줄로 남자, 한 줄로 여자가 앉아 식사하도록 되어있었다.그런데 아침에는 옥수수밥, 점심에는 검은 밀가루 빵, 저녁에는 옥수수국수였는데 그 양이 너무 적어서 밥을 먹고 돌아앉으면 배가 고프기 시작 한다.특히 점심시간에는 검은 밀가루빵 4조각을 주는데 어머니가 당신의 몫에서 3조각을 나에게 주시면서 “나는 소화도 잘 안되고 괜찮다”라고 하시면 “엄마도 배고프시겠는데 엄마 드세요”라고 말은 하면서도 게눈 감추듯이 먹어버리곤 하였으니 정말 내가 너무나도 불효한 것 같다.점심시간이면 어머니 몫인 그 빵을 더 먹겠다고 어머니를 기다렸다가 어머니가 식당으로 들어가시는 시간을 맞추어서 어머니의 몫을 빼앗아 먹곤 하였으니 철이 없어도 너무나도 없었고 덜된 자식이었다.내가 한국에 온 이후에는 남들이 그래도 고령의 어머니를 업고 왔다고 효자라고 칭찬을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나에게 돌려주던 그 사랑 천만분의 하나에도 보답하지 못한 죄책감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또 내가 북한에서 식량난 못지않게 힘들었던 것은 중국에서 살다가왔다는 이유로 애들이 ‘똥떼놈’이라고 놀려주면서 빼앗고 때리고 모욕하고 멸시한 것이다.너무나도 견디다 못해 국방체육구락부 권투소조에 들어 만 4년 동안 열심히 권투를 배웠다.전국 고등중학생대회, 전국 구락부생 경기대회 등 경기에도 많이 참가하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하여 그때부터는 생활에서 좀 안착이 된 듯하였다.다행스럽게도 나의 체질이 몸무게가 적게 나가고 팔이 길고 허리가 유연하여 권투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하였고 인민군 체육단을 비롯하여 전문 체육단에서 선수로 뽑아가겠다고 구락부에도 집에도 많이 찾아오곤 하였지만 나의 부모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직업적인 체육인은 되지 못했다.그 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하필이면 강원도 김화군에 위치한 최전방부대였고 그것도 경보병(한국군 특전사)에 입대하여 살인적인 훈련도 많이 받았고 고생도 엄청 많이 했다.20kg이상의 전투장구류들을 지고 하루 보통 200~300리 강행군과 천리 행군, 삼천리 행군을 비롯하여 실탄사격, 단도조법, 벽돌 까기, 격술, 밧줄타기, 매복, 습격, 지형학훈련 등 한국영화 “실미도”에서 나오는 훈련모습은 비교도 안 되는 정도로 게릴라 훈련을 하였고 남한 국군 군가 “진짜 사나이”도 배웠고 국군의 일과, 제식동작 등 국군생활과 남한의 자연지리조건, 주민들의 언어와 풍습도 다 교육받았다.그 때 즐겨 읊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데.……내 단숨에 날아 넘어야 할태백의 준령은 그 어디헤엄 쳐 건너야 할 한강의도하지점은 그 어디 나루냐!내 기어이 가야 할남녘해방의 그날을 눈앞에그려보며 나는 서있다조국의 지도 앞에...한 해 한 해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군복무의 나날들과 힘들었던 북한에서의 생활들이 희미한 기억들에 차츰차츰 잊혀가고 있지만 그 암흑의 땅-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을 비롯한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기까지의 그 과정과 나날들은 수년간이 지났지만 어제인 듯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곤 한다.“하루는 가고, 하루는 만나고 하루는 돌아온다. 3일이면 충분하니 기다리라고.”거짓 약속을 하고 고령의 어머니를 업고 평양-온성행 열차에 오른 것은 2003년 2월 10일 저녁 7시였다.열차에 겨우 오르니 발 디딜 자리가 없고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 안에서 어머니가 걱정되어 열차 뒤켠에 있는 화물칸에 찾아가서 화물원에게 우리의 도중식사로 준비했던 도시락과 돈 500원을 찔러주면서 화물칸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그런데 어머니가 화물칸에서 너무 추워하시기에 집에서부터 준비해갔던 사방 2m짜리 비닐박막과 담요로 어머니를 둘둘 말아놓으니 어머니도 괜찮다고 하시고 한결 마음이 놓였다.보통 열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갈 구간이지만 급행열차도 아니고 도중에 정전이 되다보니 약 40여 시간이 지나서야 온성군 남양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기차에서 내리니 역 보안원이 “왜 국가용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가?”고 따지면서 법을 위반했으니 벌금 천원을 내라고 하여 벌금으로 천원을 줬더니 “개인집에서 숙박하지 말고 무조건 여관에서 숙박하고 24시간 내로 용무를 끝내고 무조건 돌아가라. 그리고 앞으로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죄인 다루듯이 취급할 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칼자루 잡은 보안 원 앞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남양에 도착하여 새벽 2시 반경에 나는 아는 사람의 집을 찾아들어갔더니 이미 다른 손님이 들어있었고 집주인이 말하기를 “날이 밝으면 무조건 여관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누가 보안원에게 보고라도 하면 자기들은 먼 산골로 추방당한다.”고 하면서 나와 어머니를 반갑지 않게 맞아주었다.그런대로 그 집에서 앉은 채로 밤을 밝히고 날이 밝자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냉방인데다가 어지럽고 말이 아니었다.그래서 장마당에 나가서 땔감나무로 장작 2마대를 사놓고 어머니의 간식을 좀 해결하고는 국경경비대 초소에 가서 국경경비대 분대장을 만나서 나와 어머니가 며칠간만 중국에 가서 친척의 도움을 받고 돌아오겠으니 두만강을 건널 수 있게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돈 2만원을 내고 돌아올 때 손전지(후레쉬)와 기타 좋은 선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그래서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니 먼저 돈 2만원과 내가 손에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지금 당장 어머니를 모시고 자기네 분대가 담당한 구역을 통과해도 괜찮다고 하여 여관에 가서 어머니를 업고 그 군인의 뒤를 따라 저녁 5시경에 두만강 얼음 위를 건너 중국 도문에 도착하였다.도문에 도착하여 이미 전부터 알고 있던 형님의 친구인 조선족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여 그분의 집에서 6년 전에 헤어졌던 형님과도 만나고 형님이 중국 장춘에 있는 브로커에게 연결해주어 그 이튿날 장춘역에 가서 그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면서 기차를 타고 며칠 동안 가서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또다시 베트남 브로커에게 인계되고 캄보디아 브로커에게 인계되고 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캄보디아 수도에 있는 한국인 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매 걸음걸음이 위험이 뒤따르고 힘들고 어려운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기장 힘들었던 것이 베트남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에 도착할 때였던 것 같다.베트남에서 우리를 관리하고 있던 한국인 김사장님을 보고 오늘밤 걷는 노정이 거리가 대략 얼마나 되며 거리가 멀면 간식도 좀 준비하겠다고 하자 “노년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에 특별히 차를 대기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마음을 놓았었는데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날 밤, 초저녁부터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물 한 모금 못 먹고 온밤 걸었는데 어머니를 업은 상태에서 진흙탕에도 넘어지고 담배 밭에도, 논밭에도 넘어지면서 수백 번을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걸었는데 내가 힘이 다 빠지니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80년이상 살았으니 살만큼 살았다. 이러다가는 둘 다 죽는 다. 그러니 나를 버리고 너만 꼭 살아서 가라!” 그럴 때마다 “엄마!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왜 엄마까지 힘들게 해요? 제발 좀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 하면서 업히지 않으시겠다는 어머니를 끌어당겨 업군 하면서 캄보디아에 도착하였다.오전 10시경에 한국인 목사님이 승합차를 가지고 오셔서 맨 앞에 선 나에게 “북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는가?”고 물으시어 나는 솔직하게 “군부대 사무원을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안경너머로 나를 쏘아보면서 “군부대 사무원이면 괜찮게 살았겠는데 왜 오냐?” 하면서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다.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수백 번을 넘어지면서 온 사람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못해줄 망정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가?!그 목사님이 왜 그때 그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그날 그 목사님을 따라 교회에 도착하여 “나는 죄인이다.”라고 무조건 따라하게 하고 성경공부를 무조건 하라고 하여 나는 눈이 나빠서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큰 글자로 된 성경책과 돋보기안경을 가져다 주셨고 사도성경과 주기도문을 무조건 외우도록 하고 찬송과 율동 5가지이상 무조건 배우도록 할 때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지만 한국에 오는 것이 목적이니 울면서 겨자 먹는 격으로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다.그때 외운 사도성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성경공부가 그 후 나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도 생각되기를 우리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줌에 있어서 너무나 강요적이지 않았나, 그 방법 말고 좋은 기억 속에 남도록 다른 방법으로 유도하면서 신앙공부를 시켰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지 않을까 생각 되군 한다.물론 북한생활과 타국살이에서 성격들이 많이 이지러지고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는 이해도 되면서 감사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좌우지간 여러 가지 시련과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면서 2003년 3월 27일 드디어 그토록 소원이던 자유의 땅, 민주의 땅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대한민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쓰기에 앞서 돈 한 푼 없이 맨 주먹만 쥐고 찾아 온 우리들에게 진정한 동포애의 정을 가지고 집을 주고 정착금 주고 생계비 주고 여러 가지 의료혜택 등 많은 관심과 사랑, 혜택을 돌려주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진정으로 드리고 싶다.남한에 와서 처음 배운 말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라”라는 말이었는데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것을 받았고 받은 것에 대해 보답하지 못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다.한 탈북자 선배가 말하기를 “대한민국 정부를 진정한 어머니 품으로 대하고 있는가?! 단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과연 진심을 주고 충성하고 있는가? 가슴 아프게 자문해보게 된다고.”하였던데 정말 맞는 말이고 심금을 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된다.자유롭고 풍요로운 천국과도 같은 대한민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쓰려면 몇 달 몇 일을 써도 모자라겠기에 쓰지 못하고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이 80년대 중반에 전국 모든 세대에 벽시계와 나이롱 담요를 한 개씩 선물을 주었을 때 북한 주민 모두가 너무나도 감격에 겨워 “세상에는 영도자가 많고 많아도 어버이 수령님 같으신 분은 없다.”고 만세를 부르며 충성을 맹세했었다.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나에게 집과 승용차, 색텔레비죤(칼라TV), 냉장고, 세탁기 등 각종 전자제품과 생활용품을 마련해주고 세상에 부럼 없는 행복을 누리도록 보살펴주고 있는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런지 도저히 모르겠다.모쪼록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통일역군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면서 받기만 하지 말고 주기도 하면서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이 그 보답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속 결의를 다시금 굳게 다진다.
2011년 5월 김광혁
2011-07-04 23:07:57
출처 : 탈북자동지회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