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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등초 - 북한군

작성년도 : 2014년 82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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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초

- 북한군

 

 

봄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얼마나 지독한지 백두산 정상에서 시작해 산자락을 거치면서 뿌연 먼지를 동반할 때면 앞뒤분간조차도 어렵다. 엄혹한 자연의 실태에 방풍림과 같은 바람막이가 없으면 부식토와 씨앗은 송두리째 날아가고 농사포전은 사막처럼 메말라 버리는 곳이 바로 척박한 이 땅의 특징이다.

해만 뜨면 시작해 별이 뜨는 밤에서야 그 자태를 움츠리는 반갑지 않는 불청객, 하지만 이 천방지축도 해마다 523일이 오면 마치 정해준 순리마냥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되어버렸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고장의 서북계절풍을 두고 어떤 이들은 농본기를 알리는 전주곡이라고도 했고 어떤 토박이들은 신호탄이라고도 불렀다. 암튼 이 기간이면 농부든 직장인이든 이 땅에 모여 사는 모두가 떨쳐나서야했다.

부지깽이도 뛰어야 하는 천하지대본의 시기라 노동당은 이 적기만 되면 발등에 불이라도 달린 것처럼 사람들을 마소와 같이 몰아붙였다. 남녀노소는 물론 어린이든 사병이든 그 누구도 가리지 않았다. 제외대상이라면 오직 하나 당, 정권, 군부, (안전, 보위)기관에 종사하는 노동당간부들과 그 추종세력들뿐이었다.

이 날도 나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삽을 멘 어깨를 들썩거리며 포전으로 향했다. 집 쌀독은 거미줄이 쓸어 초근목피로 끼니를 에우고 있는지도 벌써 보름을 넘었다. 태어나서 부터 시작된 식의주문제해결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졌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의욕은 떨어 질대로 떨어졌다.

여기저기에서 농부의 근본을 어기고 땅 속에 파묻힌 종자는 물론 먹을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집어가는 판이었다. 심지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인육을 먹고 파는 기이한 일까지 자행되었다. 갈수록 깊어가는 가난의 대물림에 기아는 우리들의 생존권을 시시각각으로 위협했다.

이대로 굶어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가장인 나의 어깨를 그대로 짓눌렀다. 어떤 뾰족한 수든, 네모난 수든 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난 집에 기름을 붓 듯 내 앞으로는 화가 쌍이 되어 덮쳐들었다.

오전 10시 경, 농부라면 또는 직장인이라면 너나없이 벅적이는 작업반포전으로 소위 초급지휘성원이며 유급이라는 반장이 나타났다. 그는 상기된 벌건 얼굴을 흥분으로 채우며 나를 보고 담당경찰관이 찾는다는 것이었다.

반장의 옆에는 겉보기에도 아주 투박해 보이는 북한군소좌가 뒤짐을 쥐고 건방을 떨고 있었다. 질근질근 껌을 씹으며 군 장성들이 입고 다니는 색다른 외투에 붙은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응시하는 그의 눈초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매서웠다. 주변 환경과 너무나 대조적인 그의 행동과 자세는 상대를 무시하는 전형적인 폭력배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시켰다.

반장의 때 아닌 출몰과 괴이한 소좌의 행동으로 이상한 혹성에 불시착한 것처럼 나의 마음은 불안하기 시작했다. 젊은 제대군인들로 조직된 노동자규찰대원 3명도 그와 함께 동행 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포전을 나섰다. 이 동네에서만큼은 법기관의 하수인들로서 절대 권력이라고 자처하는 규찰대원들까지 대동한 마당이어 사태의 엄중성파악을 위해서는 그들을 따라가야 했다. 착잡한 심정은 온 몸을 향해 긴장과 공포를 몰고 왔다.

그들은 병아리를 품은 암탉처럼 나를 에어 싸고 담당보안원(경찰)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당에는 소련산 '우아즈'라고 하는 지프형 차가 굶주린 호랑이마냥 입을 벌리고 서있었다. 차의 번호는 군부대호칭이었다.

반장이 지적과는 달리 담당경찰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차 조수석에서 사복을 입은 40대의 사내가 내 앞으로 묵직한 몸집을 들어내며 다가왔다. 그는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입에 개 거품을 물며 신 것 같은 동작으로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내들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돌발 상황이었다. 수갑을 보는 순간 눈앞은 아찔했다. 생각과 감정, 경직에 가까웠던 몸은 두려움으로 완전히 얼어붙었고 겉모습만 단지 인간을 형상하고 있었다. 졸지에 식은땀이 등골을 향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나를 연행했던 소좌와 또 다른 북한군대위가 양팔을 숙련된 동작으로 저지시켰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가 보태지 않고 전문훈련을 받은 프로에 가까웠다. 그 치밀함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 자신도 놀랐다. 역대군대를 구별 짓는 세 가지 요소인 훈련, 기강, 사기가 박진감 넘치는 그들의 기질에 그대로 묻어있었다. 특히 사기 하나는 호랑이를 잡은 포수마냥 기고만장했다.

당신을 불법월경(밀수) 혐의로 체포한다.”

결국 터졌다. 법기관의 체포, 숙명처럼 이 몸을 휘감아 오던 쇠사슬이었다. 바라지 않던 안타까운 현실에 나의 머리는 이미 정상과 광기의 구분조차 모호해졌다. 하지만 벌레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다. 신상의 위협에 동물적인 감각이 절로 튀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나에겐 죄가 없습니다.”

개소리 치갔어? 빌어먹을 자식!!!!”

볼 사나운 광대뼈의 사복을 입은 사내가 수갑으로 뺨을 후려갈겼다. 정신, 육체적 긴장의 방심으로부터 나는 미처 그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육박의 총창으로 돌변한 수갑의 이가 오른쪽 이마에서 쌀알 크기의 살점을 앗아갔다. 때를 맞추어 뒤에 포진되어있던 장교 두 명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덮치듯 뒷무릎을 군화발로 꺾었다.

! 000들아!!!”

나는 발버둥을 쳤다.

! 부과장!! 그 새끼의 척추를 분질러 버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알았습니다. 부장동지!!”

약삭빠른 소좌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직면한 인간의 최후발악도 만만치는 않았다.

우리공화국법이 죽이지 못해 살려주었더니 개 같은 놈이 그 새 많이 자랐는데? 인간이기를 포기한 새끼!!! 아직도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겠는가?”

부장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잠시 당황했던 소좌와 대위가 배와 허리, 팔과 무릎, 얼굴과 목을 비롯하여 드러난 모든 육체를 향해 살인적인 공격을 들이댔다. 스피드와 힘을 동반한 그 파워에는 인정사정이 따로 없었다.

순식간에 코와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내 뿜었다. 이어 입술과 볼을 비롯한 육부의 여기저기가 고무풍선처럼 불어났다. 샌드백에 가까운 무방비의 육체는 내남없이 파김치처럼 늘어졌다.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 상황에 안개가 낀 듯 희뿌연 해지는 시야로 수천, 수만 개의 불꽃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왼쪽에서 담금질을 하던 멀쩡한 허우대의 대위가 권총손잡이로 끝내 나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던 것이다.

그러게 왜 까불고 있어? 우리가 왼뺨을 치면 조용히 알아서 오른뺨을 대란 말이야!! 이 미난(우둔한)자식아!!”

한계의 바닥을 드러내는 무의식 속에 쟁쟁히 들려오는 부장의 목소리였다. 먼지가 자욱한 담당경찰관의 집무실마당은 피와 부러진 이, 살점으로 얼룩졌고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한 30대 청춘의 육체는 넋을 잃고 나무토막처럼 넘어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차가 두만강연안을 따라 무산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의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주지 않았다. 신기했다. 15분전만 해도 젊음으로 의기양양했던 그 기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온 사지가 통증으로 벅적지근하고 그 시간대에도 뜨거운 선지피는 뒷머리에서 풀떡, 풀떡 거리며 등을 향해 계속 흘러내려왔다. 그나마 코피와 살점이 떨어졌던 이마에서 피는 멈췄다. 하지만 속이 메스꺼웠고 헛구역질에 어지러움과 신음소리는 두툼해진 입술과 부러진 이 사이로 줄줄이 새어나왔다.

정신을 차렸어!! 짐승 같은 새끼! 너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아까처럼 또 한 번 반항을 해 봐!! 이번에 가차 없이 검정콩알로 네놈의 대갈통을 부셔주지! 너 같은 건 이 땅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알겠어?”

조수석에 앉은 부장이 계속 뇌까렸다. 그럴수록 나의 심장은 매 맞은 아픔보다 그들에게 벌레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수치심에 더 괴로웠다. 수갑이라는 물리적 기재에 흐르는 피마저 방치해야하는 속수무책이 가득이나 쓰린 가슴에 송곳질을 했다.

차는 계속 달렸다. 타인에 대한 고통 따윈 아랑곳도 없이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로 먼지를 날리며 기염을 토했다. 야속한 구동력의 정상운행은 순종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이들의 대변인처럼 느껴졌다.

구름 몇 점 없이 청청해져버린 하늘, 그 아래로 첩첩히 놓인 등판과 골짜기는 두만강연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더 한층 산산한 녹색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4월 말이라 조금만 있으면 이곳도 온갖 생명들의 숨 쉬는 보금자리로 전변될 것이다.

자연의 색다른 조화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나의 머리에 별의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읍에서 40여리 떨어진 아찔한 벼랑길에 이르렀을 때는 타이어에 공기구멍이 뚫릴 것을 바랬다. 그로 인해 차는 전복되고 총을 쥔 법관들은 다 뒈지거나 병신이 되고 혼자 도망갈 수 있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어느 한 외국영화의 탈출 장면을 그려보며 천지신명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우리고장에서 무산까지는 180리 길이다. 워낙 생산품이 없어 철도가 들어오지 않은 관계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철광석기지인 무산을 통해 이 육로로 가능했던 이곳은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북부산악지대였다.

전후 50년대 말에 북한의 독재자는 이런 곳들을 지배하기 위해 명령 158호를 발표했다. 명령은 전쟁의 상처를 가장 많이 입은 황해도와 강원도, 평안도에서 출신성분이 불결한 사람들을 이주민으로 간주하고 중국공산당을 하늘처럼 믿으며 북부산간지대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대신 북쪽지역에서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남쪽으로 파견했다.

시행착오적인 민족의 대이동이 잘못됨을 느꼈을 때는 이미 일은 그릇 친 뒤끝이었다. 마오쩌둥이 죽고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들어가 적국인 대한민국과 국교정상화를 맺었던 것이다. 마음대로 통제하고 감시하려던 구역이 그들의 탈출구가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 통로로 불법 월경과 자유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원래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정권은 그 형태와 역할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그 외 다른 정권이란 이 지구촌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고대노예소유자사회로부터 이어진 이 명맥을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민족분단의 기구한 역사의 와중에 소련군을 등에 업고 절묘하게 이용한 북한의 독재자는 사회주의 고유의 11당제의 원칙에 근거하여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을 와해, 흡수의 비열한 방법으로 말살해버리고는 집권당을 창건하고 핵심계급과 기본계급, 적대계급이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악랄한 노선정책을 강구했다. 여기에 전쟁회피는 그 정책의 명분을 세우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친일파와 미군, 국군의 방조자였던 치안대가담자들, 그리고 당 정책을 비난한 시비꾼들로서 반동과 역적의 오명을 쓰고 숙청된 일가친척들, 월남도주자, 국군 및 북한군포로들, 또한 법적제재를 받은 전과자들이 적대계급의 주되는 대상이었다.

인구밀도의 10%밖에 안 되는 핵심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대상으로 적대계급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가운데 놓인 기본계급은 자기들의 동조대상이었다. 따라서 절대다수에 속하는 기본계급을 어떻게 쟁취하는가에 따라 자기운명이 결정된다고 북한의 독재자는 판단했다.

자산계급에 외국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집안은 겨우 적대계급을 면할 수 있었지만 기본계급에서 핵심계급으로 되긴 불가능했다. 그 깊이를 알자면 냉혹한 현실체험과 삶의 지혜가 나로서는 짧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사 과거의 역적질이 어두웠다고 밝은 21세의 오늘에도 어두워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도 허무한 것이 아닌가?

당사자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는 치욕의 굴레는 누구보아도 상식 밖의 일이었다.

무산은 인접 군에 해당되지만 그렇다고 일반주민들이 마음대로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앞길에 네 개의 국경검문소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때 없이 지역 분주소(파출소)에서 이동식검문을 차려놓으면 주민들의 수족은 더 불안해졌다.

노동당간부들에게는 어께에 폼만 넣을 호화호식의 법적공간일지는 몰라도 지역이동자체가 법으로 금지된 일반주민에게는 늘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곳이 바로 국경검문소다. 신분증 외에 증명서를 더 소지해야 통과할 수 있는 외나무다리여서 그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그들의 선택여하에 따라 고통과 불행의 그래프가 달라졌다.

단 한 가지 다른 방법이라면 검문을 담당한 검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었다. 뇌물도 중국산 담배 한 통으로 일반주민의 생활비 한 달분에 해당되는 값어치였다. 1킬로그램하고도 맞먹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어 당사자들은 모두가 감히 그 선택을 겁냈다. 그것도 한 개의 초소가 아니라 4, 심지어는 5개까지 될 때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만큼이나 힘든 곳이 바로 북한 전역에 거미줄처럼 포진되어있는 검문소였다.

이런 관계로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혁명의 수도이며 북한의 심장인 평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수많은 기본계급과 적대계급출신들이 수십 년을 살면서 제 나라의 수도를 밟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평양뿐만 아니라 전방과 해안, 국경지역에 발톱까지 무장한 100만의 대군이 일반주민들의 이동을 막아섰다. 이 땅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었다.

삼엄한 이 검문소를 내가 탄 차는 이상하게 무사통과했다. 조수석에 앉은 부장이 빨간 증명서를 보이면 야무진 거수경례까지 취하며 검열원들이 올려주는 차단 봉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무산까지 네 개의 검문소에 설치된 차단 봉들 모두가 하나와 같이 일사불란했다. 우리에게 맹수처럼 달려들던 그들의 눈빛은 역겨울 정도였다. 이상한 검열원들의 행동은 나의 궁금증을 더해만 주었다.

저 빨간 증명서가 과연 무엇이기에 일반인은 반드시 지참해야 할 신분증도 필요 없단 말인가?

부장동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쉼 없이 달리던 차에서 하사계급의 운전기사가 즐비하게 늘어선 10층 이내의 단층짜리 아파트건물들로 도로주변을 장식한 읍 시가지를 통과하며 입을 열었다. 차창너머로는 아지랑이에서 피어난 꽃망울들이 살구나무의 가지들마다 한 가득씩 매달려 서로마다 제 아름다움을 자랑하려 키 돋음 하고 있었다.

비밀아지트로!!”

북한에서 만든 '대덕산'이라는 권연을 깊숙이 빨며 지그시 눈을 감았던 부장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마치 그의 자세와 태도는 누구보아도 무소불위를 지닌 강자에게서만 나오는 거만함이었다.

무산군 논급에 위치한 그들의 비밀아지트는 읍 중심지인 역전에서 5분 거리였다. 줄을 맞춘 3층짜리 건물가운데서도 마지막 호동의 맨 위층에 위치한 아지트는 얼핏 보아 일반 주민이 사는 집과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단지 특징이라면 현관문의 5미터거리에서부터 콩기름으로 마늘을 태우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주린 창자를 허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의 풍경은 허기진 나를 미칠 지경으로 몰아갔다. 절반 먹다버린 두부 탕과 쌀밥 그릇들이 두 개의 밥상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특히 눈이 뒤집힐 정도로 즐비한 반찬들은 산나물들과 육류, 고급어족들로 만든 값비싼 요리들이었다.

양반관료들만 먹던 그 옛날의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나에게 있어 이런 음식문화는 30년 동안을 살면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매 맞은 어혈보다 참기 어려운 군침이 위를 자극했다.

내가 더 놀란 것은 나라의 법관이라고 자처하는 7명이의 장교들이 백주대낮부터 술에 취해있는 것이었다. 개기름에 번들거리는 그들의 이마에는 너털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지트와 멀지 않는 재래시장에서는 지금 이 시각도 수백, 수천의 백성들과 거지들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상대적이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반백년을 살면서 시키는 일만 강요당하다가 3년 전에 굶어 돌아가셨다. 그때 운명의 목전 앞에 비낀 아버지의 모습은 노련한 백정의 솜씨를 발휘해 살이 발리어 몇 근 발라내기 힘들 정도로 야윈 깡마른 체구였다. 보태지 않고 뼈에 가죽만 씌어놓은 처참한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집만 아니라 동네의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아사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발생했다. 이런 엄혹한 시기를 외면하는 인간들, 특히 나라의 주인들라고 자처하는 그들의 존재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어리석은 나 자신을 깨우쳐 주는 듯 시간이 지날 수록 충격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지트의 목적은 중국을 활동무대로 이 지역에서 자기들의 수사망에 걸린 사건대상자들을 체포, 구금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복탈피를 위한 위장은 물론 필요하다면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해외첩보기관의 연락 장소, 북한군보위사령부의 작전반경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독재자가 죽자 그의 아들은 선군정치라는 이상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을 알리는 장엄한 서곡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 바로 북한군총정치국장이 섰고 북한군보위사령부가 척후병으로 등장했다.

새 독재자의 위임으로 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북한군보위사령부는 북한전역에 걸쳐 정계, 사회계, 학계, 법계, 예술계, 스포츠계를 비롯한 모든 조직들과 행정기관들을 한 손아귀에 장악하였다.

그들에 의해 합법적 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 사형과 같은 포악무도한 행위들이 도처에서 이어졌다. 일반주민들에게 우쭐거리던 안전원(경찰관)들과 보위부(국정원)원들도 꼼짝을 못했다.

오직 그들의 눈만 보석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은 유리알이었다. 벽창호와 같은 그들의 고집에 많은 사람들이 간첩, 역적, 반역자로 분류되어 처형되거나 비밀리에 사라졌다. 옆에서 발생되는 몇 백만이 아사는 그들에게 한갓 평범한 일상이었을 뿐이다.

1998년까지 기록만 보더라도 겁에 질린 국가안전보위부장이 자결하였고 사회안전부[경찰청]총정치국장인 최문덕이가 그들의 손에 걸려 처형되었다. 보위부장의 옆집에 살던 최룡해는 다행이 좌천되었고 노동당 농업비서인 서관히는 극형에 속하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은 황해제철소가 있는 송림 시와 남포시를 숙대 밭으로 만들었으며 내가 살던 양강도의 도소재지인 혜산에도 몇 개월 동안이나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많은 인사들과 기술자들, 일반인들을 체포했다. 하루에 몇 명씩을 공개처형하는 야만적인 행위도 그들은 서슴지 않았다. 암튼 새 독재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 둘씩 제거되었다.

북한의 독재자는 자기의 기반구축이 끝나자 1998831, 대포동1호라는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고난의 행군을 종결했다. 외부세계에는 인공지구위성이라고 떠벌렸다.

결국 고난의 행군은 자기가 시작해서 지가 끝낸 여정이었다. 그에게 있어 백성들의 기아와 굶주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고난의 행군은 곧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숙청작업일 따름이었다.

모든 것의 정리에 강한 자신감을 가진 북한의 독재자는 20005, 드디어 러시아방문길에 올랐고 같은 해 6월에는 대한민국대통령을 평양에 불러들여 정상회담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외교전으로 돌입한 그의 행동에 전 세계가 놀랐다. 6년간의 두문불출로 운둔했던 그의 이미지가 부각되었던 것이다. 내가 잡힌 날로부터 보름 안팎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흑백의 전모를 전혀 알 수 없는 나 같은 농부는 결국 그들의 기분에 걸맞은 주안상의 밑반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독안의 쥐 신세의 가련한 삶에 그 어떤 말로 변명할 것인가?

생각도 잠시 후, 아지트의 출입문을 향해 맨 마지막으로 들어 온 부장을 우러러보며 주정뱅이로만 보였던 방안의 주인들이 매사에 남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꾼들처럼 하나와 같이 일어나 굽실거렸다. 그 모습은 아첨으로 일관되거나 아니면 서로 간의 믿음으로 확립된 것처럼 나를 아이러니하게 만들었다.

이 새끼는 굶어죽어도 되니까 점심을 먼저 한 당신들이 차에 억류시키고 좀 감시하게나. 뭘 좀 먹어야 다시 길을 떠나지?”

부장의 명령에 의해 결국 한갓 그림의 떡으로 되어버린 아까운 음식들을 뒤로 하며 나는 새로운 법관들에 의해 차체로 끌려갔다. 40분정도 지나 부장을 비롯한 일행은 제가끔 이를 쑤시며 나타났고 차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쇳돌광산을 뒤로 하며 신참검문소와 고무산검문소를 지난 차는 어느덧 철의 기지인 청진을 거쳐 도자기생산지로 유명한 00에 도착한 것은 5시경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읍에서 동해바다 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그 곳은 북한군공군사령부 0사단 보위부였다. 원래 공군 0사단은 0000리에 있었다. 그러던 0사단이 차광수비행군관학교의 이동과 함께 재빠르게 이곳을 차지했다.

보위부는 사단본부로 향하는 200미터 지점에 있었다.

철조망을 두른 삼엄한 담이 건물을 지켜섰다.

오늘 우리 고장에서 여기까지 달려 온 거리는 도합 700여리였다. 나로서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번개처럼 지나간 길고 험한 먼길이었다. 평상시대로라면 열차의 정상운행이 따라주어도 최소한 12일이라는 시간이 걸려야 했다. 한 시간에 40킬로씩 달려 7시간 만에 도착해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반탐과 <첩보>사무실에 끌려들어갔다. 하지만 수 백리길을 달려 온 피멍에 멍든 장딴지와 허벅지의 통증은 걸음마를 더디게 했다. 반대로 부장을 비롯한 일행 모두의 얼굴에는 임무완성에 대한 감격으로 들떠있었다.

이 새끼 무릎 꿇지 못하겠어?”

사무실에 들어서자 어안이 벙벙해 앞뒤분간을 못한 나를 향해 소좌가 윽박질렀다. 그 서슬 푸름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질반질한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주저 없이 엎드렸다. 그러나 지친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몸의 균형을 좀처럼 잡기 어려웠다.

참다못해 지탱 점을 향해 손이 바닥으로 갔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처음부터 나의 행동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눈만 도사리던 소좌가 오른쪽 구석에 세워놓았던 32미리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수갑에 갇힌 왼쪽 손을 향해 내리찍었다.

이 새끼 아직 정신이 덜 들었구나!!”

아찔한 허상과 나로서도 알 수 없는 괴상한 비명이 목구멍으로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더 이상 그들의 욕설은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멀쩡하던 왼 손 검지가 골절된 뒤끝이었다.

온 사지가 마비로 떨어있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이가 손뼉처럼 딱, 딱 소리까지 내며 마주쳤다.

손톱은 빠지고 장맛비에 뚫린 방파제처럼 강하게 뿜은 선지피의 얼룩에 바닥의 여기저기가 지저분했다.

그들이 청소용 밀대로 대충 닦아냈던 것이었다.

아픔도 잠시 후, 보이지 않던 부장이 북한군 상좌의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동무들!!! 이젠 좀 살살 하라우!! 사무실에서까지 이러면 되나?”

그의 갑작스런 인간취급에 말라져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통의 한계에서 미세하게 찾아 온 한 조각의 동정이 나의 감정을 이상한 코너로 몰아갔던 것이다.

너 이곳에 왜 왔는지 알지?”

부장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계속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비법월경으로 중국에 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가족은 물론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담당경찰이나 보위부원들이라면 몰라도 이들의 권세를 이 나라 사람치고 모르는 봐는 아니었지만 한갓 감자 농사나 짓는 농부의 체포를 위해 내 월급의 몇 년 치에 해당하는 기름까지 태우며 요란스러운 연행을 강행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전광석화 같은 체포공작은 나의 갈피를 흐리게 했고 자기 굴을 잃어버린 겨울오소리처럼 멀쩡하던 인간을 순간에 바보로 만들지 않았는가?

부장이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나를 걸상에 앉힌 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성철이를 모르는가?”

그랬었다. 이유는 박성철이었다. 그는 나와 5개월 전에 중국으로 비법 월경한 인물이다. 그때 길림 시에 있는 그의 친척집으로 갔었다. 헌데 문제는 노자가 없어 조선족자치주인 연길에서 한국인 유목사가 운영하는 교회에 들어가 그의 설교를 듣고 중국 돈 70위안을 받았던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박성철의 이름에 정신이 다 번쩍 들었다. 그의 사진들을 최종 확인하면서 나의 머리는 다시 텅 비어버리는 것이었다. 3개월 전에 체포된 20대의 박성철은 그들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8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사단부대의 공군중위였던 그는 공군대학시절의 4년을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지혜와 학식이 풍부했고 중국연길교회의 여신자들도 부러워할 만큼 헌칠한 키에 탤런트 뺨칠 정도의 외모를 가졌다. 그런 그가 나에게는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박성철이가 그들의 갖은 악행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나와의 범행을 자백했다.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서 격렬한 존경심의 최고상징인 의지와 담력이 그에게는 부족했던 것이다.

사진을 거두고 몇 백 장에 달하는 그의 진술서를 오른 손에 잡으며 부장은 자기소개부터 했다.

난 이곳 2부장이다.(북한군보위부는 일반사건담당을 1부가, 정치범대상자는 2부라는 반탐기관이 담당했다. 거기에 3, 4, 그리고 5부까지 이어졌다.) 난 너에게 용의자와 취급자의 관계를 떠나 사내 대 사내로서 투철하게 말하고 싶다.”

일단 부장은 자기의 증명서부터 보여주었다.

검문소들을 무사통과했던 바로 그 의문의 빨간 증명서!!! 부장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물음표의 존재감을 강한 자신감에 넘쳐 펼쳐보였다. 그 증명서를 보는 순간, 심장의 박동은 터질 것만 같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사원이라고 쓴 빨간 뚜껑의 표지가 30대 청춘의 빛나는 눈동자를 놀래었다. 다음 장은 김일성의 초상이 붉은 당기의 정중앙에 위치했고 그 옆 페이지에 그의 사진과 이름, 성별, 출생지 및 출생년도가 표기되었다. 또한 이 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사원임을 증명함라는 글발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실어증에 걸린 환자처럼 멍한 나를 향해 몇 장인지 알 수 없게 부랴부랴 폐이지를 번지던 부장이 마지막 장을 보여주었다.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었다.

“1, 이 증명서를 휴대한 동지는 우리나라의 모든 비행기, 선박, 기차 등에 무임승차할 수 있다.”

다음의 글들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이조봉건시대에 있었다던 암행어사가 21세기의 현실 형으로 나타났다는 그 사실에 눈앞이 캄캄했던 것이다. 부장은 계속했다.

난 지금까지 200여개의 사건을 처리했다. 그래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는 자랑이 아니라 내 손에 걸리면 일단 입을 열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소리다.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대답은 모기소리였다. 왜냐하면 그의 공적과 위협에 입안은 바짝바짝 말라들었던 것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역시 나를 다루고 있는 그 솜씨로 보나 박성철의 두툼한 진술서들을 보나 그는 책임성이 높은 수사관이었고 실무도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앞에서 간죽거리는 그 웃음과 행동이 제발 겉과 속이 다른 검은 마음에서 나오지 않길 어리석게 바랬다.

200여개의 사건, 그것은 200명의 사람들이 이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귀신도 몰래 정치범으로 감금되었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얘기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공화국영웅이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특출한 공적이나 위훈을 세운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명예였다. 그래서 그 칭호에 대한 하사는 반드시 북한독재자가 진행했다. 어려서부터 받은 세뇌에 기초해서라도 6.25때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육탄이 되어 영웅으로 받들렸던 이수복이나 강호영이와 같은 인간들이 나의 머리에는 전부였다. 부장처럼 사람 잡이에서 위훈을 세워 영웅이 되었다는 것은 실로 상상 밖의 일이었다.

결국 내 앞에 서있는 수사관은 내가 상대할 능력조차 없는 거인 중의 거인이었다. 36계의 줄행랑을 놓아야 할 마당에 빼도 박도 못할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가증스러운 이 손아귀에서 파리 목숨에 불과한 나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도 잠시 부장은 입에 거품을 물며 대덕산 담배 한 가치를 꺼내 한 모금 깊숙이 빨았다.

박성철이를 취급하는 과정에 우리는 너의 대한 요해를 다 끝냈다. 우리가 본 네 놈은 똑똑한 놈이다. 8년의 군사복무를 하면서 기본계급출신 따위가 감히 우리와 같은 핵심계급이 되어보려고 무지 애를 썼더군. 하지만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랬다고 너무 설쳐댔어. 결과 우리가 죽이지 못해 살려 놓은 적대계급으로 전락되었거든. 너의 운명은 현재 내가 피우고 있는 이 담배 한 가치 보다 못해!! 알겠는가?”

부장은 피우던 권연을 추켜들며 회유절반, 위협절반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 테니까 조용한 방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요구하는 건 단 하나, 박성철이와 만난 그 시각부터 헤어진 그날까지 910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11초도 빼놓지 말고 영화를 보듯 선명하게 진술하는 것이다. 알겠는가?”

텅 비었다가 엉킨 전기회로처럼 복잡한 나의 머리를 향해 그는 더 이상의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부과장!! 이 자를 끌고 가!!”

부과장인 소좌에 의해 끌려간 감방은 2평도 되지 않는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출입문은 3중의 철문이었고 A4크기의 철근으로 무장한 뙤창문하나가 북쪽을 향해 달려있었다.

냉기와 습기를 동반한 썩은 피비린내가 방안을 진동했다. 그 누군가의 핏자국들이 곰팡이서린 벽체의 곳곳에 깊숙이 스며있었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또 다른 공포가 느껴졌다.

그나마 유치장과 달리 감시하는 간수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때를 만난 듯 긴장감은 사라지고 사지에서 달려드는 통증과 오한으로 몸은 오그라들고 눈의 실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인간의 한계를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오장육부가 뼈 없는 살처럼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 벌써 간고한 고통의 하루해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의 나날들이 겹칠수록 이 땅에서의 나에 대한 배신감은 더해만 갔다. 진퇴양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지옥의 불가마가 따로 없었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나를 구원해줄 따뜻한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는 티켓판매장소와 같은 이 사지 판에서 정신 줄을 놓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앉아서 눈물이나 짜고 괴로워하고 모대기고,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혹한 학대일 뿐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잔임 함과 노련함으로 체질화된 수사관과 같은 인간들의 공격만큼이나 무서운 대상은 사실, 나 자신의 나약함이었다.

나약해진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지나간 과거의 귀중함에서 오늘의 나를 가다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실 철없던 초등학교, 중학교시절에는 어떻게 하나 공부라도 잘해서 간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였건만 출신성분의 격차로 다 가게 되었던 영재학교에서 밀려나고 대학까지 포기했다. 군복무시절에는 엄청난 뇌물을 들여 장교학교로 진출하였지만 큰 뜻은 고사하고 되려 기본계급에서 적대계급으로 밀려났다.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지난날들의 괴롭힘에 시간은 방안을 향해 캄캄한 어둠만 선사했다. 다행히 공기구멍인 뙤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흘러들었다. 신비로움에 가까운 그 빛을 따라 망가진 몸을 추스르며 나는 기어가기 시작했다. 1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직일관실(당직실) 창문에서 뜻밖에도 촛불이 가물거렸다.

우리 백성들은 정전의 탈피로부터 모두가 디젤등잔을 사용했다. 조금 더 어려운 집들은 그것마저 없어 소나무옹이로 방안을 밝히던가 아니면 아예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초 한 대의 값이 백성들에게는 하루인건비와 같았기에 누구도 감히 그것을 살 엄두를 못 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는 그 곳에 권총을 휴대한 담당당직관이 술잔을 기울고 있었다. 담배까지 꼬나든 그의 얼굴엔 팔자가 늘어졌고 환희는 그칠 새 없었다. 그의 취중에 제 몸을 불태우는 촛불의 운명이 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야속하기도 했다.

우연 중 두 배, 세 배의 크기로 점점 나의 눈을 부각시켜주는 촛불, 초점을 향해 다가오는 그 불빛의 운명이 문득 나를 깨우쳤다. 만약 저 촛불을 바람 부는 등판에 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순간에 꺼져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인간 밑바닥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새기면 새길수록 머릿속의 정리는 오직 하나, 강도 적 논리에 의해 이중적인 잣대에서 규정된 적대계급이나 기본계급출신들은 이 땅에서 언제나 바람 부는 등판에 세워진 촛불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2부장의 말대로 왼뺨을 치면 오른 뺨을 내대야 하고 살점이 뜯겨도 머리통이 박살나고 이가 부서지고, 손가락이 골절되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으며 그의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담배 한 가치 보다 못한 최하층의 싸구려가 바로 우리들의 운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등초의 운명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부류였다. 절대 복종이나 순종으로 아버지, 어머니처럼 굶어죽어야 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버둥거리면 감방을 두 어께에 멍에처럼 걸머쥐는 것이었다. 특히 나와 같은 부류는 죽을 때까지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언제나 위험을 감수해야만하였다.

지난 30여년을 돌아보는 내 조국의 현실은 이처럼 냉담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 그 품에서 사랑보다 먼저 조국을 알았고 배고픈 소년의 설움보다 미래가 없는 청년의 슬픔을 더 뼈아프게 심장으로 새긴 내가 아닌가?

때로는 저 멀리 백두산 정상을 바라보며 고구려의 아득한 옛 판도를 자랑높이 바라보기도 하였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총검의 숲을 헤치며 차디찬 두만강의 살얼음판에 망국의 뜨거운 눈물을 뿌리기도 하였던 이곳, 그곳은 바로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하는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이었고 어머니의 품이자 또한 조국이었다. 그러기에 내 그 품을 떠나 생존권을 위해 사선의 언덕에 나설 때면 다 찌그려져가는 널빤지문가에서 눈물지시며 손 저어 바래주던 앙상한 어머님의 주름 깊은 얼굴은 독재자에 의해 짓밟힌 내 조국의 슬픈 모습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은 우리 등초들에게 있어 진정한 조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핏자국이 역력한 콘크리트벽체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한 치 앞도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의 두려움을 가시려했다. 저 멀리 관모봉정상으로는 벌써 반병신이나 다름없는 나의 얻어터진 피부와 골격을 향해 새벽의 찬 공기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맺는말

이 스토리는 내가 직접 겪은 사연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그로부터 몇년 후, 천신만고 끝에 꿈결에도 그리운 대한민국의 품으로 이 몸은 안길 수 있었다. 이 땅에 안겨서야 비로써 나는 지난 30여 년을 북한의 더러운 시궁창에서 헤매던 그 삶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좋은 황금시절만 맛볼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이 땅에 정착한지도 10여 년이 흘러갔다. 이 기간 동안 태극기를 따라 변함없이 한길만을 달려 온 나였다. 대한민국의 가는 길이 진정으로 민족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길이었고 사람들을 가장 참된 길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그 어떤 동요나 두려움도 없이 오직 한 우물만 파며 열심히 살아왔다. 결과적으로 오늘은 마음의 부자가 되었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고급기능기술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북쪽에서의 30년 세월과 남쪽에서의 14년의 세월은 결국 극과 극의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우리등초들에게 있어 이 땅의 남쪽은 지켜야 할 조국이었으며 북쪽은 반드시 찾아야 할 조국으로 되었다.

조국의 귀중함을 실생활로써 느꼈기에 태극기를 따라는 길에 있어 나는 믿음이 아니라 설사 역적의 오명을 쓴대도 따를 것이고 두 눈이 먼대도 지팡이를 짚어서라도 따를 것이고 땅 속에 묻힌대도 넋이라도 따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오늘도 고통과 불행을 강요당하는 북한의 모든 천만 등초들의 가슴 속에 간직된 필승의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201412월 북한군

 

 

2015-02-08 22:38:13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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