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북녘 땅에 계시는 부모님을 그리며 - 탁은혁 > 탈북민 수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민 수기

머나먼 북녘 땅에 계시는 부모님을 그리며 - 탁은혁

작성년도 : 2003년 631 0 0
  • - 별점 : 평점
  • - [ 0| 참여 0명 ]

본문

머나먼 북녘 땅에 계시는 부모님을 그리며

- 탁은혁

 

 

학창시절에 나는 종종 TV에서 이산가족의 아픔과 슬픔의 상봉장면들을 본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보면서 나와는 거리가 먼 일로 남의 나라,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의 일도 다른 나라,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집안의 일로 되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 가정은 왜,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이산가족이 되었으며 고통과 아픔의 도마 우에 올라서게 된 것인가...... 결국에 와서는 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나 자신도 오늘까지 내가 무엇을 잘 못했는지 알 수 없다. 결코 나는 나의 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꼭 누군가의 음모, 사탄의 비열한 계책에 말려들었다고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나 자신이 분단된 이 나라가 낳은 사생아이고 우리 집안은 갈라진 민족이 만든 오늘의 이산가족임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어려서 비행기소리를 자장가 소리처럼 듣고 자랐다. 군인들의 총격술과 군가는 동심과 유년시절의 한 부분이었고 비행훈련이 시작되면 아찔한 하늘을 바라보며 남편들의 행운을 빌던 비행사택 새색시들과 아줌마들의 겁에 질린 표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다.

남들이 먹어보지 못하는 남방과일들과 초콜렛을 들고 아이들 앞에서 뽐내던 비행사 아들의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반대로 우리 어머니는 항상 힘들게 보내셨다.

 

자식들의 학교 걱정, 집안 걱정, 남편 걱정으로. 언제나 어머니의 두 손은 나무를 패다가 물집을 잡혀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서툰 망치질에 거멓게 상처들이 자리잡곤 했다. 그러나 한번도 힘든 기색, 아픈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신 어머니셨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인민학교(남한의 초등학교에 해당. 최근에 소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함) 체조시간에 우리들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행훈련을 하던 미그기 한 대가 방향을 잃고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길 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비행기 동체에서는 새까만 연기가 터져 나왔고 기우뚱거리는 비행기는 아무렇게나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그때 두 개의 하얀 낙하산이 마치 아카시아 꽃이 가지에서 떨어져 바람에 날리듯 푸른 하늘에 뿌려졌다. 비행기는 그대로 학교 맞은 켠 산에서 화산이 치솟듯 ""하고 터졌고 아이들은 꿈이라도 꾼 듯 신이나서 주절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벌써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낙하산이 떨어진 그곳으로 달음박질쳤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부대 구급차가 길다란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쳤다. 그때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큰 부상을 당하셨지만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조수인 김형석 비행사는 자살이라는 치욕을 남기고 숨졌다. 사람보다 비행기를 더 우선시 하는 북한사회에서 "탈출하라"는 조종실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살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벌써 기울어진 상황에서 아버지와 동료는 낙하산으로 탈출했었다.

 

하지만 북한 비행사들에게 있어서 금보다 비싼 비행기를 목숨 바쳐 지키지 못한 것은 아무리 하여도 정당화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고 한 다리가 부러져 나간 김형석 비행사는 그날이 마지막 비행날 임을 스스로 느끼고 권총으로 자살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살이라는 치욕스러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순간까지 김일성 초상화를 두 손에 꼭 쥐고 있은 점을 치하해 사건을 무마해버렸다.

 

오히려 아버지는 그 잘난 김일성의 초상화 때문에 덕을 본 셈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죽은 김형석 비행사와 이웅평 비행사에 대해서. 아버지와 이웅평 비행사는 공군비행학교 동기였다. 졸업앨범에도 여러 장이 찍힐 정도로 가까웠던 두 사람은 졸업 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이웅평 비행사는 아버지 뿐 아니라 같은 동기비행사들의 저주와 규탄의 대상이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세월은 흘러 최전방 판문점 군사복무 떠나는 나를 바래주면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사회주의 최전방초소를 목숨으로 지키기 전에는 내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

나는 거기에 큰소리로 화답했었다. 어색하나 힘찬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조국을 위하여 복무하겠습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지프차에 기대서서 군관 평상 모를 벗으시며 나를 바래주시던 그 손 등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이 나라의 아버지들도 울 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떠나는 열차를 따라오시며 울고 울던 어머니....... 혹시 열차를 따라오시다가 넘어지시면 어쩔 가 싶어 창문을 밀어붙이고 하반신을 내밀자 주저앉아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13년의 군사 복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최전방초소에서 예측 못할 아들의 생사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때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굳게 지키리라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었다.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6년 간의 성실한 군사복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고통과 고뇌의 연속이었고 순간순간이 괴로움 그 자체였다.

 

수십 명의 동료들의 한국 행을 시도하다 비무장 지대에서 무주고혼이 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고 명령을 집행하는 사형수가 되어 그들에게 총탄을 날릴 때도 있었다. 실로 그 때에는 내 자신이 무덤을 파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위부의 프락치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들의 동향을 보고할 때도, 영양실조로, 아니면 종신불구가 되어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볼 때에도 이것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국을 지키는 길이라고 자신을 애써 위안하군 했었다.

 

중앙분계선을 넘어 대북 방송 스피커를 파괴하고, 국군의 순찰 길에 필갑지뢰를 매설 할 때에도 그 모든 것을 긍지와 보람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위 조국에 바쳐진 나의 모든 충성과 젊음이 한 장의 "체포영장"으로 날아왔을 때에는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래서 끌려가 치욕을 남기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는 생각으로 자동보총에 새로 탄창을 끼고 어두컴컴한 지하갱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문뜩 10년 전 김형석 비행사의 죽음이 떠올랐다. 여기에서 나는 부모님들에 대한 효도를 끝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이웅평의 귀순 길. 내가 걷자고 하는 그 길이 부모님들의 뜻과는 다른 길임을 알면서도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자신의 과거에 총탄을 퍼부으며 죽음의 휴전선을 넘었다. 지금도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다.부모님들이 그토록 충실했고, 나와 동료들이 청춘을 바친 조국 아닌 조국이 나를 버렸고 수백만의 무고한 인민들을 기아와 살육에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하여 오늘 나도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 되어 이 글을 쓴다.

 

실로 수백만의 이산가족 대열에 나도 포함되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부정하려해도, 외면하려 해도 나는 지금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과거를 인정해야만 하는 탈북자, 북한이탈주민인 것이다.지금 현실은 말 그대로라면 이산가족들에게 만남의 기회가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 탈북자 혹은 이탈주민이라고 하는 우리들에게는 아직까지 그 만남의 기회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무엇때문인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직 통일, 통일만이 우리가 형제와 혈육을 만날 수 있는 길이고 그 길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할 수 있다면 한순간의 만남을 위하여서는 내 운명이라도 바치고 싶다. 한국에 온 3000명의 탈북자 모두가 그러하듯 나 역시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공감한다. 광화문에서, 종로에서, 판문점과 멀리 바다 건너 먼 해외에서 북한독재를 반대하는 "북한민주화와"의 투쟁의 기수에는 항상 우리들, 탈북자들이 기수로 서있어야 할 것이다.

 

두고 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 혈육들을 그리며 다시 만날 그 날을 그려보면서 말이다.

 

잘 있느냐 내 고향아 꿈에도 그리운 곳

백사장에 해당화는 지금도 피어있겠지.

들려주렴아 들려주렴아 유정한 파도 소리

저물녘이면 나를 부르던 어머니 그 목소리.

 

가고싶어 내 고향아 꿈에도 가고싶어

이슬 젖은 푸른 언덕 맨발로 거닐고 싶다.

전해주렴아 간절한 이내 마음을

멀리 있어도 변함이 없는 자식의 그 사랑을

 

20038월 탁은혁 탈북자동지회 회보 8월호

 

 

2004-11-19 20:51:20

출처 : 탈북자동지회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