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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모란꽃이 필 때까지 - 김용

작성년도 : 2004년 62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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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필 때까지

- 김용

 

 

나는 1960년생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남한 사람들이 잘알지 못하는 강계라는 곳이다.지금은 자강도 강계로 되어있지만은 예전에는 평안북도 강계면으로 되어있다.

 

강계하면 제일 기억속에 남는 것이 강계포수가 유명했고 예로부터 강계미인이 예쁘다는 얘기가 있다. 옛날말 그런데(틀린곳) 없다고 강계미인은 그야말로 예쁜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나는 그 시골에서 3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서 자랄 당시의 북한사람들의 취미는 하루빨리 추운 겨울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었고 겨울이면은 얼음판위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 스케이트와 호케이(아이스하키)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이것이 취미라 할 수 있었다. 9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앞길이 열렸다. 12살에 자강도 스케이트 직업선수가 되었으며 14살에는 스케이트 대표 선수가 되었고 나에게는 이것이 전부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십여년동안 현역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나의 장래 앞길에 대해서 보장성이 있는 직업이냐 없는 직없이냐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대담한결심을 하고 자강도 강계 김정일 예술전문대 성악과를 가게 되었다.

 

나의 앞길은 체육할 때와 같이 또 열렸다. 나는 드디어 운동선수가 아닌 가수로서 새롭게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었고 평양영화 및 방송음악단에서 영화주제가, 드라마주제가, TV 라디오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 년 북한의 인민배우나 공훈배우의 실생활을 드려다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느낀 것이 누구의 말대로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내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내가 그길을 걸어봐야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직업을 또 바꾸기로 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술전문대를 다닐 때처럼 열심히 공부하자. 이런 마음으로 5년 세월이 흘렀고, 백두산 건축 연구원 책임지도로 출세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대외사업 업무였다. 주로 나는 일본사람등 외국인과 비즈니스를 하게되었다. 나는 유주노 사할린스크라는 러시아의 섬으로 출장을 갔다. 거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남한에서 온 아끼꼬 소냐라는 영화 촬영진의 촬영모습을 본 것이다. 참 반가웠고, 생전에 처음보는 남한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한발한발 다가선 것이 그들의 옆에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고 싶었고, 그들의 얘기는 사심이 없었고 거짓이 없었다. 알지 못했던 남한을 잘못 알았던 남한을 동경하게 되었고 가보고 실은 욕망과 단 하루라도 내 눈으로 보고 내 발로 걷고 싶은 생각이 용솟음 치기 시작했다. 사나이의 결심을 누가 꺽으랴. 러시아에 있는 나의 안내자와 주위의 교포들은 말렸다.

 

그러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내 결심을 굽히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생명의 유서를 썼다. 드디어 나는 먼 길 기약없는 길을 떠났다.

 

나는 나 때문에 혈육들은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였고 머리는 무거워지기만 시작했다. 바로 이렇게 고생끝에 찾아온 것이 자유의 땅 남한이다. 자유란 것이 무엇인지 자유를 찾은 대가는 얼마나 큰 것인지 내각 상상하기는 아직까지도 어렵다.

 

돌이켜보면 러시아에서 결심한 것이 너무 가벼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상황으로는 체코, 루마니아, 독일, 전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도 무너질 판이었으니 북한도 머지 않아 무너지고 나는 자유땅에서 몇 년안으로 부모 형제를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나에게 귀순의 큰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내 부모, 형제를 살아 생전에 볼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때 막막하기만 하다.

 

나는 남한에서 처음 시작한 방송과 가수일로부터 시작하여 돈을 버는 족족 부모,형제를 만날 그날만을 기다리며 형님,누나와 어머님 이름으로 저축한 돈이 꽤 많이 된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정성이 전달 될 수 있을까.....

 

나는 4년전에 신도시 일산 장항동이라는 시골땅에 모란각이라는 자그만 냉면집을 세웠다. 그것도 내돈이 아니라 은행에서 5천만원을 대출받아 시작하였다. 나는 이 씨앗에 남이 잘 때 잠도 잊은채 물을 주었고 그 씨앗이 어서 빨리 자라 싹을 이루고 꽃망울이 되기를 기다렸다.

 

오늘에 뒤를 돌아다 본다면 나도 참 고생 많이 했다고 본다. 밤새껏 끊인 육수에 신발은 쩌러 있었고 바가지를 들고 옮기고 퍼담고 하기를 몇만번 팔목과 손가락은 펴지지 않았고 하루 12시간 이상 불앞에 있는 나는 얼굴이 홍당무였고 내집은 어디있는지 잊을상 싶을 정도로 식당에서 자고 먹었고 이러기를 2.....

 

세월은 참 빨리 가기만 했다. 오늘의 모란각을 볼 때는 43개의 체인점이 늘어났고 사장단만 해도 60여명이 되고 모란각의 전 직원이 2,700명이나 된다.

 

오늘의 모란각은 어젯날의 깨숯불 앞에서 육수물 끓이던 나의 모습이 아니라 최신식 설비로서 몇 십억의 공장이 설립됐고, 이런 공장도 김해와 서울, 두 곳이나 있다.

 

나는 부자다. 나에게는 어젯날의 외롭고, 슬프고, 그리울 때 혼자서 못이기던 가난한 모습이 아니고, 밤이면 밤 낮이면 낮, 모여라 형제들아 하면 언제든지 모여서 웃고 즐길 수 있는 귀순한 형제들이 모란각에 뭉쳐있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 모란각의 음식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해외까지 우리 이름으로 자신있게 나가는 음식이 되었다.

 

더욱 기쁜 것은 북한에서 탁구 대표선수를 하던 귀순자 전경철이 나의 기술을 이어 받아 모란식품의 총 사장이 되었고 이 손에서 나온 음식이 전국과 외국에까지 나간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이것 뿐이랴 모란각 본점에는 지배인과 사장이 다 귀순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장했다. 작은 씨앗이 화려한 꽃방울로 되었고 그 꽃방울의 향은 오늘의 모란꽃이다. 모란꽃은 계속 필 것이다.

 

(탈북가수 김용 수기)

 

 

2004-11-18 00:04:5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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