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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때로는 그리운 배급제 - 김승철

작성년도 : 1999년 61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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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그리운 배급제

- 김승철

 

 

주위사람들은 나를 남한에 와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해준다.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의 평가로는 아직 남한 생활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삶은 너무나 긴장하고 힘들고 또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서 순간마다 불안이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게 느껴지고 미래에 대해 나약해지는 자신을 추스릴 능력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아오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다양한 남한의 사회상보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능동적이지 못했던 북한에서의 30여년간 살아온 삶의 방식을 남한생활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도대체 맞지 않는다.

처음에는 '따뜻한 남쪽 나라'는 북한에서 배운대로 '반만년의 핏줄을 이어온' 한 민족이여서 사는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었다. 주위의 사람들의 격려와 동정, 그리고 특별한 신분으로 새로운 환경에서의 자유와 풍요는 원하면 차례질 것 같았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택한 대가로 얻어진 물질적 풍요와 식탁의 포만으로 얻은 행복감은 짧은 시간뿐이었다. 선택된 삶이 아니라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되면서 그에 맞게 준비되지 못한 나로서는 힘에 겨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과 북의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북한 사람들도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출근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퇴근하는 것은 다를바 없다. 비록 작업동원으로 년에 몇 번밖에 쉬지는 못하지만 휴식일도 있고 1년에 한두번이지만 작업반 성원들 모두 모여 회식하는 자리도 있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싸우거나 다투기도 하는 것은 영락없는 우리민족의 기질인 듯 싶다.

 

하지만 일의 내용과 책임에 있어서는 엄연하게 남과 북은 차이가 난다. 내가 겪은 바로는 남한의 회사에서는 맡은 업무에 관해서는 자신이 알아서 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진다. 처음에 입사하여 연수기간이 끝나면 자신의 능력과 책임감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업무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이 끝나면 누가 와서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고 충고를 주는 경우가 드물다.

 

북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에 이를때까지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이 이곳에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출근하여 회사에 들어서면 업무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남모르게 긴장해진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온몸의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고등중학교 시절 '잠 아바이'라고 불리우던 것이 정말 내 별명이였던가 싶게 졸음도 오지 않는다.

 

북한에서 직장 일을 할 때는 그러한 긴장감이 없었다. 뭐라고 딱 찍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쉬웠다. 차례진 일의 내용이 쉬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키는대로 하고 잘못되면 다시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개인적인 책임감은 있어도 크게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뭐 잘해봐야 월급도 안오르고 그렇다고 출신성분도 좋지않은 나를 입당시켜 줄것도 아니다. 또 잘못된다고 해봐야 조직 '생활총화'에서 머리를 깊이 수그리고 비판을 접수하면 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쫏겨날 위험은 더욱 없고 출근만 제대로 한다면 고정된 월급과 식량 배급표는 나오는 것이다. 직장에서 바라는 것이란 크게 두가지, 월급과 배급표 외에는 없었기에 일이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생활수준이 갑자기 비약해서일가. 남한에 처음 와서 정부에서 마련해 준 직업을 얼마안돼 자신만만하게 때려치웠다. 그럴 당시 나의 꿈은 원대했다. 더 나은 직업과 보수와 명예를 위하여. 한마디로 북한에서 이루지 못했던 모든 꿈들을 나는 단기간에 이루려 했던 것이다. '뱁새가 황새 걸음을 걸으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했던가 나의 꿈과 욕망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장사로 큰 돈을 벌려는 꿈도, 대기업에의 취직도 어느 하나 이룰 수 없었다.

 

남한의 발전된 사회와 삶의 수준은 북한과는 비할바 없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다. 나 자신의 능력과 수준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남들이 좋은 차를 타고 수준높은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수준을 따라가려하니 도저히 이룰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바쁘고 돈은 쉽게 벌리지 않으니 심신이 고달퍼지기 시작했다.

 

업무로 피곤하고 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다. 먹고 살기가 헐치않구나 하는 생각이 또 입속에서 맴돌며 한숨이 나도 모르게 ""하고 길게 탄식처럼 흘러나온다. 그럴때면 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에이, 돈만 있으면 조용한 산골에 가서 살겠는데……"

 

처음 1년 지나서는 일이 힘들고 홀로 외로움을 삭일 때면 왠지 탈출하여 정처없이 떠돌던 카자흐스딴의 드넓은 황야가 그립기도 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표현이 이럴 때 맞는 것 같다. 그때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여 여러번 울기도 했는데 안전하고 편안해지니 고독과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면 문득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배급이나 대충 타먹고 시키는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편안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어처구니 없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국가에서 먹여주고 배워주고 하니 그 삶이 고달프고 지겹고 힘들어도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던 것이 북한에서의 삶이다. 배급에 삶을 저당잡힌 셈이 되어버린 꼴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배급이란 것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얽어매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놈의 배급에 매여산다고 배불리 먹은 것도 아니었다. 이것저것 떼고나면 항상 배급쌀이 모자랐다. 어머니는 배급날이 다가오면 '누구네 집에 가서 쌀 꾸어올가'하고 바가지를 놓고 걱정과 푸념을 하시군 하셨다. 그래도 그 배급이 보름에 한 번씩 준다는 것이 절망적이지 않게 했고 안정감을 주었다.

 

지금의 북한은 내가 살았던 때가 낙원이였던가 싶게 배급을 포기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들이 살기 힘들까. 그렇게 생각하면 좀 마음이 안정되기도 한다. 참으로 사람의 감정이란 요상함을 느낀다.

 

지금은 북한에서보다 백배 아니 수백배의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 배고픔과 결별하였고, 사계절 입던 단벌옷 대신 철따라 멋진 양복을 입고 구두를 광내고, 꿈도 꿀 수 없었던 자유와 풍요를 누린다. 그럼에도 내가 배급제가 이따금 그리워지는 것은 자신의 나약한 의지 때문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부단히 추스리고 희망을 가꾸려고 노력하지만 오랫동안 몸에 배인 관습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며칠전 마을 비디오 가게에 들려 담배를 사며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 산다는게 쉽지 않네요"

"뭐가 힘들어요. 다 그렇게 사는거지요"

 

후기 : 지금은 배급제보다는 살아가는 치열함에 스릴을 느끼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하시던 그 말, "다 그렇게 사는거지요"에 깨달음을 얻었죠. 그리고 일을 싫어하고 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었던 삶에서 일을 좋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삶의 영역으로 들어왔죠. '때로는 그리운 배급제'를 보신 분들은 지금도 그런가 하고 오해하십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전과 후는 하늘과 땅 차이더라구요.

 

1999830일 김승철 북한연구소 연구원

 

 

2005-12-13 15:06:00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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