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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북한은 해적이다

작성년도 : 2020년 1,11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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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해적이다

 

2016년 국내 입국 한지 어느덧 8년이 시간이 지났습니다. 내 나이 서른하나, 155cm 몸무게 53Kg 얼마 전인가 TV 뉴스의 주요 핵심적인 내용은 아동학대 내용들이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굶기고 물에 쳐 넣고,  화장실에 가두고, 방치하고. 매질당하고 그러다 죽으면 야산에 묻어버리는 사건들입니다.  또 한 가지의 공통적인 것들이 피해아동들은 가해자들의 굶기에 의해 또래의 아동들에 비해 키도 작고 몸무게도 작게 나간다는 것입니다.

 

내 나이 31세 이젠 아무리 잘 먹어도 키도 크지 않을 나이인데 남한의 초등학교 5~6학년 또래와 비슷하다는 10cm 키높이 구두나 신발을 신어도 정상적인 남자들보다 한참이나 작은 것입니다. 아동학대의 피해가 내 몸에 고스란히 나타난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남한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아동학대를 나는 20여 년 전 몸서리가 칠 정도로 북한에서 당하였습니다. 기억이 나는 건 아마도 아주 어린 나이 다섯 살 때부터 그렇게 매질당하고 굶기고 하였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과연 부모의 생각은 아마도 저를 물건을 소유한다는 분풀이 모두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시기 이지 만 너무 다섯 살 나이 감당을 해야만 했던 순간을 말합니다.

   

꿈속에서 또다시 매질을 당하다.

201512TV 뉴스 를 보던 나는 온몸이 전율하듯 떨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자존감도 없어지고 마치 누군가 나에게 달려와 폭력을 주는 것 같은 심정으로 눈물이 그냥 하염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천에서 12살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감금되어 매질 당하다가 슈퍼마켓으로 탈출한 사건에 대해 그 뉴스를 통해 접한 날 밤 나는 밤새도록 북한에서 있는 엄마에게 매질당하는 꿈을 꾸었고 다시는 TV 뉴스 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TV 를 켜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엄마는 그때 그 무서운 모습으로 계속 꿈속에 나타나서 술병으로 머리를 때리며 잠을 못 자게 하였습니다.    

 

왜 때리셨는지요? 과연 나를 죽이려고 하셨는지요? 내가 그렇게 죽도록 미우셨는지요? 왜 굶기셨는지요?  참 생각을 해도 이해 할 수 없지만 그러면 나를 왜 나으셨는지요? 하며 어머니라는 그분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이유를 묻고 따지고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현실이기에 가슴이 더욱 답답한 마음입니다

 

나의 어릴 적 이야기

내가 어머님으로부터 매질당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섯 살 때부터 상세하게 머릿속에 기억된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때리는 것은 허용되고 있는 북한 독제 정권은 흉이 되거나 죄가 되지 않고 잘못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과거나 현제의 상황을 말합니다. 즉 죄책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님의 매질은 집과 장마당 상황을 가리지 않고 기타 등등 시간 장소 가리지 않고 작고 사소한 분분이라도 용서란 없고 무참하게 폭행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매질이 더욱 심하게 된 것은 내 나이 9살 때 시작된 것입니다.

 

1994년 여름 부터입니다. 당시 저 때문에 알게 된 군인들은 기쁨과 슬픈 일이 있어도 항상 우리 집에서 군인들의 회식장소로 제공하게 되었고, 아버님은 경비업무로 집을 비우게 되면 어머님은 수성포 대대 있는 장교와 잠자리를 같이하였고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목격하였다. 내가 아버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머님의 매질과 굶기는 것은 그때로부터 더욱 심하게 되었으며 아마도 옆집 철호 형님 어머님이 말려주지 않고 장마당 국수 장사를 하던 봉선의 어머님이 말려주지 않았으면 나는 벌써 세상에 없는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머님은 199411월부터 담배, , 콩기름 기타 등 다양한 물품을 장마당에서 팔며 돈을  빌려주는 일을 하였고 나는 외상 값 빌려준 돈을 받아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외상값을 받아가지 않으면 그에 대한 분풀이를  심한 매질과 밥을 주지 않기에 그 집에서 돈을 줄 때 까지 버티면서 먹고, 자고, 뛰여 놀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 집에서 쫓겨나면 부엌에 들어가서라도 버텼다. 그 집들도 내가 돈을 못 받아가면 죽도록 얻어맞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중에는 다른 집에서라도 돈을 빌려 나에게 주었다. 어머님이 장사를 하면서 외상 준 물건 값, 또한 빌려준 돈이 큰 돈은 아니지만 결극은 모든 부분은 제가 가서 직접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기도 하지만 무조건 어머님의 시키는 대로 법처럼 따라야만 했다.

   

꽃제비 생활은 중국으로 탈북 

북한을 버린 죄 명 <<비법 월 경 자 단어가 >>   

19955월 내 나이 열 살, 만으로 9, 남한의 초등학교 3학 년 때 나는 스스로 이렇게 살다가는 어머님에게 맞아 죽겠다 는 생각을 하고 가출을 결심하여 원산, 고원, 함흥, 길주, 신의주, 기타 등등 여러 지역을 떠돌며 16개월 정도를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던 그 시각 살기 위해 쓰레기 장에서 뒤지고. 먹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뭐든지 먹었다.

 

그러다가 중국에 가면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961120일 두망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에게 얻어맞으면서 진짜 나의 집 분명하고 친부모님인 것도 확실한데 눈칫밥을 먹으며 커서 그런지 나는 내 또래의 아이들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수많은 생각을 하였으며 다양한 삶을 통해 그 어떤 고난의 시련 속에 주적한지 않고 정말 힘들면 넓은 바다를 보면서 새로운 창의성을 표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는 면을 진정 어려운 시간도 나를 더욱도 강한 자신을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3년 반 정도 꽃제비 생활은 반복적인 부분이긴 했지만 밥은 굶지 않았으며 지금 내가 155cm의 키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과정은 3년여 동안 중국에서 생활 하였 던 덕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시련은 다시 찾아오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북한 사람 신고하면 포상금을 준다고 하고 경찰에겐 포상금과 승진하게 된다는 부분을 알고 나이 먹은 연변 조선족이 북한사람을 사냥감이나 돈으로 생각되어 중국 심양시 작은 公安國 경찰에게 신고를 하여 고수란히 붙잡혀 그대로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 북송 조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199912월 중국 단동에서 北韓신의주로 경찰버스로 강제 북송되었고 한 달 동안 북한 국가보위부(국정원) 유치장에서 신문 조사를 받으면서 제대로 말을 안 하거나 남조선 사람 봤냐 하고 물어보는 부분도 있고 그렇게 죽어라 맞고  개머리판으로 쇠파이프로 마구 맞았지만 일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해 매일 콩, 옥수수 살마서 주는 반 그릇 정도 먹다 보니 다리의 힘이 풀려 도망칠 수 없는 게 그때의 상황입니다.   

 

5년 만에 고향으로 귀가하여 중학교를 졸업

2000115세 나이로  5년 만에 고향에 귀가하였지만 아버님과 어머님은 반겨주지 않았다. 또다시 어머님은 이중적인 성격이 문제이긴 하지만 너무나도 지나친 폭력이 참으로 다양하게  잔혹한 내성적인 면이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당시 현실이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내가 그토록 피할 수가 없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사소한 일로 인한 언어적인 폭언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놈은 영광로에 넣어 죽였으면 좋겠다는 말씀과 더불어 입에 담 아서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도 부족하신지 자주 매질로 이어졌습니다.

 

나의 얼글과 몸에다는 흔히 시골에서 빨래를 할 때 사용되는 나무망치와 사각 나무로 분이 풀리 실 때까지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마음 같아서는 부모 모두 이 세상없으면 했으나 미우나 고우나 부모인 것이 너무 나의 미래가 보이지는 않았다는 단점을 알게 되었다. 어머님 폭력적인 순간마다 어머님 제발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구하여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수차례 이어진 나의 반응을 보면서 고치는 면은 보일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지욕이 따로 없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도 어머님은 욕설만큼 하는 부분이 지금 이 순간까지 잊을 수 없지만 혼자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욕구적인 부분입니다

어머님은 당간부와 군관, 보위부 사람들과 발이 넓다. 안면이 많았고 수시로 뇌물을 바치던 사람이었기에 00군 당위원회를 통해 인민학교(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를 고등학교 5학년에 입학시켰으며 저는 그렇게 2년 동안의 학교를 다니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그것만큼은 부모님에게, 정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북한 생활에 적응 못하고, 탈북과 강제북송, 또다시 세 번의 탈북  

중국에서 3년 반 동안 생활하며 김일성, 김정일, 정신 나간 독제 즉 소말리아 해적 같은 이미지 또한 욕심이 하늘을 잡는다. 저는 그때 정체를 알고 나니 믿음이 더 욱도 강하게 저의 마음속에는 북한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불쌍한 것은 북한 주민과 어린아이 군대입니다. 어린 나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으며 중국에서 보았던 남한의 영화와 드라마는 탈북자 모두에게 엄청난 사실을 알게 해줬다는 감사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장사하는 남한 사람들의 허여멀건 기름진 얼굴과 자신감이 항상 넘치는 모습, 탈북자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 모습 남한이 중국보다 몇 배나 더 잘살고 중국 사람들도 돈을 벌기 위해 남한에 엄청난 돈을 주면서 가는 모습을 보았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없었고 북한에서 교육은 전부 거짓인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북한 생활은 당연히 적응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당연하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중국 탈북 경력으로 인한 관계로 군대를 입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20026 00 군 청년돌격대에 입대하여 대대장 연락병 생활을 하였으나, 나에게는 너무나도 적응 과정은 고통이자 힘든 상황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200211월 다시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으나 한 달 만에 중국공안국 조선족 연길시 신흥파출소에 군무하는 공안국장 조카 연변 조선족에게 검거되어 20031월 북한으로 강제북송을 되었다.

 

20039월에 북한에서 공동 재판을 통해 인민보안성 단련대인 증산에서 16개월 정도 살았습니다. 20056월 열심히 성실하게 일한 관계로 풀려나 집에 가게 되지만 반겨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증산 단련대에서 죽도록 얻어맞고 난생처음으로 다녀 정말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배도 고프고 먹으면 먹는 데로 용변으로 그대로 배출되고 영양실조 2단 정도를 걸린 것입니다. 결극은 북한 장교들에게 폭력과 폭언 강제노동을 통해 얻어준 것은 오직 하나 상처와 병, 위협적이고 꿈에서 나와 매일 과 같은 악몽 인한 스트레스 너무 맞고 굶주려서 한걸음 한걸음 걷는 그 자체가 지욕이었으나 안정적인 집이라고 생각되어 부모님 계신 고향으로 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조금 챙겨 주시는 것 같은데 역시나 잘하든 못하든 어머님의 매질은 심각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곳은 안정을 찾고 사랑을 받고 싶은데 나는 잘못 선택을 하고 생각이 너무 잘못 선택을 했다는 배신감을 준 것입니다.

 

아버지의 충성심은 너무 무섭다.

아버지는 나에게 집을 가출하고 조국을 배신한 이유로 집에 군인 앞에서 술을 마시면서. 나를 밥 상우에 앉혀 놓고 부엌 식칼로  찌르려고 하였으며 조국을 배신한 놈을 부모가 찔러 죽였다고 죄가 되지 않는며 당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고 나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하였고 나가도 먹을 것과 잠을 잘 곳이 없어 그냥 중국을 가기 위해서는 꽃제비 노릇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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