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수기]빛을 찾아 만리9 - 홍은영
작성년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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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기]빛을 찾아 만리9
- 홍은영
빛을 찾아 만리- 한 탈북 소녀의 수기 홍은영(평양시 모란봉 구역 학생)우리가 살던 곳에서 강계까지는 230리 되었어요. 우리한테 먹을 것이라고는 삶은 감자 몇 알이 전부였어요. 그래도 우리는 그것으로 강계까지 가야 했어요. 강계라 하여도 누가 기다리는 것도 오라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기차길이 있는 곳까지 가야만 살 것 같아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정말로 힘들었어요 어떻게 강계까지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우리는 걷고 또 걸어 마침내 강계까지 갔어요. 그런데 막상 강계에 도착하고 보니 또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어요. 결국 우리가 간 곳은 강계역이었어요. 여덟달 전에 잠시 왔다가 여러 날 묵을 수밖에 없었던 강계역, 그 때 보다도 더 한산해 보였어요. 가는 사람, 오는 사람, 갈 곳이 없어 들린 사람, 사람, 사람, 사람뿐인데 청소는 언제 해 보았는지 구석마다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고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껄껄대고 있었어요. 제일 보기 싫은 것은 역시 군대였어요. 언제 팔아 입었는지 때가 조들조들한 옷들을 입고 그래도 군대랍시고 우줄렁거리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거렁뱅이들도 그들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렸어요. 호기심이 나서 가보니 열한두 살 되는 소녀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다 해어진 인민학교 교복치마, 때가 옹기종기 낀 얼굴, 너무나 먹지 못해 얼굴에 말 그대로 핏기 한 점 없는데 노래부르다 금방 쓰러질 것 같았어요. 그래도 그 아이는 콧등에 땀까지 송골송골 돋혀 가지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군대들이 빙 둘러싸고 낄낄거리고 있었어요.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이제 오니 나 홀로 남았네낙엽 따라 떨어진 이 한 목숨 가시밭을 헤치고 걷는다열여섯 살 꽃 나이 피눈물 장마아 누구의 잘 못인가요 누구의 잘 못인가요...처음 듣는 노래였어요 하지만 너무나도 구슬프게 들리어 저는 담박 눈물을 쏟아 놓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다가가는데 소녀가 노래를 다 부르고 사뿐이 인사하더니 그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동냥을 청하기 시작하였어요. 십 전짜리 오십 전짜리 엽전을 던져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군대는 아니었어요. 노래가 끝났는데도 돈은 안주고 왝왝 떠들기만 했어요. 그 중에 두 줄단 놈 하나가 소리쳤어요.“잘한다 잘해. 한데 그 따위 슬픈 노래는 듣기도 싫으니 ‘정일봉의 우레소리’를 해라. 그러면 돈을 많이 준다.” 그 애가 금방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으나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정일봉에 우레 우니 천하가 우르릉검은 구름 몰아들고 불벼락 내려친다김정일장군님 불호령 소리에 천지가 뒤흔든다...그 노래는 원래 노래가 아니었어요. 보지는 못했지만 무슨 미쳐 날뛰는 사무라이들의 군가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노래를 그 갸날픈 아이가 부르니 노래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의 무슨 애절한 울음소리 같이 만 들렸어요. 그 애는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했어요. 1절도 채 끝맺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어요. 역시 군대는 아니었어요. 빙 둘러 서있던 군대들은 멋적은 웃음을 흘리며 물러나고 나이 든 분들 몇이 다가 갔어요.한 할머니가 서둘러 보따리를 헤치고 물병을 꺼내더니 그 애의 입에 조심스럽게 부어넣었어요. 그래도 그 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 한 참 지나서 가까스로 눈을 떴어요.“에그 불쌍한 것, 너의 아버지 어머니는 다 뭘하고 널 이렇게 밖에서 떠돌게 한다더냐?”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어요.“할머니 고마워요. 그런데 저의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돌아가시고 아무도 없어요.” 애가 힘겹게 말하였어요.“그래 그랬겠지. 그렇지 않고야 너를 이렇게 밖으로 나돌게 놔둘테냐. 어이구 기가 막힌 세상이지.” 할머니 눈굽에서 마른 눈물이 한 방울 굴러 맺히더니 아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었어요.할머니는 서둘러 보따리를 풀더니 강냉이 빵 한 개를 그 애 손에 쥐어 줬어요. 저도 그때 보따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감자 두 알이 남아 있었지만 차마 거기에만은 손댈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서슴없이 빵을 쥐어 줬어요. 할머니에게 하루 식량 전부였을지도 모를 빵을요. 사실 이 일 때문에 저는 그 후 오랫동안 계속 마음에 가책을 받았어요. 우리는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어 서둘러 자리를 떴어요. 결국 우리 발길이 닿은 곳은 장마당이었어요. 강계장마당은 시 중심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어요. 물론 장마당을 처음 가보는 것은 아니었어요. 평양에 있을 때에도 송신 농민시장, 대동강구역 농민시장 등 여러 곳에 가 보았지만 강계 장마당은 정말 생각 외로 규모가 컸어요. 매장도 수십 줄이나 되었는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모여들었는지 정말이지 발 밟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어요. 다 말라비틀어진 무 몇 개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 닭이나 개, 염소 같은 가축을 가지고 나와 있는 사람, 한 쪽에서는 금방 해 가지고 나온 듯한 김이 문문 나는 두부 버치를 들고 나와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도 보이였어요. 실제로 물건을 팔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팔지도 않고 사지도 않고 공연히 기웃기웃 하려 나온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어요. 중국제 고급 담배나 라이터 같은 것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장마당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빙빙 도는데 윗 호주머니 혹은 아래 바지 주머니에 담배 또는 라이터 꼬리가 살짝 보이게 내놓고 다니면서 살만한 사람들을 물색하여 으슥진 곳에 데리고 가서 거래했어요. 정말 발 밟을 자리 없이 사람들이 붐비는데 그 속을 누비며 꽃제비들까지 날판을 쳐대서 꼭 전쟁터 같았어요. 우리가 어느 한 매대 앞으로 다가 갈 무렵이었어요.“저기 토비 떼 온다. 토비 떼가 와!” 물건을 놓고 앉아있던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가지고 나온 물건들에 포위장망 같은 그물들을 씌우기 시작했어요. 영문을 몰라 그들이 보는 쪽을 보니 뜻밖에도 역전에서 우리가 봤던 그 군대들 몇이 장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어디선가 대낮부터 술들을 먹은 모양이었어요. 얼굴들이 한결같이 모주 먹은 돼지 상들인데 쓰고 있는 모자들은 바람이나 맞았는지 꼭 논 판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처럼 한 쪽으로 삐두러져 있었어요. 역 대합실 안에서 노래부르는 아이한테 “정일봉의 우레소리”를 부르라고 하던 두 줄박이 군인은 어디서 모자를 잊어버렸는지 군모 대신 여자들 여름 모자를 올려놓고 뭔가 쩝쩝 씹으면서 허연 이를 드러내고 히히거리며 다가오고 있었어요. 그들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마치 무슨 더러운 물건이나 피하는 것처럼 서둘러 한 쪽으로 피해 주었어요. 그들은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이기라도 한 듯 사람들이 피해 주는 길을 따라 오면서 옆에 있는 떡이며 과일이며를 마음대로 주어 먹었어요.그래도 사람들은 그들이 빨리 자기들 앞에서 물러가기만 바랄 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어요. 그들이 우리 옆에서 얼마 멀지 않게 왔을 때였어요. 다른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모두 긴장하여 그 녀석들 움직이는 것만 지켜보고 있는데 계란을 가지고 나오 한 할머니만은 뒷줄에 앉은 다른 할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고 깜짝 그들이 곁에 다가온걸 걸 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문득 두 줄 박이 군대가 그 할머니가 팔던 계란을 광주리 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정말 뜻밖이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다른 데서도 떡이며 과일이며를 덮쳐 먹었지만 그건 한 두 개씩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어요. 하지만 계란 파는 할머니 것은 광주리 채 들고 달아나기 때문에 그건 정말 야단이었어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저 “와 와” 소리만 지르는데 실제로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어요. 계란 광주리를 통째로 빼앗긴 할머니가 놀라서 돌아앉다가 그대로 자빠져 끌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할머니가 그럴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광주리 밑 굽을 바오래기로 발목에 단단히 묶어둔 것이었어요.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요. 할머니는 맨 봉당으로 끌려가면서 죽는다고 소리지르고 군대 놈은 군대 놈대로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 애쓰고. 결국 군대놈이 포기하고 광주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어요.“에이 악질 같은 노친네 장군님 군대도 몰라보다니.” 군대가 오리려 제 쪽에서 분한 듯 투털거리며 저 만치 물러가는데 할머니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 내 동댕이쳐진 광주리로 다가 갔어요. 물론 광주리에 들었던 계란은 이미 한 알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탕이 되어 있었어요.“아이고 이 못된 놈아! 네... 네 놈은 애비 에미도 없는 놈이라더냐! 아이고 이 못된 놈아!” 할머니 대성통곡하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아마도 그 계란 십 여 알이 그 할머니네 생계수단 전부였는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모두 동정하였지만 그래도 저마다 살기 힘든데 누가 무슨 수로 그 할머니를 도와 줄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혀들을 차며 돌아서는데 바로 그때였어요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저를 확 밀치는 것 같아 엎어질 번 하다가 겨우 몸을 가누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떨군 보따리를 누군가 들고 달아나는 것이 아니겠어요. 깜짝 놀라 보니 열한두 살 된 머리 까만 아이가 제 보따리를 들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어요.※ 본 수기는 저자의 사정으로 연재가 안되고 여기서 중단됩니다.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자의 재기를 기대하면서 애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탈북자동지회 회보 2003년 8월[탈북자들] 연재수기
2005-10-26 10: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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