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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수기

41년을 뒤돌아 보며

작성년도 : 2020년 1,056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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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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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과 성실로 오늘에, 내일을 향하여

 

 

출생과 가정환경 & 유년시절

나는 1975년에 북한의 자그마한 바닷가 마을에서 1남6녀의 4녀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북한의 가장 큰 비료생산기지인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사무원을 역임하셨다.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우리 7남매를 키우시다가 아버지가 병환으로 집에서 쉬게 되어 아버지를 대신해 비료연합기업소에서 근무를 하시며 우리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신 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나의 가족은 그렇게 유명하거나 대단하지 않으며 평범하지만 오직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삶을 살자!”가 가문의 좌우명으로 간직 될 만큼 평화롭고 화목한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다.

특별한 종교는 없었지만 웃어른을 공경하고 주변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주신 훌륭한 부모님들이 함께 계셨기에 삶 자체가 행복한 가정이었다.

나의 형제들은 서로를 위해주고 감싸주고 돌봐주며 비교적 학교와 사회생활에 낙오자가 없이 잘 성장하였으며 많은 형제들이었지만 주변집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화목하게 잘 살아왔다.

하나둘 나이가 들어 결혼도하고 아이도 키우면서 살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위하고 동생들을 돌봐주며 형제애가 남다르기도 했다.

나에 대한 부모님들의 기대는 특별히 더 강하셨고 또 항상 힘을 실어주셨다.

나는 북한에서 유치원을 거쳐 인민학교(4년) 중고등학교(6년)를 졸업하고 간호학교에 재학중에 탈북을 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고 한국에 와서 4년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는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나는 어린 시절 유치원때 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리 특별하게 성장 되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늘 앞장에 섰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모든 생활에서 항상 모범이었으며 전 유치원의 리더로 키워졌다.

유치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사나 야유회, 운동대회나 놀이를 할 때도 늘 앞에서 전체 유치원생들을 이끌어 가도록 인도해주셨고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으며 이때부터 나의 승부욕이 키워졌으며 상을 많이 받곤 했다.

이런 과정들이 나에게 모범생활과 경쟁심을 심어줬고 또한 승리함으로 얻어지는 것에 대한 표창이나 물질적 보상에 대한 중독성을 키워줬다.

나는 지금도 2001년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유치원을 1982년에 졸업한 내가 2001년 약 20년후에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유치원 높은 반 시절 담임선생님이 나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맞아주실 때 나는 사람이 부끄럽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항상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먼 훗날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도 즐겁게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나의 인기는 계속 되었고 나는 항상 친구들과 함께 건전한 생활을 계속 했었다.

나는 스케이트도 배웠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3~4학년 때 (11살 경으로 기억됨) 높이뛰기 1m를 넘어서자 체육선생님이 모든 학생들 앞에서 번쩍 안아들어 꽉 껴안아주시며 대견해하시던 모습과 우리 학교가 도에서 진행된 동기체육대회인 스케이트경기에서 2등을 하여 상품을 가득 탔고 선생님들이 기뻐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인내를 배웠고 친구를 사귀고 서로 도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겪었다.

제일 친하게 지냈던 정옥이와 길옥, 주옥(나의 공부경쟁 대상이었다, 라이벌)혜련이와 용순, 춘희, 두 명의 명화와 명숙, 바로 윗 집에 살던 순옥, 영복, 철숙!

그리운 친구들이다. 다들 꿈에서도 보고싶은 친구들이다.

통일의 그날 모두가 살아 있어주길 바라고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정의에 불탔던 나!

나는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아이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농촌지원을 갔었는데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우리 반이 열심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공수를 적게 줬다.

나는 농민 자녀가 아니라서 공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주는대로 받아가지고 학교로 왔는데 다음날 담임선생님(정연옥)이 날 부르더니 왜 다른 반보다 실적을 적게 받아왔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났었고 그날 애들 몇 명을 불러 밤에 농장 밭으로 가서 파밭을 다 뒤집어 엎었고 파를 싹 뽑아버렸다.

다음날 농장 반장아저씨한테서 용서를 받아냈고 왜 모른다고 우리를 속였냐고 따졌고 우리가 한 만큼의 공수를 받아내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담임선생님을 조금씩 미워하는 맘이 생겼다.

선생님은 매번 다른 학부형들에게서 개인 부탁을 해서 뭘 가져오는 심부름을 항상 내게 시켰고 친구랑 나는 수업에 빠지면서 늘 그 아이들 부모님들의 직장에 물건을 받으러 갔다 와야 했었다.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인민학교 4학년 자연시험을 보던 날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르쳐준 것도 못썼다고 하면서 정신 아찔할 정도로 당신이 숨이 차서 헉헉거릴 정도로 정신없이 때렸다.

그날 친구들이 얻어맞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울었고 시험을 잘 못 봤다는 이유로 아니 선생님은 당시 운퇴 준비를 하던 시기였는데 반을 학교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시켜놓고 그걸로 명예퇴직을 준비하고 싶어 했었는데 우리들이 미처 그 의도에 못 따라 준 것이 죄가 되어 학급의 반이상 학생들이 매를 맞아야 했다.

어떤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맞는 것을 보고 기절 했었고 우리는 그날 반 전체가 울었던 걸로 기억하며 그때 난 처음으로 선생님이 미웠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시장에서 양념재료 장사를 하는 담임선생님을 여러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선생님 물건을 사지 않았다.

아직 내 마음에 응어리가 덜 풀렸던 것이다.

 

중학교시절의 추억들

중학교에 올라온 후 나는 좀 더 활동 범위가 넓어졌고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나의 중학교 첫 담임선생님은 량준옥선생님이었다.

나에게 많은 교육을 해주셨지만 그 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점은 반항의 싹을 키워주셨다는 점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어른을 비교해 욕을 하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엉뚱한 비교를 하셔서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게 만드신 장본인이시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늘 나에게 뭔가 말 못할 질투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았다.

머리를 잘 깎고 학교로 가면 13살도 되나마나한 나에게 연애하려 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고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 한거냐’는 표현도 서슴없이 하셨다.

나는 화가 났었고 그 화를 선생님에 대한 반항으로 풀었다. 담임이셨지만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에 대한 불평을 나를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표현을 하였다.

담임이 앞으로 가라고 해도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친구들은 가지 않았고 잘못을 빌었는데도 학교 수업에 안 참가시킬 것이라고 위협을 주기도 하셔서 나는 집에서 일주일간 학교로 가지 않은 적도 있다.

매일 같은 반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그날그날 배운 내용과 있었던 일들을 다 알려주었고 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담임선생님은 급기야 나를 반급 간부가 아닌 학교급 간부로 놔주기도 했었다. 하여 나는 학교 소년단위원이 되었고 13살 때에 전교 1200명 정도가 내는 학교 꼬마자금 관리를 비롯해서 학교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었다.

14살 되던 해 담임은 질투하여 학교 소년단지도원과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다시 나를 반으로 끌어들여 학급반장을 시켰고 나는 강하게 거부를 하였으며 하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었다.

하여 우리 반은 몇 달간 결여된 상태로 대리 반장이 인솔을 하는 상황까지 연출해냈다.

나는 반항으로 학교전체가 가는 야외활동중의 한 프로그램인 바닷가에 가는 것도 가지 않았고 반 전체 46명중에 70%에 달하는 아이들이 나를 따라 바로 옆에 따로 놀러가서 담임선생님의 위신을 떨어뜨리기도 했었다.

선생님은 나의 성적을 가지고 내게 벌을 주려고 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 일로 인해 담임은 학교 측으로 부터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수학을 맡았던 선생님은 자신이 맡은 과목이란 점을 이용하여 이유없이 내게 부당한 성적을 매겼었는데 그 외에도 외국어와 국어 중요 과목들에 대한 점수를 마음대로 수정하였었는데 운이 없게도 선생님 일을 도와주던 학생이 내게 와서 그 점수들을 알려줬고 나는 해당 과목 담당선생님들께 찾아가서 성적에 대해 알아봤으며 결국 학교까지 상정되어 학교 측으로 부터 담임의 부당한 행위는 심한 질책을 받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철이 든 지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에 대한 섭섭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왜 그러셨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속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나를 위한 배움의 과정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교 도서 책임자는 물론이고 체육활동에도 꾸준히 참가 하였고 가장 잘 한 것은 클라리넷을 배워놓은 것이다. 훗날 나는 전교는 물론 우리 구역에서 하나 밖에 없는 클라리넷연주자가 되어 각 학교는 물론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도 가르쳐 줄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 사로청부위원장을 맡아 우리 학교의 명예를 빛내는 일에 앞장서서 충실히 나의 모든 사명을 수행하였다.

가장 고맙고 감사했던 스승은 강만호음악선생님과 내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내가 잘못하면 함께 조용히 불러 타일러주시고 울기도 해주신 김복녀국어분과장선생님(훗날 선생님은 인민학교 부교장으로 승진) 최근 입국자를 통해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하마터면 비뚤어진 길로 걸어갈 뻔한 나를 매일 함께 집으로 오는 길에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분이라서 잊을 수 없으며 언젠가는 꼭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계속되는 담임의 변경으로 조금은 혼란을 겪기도 했었다.

량준옥선생님의 출산 휴가 때문에 잠시 우리를 맡아서 정말 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차근차근 일깨워주신 하여 학급을 학교에서 가장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반으로 이끌어주신 홍명희선생님! 짧은 기간 임시로 우리를 맡아주셨지만 선생님은 우리에게 여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것부터 우리의 인성을 바로잡아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아쉽게도 선생님은 우리반 임시담임이시라 담임선생님이 다시 오시여 우리 반과 헤어져야 했다.

다음으로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주신 김선생님(이름은 잘 기억이 안남)!

아버지의 회사 재산을 자신의 개인 사유재산처럼 생각하며 내게 학교 건설을 위한 일에 시멘트와 벽돌, 모래를 학교에 가져오지 않는다고 그것도 남녀 전체 앞에서 일으켜 세워놓고 깍쟁이라고 욕을 하시던 잊을 수 없는 선생님!

결국 나는 그 선생님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그 후 바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으며 여전히 나의 기억속에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같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을 남겨주신 이운복선생님!

선생님은 연세가 있으셨지만 참으로 정 많고 따뜻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반 전체 아이들의 학적부기록을 하면서 내게 쓸 단점이 없어 고민이셨다고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사춘기에 들어서 학생들이 선생님 속을 썩여 졸도하신적도 있으신데 일찍 철든 나를 붙잡고 정말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생님을 도와 도망간 애들을 찾아 농촌의 시골길을 40리 넘게 달려 역전으로 애들 찾으러 가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길가에서 만난 한 농장사람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초대받아 그 집에서 선생님을 위해 개까지 잡아주셨는데 그때 선생님은 내게 정말 고맙다고 하셨다. 나 같은 제자를 둬서 행복하시다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되라고...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마지막으로 나의 인생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 주신 최일삼선생님!

선생님은 내게 올바른 교사의 자세를 보여주셨고 나를 위해 정말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셨다.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에 질투를 느낀 학생들속에서 없는 일을 만들어 나를 따돌리려고 했었는데 처음에 그 상황을 모르고 선생님은 나를 불러 물어보셨고 내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드렸더니 이해를 하시고 나를 모함하려 했던 학생들을 불러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다. 내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할 때 선생님께서는 나의 어머님 편에 계란을 사서 몸보신에 도움이 되게 써달라고 해주셨고, 농촌지원기간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특별히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명절때마다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와 함께 하시기를 즐거워하셨고 졸업당시 내가 허리 때문에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학교에서 잘 해주려는데 왜 이렇게 병이 낫지 않느냐며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와 눈물을 보이기도 하셨다.

그때 방안에서 그 광경을 다 목격한 나는 포기를 하지 않았고 꼭 치료를 해서 다시 걸어야 겠다고 의지를 키울 수 있었으며 그 의지가 있어 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아 지금처럼 이렇게 다시 걸을 수 있었으며 훗날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선생님이 바라는 그런 바른 삶을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훗날 선생님은 내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나의 동생들을 위해 사소한 모든 일도 다 원만히 해결되도록 도와주셨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사망후 나의 동생들에게 아버지같은 자리를 채워주신 분이시다.

성공한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어 2001년 내가 마지막으로 북한에 갔을 때 선생님을 뵙지 않고 나온 것이, 보다 나은 모습으로 찾아뵙기를 희망하며 만나지 않고 온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도 나는 맘속으로 약속한다. 계속 열심히 살아서 나중에 꼭 선생님께 기쁨을 줄 수 있는 그런 제자가 되어 찾아뵙고 큰절을 올리리라...

참고로 나는 독립심이 강한 소녀였었다. 나는 유치원시절부터 졸업하는 시기까지 약 11년 교육을 받는 동안 한번도 부모님이 책과 연필을 사주신적이 거의 없다.

나는 내가 운동대회에 참가해서 받은 상(책과 연필 그리고 일체 학용품)으로 쓰기도 했고 또 같은 반의 친구들을 통해 늘 부족한 걸 채웠었다.

 

꿈을 향한 나의 도전과 새로운 나의 인생

사회에 나온 후 내 꿈은 막연하게 그냥 무조건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돌아보는 것으로 꿈은 좋았지만 목적이 없었다.

단순히 그냥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훨훨 날아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러다보니 나의 인생은 절제가 없었고 목표가 없다보니 방황도 많이 했었고 정체성을 몰라 정말 인생바닥의 나락에 까지 내려가 보기도 했다.

북한의 식량이 어려웠던 1998년 나는 처음으로 국경을 몰래 넘었으며 하루하루를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불법으로 밀입국한 죄인이라는 죄아닌 죄때문에 늘 불안했었고 나는 마실 줄도 모르는 술도 마시게 되었으며 매일 술에 의지하여 목적 없는 날들을 보냈었다.

그 과정에 잘못된 판단력 때문에 나는 친구들을 따라 목적 없는 날들을 살았다.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이고 잘 된 것인지도 몰랐고 내가 사는 이유도 몰랐다.

나는 북한과 중국을 여러 차례 강을 몰래 건너다니면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잘 몰랐으며 오직 부모형제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만 빠져 살았다.

나는 그때 처음 목표였던 비행기를 타고 다녀봤지만 뿌듯함과 꿈을 이룬 것에 대한 성취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식당에서 일을 할 때도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여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과 동등한 월급을 받았고, 일하던 식당에 도둑이 들어 수천원의 돈이 없어져 경찰이 출동했을 당시에도 사장님은 목숨걸고 나서서 나를 옹호해주셨다.

북한사람은 절대로 도와주면 안된다는 인식의 변화를 주기 위해 진심으로 일을 했고 1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받으러 가서 그 돈을 받았을 때도 단돈 한푼도 유실없이 전액을 사장님께 전해드렸을 때 사장님은 내게 물어왔다.

“왜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지 않았냐고?” 나는 사장님의 질문에 “나는 북한에서 왔고 내가 이 돈을 가져가게 되면 당신들은 나 개인의 이름으로 나를 욕하지 않고 전체 북한 사람들을 빗대어 욕할꺼란 걸 잘 안다. 나는 북한에서 왔지만 결코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사장님은 나를 인정해주셨고 후에는 아예 식당 영업을 전적으로 내게 믿고 맡겼다.

그러다 나는 중국공안에 잡혀 감옥에서 50일을 보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내가 살아야 할 목적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찾게 되었다.

나는 중국에 머물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의 도움으로 북송을 피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남편과 중국친구들의 끝없는 관심과 노력으로 생사귀로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당시 얻은 답도 결국은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인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크고 작은 일들을 도모하고 있다.

이 기간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좋은 시간이었고 생명의 소중함과 나는 나를 돌이켜 보았으며 진정한 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 다른 내 꿈과 나의 비전에 대해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 인생을 다시 설계하였으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였고 반드시 실현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드디어 나는 그 새로운 꿈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으며 한국으로 입국을 이룰 수 있었으며 새로운 나의 꿈을 펼치기 위해 희망의 날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입국

나는 2002년10월말 중국을 떠나 태국에 도착했으며 태국에 도착하여 몇 달간 머물다가 2003년 2월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겨울의 새벽공기를 마시며 도착한 대한민국은 내가 아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어릴적부터 받아온 쇠뇌교육으로 가난하고 스러져가는 판자집만 많다고 알고 있던 이 땅이 중국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내가 상상하던 그런 세계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천국이었다.

곳곳에 반짝이는 밝은 불빛들은 마치도 갈길 몰라 망망대해에서 헤메는 나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이 다가왔다.

나는 드디어 나의 희망의 나라에 왔다고 생각하며 목적 없이 목숨 부지만을 위해 부질없이 살아온 지난날을 접어두고 다시 새 인생 출발을 하자고 결심 했다.

 

나의 사랑 나의 남편과 결혼

나는 사회에 나온지 보름만에 결혼을 하였고 남편은 나와 나이차가 조금 있긴 하지만 2000년도부터 꾸준히 나를 위해 말없는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온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남편은 한국에서 태어나 학력은 그리 높지 않으나 성실함과 노력하나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건설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오랜 현장경험으로 여러 건설을 도맡아 수행할 정도의 기술소유자다!

내가 본 내 남편은 참으로 자랑할게 많은 사람이다.

그는 인내심이 대단하며 때론 지나칠 정도의 집요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가끔 살면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편보다는 그 집요함이 얻어내는 결과는 더 좋은 성과를 이뤄내기도 한다. 나와의 결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다들 반대했다고 한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내가 북한 사람이란 걸 알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 후에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을 늘 함께 나눠지기도 했다. 하여 나의 짐은 가벼워졌고 나는 늘 뒤에 남편이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남편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끝까지 나를 믿고 기다려줬으며 훗날 우리가 결혼을 할때 주변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99.9%가 나에게 이용당하고 나중에 내가 한국에 나오면 버릴꺼 라고 그를 만류했지만 나와 남편은 결혼도 하였으며 지금껏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사람들은 마지막 0.1%를 뒤집은 사람들이라고 우릴 볼 때 마다 이야기 한다.

살면서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우리는 힘들고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며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위해주고 배려하고 감싸주면서 행복한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생활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현명하게 잘 이끌어주고 늘 나를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하며 내게 든든한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어 말없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는 남편에게 나는 감사함을 느끼며 산다.

 

나의 학교 생활

나는 지금 사회복지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다.

돌아보면 참 잊지 못할 추억이 가득한 대학시절이다.

학사에 이어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매일 내겐 전투장에 투입된 군인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한국에 입국하여 나는 비교적 한국사회생활에 잘 정착한 편이였다.

입국후 병원에서 3년간 간호조무사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고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한 후 복지관에서 같은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그들의 정착지원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

학교생활 과정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내심을 많이 키웠다는 점이다.

겸손함과 양보심, 자제력 향상! 이것이 대학, 대학원생활 과정에 얻은 것 중에 가장 큰 성과다.

주변에 소중하고 귀한 인연들을 많이 만들었다. 한국에 입국 후 하나원에서 처음 만난 분과 맺은 인연이 10여년 넘게 이어오고 있으며, 그 분의 연구를 위한 일에 나와 연구자도 놀랐고 외국의 교수님들까지도 놀랐을 만큼 수십명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도 했다.

남편의 직업 특성상 매월 일정치 않은 생활비에 의지해 살아야 함에도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 하지 않았고 대학과 외부 여러 재단의 장학금 혜택은 내게 보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도전하게 해준 감사의 선물이었다.

이 외에 북한과 관련된 많은 활동에 참여했고, 끊임없이 꿈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자기개발에도 충실했고 늘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 지원하는 사람들, 여성정책연구원 생활체감정책단 활동, 한국여성정책연구소, 제3회 국제한류학술대회 참석 등 다양한 단체 활동과 연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 수상, 개근상, 최우수상 수상 및 수료, 그리스도대학교 총장상 및 우수활동상 수상, 통일부 하나원장상 수상 등 입국하여 참석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성실히 임하여 상을 수상하였다.

나는 여러 교육과정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으며 대학생활기간에 중국을 비롯한 국내`외의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었으며 마음먹고 열심히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편이다.

나는 조금 부족하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나의 꿈, 나의 사명

나의 꿈은 이제 명확성을 찾았다.

지구한바퀴 돌아보고 싶어 시작된 어린시절 작은 꿈은 이제 20여개국을 돌아본 것 만으로 이미 모두 이룬거나 다름없다. 무턱대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었다면 지금 그 꿈에는 목적이 생겼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찾았다.

나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아와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며 특히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인권대변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열심히 배울 것이며 말로써가 아닌 실천 행동가로서 발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은 다 찾아다니며 봉사와 사랑을 전하며 내가 가진 것의 일부라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오블리스 노블리제(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과 행동을 한다라는 뜻)정신을 본받아서 Give and Take!를 실천하겠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말로써가 아닌 내 마음의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지금 영어가 조금 약하다. 하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이며 나는 그 꿈을 향해서 끝없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꿈은 북한을 위해 내가 북한 사회복지를 위해 전문가로 준비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기아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에 나의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며 장래에는 전 세계 여성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인권대변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매일 나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이며 더 많은 책을 읽고 학문의 폭을 넓혀갈 것이며 체계적으로 학습해갈 것이다. 어느 한 과목도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학습하여 학문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갖춘 전문가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나의 양심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며 부끄럽지 않게 온전한 나의 지식을 채워갈 것이다.

나는 북한이탈주민의 명예를 걸고 한걸음을 옮겨도 바른 삶을 살아갈 것을 나 자신에게 약속한다.

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교회를 선택하는 문제는 심사숙고하여 절대로 중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믿음으로 준비하여 말씀대로 행동하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 인간으로 내 생이 다 하는 날까지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끝으로 나는 행복하며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며, 나는 할 수 있다. 나에게는 희망과 용기, 끝없이 도전하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통일주역으로 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오늘에 충실할 것이다.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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