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 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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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 김은미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새로운 환경 속의 새로운 시작
인천공항에 내려 내가 보게 된 세상은 천국이었다. 한국 사회는 너무도 발전되어 있었고, 이 곳에서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국 땅을 밟았다는 설레임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나는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원 교육을 마친 후 서울에 집을 배정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신분증을 받았을 때 설레임 보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과연 나는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서 살아가야 하나? 나는 무엇부터 해야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더니 마침내 처음 가졌던 희망과 포부는 사라져버렸다.
우리 부부의 유일한 꿈이자 희망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남부럽지 않게 잘 키워 대한민국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그 꿈을 위해 우리 부부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지만 꿈을 이루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체제와 문화가 서로 상반된 곳에서 자그마치 37년을 살아왔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중학교 교사생활까지 했던 나였지만 그런 것들이 이곳에서 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2002년 12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처음 일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주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손님들은 내 말투에 놀라 주문도 하지 않고 이상하게 쳐다보기 일쑤였다. 하나원에서 대한민국 문화에 대해 교육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다. 보다 못한 사장님은 나를 주방으로 보냈다. 손님과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부엌에서 설거지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속은 상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렇게 식당일을 시작한지 20일만에 음식 먹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몸이 너무 아파 나는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내겐 누워있는 것조차 사치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는 나는 눈물로 베갯머리를 적셔야만 했고 이런 내 자신에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2001년 12월, 중국 내몽골에서 검거되어 북송되기까지 4개월 동안 내 몸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4개월, 짧다면 짧은 시간일 수도 있었지만 나에게 4개월의 시간은 마치 수십 년처럼 길게만 느껴졌었다. 2~3일을 굶는 것은 허다했고, 쫓겨다니는 처지여서 편하게 누워 잠을 청하지도 못했다. 항상 긴장한 채로 지내야했기에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었고, 중국 공안을 피해 다니는 과정에서 다리까지 다쳤다. 그래서 아직까지 다리가 온전히 펴지지 않아 계단을 오를 때면 송곳이 무릎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갔지만, 감기라고 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집에서 누워있을 수만은 없어 나는 남편과 함께 세탁소에 다니게 되었다. 평소 미싱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좋은 기회다 싶었다. 그곳에서 3개월 정도 미싱에 대한 기술을 익혔고, 남편은 밤늦게까지 배달을 하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고 점포를 차릴 욕심이었지만 4천만원이라는 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내 욕심도 이내 날아가 버렸다. 당시 내 월급 30만원으로 4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으려면 한푼도 쓰지 않고도 10년 이상을 모아야 했다. 하지만 30만원은 한 달 생활비조차 모자라는 돈이었다.
“우리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꼭 우리만의 가게를 차려요.”
남편과 나는 서로를 격려했고, 훗날을 기약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건강지킴이 “종근당”과 함께
탈북과 북송, 그리고 탈북이라는 수차례 반복되는 과정에서 얻은 병은 여전히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의 상의 끝에 큰 마음 먹고 건강 검진을 받아보기로 결심하였다.
“폐결핵입니다. 몸의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요. 약을 먹고 푹 쉬면서 몸조리 하셔야 합니다.”
폐결핵이라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병이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약했었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나니 몸이 떨리고 소화도 안되었다. 편히 쉬어야 낳는다고 했지만, 나는 편하게 누워 있을 형편이 못되었다.
과학연구소와의 면담이 있어 양재동에 가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남편은 밖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차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정보지의 직업소개소 광고란을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직업소개소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냥 훑어볼 생각뿐이었다.
대부분의 직업이 기술을 요하거나, 나이 제한이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숙식을 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이 많은 구인란 광고에 나를 찾아주는 곳이 한 곳도 없다니……. 이 땅에서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정보지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한 광고가 내 눈에 들어왔다.
‘주부사원 구함!’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니 무엇보다 출퇴근 시간이 일정해 나에게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내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문의를 해보았다. 내가 면접을 보러가게 되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소 냉소적이었다.
“거기 다단계 아냐? 괜히 돈만 뜯긴다구. 조심해.”
입사조건이 좋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다단계 회사일거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 때 나는 다단계 회사에 빠져 정착금까지 모두 날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 가서 다단계 회사인지 아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탈북자라고요? 이 곳 사람들조차 힘들어하고, 꺼려하는데는 직업인데 해낼 수 있을까요. 사람을 상대로 세일즈 한다는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 종종 봤죠? 그 정도의 용기조차 없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게 좋아요.”
“살겠다는 생각 하나로 목숨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우선 저에게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3달의 시간만 주십시오. 그때가서도 그만두라고 말씀하시면 선생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사람 많이 만나려면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고, 무엇보다 건강식품을 파는 일인데 몸이 그래서야 해낼 수 있겠어요.”
“이 회사 제품이 정말로 좋다면 제 몸을 실험 삼아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파는 사람이 제품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말들을 술술 내뱉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이게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요. 일은 어렵지만, 자기가 판매하는 만큼 이익을 가져갈 수 있어요. 그야말로 능력만큼 벌 수 있습니다. 한 번 잘 해봅시다.”
그때부터 나는 세일즈맨으로서, 북한에서 온 가정주부로서, 대한민국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면접을 보던 처장님이 나를 50대 중반의 나이로 보았다고 했다. 살면서 얻은 고생과 아픔이 얼굴에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젊음을 되찾았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사고와 나를 재발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삶의 활력소로 작용한 것 같다.
첫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투박한 함경도 말투를 고치는 일이었다. 서울말은 들으면 닭살이 돋을 정도로 어색했지만 주 업무가 전화상담이었기 때문에 의사전달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화 받은 사람들은 내 말투 때문에 종근당을 빙자한 회사에서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고, 심지어 장난 전화로 착각해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기죽지 말자. 한 달이면 고칠 수 있어.”
나는 그때부터 회사에서 전화를 제일 잘 받는 상무나 국장의 전화를 녹음해 두었다가 반복해서 들으면서 받아쓰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수십번, 수백번 반복한 끝에 2달째부터는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고 3개월이 되어서는 서울말이 아주 편안해졌다. 이 때 ‘힘들다, 못하겠다’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졌다.
영업이라면 큰일인 줄 알고 지레 겁부터 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자유를 찾아 그 어떠한 위험까지도 무릎쓰고 탈북이라는 커다란 벽도 너끈히 넘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았다.
한 조직의 책임자가 되다
국장이 되고 나서 3개월만에 강사로 선발되었다. 강사의 자질에 대한 교육을 틈틈이 받으며 나의 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반복되는 연습과 훈련 속에서 다른 강사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실력을 다져나갔다. 강의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기도 했다. 직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곧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기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또한 강의하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신감을 갖기도 했다. 이렇게 강사로 일을 하다 마침내 2004년 1월 9일, 나는 상무로 승진하게 되었다. 말단 직원으로 있을 때와는 달리 상관이 되고 보니 여간 힘들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한 개의 조직을 이끄는 책임자가 되었다. 북한을 탈출할 때 부푼 꿈을 가슴속에 품었지만, 설마 내가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중국에 있으면서 텔레비전, 라디오 그리고 입 소문을 통해 대한민국에 가면 정착금도 주고 편히 살게 해준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한 말에 나뿐만 아니라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대다수의 탈북자들이 그 말을 믿고 대한민국으로의 귀순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초기 정착을 위한 편의를 제공할 뿐이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결코 무한한 편의를 제공해주는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유통회사를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에 온 많은 탈북 형제들이 자신의 현 위치를 냉철하게 판단하지도 않은 채 처음부터 월급을 따지기에 바쁘다. 자신의 위치와 능력 그리고 이 사회가 우리에게 배풀어준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당당한 구성원으로 거듭나기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탈북자라는 이유로 남들과 다른 기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곳은 그야말로 자유의 땅이면서 기회의 땅이다. 내가 한 만큼, 내가 능력을 가진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북한에서의 지위와 사고방식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옛 향수에 젖어 산다면 그는 분명 이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제야 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한민국의 삶은 제2의 인생의 시작이다. 첫 발을 내딛는 심정으로 자신을 낮춰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이곳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나의 발전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도 나는 전진할 것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탈북 형제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 30만원의 월급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열 배가 넘는 월급을 받는다. 게다가 상무로 승진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올해는 작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나은, 멋진 사업가로 거듭나기 위해 처장, 전무, 그리고 사장까지의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 나가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태어날 때부터 얻은 자유를 나는 수십 년만에 아주 어렵게 얻었다. 어렵게 얻은 만큼 나는 그 누구보다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안다. 나는 내 손으로 마련한 이 기회를 바탕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해 나갈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멀리 돌아온 길이지만 하늘은 분명히 나를 도와주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의욕과 성실함만 갖춘다면 그 어떠한 일이라도 꼭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간디는 ‘한 사람이 한 일이면 만인이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다(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라고 했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단지 스스로가 불가능을 만들뿐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힘껏 날개짓을 펴보자. 그리고 세상을 향해 소리쳐보자. 내가 왔노라고...나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마지막으로 김혁의 시 한편을 적어보고자 한다.
시내가에 우거진 풀을 뜯어서
곱게곱게 작은배 꾸며가지고
굶주리고 헐벗은이 모두 싣고서
눈물없는 그나라 찾아서 가자
어기영차 노 젖어라 삿대 젖어라
달려오는 순풍에 돛을 달아라
영남이 너도 예뿐이 너도
눈물없는 그 나라 찾아서 왔다
2005년 1월 김은미 씀
2005-03-14 10:17:21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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