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여대생의 좌충우돌 학교생활
작성년도 :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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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대생의 좌충우돌 학교생활
- 조현주
탈북 여대생의 좌충우돌 학교생활
프롤로그
2004년 12월, 한국에 온 지 만 3년이 지났다. 다른 탈북 동포들과 달리 나는 한국에 먼저 와 계셨던 부모님과 오빠의 도움으로 탈북한 지 1주일만에 바로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북한 땅을 벗어난 그 짧은 1주일 동안 나는 북한에서 18년 동안 살아오면서 배우고 느꼈던 것을 모두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제발 꿈이 아니길....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두 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인천공항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남조선은 어린아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하늘마저 음습한 그런 장소로 내 가슴속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인가?
창틀이 다 썩어 손으로 툭 치면 와장창 깨어질 것 같은 유리창만 보아오다가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인천공항의 어마어마하게 큰 유리창들을 보니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도저히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얼굴이 다 들여다보이는 바닥이며 너무 깨끗해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며 확인했던 화장실....정말 여기가 내가 알던 남조선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생겼다. 공항에 마중 나온 오빠의 바지가 다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공항만 번지르하게 지어놓고 실제 인민들은 찢어진 바지를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하게 생활하는 것이 남조선이란 말인가? 정말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틀린 것이 아니구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중에 그것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유행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내 상식 으로는 왜 멀쩡한 바지를 찢어서 입고 다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문화충격!
그렇게 나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첫 출근의 설레임을 뒤로하고
하나원을 나오면서 나는 집에서 무작정 놀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아는 분께 취직을 부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기특하게 여겨서인지 사회에 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작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지금도 첫출근 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첫출근 전날 저녁부터 오빠에게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놓고 물어가며 머리 속에서 몇 번이나 익혔던 출근길이건만, 막상 실제로 지하철을 타보니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꼭두새벽에 지하철을 타려는 사람이 내가 살던 고향 장마당이 한창일 때 모였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사람들을 헤집고 지하철을 타기는 했지만 그 다음부터가 또 첩첩산중이었다. 처음 타는 지하철이라 불안한 마음에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곤 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름 아닌 내 말투 때문이었다. 하긴 북에서 온 지 보름도 안된 열여덟 탈북소녀가 순화되지 않은 강한 억양의 북한 본토 사투리로 당당하게 옆사람에게 길을 물어보았으니 나 같아도 신기해서 쳐다보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한에서의 첫출근길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어렵게 어렵게 출근을 해서 직장에서 내가 했던 일은 청소와 서류복사 등 크고 작은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 10시간씩 일하다보니 퇴근할 무렵에는 파김치가 되어 있곤 하였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졸다가 다음 사람 노크소리에 놀라 깨기도 하였고 과일을 깎으며 졸다 손이 베이기도 하였으며 사장님방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방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서 잠이 들어 야단을 맞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뒤 내 손에는 첫 월급 50만원이 주어졌다. 그때 받은 한국 돈 50만원이 왜 그렇게 크게만 느껴지던지....
주위에서 한국에서는 첫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한다는 말을 듣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그리 흔하지 않은 붉은색 내복을 살 때 가졌던 뿌듯함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노력해서 번 돈으로 사랑하는 내 가족의 선물을 살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난 18년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생각도 들었지만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삶의 기회를 마냥 허비할 수 없다는 다짐으로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회사생활을 해나가면서 한가지 절실히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서는 그냥 몸으로 부딪히면서 일을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한테 한국 분들 한분 한분이 해주시는 말씀은 거의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그분들이 언제나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은 어린 나이에 일하고 돈버는 것도 좋지만 일단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르는 것이 많다고 느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단어 중에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커뮤니케이션’은 또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의 무식함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말수도 적어지며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마다 주위 분들이 친절히 가르쳐주었지만 그것도 나한테는 왠지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공부를 하기로....열심히 공부하고 대학졸업해서 당당하게 내 힘으로 회사에 들어가 내 능력껏 일하리라 마음먹었다.
기억하기 싫은 ‘새내기 배움터’
회사를 그만둔 때가 12월....그때부터 이것저것 여러 가지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책상에 앉아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했고 이런 기회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다행히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면접만 보고 입학할 수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 외국인이란 말을 들었다면 그렇게 서운했으련만 사람의 마음은 참 오묘한 것이라 그냥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이 혜택을 꼭 사회에 돌려주리라 마음먹었다.
합격통지서를 받자마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인 ‘새내기 배움터’.... 일명 ‘새터’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학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얼굴도 익히며 여러가지 학교생활에 꼭 필요한 사항들을 가르치는 곳이라 해서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참석하였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나의 말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사투리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써왔기 때문에 친구들은 내 말을 듣자마자 어디서 왔느냐며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음... 난 말이야 그러니까....중국....중국에서 살다가 왔지.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연변 쪽에서 쭉 살았거든....”하며 능청스럽게 둘러대기도 하였다. 첫날 도착해서 조를 나눠서 장기자랑도 하고 게임도 하고 노는데 나는 그냥 구경만 할뿐이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이야기하는 한국 친구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도 없었고 어쩌다 게임에 참가할 때면 계속 틀리기만 하니까 친구들은 아예 나를 제쳐놓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한국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이렇게 허물없이 잘 어울릴까?” 그들의 생기발랄함과 열정에 비해 나는 정말 완전히 딴 세상에서 살다온 세련되지 못한 나약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1박2일간의 처절했던 “새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조차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날 난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좌절감’이란 단어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이래서는 안돼" 그렇게 펑펑 울며 하염없이 떠올렸던 말이다.
Hi !
3월부터 본격적인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캠퍼스의 낭만’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낯설고 이국적인 학교 생활에 푹 빠져 지냈던 시기였다.
학교 강의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영어 시간이었다. 영어수업 시간에 외국인 교수한테 머리 숙여 90도로 인사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손을 살짝 들어 흔들며 그냥 “Hi"하는 것이 인사의 전부였다. 이 낯선 광경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수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새터’에서의 악몽이 떠올라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수업이 전부 영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이래서는 안돼”를 되새기며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님을 찾아가 내가 북한에서 온 탈북자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강의하실 내용을 미리 알려주시면 미리미리 공부해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무척 반가와 하시며 친절히 알려주셨고 그런 자세라면 틀림없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까지 해주셨다. 영어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는 나로서는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었다. 외우고 또 외우면서 외국에서 살다온 같은 학번 친구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친구를 만나 다음 시간에 공부할 내용을 배우곤 했었다.
정말이지 나에게 영어수업은 1시간 이상을 운동한 것과 같은 강도의 ‘노동’이었다. 그렇게 ‘노동’을 계속한 결과 그래도 지금은 한국 대학생들만큼 그렇게 유창하지는 않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다가서기
학교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나는 ‘새터’에서 같은 조였던 친구들이랑 강의시간표를 짜고 수업도 함께 듣게 되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물어볼 것이 그만큼 많았던 나로서는 그러나 쉽사리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만큼 중국에서 살다가 왔다고 말했음에도 “너 정말 어디에서 왔니?” 하며 집요하게 물어보는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말해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나 북한에서 왔다고....
친구들은 처음에는 눈이 휘둥그래 해지며 북한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그리웠던 나는 하나를 물어보면 열 가지를 대답해주며 친구들과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마치 앓던 이를 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또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정말 북한에 있는 친구들이 그리웠다.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친구들이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서운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북한에 있는 내 친구는 이렇게 해주었을텐데”, “누구는 그렇게는 안했을텐데” 라고 중얼거리며 책임을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만 돌리곤 했던 것 같다. 사실 한국에 와서 몇 달 지나지 않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는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나한테 다 잘해주시고, 다 이해해주시며 도와주곤 해서 나에 대한 관심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스스로 다가가는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친구들이 먼저 도와주기만을 바랄 뿐 내가 먼저 손내밀며 도움을 요청하는 적극적인 노력없이 마냥 소극적으로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잘 해나가야지만 학교생활도 잘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생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달라지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어색한 나의 말투부터 바꾸어야만 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혼자서 음계를 그리며 말투의 높낮이를 가늠하며 서울말을 익히려고 노력했고 친구들은 그런 나의 노력에 호응이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내 말투에 놀라워하며 조금씩 나에게 다가와 주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A학점을 받고
그렇게 1학기를 마치고 성적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며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남아있기도 하였고 시험 기간에는 누구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자부했기에 내심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을 확인한 결과, C가 두개나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만 주루루 흘러내렸다.
우수한 한국학생들과 함께 공부해 나가기 위해서는 남들에 비해 두배 세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다시는 C가 들어있는 성적표를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날로 학교서점에 가서 2학기 전공교과서를 모두 사왔다. 방학동안 낮에는 도서관에서 2학기 전공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렇게 두 달에 걸친 여름방학을 보냈다.
2학기 개강이 되면서, 나는 예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자신감을 가지고 강의를 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을 구할 때까지는 계속 일을 해야한다는 아르바이트 사장님의 말 때문에 밤 12시까지 일하고도 학교가 먼 탓에 새벽 6시 45분에 집에서 나오는 생활을 2학기 내내 해나갔다. 어떤 때는 졸다가 몇 정거장을 지나치기도 하였지만 그 대가는 2학기 성적표로 보상을 받았다. 그렇게도 바라던 A학점으로 내 성적표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이 글을 쓰기 전에 정말 열심히 살고 계시는 다른 탈북 동포들의 글들을 읽어보았다. 한국 땅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고 계시는 동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내 마음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이 순간 그분들께 다시 한번 “화이팅”을 외쳐드리고 싶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앞서 글을 쓰셨던 분들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멋지게 성공해 있어서가 아니라 그동안의 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이 글은 내가 공개적으로 다짐하는 어길 수 없는 약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전에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모두 꺼내어 보았다. 확실히 최근에 찍은 사진이 예전에 찍은 사진보다 웃는 모습이 훨씬 많다는 것을 느낀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웃게 만들었을까? “자신감”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일도 웃으면서 해낼 수 있는 나만의 여유, 나만의 자신감이 생겼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내가 북한에서 온 사실을 아시는 분들은 “이제 한국에 적응을 다 했니?” 하고 물어보시곤 한다. 적응을 한다는 것! 어찌보면 정말 주관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아직 멀었다고 말할 것이며 이제 완벽한 한국사람이 다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위의 평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지만 더 배우려고, 더 열심히 하려고 항상 노력하는 내 모습...... 그리고 어딜 가든 북한사람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한국에 와서 살고있는 많은 탈북동포들은 하루밤사이에 우연히 이 곳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 오려고 그만큼 노력하고 준비하고 기대하였기에 여기 기회의 땅 한국에 오게 되셨으리라고 믿는다. 이 땅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초심을 잃지않고 열심히 생활한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에게 오고 있는 이 엄청난 기회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루어 열심히 산 내 자신에게 감사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04. 12월 조현주 씀
2005-02-16 11:55:04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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