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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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
- 최춘명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입국한지도 이젠 3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 생활은 흐르는 물처럼 평범하게 흘러간다.
내가 이 남한에 와서 가장 강하게 받은 충격은 자유와 선택에 대한 고마움이다. 저 북녘 땅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자유로움, 그리고 나의 선택에 따라 생활을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이러한 사회에서 내 후반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그저 꿈만 같다.
대한민국을 오늘과 같이 건설하는데 나는 벽돌 한 장 나르지 못했다. 고스란히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아 먹기만 하면 되는 염치없는, 그러나 복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때 북한에서 내 모든 것을 바쳐 헌신적으로 일한 것이 더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시 하송마을이다.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그 사회가 요구한 삶에 희망을 두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인생의 황금기라 부르는 20대 처녀시절, 나는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큰 포부를 안고 성진시에서 벼농사를 전문하는 하송농장에 자원 진출했다.
힘든 농사일이지만 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열성을 바쳤다.
20대 초반의 여인이 포전에서 살다시피 애지중지 벼 모를 키우고 가꾸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아름다웠던 것 같다.
북한에서 벼농사는 모두 사람 손으로 한다. 때론 모내는 기계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기름과 부속품이 없어 결국엔 손으로 하게 된다.
7월이면 무릎을 치는 벼에 종아리가 긁혀 시뻘건 뱀 지나간 자국이 생겨도 쓰리다는 생각을 가져 볼 새도 없다. 일이란 하고 싶어 하면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힘든 줄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악조건에서 어떻게 그 일을 즐겁게 하게 되었던지 스스로 의문도 들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 인생목표는 이러했다. 25살 전에 무조건 노동당에 입당하리라. 그 다음 벼농사 달인이 되어 농장을 이끄는 훌륭한 리더가 되겠다는 거였다.
나는 그럴만한 사회적 뿌리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웃 길주군 당 간부고 아버지는 하송농장 관리위원장이다. 나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었다.
그러던 우리 집에 시련이 닥쳐왔다. 내가 20살을 갓 벗은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 홍수로 제방 둑이 무너지는데 그걸 막으려고 사투를 벌리던 중 터져 나오는 흙탕물에 두 눈을 크게 다친 것이다.
지방병원에서는 이미 파열된 눈동자를 치료할 능력이 없어 평양 적십자 병원에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아버지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자연히 관리위원장 자리에서도 밀리고 우리 집도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식이란 나와 여동생, 이렇게 딸만 둘이라 아버지의 한숨은 그칠 줄을 몰랐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아버지 뒤를 이어 하송농장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런 희망마저 가질 수 없어 아버지의 실망은 더 커졌던 것 같다.
누가 안내하지 않고는 바깥출입도 변변히 못하던 아버지는 점차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시중을 드는 어머니를 이유 없이 구타하기도 했다. 평소 별로 즐기지 않던 술을 그때부터 입에 달게 되었고 일단 취하면 남편과 아버지가 아닌 ‘폭군’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지쳤다. 당시 18살이던 여동생은 군에 입대한 후여서 자상하게 아버지를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평생 농사꾼으로 일한 아버지의 솥뚜껑 같은 손이 내 뺨을 칠 때마다 나는 울면서 아버지께 매달렸다. 왜 이러시냐고, 이러시면 병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데 좀 진정하면 안 되냐고 하소연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방구들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 필요 없어! 너 같은 것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이냐, 으흐흐흐”
한생을 바쳐 받들어 온 당을 위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뒤를 이어 줄 아들마저 없으니 성 쌓고 남은 돌 같은 자신의 존재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도 더는 어쩔 수 없어 아버지를 포기하는 것 같았다.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시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길엔 살아 온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가득 담겼다.
“아버지는 일밖에 모르셨다. 23년 함께 살았지만 언제 한 번 가정을 위해 애정을 기울인 적이 없었어. 그저 수령 당 조국 그것이 아버지의 전부였지. 난 그런 네 아버지를 언제 한 번 탓한 적이 없었고. 그런데 이건 좀 너무하구나! 아들 낳지 못한 내 죄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지만 그게 어디 사람의 마음처럼 되는 일이냐? 이젠 나도 지쳤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서 아버질 받들어 온 나인데 지금에 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세뇌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아버지의 한생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나 역시 아버지처럼 그 길을 따라 나섰다. 당을 위해 한생을 바쳐 가는데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떠랴. 나는 이를 악물고 여린 여자로서 견디기 힘든 고비를 넘기며 열심히 농장 일을 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나는 끝내 농장 당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영광스럽게도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하였다. 그리고 청년작업반의 분조장, 얼마 후에는 작업반장이 되었다.
내 마음속엔 오로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장주인인 관리위원장이 되어 아버지 앞에 떳떳이 나서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도 달라지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후보당원의 된지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후보당원 1년이 지나면 정당원이 된다. 그 1년이란 준비기간 뭔가 잘못되면 정당원이 될 수 없다.) 40대인 작업반 부문당 비서가 나를 찾았다.
반장과 비서는 자주 만나게 되지만 이날따라 비서의 눈치가 이상했다. 말로는 작업반의 이러저러한 문제를 토의한다고 했지만 나는 여자의 감각으로 그가 지금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내 눈치 챌 수 있었다.
항상 만나면 마주 앉던 그가 이 날 밤만은 괜스레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치근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김을 풍기며 다가드는 비서의 행위가 역겨워 나는 그 자리를 피했다.
급히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뛰쳐나가는 나를 그는 분명 곱지 않은 눈길로 지켜봤을 것이다. 아니 감히 당 비서의 뜻을 거역하는 방자한 행위에 복수로 가슴 끓였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나는 비서가 보낸 밀봉된 작은 편지를 작업반원으로부터 전달 받았다. 무심히 밀봉을 뜯었을 때 나는 거기에 적힌 내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밤, 10시 우리 집에 들 릴 것. 집이 비었으니 노크 하지 말고 그냥 들어 올 것. 사실 나는 반장때문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니 제발 내 소원을 들어 달라.일 밖에 모르는 여자여서 한 남자의 가슴에 끓는 이 피멍의 깊이를 다는 알 수 없겠지만 이제 지내보면 알게 될 것이다.여자란 혼자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는 것. 무슨 일이던 뒤를 받쳐주는 믿음직한 동반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나는 반장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위해 그처럼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심으로 방조하고 싶구나. 내가 없으면 네가 무엇을 원하던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기다리겠다. 난 꼭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비서라는 사람이 지금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너무도 분명해 모멸감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포전으로 흘러드는 큰 수로 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뚝위에 앉아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는 서럽게 울었다. 무엇인가 갈쿠리 같이 무섭고 억센 것이 내 명줄을 쥐고 마구 조이는 것만 같았다.
내 곁으로 조심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작업반에 온지 얼마 안 된 제대군인인데 내게 남다른 관심을 보인 청년이다. 그것이 스칠 수 없는 순정임을 나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그 순간 왜 그렇게도 아직은 생소한 그 품에 안기고 싶었던지.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참으며 나는 퉁명스런 어조로 내쏘듯 말했다.
“무슨 일이예요? 여긴 어인일루? 얼른 가세요. 난 지금 혼자 있고 싶거든요.”
무겁게 가라앉은 그 남자의 말이 내 귀를 스쳤다.
“힘을 잃지 마오. 내 언제나 반장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달 쯤 지난 후, 그날 저녁에 작업반 전체가 모여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오락회를 했다. 한 달간 일한 정형을 총화 지은 후였다.
술 한 잔씩 마시고 나서 농장 원들은 신이 나서 노래 가락을 뽑았다. 모두 노래를 잘 불렀다.
내 차례가 왔다. 나도 왠지 기분이 들떠 또래 처녀들의 박수장단에 맞춰 춤까지 추며 노래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보천보전자악단 전혜영의 휘파람이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일어났다.
그런데 박수 소리는 요란했으나 나를 쳐다보는 많은 눈길은 어떤 사연을 담은 듯 냉정해 보였다.
나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그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조용한 나무그늘 속에 잡아 세우며 격하게 말했다.
“반장은 얼굴에 철판을 깔아 둔 거요? 부끄럽지도 않소? 어떻게 그럴 수가. 그렇게 흥겨운 춤이 대체 어데서 나오는 거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정말 몰라서 묻소?”
나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쳐다보는 내 눈에 또다시 가랑가랑 눈물이 고였다. 그것이 일순간 그 남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한결 부드러워진 그가 들려준 말은 곧 생벼락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작업반 선전실에서 누구누구와 방탕한 짓을 벌린 처녀 작업반장, 그러고도 새침 떼는 철면피한 여자, 저렇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가 어떻게 반장이냐, 옳아 그래서 어린나이에 반장을 하는 거겠지,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었다.
아, 모닥불을 뒤집어 쓴 듯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출 수 없어 그 남자에게서 황급히 물러난 나는 어디라 없이 정신없이 뛰었다.
아버지에게도 부끄러웠다. 역시 여자란 집안 재산일 뿐 밖에 나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정말 그것이 억울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지난 3년간 열심히 일해 왔건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아 나는 정말 그 순간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정말로 준비된 사람이었다면 모든 것을 모르는 척 참아내며 그냥 일에만 충직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누가 이런 소문을 냈는지 밝히고 싶었다. 찾아서 따져 묻지 않고서는 순간도 편히 숨 쉬고 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나는 그 소문의 시작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끝내 소문의 출처가 다름 아닌 부문당 비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나로서도 나를 걷잡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열린 또 다른 총화 마지막에 나는 연단에 올라가 열변을 토했다.
“나는 지금까지 당 조직을 어머니 당으로 알고 오로지 당을 위해 한목숨 바치려는 각오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뗀 후 그간 있었던 모든 사실을 전 작업반원 앞에서 쏟아냈다.
그 자리에는 당사자인 부문당 비서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익은 꽈리처럼 벌겋게 변해갔다.
자기 욕망이 거절당하자 비열하게도 헛소문을 돌려 한 젊은 여성의 정치적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이런 치한이 어찌 당 비서라는 호칭을 달고 행세할 수 있냐는 규탄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졌다. 듣다못해 그가 손을 번쩍 쳐들며 일어섰다.
“반장이 지금 제정신을 가지고 말하는 거요? 누가 누구를 어쨌다는 거야?”
“듣고도 모르겠어요? 아직도 내게는 당신이 준 그 치사한 편지가 그대로 있어요. 자, 이것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그 쪽지 편지를 꺼내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서두를 떼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 손이 바람소리를 내며 내 입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입을 싸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 나는 뒷벽에 세워져 있던 노동 삽을 움켜쥐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삽을 휘두르는 내 몰골은 분명 한을 품은 귀신의 모습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억센 손이 삽자루를 잡아 빼앗아 버렸고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울음과 저주가 섞인 목소리를 악을 쓰며 뱉어냈다.
이 사건은 곧 리당을 거쳐 군당까지 통보되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를 이어 농장 주인이 되려는 꿈으로부터 거리가 먼 낙오자로 점 찍혀 일반 농장원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후보 당원 9개월 만에 제명되어 낙오자 교양대상이 되고 말았다.
집에 들어와서까지 아버지의 거쿨진 주먹에 사정없이 맞았다.
“되지못한 년, 네가 당이 뭔지 알기나 해? 그걸 모르는 네가 무어? 관리위원장이 된다고? 어허, 하늘이 진노할 일이다.”
정말 그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다니!
연 며칠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어머니가 조용히 다가오셨다.
“왜 그랬느냐? 삽만 들지 않았어도 네가 조금은 유리할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넌 더 큰 오욕을 들쓰게 되지 않았니?”
나는 어머니 말씀이 무슨 뜻인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이란 위대한 거란다. 설사 무언가 납득이 안가도 이성을 가지고 대해야만 하는 신성한 것이기도 하고. 네가 그렇게 달려 든 것은 개인이 아닌 당에 도전한 것이기에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거란다. 아버지의 공적, 그리고 길주 군당에 계시는 할아버지의 힘이 있어서 네가 그만큼이라도 용서를 받은 거란다. 이젠 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럼 당 간부의 탈을 쓴 그 인간은 잘했다는 거예요?”
“이것 봐라. 아직도? 그도 인간이다. 하지만 당 비서라는 직함을 단 일꾼인데 거기에 삽을 휘두른 네가 어찌 당원이 될 수 있다는 거냐? 넌 멀었어. 그렇게 정면으로 대드는 것은 앞으로 당에 대들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니? 그래 갖고 네가 바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느냐?”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 울고 나서야 무언가 안겨드는 것이 있었다.
그랬다. 당을 위해 일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바쳐 일한다는 것은 그보다 먼저 언제 어디서나 당의 권위를 존중하는 사상적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쓴 웃음만 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던 그 사회에는 개인의 얼굴이란 없다. 오로지 당에 대한 충성만이 사람의 진가를 가리는 시금석이 되었다.
차라리 그때 그 부문당 비서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를 이용했더라면 나는 보다 쉽게 관리위원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젊은 나의 이성은 절대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살기가 싫어졌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구호만 부르며 자기 이속만 챙기는 권위자에 대한 환멸도 깊어갔다.
그러던 중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군대에 나갔던 여동생이 훈련도중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워 우셨다. 18살의 꽃나이로 군에 입대 할 당시 그것이 대견해서 어깨를 두드려 주던 어머니, 이제 제대할 나이도 가까워 은근히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어머니 앞에 전사자 통지서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아버지는 술에 절어 고래고래 소리쳤다.
“왜 울어? 자식을 나라에 바친 자는 우는 것이 아니야. 자랑으로 생각해야지. 운다고 살아오는가? 장해. 그래도 둘째가 장하단 말이야! 내 명예를 지켜줬어.”
나는 아버지의 그 소리에 더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술기운이라 하지만 이건 좀 도를 지나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명예를 지켜 주다니. 도대체”
“이년아, 네가 무너뜨린 우리 가정의 대들보를 둘째가 일으켜 세운 것 아니냐? 그 애로 인해 우린 다시 전사자 가족이 되었단 말이다. 너 같은 건 열 명이 있어도 그 애 하나만도 못해!”
아버지의 혀 꼬부라진 외침은 불길처럼 내 가슴을 지졌다.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후 나는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세상을 이별하려 했다. 그러나 이상해진 나를 감시하던 어머니의 발 빠른 조치로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돌아볼수록 부모님께 죄스럽다. 당이라는 거물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만 했던 삶, 그 속에서 나의 아버님은 오로지 충성 하나만을 알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아버지에게 말년의 기쁨을 안겨주진 못했다.
내가 탈북한 후 완전히 실명이 된 아버지는 지금도 떠나간 이 딸을 부르며 나라걱정만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할수록 인정받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나라, 다시는 태어나선 안 되는 사회, 오로지 한사람만을 위해 수천만이 노예로 세뇌되는 땅, 갖은 권모술수로 자신을 미화하는 곳, 그곳에는 진정한 인간의 삶이 없었다.
이것이 지나온 가슴 아픈 일을 적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2015년 1월 최춘명
2015-03-07 09:06:46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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