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불씨를 품은지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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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불씨를 품은지 6년
- 김은주
희망의 불씨를 품은지 6년
프롤로그
98년, 어릴 적 뛰어 놀던 고향을 뒤로하고 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였습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을 통해 한국사회의 발전상을 알게 되었고 그런 사실을 알게된 것이 마치 큰 죄인양 자책하던, 그렇게 나약했던 제가,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에서의 모진 6개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서오십시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느 날 꿈에도 그리던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설레임과 긴장 속에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고민도 없어 보이는 안내원의 첫 인사말에 저는 오히려 시무룩해졌습니다. 우리 가족이 이겨냈던 그 추운 겨울을 떠올리며 안내원의 환한 미소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습니다. 남조선, 아니 대한민국에서의 희망의 불씨는 그렇게 지펴졌습니다.
사회적응 교육
지금은「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제가 왔을 때만 해도「대성공사」란 곳에서 사회적응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알게된 서울은 외할머니께 듣던 것 이상으로 황홀했습니다. 즐비하게 늘어선 승용차, 상가들, 음식점들.... 내 눈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광경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진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대성공사」에서 4개월의 생활을 마치고 강원도에 새 삶의 둥지를 틀었습니다.
꿈많은 열아홉에 겁없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지만 모든 것이 처음 느낌처럼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기만 했고 물건 하나 사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북한 말투 때문에 또 다른 ‘중국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내가 이런 운명을 타고났는지 원망도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목숨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느냐. 나는 할 수 있다” 며 힘겹게 틔운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탈북자라면 누구나 언어의 장벽을 실감할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북한에서의 말투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디오나 TV를 자주 접하며 어려운 말이 있으면 녹음기에 녹음해서 여러 번 되풀이해서 듣곤 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대학생들은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테이프를 듣고 외국방송을 듣지만 저는 우리 민족의 말을 마치 외국어를 공부하듯이 다시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노력한 결과, 사람들을 만나는데 있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말에 대한 자신감은 곧 생활전반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운전면허증
「대성공사」에 있을 때부터 사회에 나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운전면허증’을 따는 것!!
북한에 있을 때 친구들과 같이 먼 거리를 힘들게 걸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친구 한 명이 “남한사람들은 걸어다니지 않고 차 타고 다닌대!”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와서 생활하다 보니 그 친구의 말이 갑자기 생각나면서 ‘운전면허증’을 따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하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제 돈을 주고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라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학원에 나갔고, 북한에서 운전수를 볼 때마다 가졌던 부러운 감정을 회상하면서 학원 다니는 내내 마냥 흥겨웠습니다.
“아! 내가 가진 돈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구나”
노력해도 기회조차 오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지고 그 기회는 노력하는 자만이 잡을 수 있다는 평범 하지만 값진 진실을 전 이제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면허증을 받은 날, 북에 있는 친구에게 한달음에 달려가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아직은 여건이 안돼서 차는 가지지 못했지만 언젠가 통일이 되면 그 친구를 내 차에 태우고 지난 날 추억을 얘기하며 강원도의 멋진 곳으로 드라이브할 생각을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정착하느라 정신없이 몇 달을 훌쩍 보내고 나니 접었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북한에 있을 때 저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도 들어갔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접고 자유를 찾아 한국에 왔지만 다시 그 꿈을 펼쳐보고 싶은 생각에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요?
저의 이런 간절한 바램을 이해하신 주위분의 도움으로 한의대를 추천받았고 그때부터 제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북한 에서 가졌던 희망의 불꽃을 남한에서도 꺼뜨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전 제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입학하기 전까지 아직 몇 개월의 시간이 있었고 그 동안 영어와 한문을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특히, 앞으로 공부하게 될 한의학은 한문이 많이 쓰이리라고 생각되어 한자공부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한자속성학원’에 등록하고 하루 한자 70개 암기를 목표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학원 원장님도 나의 이러한 노력을 칭찬하시며 그렇게만 계속 노력한다면 넌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처럼 전「한문 3급」자격시험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노력한 결과 좋은 결과가 있어 운전면허증에 이어 다시 한문 자격증도 따게되니 “이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내가 목표했던 대학에 특례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지펴진 희망의 불꽃이 이제 한국의 캠퍼스에서 활활 타오르게 된 것입니다. 미리 한자공부와 기초적인 영어공부를 해간 터라 책을 보는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교수님 강의 중에 생소한 단어가 들려오면 무척 속상했습니다. 그때마다 필기해서 같은 학번 친구들한테 물어보거나 사전을 찾아가면서 하나하나 알아나갔습니다.
그래도 북한에 있을 때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의대도 다녔었지만 막상 한국의 대학에 들어와 보니 저의 실력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 었다고 생각들 정도로 학생들의 실력은 월등하였습니다. 이런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북한에서 온 학생이라 뒤쳐진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도서관에서 밤을 세워가며 공부했습니다. 일부러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의 노력하는 모습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처음에는 ‘북에서 온 탈북자라 특례로 들어온 아이’라며 보이지 않는 벽을 쌓던 친구들도 마음을 열고 정겹게 말을 붙여오기 시작했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보며 어릴 적부터 같이 뛰어놀던 친구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내가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 없는 저에게 정착지원도 해주고 보살펴 주는 대한민국 국민들, 또한 부모 형제도 아닌 남남인 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장학금도 주고 지켜봐 주시는 주위 분들에게 전 항상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특히 TV에서 서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나올 때면 너무나 미안해서 꼭 성공해서 국민들에게서 받은 것을 돌려줘야지 다짐을 하곤 했는데.....
대학에 들어와서 한의학과 동아리에서 하는「의료봉사」활동에 참가하면서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직은 예비의사에 불과한 한의대생이지만 의료봉사를 하면서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함을 느낍니다. 침 한 뜸에 남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을 담고, 또 다른 한 뜸에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북에 있는 동포들에게도 봉사하고 싶다는 희망을 담아 앞으로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봉사활동에 참가하렵니다.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격지심을 버리고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교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 한의학이라는 힘든 공부를 끝까지 해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서 공부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보려고 낯선 동급생들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이 주위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그런 친구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대학입학하기 전 한문공부를 할 때도 혼자서 공부하는 모습을 예쁘게 봐 주신 원장님이 여러가지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것처럼 누가 먼저 알아주기를 바래서 하는 노력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처럼 어디선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되더라는 것이 제가 생활하면서 절실히 느낀 바입니다.
에필로그
“끝이 무딘 못은 구멍을 뚫기가 어려울 뿐 한번 뚫리게 되면 크게 뻥 뚫린다. 한번 보고 안 것은 얼마못가 남의 것이 되지만 피 땀흘려 얻은 것이라야 평생 내 것이 된다”
며칠 전에 읽었던 책에 있던 말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려워도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무딘 못처럼 훌륭하게 성공한 모습의 저와 여러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로 향하는 나의 모습과 어제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같은 강의실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어색할 때도 있고 모든 것이 놀랍고 신기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자유를 찾아, 인간다운 삶을 찾아서 제가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나를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고, 열심히 살아야 할 내일의 희망과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1년 정도 후면 졸업을 하게됩니다. 입학할 때는 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특례로 들어왔지만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 대한민국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당한 사회인이 되렵니다. 그래서 저를 도와준 대한민국에 어엿한 한의사로서 봉사하며 꺼뜨리지 않으려 애썼던 희망의 불꽃을 활활 태워 보고싶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드라마에 나왔던 “장금이”처럼 내가 살던 고향 사람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침술을 배풀고 싶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탈출해서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 가운데 좋은 소식도 들리지만 때로는 안좋은 소식도 들리곤 합니다. 이제 막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이 글을 쓰는 것은 이 글로 인해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첫 걸음을 때려는 탈북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동시에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4. 10 김은주 씀
2005-01-21 10:30:50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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