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펜으로 적어 가는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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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펜으로 적어 가는 일기장
- 여정옥
희망의 펜으로 적어 가는 일기장
프롤로그
운명의 쪽배에 몸을 싣고 돛대도, 삿대도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며 방황하다 대한민국의 품에 닻을 내린지 벌써 2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땅에 발을 딛고 했던 첫마디
"이렇게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를 4년동안 힘들게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손수건을 손에 쥐어주며 울지 말라고, 참 잘 왔다고 등 두드려 주시던 경찰 아저씨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한국생활이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참 눈물도 많고, 후회도 많았던 시간이었다. 지난날을 돌이키며 애써 감추고 싶은 나만의 일기장을 공개하는 것은 지금 조금 편해졌다고 해서 쉽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하루하루 열심히 만들어 나간다는 처음의 뜻을 새롭게 하고 싶어서다.
남에게 소개할 만큼 자랑스런 사연은 아니지만, 나의 작은 경험과 거기서 얻은 교훈이 이 사회에 새롭게 둥지를 튼 탈북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2년 6월 8일
이땅에서 사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다. 처음부터 각오는 했었다. 아무리 한 동족이라고는 하지만 수십년간 서로 다른 체제와 문화속에서 자라온 사회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아무래도 언어같다. 북한에 있을 때 그래도 방송일을 했었기 때문에 언어문제 만큼은 크게 걱정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길거리에 즐비한 간판들 중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몇개나 되며, 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 중 쉽게 귀에 들어오는 것은 또 얼마나 될까?
같은 민족인데 다른 것도 아닌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니 참 서글픈 일이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오늘은 모르는 말들, 간판이름들을 수첩에 적어 가지고 동네 슈퍼에 가서 하나하나 물어 보면서 배웠다.
슈퍼 주인언니가 말하기를
" 우리 동네에 요새 탈북자 수가 많이 늘었지만 이렇게 모르는 거 적어 가지고 와서 물어보는 사람은 자기가 처음이야."
하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남이 웃건 말건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 생활에 자신감을 갖고 빨리 정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2003년 1월 29일
트럭운전을 시작한 남편을 돕기 위해 서울에 있는 인쇄소에 출근하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한달이 다 되어간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전철을 두번 갈아타고 출근한 뒤 저녁에도 똑같은 식으로 퇴근하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는다. 너무도 힘이 든다. 인쇄소 일도 장난이 아니다. 너무 힘들어 끙끙거리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 아,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니 대한민국이 잘 살 수 밖에……"
이렇게 힘든 일과를 지내다보니 참 웃지 못할 경험도 하게 된다. 평소 720번 버스가 우리 아파트 앞을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기에 어제는 퇴근길에 역전에서 그 버스를 탔다. 잠시 졸았다고 생각이 들어 눈을 뜬 순간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 정류장이었다. 어디냐고 물어보니 화성시 봉담동이란다. 공연히 버스기사 아저씨한테 난리를 쳤다.
" 난 수원에 가야 하는데 여기다 내려 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20여분이 지났을까?
택시 한대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무작정 손을 흔들어 그 택시를 잡았다.
" 아저씨, 나 수원으로 가야 하는데 돈이 2천원밖에 없어요. 수원쪽으로 2천원어치만 태워 주세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택시기사 아저씨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주머니, 중국교포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 북한에서 온지 석 달 밖에 안된 처지로 서울에서 일 끝내고 퇴근하던 길에 그만 버스를 잘못 타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며 이야기했다.
" 쯧쯧, 참 고생 많았겠수. 내가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잘 됐소. 요금 걱정은 말고 어서 타세요."
어제 그 아저씨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신이 없던 차에 아저씨 이름도, 차 번호도 기억하지 못했다. 예전부터 한국사람 중에는 우리 탈북자들의 정착금을 노리는 사기꾼들이 많다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런 좋은 분도 있구나하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지금 이렇게 헤매고 고생하는 것들이 모두 이 사회에 살 자격을 갖추기 위한 값비싼 수강료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 편하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겨울추위가 봄바람에 가시듯 지금 어려운 시절도 훨씬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조금만 더 이를 악물자.
2003년 7월 15일
내가 이땅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내 자식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 중국에 있을 때 벽돌공장으로, 농촌으로 숨어 다니면서 이를 악물고 살아 보자고 발버둥치던 때를 생각하면 여기서 겪는 어려움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요즘 며칠 동안 겪은 일을 떠올리면 희망보다는 절망이 앞선다.
탈북과정에서 생긴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낯선 곳에서 의지가 되어 새롭게 출발하자며 정착교육시설인「하나원」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운전면허를 딴 뒤 어느 치킨 체인점 본사에 취직해서 트럭을 몰고 전국 각 영업점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해왔다.
운전이라는 직업은 보기와는 달리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적어도 아침 7시까지는 납품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늘상 야간운전을 해야만 했다. 남편 역시 아직 정착한 지 얼마 안되어 전국 지리에 서툴기 때문에 위험한 야간운전 동안 졸지 않게 말동무라도 되어 줄 겸해서 그동안 둘이서 같이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다 싶어 남편만 보내놓았더니 이내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겼다.
남편은 일주일 넘게 경북 구미에 있는 영업점들을 상대로 납품을 하게 되었는데, 무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졸음운전을 하다가 그만 접촉사고를 내고 만 것이다. 이틀 전 경찰서에서 급히 연락을 받았을 때는 그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혹시 몸이라도 상했으면 어쩌나! 순간 한국땅을 밟기까지의 모진 고생이 떠오르며 하늘이 왜 그렇게 무심하게만 여겨지던지……
차가 반파될 정도의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남편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정말 하늘이 우리의 살고자 하는 노력을 가상히 여겨 주었나 보다. 경찰 아저씨 말이
" 부주의에 의한 사고인 만큼 벌금에 면허정지 처분을 받게 될 겁니다. 그나마 사람이 성한 것만 해도 큰 행운이라고 여기세요."
나 역시 그랬다. 앞으로 닥쳐 올 벌금이나 차 수리비 같은 금전적인 걱정보다 평생의 밑천인 남편의 건강이 더 소중했다.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보자며 힘든 운전일을 마다않던 남편은 내게 미안한 나머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남편의 손을 꼬옥 잡으며
" 여보. 괜찮아요. 우리 예전에는 더 힘든 일도 겪었잖아요. 우리 기운 잃지 말고 다시 시작합시다."
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서로를 위로해 보아도 앞으로 닥쳐 올 차사고 뒷정리에 마음이 편치 않다. 면허정지라도 받으면 남편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면 그동안의 힘든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우리 부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마냥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에게도 정말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2004년 5월 27일
트럭운전을 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집 근처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5개월이 다 되어간다. 손님 차가 들어오면 주유도 해 주고 또 서비스로 세차까지 해 주는 일이다. 주유는 수월한 편인데 세차는 만만치 않다. 특히 한 겨울에 손을 꽁꽁 얼리면서 차를 닦고 있노라면 정말 내가 여기서 지금 무얼 하고 있나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손님들을 대할 때도 북한 사람이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대화를 피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랬더니 모두들 나를 불법체류하는 중국동포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들게 살망정 떳떳하게 사는 게 낫겠다 싶어 다음부터는 탈북동포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고 다녔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주머니, 고생 많이 하십니다. 참 장하시네요. 힘내서 열심히 사세요."
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용천참사가 일어난 후에는 세차도 하지 않으면서 일부러 날 찾아와 혹시 그쪽에 친지들은 없냐 하시면서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성금 많이 보냈다고 위로해 주는 분들을 보면서 정말 가슴 뜨거웠다.
나 역시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 결과, 요즈음은 하나 하나 그간 고생한 열매를 맺고 있다. 오늘은 사장님이 사무실로 부르시더니,
"아주머니, 그동안 주유일에 세차일에 고생 많았어요. 경리 아가씨가 개인사정으로 그만 두게 되었으니 아주머니가 6월달부터 경리일을 맡아 보도록 해요. 아주머니라면 잘 해 낼 겁니다"
하시는 것이었다. 경리일은 우리 주유소의 곳간 열쇠를 맡기는 직책이므로 그 사람을 믿지 않고서는 함부로 맡길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사장님에게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뿌듯해서 잠이 오질 않는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나 보다.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서 주변분들의 믿음에 보답해야 겠다.
에필로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이렇다하게 해 놓은 것이 없다. 세차장 일을 마치고 남는 시간을 꼼꼼히 활용해서 얼마 전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지금은 컴퓨터 학원을 다니고 있다. 컴퓨터 자격을 따고 나면 이발미용 분야에 도전할 생각이다.
북한에서 따 놓은 이발미용 자격이 있기는 하지만 좀 더 업그레이드 된 기술을 배워서 나만의 자그마한 가게를 하나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학에 진학해서 방송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북한에서 채우지 못했던 부분을 마저 채우고 싶다.
한국생활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무슨 일을 하던지 어설프게 대강 하려 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많은 탈북 동포들이 북쪽에서 해 오던 일을 갖고 남쪽에서도 대충 적응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큰 잘못이다. 북쪽에서 배운 것 중 남쪽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만큼 남과 북의 지식과 기술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탈북자들은 예전의 경험에 집착하지 말고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또 무엇 한가지를 배우든지 내 돈을 들여 제대로 배우는 것이 낫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직업학교 등지에서 거의 무료로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는 하지만 무료이다보니 내 돈내고 배우는 것처럼 깊이 있게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어정쩡하게 배워서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부끄러운 일기장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많은 탈북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의 빛을 안겨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끝.
2004. 5 여정옥 씀
2004-11-19 20:56:33
출처 :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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