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지난날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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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던 지난날을 되새기며
- 이일
1992년 나는 양강도 어느 광산에 소속된 광부였다. 십여 년을 갱막장에서 일했던 나는 폐가 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식량사정이 나빠 끼니를 거르기 예사였고, 굶주림으로 온몸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도 쉴새없이 일했다. 그러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쪼들리고 배급을 받지 못해 굶는 날은 늘어나기만 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소심했던 나는 조직의 규율에 얽매여 식량을 구하러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식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운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빌릴 식량도 없었고 죽는다해도 눈썹 하나 까딱할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산나물을 뜯으러 지팡이를 짚고 나갔는데 점심때가 지나니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죽 먹은 기운까지 다해 걸어보려고 했지만 의지만으로 되지 않아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걸어서 30분이면 족할 거리를 몇 시간을 기다시피 해서 집에 도착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이렇게 죽느니 고향에라도 가서 먹을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찾은 고향도 식량사정을 비슷했다. 그곳 농장에 일자리를 얻어 부지런히 일했지만 끼니걱정을 하지 않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식량을 구하러 마음대로 이동할 자유도 없었다. 식량사정이 점점 더 나빠지면서 문득 내가 짐승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더라도 이렇게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오기가 들었다. 가슴속으로부터 “여기에서는 안된다. 빨리 중국에 가야한다”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왔다.
일단 결심이 서니 나는 과감해졌다. 내 자신도 모르던 용기가 솟아 올랐다. 더 이상 미룰 것이 없었던 나는 다음날로 탈북의 길에 올랐고, 마침내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땅을 건너 강변 옆 마을에 들어가니 조선족 집이었다. 그런데 집안에는 쌀마대가 50여개나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를 세상이 있다니? 북한은 강냉이도 배불리 먹기 힘든 세상인데...
우리 식구들이 그렇게 중국땅으로 흘러와 5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기쁨도 많았지만 슬픔도 그만큼 슬픔도 많았다. 그 많은 사연들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은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한국행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조선족 동포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소문을 접한 나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남한 목사님을 만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지워졌다. 그후 한국에 대한 우리 가족의 환상은 점점 커져갓다. 애들도 들은 소리가 있는지 “아빠, 한국에 가자요. 꼭 한국에 가자요” 라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한국에 관한 소문을 들은지 몇 달이 지나 우리는 한국행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한국행을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리하여 2002년 3월 18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인 대한민국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직접 본 대한민국은 미국의 비루한 식민지가 아니라 당당한 경제대국이었다. 산뜻하게 일어선 고층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를 보아도 질서가 잡힌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활기차고 남을 배려해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엇다. 이런 땅이 우리 민족이 사는 곳이라니...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마음껏 배우고 뛰놀게 됐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었다.
남한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항상 통일의 그날을 위해 더욱 열심히 배우고 성실히 살려고 다짐한다. 또한 부족한 우리 가족에게 온갖 지원과 관심을 기울여 준 주변 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직 남한사람들에 비해 능력도 부족하고 재북(在北) 당시 깊이 새겨진 심신의 상처 때문에 힘겨울 때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잘 정착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부족됨 없이 떳떳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최선을 다할것이다. 그리고 통일된 그날이 오면, 내가 받은 분에 넘치는 은혜들을 북녘의 동포들에게, 고향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2003년 이일
2006-02-06 13: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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